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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22:17

 

협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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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품 속의 몸은 흔들리고 있었다. 맞닿은 모든 부분에서 울음이 전해져 왔다. 귀로 들리는 울음 소리는 그저 일부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대협은 그야말로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간 손가락 끝에서부터 뭉게진 코 끝이 문질러지는 가슴팍까지, 피부에 스며드는 울음을 견뎌내며 대협은 이 깊은 어둠 속에서도 바래지지 않는 붉은 머리카락을 내려다 보았다. 커다란 덩치를 잔뜩 구기고서 자신의 품에 깊이깊이 파고드는 뜨겁고 생생한 육체를 느꼈다. 밀착한 자신의 몸이 함께 진동하고 있었다. 안에서부터 울리는 등을 살결을 더듬듯 느린 손길로 쓰다듬는다. 그리고 더없는 불편함과 거북함에 험하게 인상을 구겼다.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 건 싫었다. 강백호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 고통으로 끓어 넘치는 울음 소리와 헤아릴 수 없는 절망이 미친듯이 생생하든 말든, 이 역시 피할 수 없는 강백호의 현재라고 해도 불쾌하고 끔찍할 뿐이었다. 대협은 더 이상 이 사실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강백호가 자신에게 전염시킬 수 있는 건 가슴 속을 간질이는 황홀함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비참함도 슬픔도 날 것 그 자체로 자신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막을 수 없었다. 문 너머로 있을 때도 그랬는데 서로의 몸뚱아리가 들러붙은 상태에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꺽꺽이는 강백호의 호흡을 따라가게 된다. 자신의 가슴팍을 흥건하게 적신 강백호를 더 강하게 끌어안게 된다. 그리고 어둠을 덧입어 아까보다 휠씬 더 조악해보이는 초라한 방을 다시 둘러보게 된다. 정말이지 강백호와 세상에서 가장 안 맞는 장소였다. 일부러 그런 곳을 골라 억지로 애를 던져 놓은 것 같았다. 속절없는 안타까움과 애틋함에 입술을 깨문 것도 잠시였다. 대협은 머리가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것들을 계산하게 된다. 팔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아플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고 품 속에 가둬버릴 마냥 붙잡는다.
“…괜찮아, 괜찮아, 백호야.”
입술을 간질이는 붉은 머리칼에 입맞추며, 대협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울부짖는 강백호에 귀에는 들리지도 않을 거란 걸 알고 그랬다. 자신의 입술이 닿고 있다는 사실 역시 모를 거란 걸 알고 그랬다. 한참을 그렇게, 대협은 멈추지 않았다. 조금씩 시간이 흐르고 품 속의 흔들림이 차츰 줄어들어 마침내 울음 소리가 멎은 순간이 와도 팔에 들어간 힘을 빼지 않았다.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하던 머리 속도 멈추지 않았다. 지쳐 잠든 건지 의식을 잃은 건지 구분도 되지 않는 몸을 단단히 끌어안은 채, 대협은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샜다. 한숨도 자지 않았다.


“…”
강백호는 퉁퉁 부은 채 입을 벌리고 잤다. 눈만 부은 게 아니라 얼굴 전체가 다 그랬다. 몹시 어려 보였다. 이상하게도 강백호를 알면 알수록, 강백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그랬다. 말도 안 되게 어리고, 심지어 작아 보였다. 이제 자신이 강백호를 객관적으로 보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대협은 한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강백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는 진작에 떴다. 연습 시작 시간인 8시도 한참 지나 거의 10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기절한 것처럼 잠든 강백호를 일부러 깨우지 않았던 대협은 중간에 한번 일어나 하나 밖에 없는 작은 창문을 열었다. 환기도 시키고 햇빛도 좀 들어왔으면 해서 그랬는데 뻑뻑한 창문을 억지로 열다보니 삐걱대는 소리가 엄청나게 났었다. 하지만 강백호는 그 시끄러운 소리에 미동조차 없었다. 가까이서 듣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작은 숨소리만 내며 죽은 듯이 자는 게 신기해서 볼을 슬쩍 찔러봐도 깰 기미조차 없었다. 그래서 대협은 창을 열어도 딱히 밝아지지 않는, 진짜 채광이 거의 안 되는 방 안에서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잠든 강백호의 시간을 독점할 수 있었다. 원하는 거리에서 원하는 각도로 원하는 만큼 실컷 보고 좀 건드려볼 수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왠지 강백호가 깨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전혀 근거가 없는 자신의 촉에 대협은 잘도 거리낌이 없어졌다. 말랑거리던 볼과 포슬포슬한 머리카락의 촉감을 알아서 그랬던 걸까. 다소 충동적으로 뻗은 손이 얼굴선의 윤곽을 실틈만한 간격을 두고 훑다가 엄지 끝이 턱에 닿았다. 보들거리는 말랑한 살이 딱딱한 손 끝에 살짝 눌려졌다. 그대로 천천히 대협은 검지로 아랫입술을 쓸었다. 물기가 살짝 묻어나는 도톰한 입술의 안쪽으로 손가락이 아주 조금 들어갔다가 멈췄다. 그리고 한참동안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코 끝으로 손을 옮겼다. 시원하게 뻗은 콧날을 그대로 따라 올라가 편편하게 펴진 미간을 쓸고 심하게 부은 눈두덩이를 피해 눈썹을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한올한올 결이 살아있는 빽빽한 눈썹은 예상을 비웃듯 중독적으로 보드라웠다. 얘는 몸에 있는 털이 다 이런 느낌인 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엄지로 눈썹을 문지르며 다른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마냥 여린 촉감에 손을 맡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를 시점이 되어서야 대협은 강백호의 얼굴에서 눈을 땠다. 그리고 집 안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세세히 살펴보다 몸을 일으켰다.
“…”
코타츠와 비디오 플레이어 사이, 샤프가 꽂힌 채로 덮인 공책 아래 사용감이 상당한 공책들이 쌓여 있었다. 왜 지난 번엔 이게 눈에 안 들어왔지, 하고 생각한 대협은 맨 위의 공책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백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되게 열심히 하네, 기특한 마음은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움직인다. 소리를 내지 않고 천천히 살펴보며 한 장씩 넘긴다. 그야말로 강백호스러운 강백호의 농구 공책을 그렇게 보기 시작한다.
 펼친 안쪽에 군데군데 풀로 붙인 경기 기록지가 있는 장은 전부 울어나 있었다. 그리곤 그 옆에 예상보다 아기자기한 필체로 글씨와 그림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어지럽게 채워져 있었다. 그 와중에 틀린 글자는 어찌나 많은 지 중간중간 대협은 추리하듯이 내용을 짐작해야 했는데 다행히도 한권 읽고 나니 어느 정도 패턴이 파악됐다. 그래서 다음권부터는 의외로 정확하고 체계적인 경기 분석이 빡빡하게 채워진 공책을 즐기며 읽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글보다는 그림이 강백호와는 더 잘 맞는 듯 했다. 직관적으로 그려진 코트 그림과 화살표가 여러 가지 의미로 기가 막혔다. 다들 어떻게 움직였는지, 어떻게 슛이 들어갔는지, 경기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신기할 정도로 분명하게 알 수 있어서 대협은 상당히 놀라며 감탄했다. 그 아래 자신이라면 어떻게 플레이했을지 쓰고 그려 놓은 것도 그랬다. 아주아주 진지한 마음으로 그렸다는 걸 알 수 있는 그림 옆에 적어 놓은 수많은 크고 작은 ‘천재’ 글자들이 속절없이 귀여운 건 둘째 쳐도, 어처구니가 없다가도 그 기발함과 날카로움에 미소짓게 되는 공책 속 강백호의 가상 플레이는 대협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커서 공책을 넘기다 말고 가만히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대협의 시선을 가장 오래 붙잡은 건 그 옆과 아래 아주 조그만 글씨로 적혀 있던, 나가지 못한 경기에 대한 강백호의 마음이었다. 그 작게 찌그러진 글씨를 뚫고 올라오는 감정들이었다. 보고 있기가 미안할 정도로 솔직한 비참함과 유치한 욕설이 갈겨진 곳에 새겨진 갈 곳 없는 분노, 눈물 자국일 게 분명한 흔적에 섞인 서글픔과 거기에 얽혀 있는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슬픔. 침묵의 한숨을 몇 번씩이나 내쉬던 대협은 결국 입술을 깨물며 마지막 공책을 덮어야 했다. 굉장한 열정이었다.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 허나 동시에 필사적인 발버둥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은 발버둥 쪽에 훨씬 더 가까웠다. 지금의 강백호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왜 자신의 가슴이 이렇게 아파오는 건지, 이제는 알 것 같아진 대협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생소한 감정을 마주하고 가만히 다가오는 고통을 감당했다. 그리고 심장이 다 욱씬거리는 고통이 조금이나마 가시고 나서야 자신의 입 속에서만 맴돌던 말을 중얼거린다.
“…사랑이네.”
조금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아주 커다란 사랑. 강백호를 이렇게까지 발버둥치게 만드는 순수하기 짝이 없는 일직선의 사랑. 이런 상태로도 농구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게 하는, 오로지 농구만을 향한 강백호의 이런 사랑. 공책을 정리해 원래대로 샤프까지 끼워놓으며 대협은 생각했다. 뭔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만큼 사랑하면 뭔가 이상해져버리지 않을까? 천천히 눈을 감고 자신과 농구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을 이만큼 이상하게 만든 강백호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다시 강백호가 사랑하는, 지금 당장은 그야말로 강백호의 전부처럼 보이는 강백호의 농구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곤 눈을 떠 강백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고개를 수그리며 가까이 다가가니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여차하면 코 끝이 닿을 만큼 얼굴을 붙이며 다시 몸을 눕힌다. 새근새근 잠든 강백호가 아기 같다 생각하곤 그런 자신이 우스워 피식 웃는다. 문득 강백호가 이대로 영원히 깨지 않으면 어떨까, 이렇게 둘이서만 이 못난 방 안에서 영원히 지금처럼 머무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해버린다. 빛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알 수도 없는 이 방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허나 생각이 결국 거기까지 미쳐버린 순간, 그런 허튼 망상을 비웃듯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백호야, 집에 있어?”
문 밖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다정하고 또 따뜻했다. 현실로 끌려 내려온 대협이 그게 환청이 아니라는 사실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자 마치 그 인기척을 느낀 것처럼 한번 더 백호야, 하고 조금 더 목소리를 높인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목소리라면 강백호랑 아는 사이일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그 소리 때문인지 움직인 대협 때문인지 잘 자던 강백호가 으응,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놀라서 강백호에게 이불을 다시 한번 잘 덮어준 대협은 조심조심 걸어나와 현관문 앞에 서선 말했다.
“누구세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조용히 문고리가 돌아가더니 문이 열렸다. 그렇게 열린 문 틈 사이 대협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단단해보이는 까만 정수리였다. 현관문을 연 녀석의 키가 작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순간 그 키를 실감하지도 못할 만큼 느껴지는 엄청난 살기에 대협은 어리둥절해졌다.
“…?”
“어, 윤대협?”
허나 그 키 작은 녀석은 대협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영문모를 검은 기운을 날려버리더니 그리 말했다. 말그대로 깡패같아 보이던 느낌이 사라지자 순식간에 어려 보이던 하얀 얼굴에 의문을 띄운 채로. 그래서 대협은 일단 웃었다. 모르는 얼굴에 처음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었다. 하지만 상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농구를 하게 되고 인터뷰도 종종 하면서 대협은 이런 일을 간간히 겪었다. 나를 알지만 나는 모르는 사람, 아마 강백호의 친구겠지. 그리고 농구 보러 왔다가 자신을 봤겠지. 채소연처럼.
“하하, 네.”
그래서 늘상 하는 얼굴로 안녕하세요, 하고 먼저 인사를 하니 상대방도 아, 네, 안녕하세요. 양호열입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반사적으로 아, 소리가 나왔다. 얘가 그 호열이구나. 농구도 안 하는데 강백호의 이야기 속에서 몇 번이나 이름이 나오던 그 애구나. 싶었다. 어젯밤 머리 속에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달랐다. 대협은 지금 눈 앞에 있는 작은 남자애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인상도 강한 타입을 생각했었다. 깡패 무리를 데리고 체육관에 온 정대만을 두들겨 팼다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들어도 그 호열이라는 친구는 중학교 때부터 양아치짓을 제대로 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백호 집에는 어떻게…?”
하지만 그리 말하며 니가 왜 여기 있냐는 표정으로 대협을 보는 눈빛이, 아까 문을 열었을 때의 기백과 함께 대협을 납득시켰다. 이런 놈이라면 키나 생김새 같은 건 상관없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약간은 날이 선 듯한 뚜렷한 존재감이 강백호와 비슷하면서도 또 굉장히 달라 묘하게 대협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아, 어제 백호랑 이야기 좀 하다가 막차 놓치는 바람에 신세를 좀 졌는데…”
그래서 대협은 한쪽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간 채로 그리 대답했다. 대답 못해줄 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백호는 자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자 양호열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되물었다.
“백호가 지금까지 잔다고요?”
그러면서 대협의 옆으로 고개를 빼서 안을 보는데 그 목소리도, 동작도 좀 컸다. 으으음, 하고 강백호가 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대협도 고개를 돌리자 부시럭거리며 눈을 뜨는 강백호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양호열이 그대로 신발을 벗더니 대협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대협의 눈썹이 꿈틀거리든 말든 갓 잠에서 깬 강백호 옆에 앉더니 백호야, 하고 부른다. 여전한 온도가 느껴지던, 너무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어… 호열이냐?”
그러자 부어서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뜬 강백호가 잠에서 덜 깬 잠긴 목소리로 답하더니 비적거리며 상체를 일으켜선 그대로 앉아있는 양호열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호열아아아-, 하고 말 끝을 끄는 강백호를 익숙한 듯 토닥이는 양호열을 보고 대협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잘 잤어, 백호야? 많이 피곤했나 보네.”
“어, 응, 호열아… 아침부터 웬일이냐햐암…”
하품으로 끝난 강백호의 말에 양호열은 작게 웃으며 답했다.
“백호야, 아침 아니야. 벌써 12시다. 나 체육관 갔다가 너 없어서 집에 찾으러 온 거야. 왠일로 이렇게 늦잠 잤어? 눈은 또 왜 이렇고?”
그 말에 번쩍 고개를 든 강백호의 눈이 놀라 껌뻑였다. 그리곤 곧 비명 같은 -뭐라고? 소리와 함께 강백호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벌떡 일어나선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곤 힉 소리를 내더니 또다시 고개를 돌려 양호열을 지나 대협을 발견하곤 딱 멈춘다. 눈이 마주친 대협은 지금 강백호의 머리 속에서 무슨 생각이 지나가는지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집에 왜 윤대협이 있지? 아 맞다, 나 어제 윤대협이랑 저녁 먹었지. 그리고 이야기하다가 윤대협이 갔지, 근데 막차 놓쳐서 다시 온 윤대협이 우리 집에서 잤지, 근데 내가 또 울었고, 그런 나한테 윤대협이…
“헉-”
떡 벌어진 입에 순식간에 시뻘게지는 강백호의 얼굴을 보고 양호열이 왜 그래, 백호야? 하고 물어도 대답은 없다. 그 광경에 대협은 구겨졌던 미간을 피며 입꼬리를 올릴 뿐이다. 어쩜 저렇게 모든 생각이 다 보일 수가 있을까, 저것도 정말 재능이었다. 양호열의 등장에 슬그머니 틀어진 기분이 강백호의 그 얼굴 하나에 다시 제자리를 찾아, 표정을 한번 가다듬은 대협은 이마를 느리게 쓸어 올리며 말했다.
“백호야, 잘 잤어?”
“…어…어…어, 윤대협, 너…너도 잘 잤냐.”
그렇게 버벅거리며 답하는 강백호와 정오의 햇살처럼 웃는 대협을 양호열은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그리곤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다 알아채고서도 대협은 끝까지 강백호만 바라보며 웃었다.




“호열아, 그럼 나 간다. 부탁할게!”
“어, 그래. 이따가 체육관에서 보자.”
“그, 윤대협 너도 잘 가라.”
“응, 백호야, 열심히 해.”
“어, 그, 당연하지, 근데, 그, 야, 윤대협 너, 조심해서 가라.”
그렇게 말하곤 후다닥, 강백호는 도망치듯이 집을 떠났다. 한번 뒤돌아보려는 듯 힐끔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재빨리 앞으로 돌리곤 얼른 가버렸다. 그 모습에 베시시 웃음이 새는 것 막을 수가 없던 대협은 옆에서도 똑같은 웃음소리가 나는 걸 들었다. 입가를 살짝 굳히며 고개를 돌리자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양호열과 눈이 마주쳤다. 
“…”
“…”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 건 잠깐이었다. 둘 다 다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강백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현관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시선을 뺏길 수 밖에 없는 빨간 뒷통수가 사라지고 나서야, 양호열이 먼저 입을 연다.
“가셔도 되요.”
“…”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 가세요.”
대협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들고 있던 종이 가방에서 목장갑을 꺼내 끼며 말한다. 조곤조곤한 말투였지만 강백호가 사라지자 표정이 없어진 얼굴은 놀랍도록 차가웠다. 이것 봐라, 싶어진 대협은 자신을 지나쳐 성큼성큼 발을 옮기는 양호열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래도 백호한테 도와준다고 했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안 그래? 백호 친구?”
그러니 멈춰 돌아선 대협을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끝내줬다. 거기에 대협은 양손을 올리며 이런, 하고 답하고는 생긋 웃었다. 그러자 좀더 살벌해진 양호열의 얼굴을 보며 대협도 얼굴의 웃음기를 뺐다. 이렇게까지는 할 필요가 없는, 비정상적인 양호열의 반응에 뭔가를 느낀다. 그리고 대답없이 허리를 수그리고 강백호 집 수도 계량기 뚜껑을 여는 양호열을 내려다본다. 뉴스에서나 가끔 봤던 걸 실제로는 처음 본 대협의 시선은 완전히 무시한 채, 양호열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대협은 모르는 작업을 시작했다.

[아, 맞다, 호열아, 오늘이었지.]
[이번 주부터 영하로 떨어진다니까 미리 해놔야지. 백호야.]
그리 말하며 양호열은 들고 온 종이 가방을 강백호에게 들어 보였었다. 대협은 오래된 두 친구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가만히 지켜 보았었다.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지만 곧 대협은 그게 겨울철 수도관 동파에 관련된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엉망인 집에 살면 그런 것도 직접 챙겨야 되는 구나 싶었다.
[호열아, 얼마나 걸리겠냐?]
[금방 해. 나 혼자 할 수 있어. 백호 넌 얼른 체육관 가라. 정대만이랑 소연이랑 송태섭까지 다들 와서 넌 언제 오냐 하고 있더라.]
[진짜? 아씨- 망했다. 호열아, 지금 빨리 하자.]
[괜찮아, 백호야. 너 빨리 가.]
[뭔 소리야. 그걸 어떻게 호열이 너 혼자 하냐. 옆에 누가 있어야지.]
[그럼 내가 도와줄게. 백호야, 넌 농구하러 가.]
대협은 자신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자연스럽지 않게 끼어들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 놀란 눈동자 두 쌍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대협은 싱긋 웃었다.
[뭐, 뭔 소리냐, 윤대협. 너나 농구하러 가. 능남은 오늘 연습 없냐?]
[어, 오늘 쉬는 날이야.]
자체적으로 쉬는 날이긴 했지만 쉬는 날인 건 맞으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는 대협에 강백호가 할 말을 잃은 틈을 타 빠르게 덧붙인다.
[얼른 가. 난 오늘은 여유 있어. 체육관에서 너 찾는다며?]
그렇게 말하며 양호열 쪽을 바라보자 양호열도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강백호를 떠밀었다.
[그래, 백호야. 가라.]
그리 둘이서 등 떠미니 어어, 하던 강백호를 내보낼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선 이렇게 불편한 둘이 남아서 어색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거 주면 돼?”
뭘 모르는 대협에게 시키는 것도 없이 혼자 척척하는 양호열 옆에 쭈그려 앉은 대협은 종이 가방 안에 있는 낡은 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양호열은 돌아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 여기.”
그래서 대협은 수건을 양호열 얼굴 옆에 들이대며 말했다. 그러니 돌아본 양호열이 무시무시한 눈을 하고선 말했다.
“…손대지마.”
그리곤 대협의 손에서 수건을 낚아채더니 수도관으로 생각되는 부분을 아주 꼼꼼하게 감싼다. 말을 되게 무섭게 하는 재주가 있네, 하고 생각한 대협은 그 후로는 양호열을 건드리지 않았다. 양호열의 옆에 그대로 앉아 작업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저 생각을 좀 했을 뿐이었다. 강백호의 이야기 속에 있던 양호열을, 거기에서 느껴졌던 양호열에 대한 강백호의 절대적인 믿음과 우정을, 그리고 지금 대협이 느끼는 양호열이라는 녀석과 강백호에 대한 양호열의 감정을. 그러다 보니 어느새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한 양호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나니 다리가 저렸다. 아이고, 소리를 내며 일어나는 대협을 양호열은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았다. 뒤도 안 돌아보고 쌩 갈 줄 알았더니 의외다 싶어진 대협이 말했다.
“고생했네, 잘 한다. 이런 거 많이 해봤나봐?”
“어제 백호랑 뭐 했어.”
“…?”
“백호 왜 울었어.”
호오, 하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오다니. 게다가 그 기세도 대단해 대협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발 물러날 뻔 했다. 대답 이상하게 하면 한대 치겠네, 싶었는데 눈을 보니 진짜 칠 것 같았다. 여기서 맞으면 강백호랑 몇 달은 엮일 거리가 생기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긴 했다. 하지만 맞으면 아프기도 하고 무엇보다 강백호 절친인 녀석과 처음부터 관계를 꼬을 필요는 없었다.
“농구 이야기.”
“…”
“백호 친구니까 알 거 아냐? 백호 농구 이야기 엄청 좋아하는 거.”
흠, 하고 내쉬는 숨에 양호열의 얼굴이 좀 풀린다. 자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양호열도 알았다.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진실을 다 말할 필요도 없었고.
“왜 울었는지는 나도 몰라.”
강백호가 직접 말해주지는 않았으니까. 표면적으로는 그게 진실이기도 했다. 그리 말하며 선선히 웃어주니 다시 얼굴이 서늘해진 양호열은 말이 없었다. 눈싸움을 하듯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신기하게도 양호열은 눈높이가 한참 아래인데도 꼭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보는 것 같았다. 대협은 왠지 가슴 속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코트에서 서태웅을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이 온도를 높여갔다. 이야, 강백호 옆에 이런 애가 있네, 싶은 게 입가가 비틀리며 평소와는 다른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을 마주한 양호열은 툭 내뱉듯 말했다.
“낚시 좋아한다며?”
강백호한테서 들었나? 그 수밖에 없어서 순간 대협은 자신에 대해 친구에게 말하는 강백호의 모습을 저절로 떠올렸다. 와, 강백호. 남들한테 내 그런 이야기도 하고 다녀? 싶으니 입꼬리가 또 제멋대로 올라갔다. 기분이 좀 좋아진 대협은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나 이어진 양호열의 말은 그 기분이 유지되도록 도와주지 않았다.
“힘들텐데 굳이 여기까지 물고기 배달 올 필요는 없어.”
그 호의를 가장한 재수없는 말에 대협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세하게 흐트러진 자신의 얼굴이 충분히 답이 되었다는 걸 양호열의 건방진 코웃음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 새끼가,
“백호 챙겨주는 사람 많아.”
그렇게 말하며 양호열은 끼고 있던 목장갑을 벗어서 들고 온 종이 가방에 넣었다. 그리곤 수도 계량기 쪽을 한번 봤다가 대협을 정면으로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럼 잘 가.”
그러고선 뒤돌아가는 작은 등을 대협은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아까 강백호가 갔을 때처럼 그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을 품고서.








대협
백호
대협
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약약약 호열백호
하지만 계속 말했듯이 이 글은 대협백호야!!!

슬덩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