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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30 13:51

 

협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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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강백호가 눈을 뜬 건 아침 10시쯤이었다. 
대협은 그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침대 위에서 침 흘리며 잠든 강백호를 훔쳐보며 좀 웃었다. 원래 자기는 새벽 5시면 일어난다고, 천재는 그 시간이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한 게 누구였더라. 픽픽 새는 웃음소리가 자꾸만 커지려는 걸 막으며 음냐음냐 잘도 자는 얼굴을 시계와 몇 번쯤 번갈아 봤을까. 강백호가 눈 뜰 기미를 보이자 슬며시 자는 척 몸을 수그리니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빨간 머리가 침대 위로 솟아올랐었다. 그리고 시계를 본 강백호가 또 예전처럼 으악! 소리를 지르며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놀라서 대협은 같이 몸을 일으켰다. 경악한 얼굴로 세수도 안 하고 뛰쳐나가는 강백호를 붙잡지도 못 했다. 느즈막히 일어나 같이 아침 사먹고 버스 정류장까지 산책 겸 한가롭게 걸어가려던 대협의 계획은 그냥 날라갔다. 덩달아 급해진 대협이 할 수 있었던 건 서두르는 등에다 대고 백호야, 하고 한번 애달프게 부른 게 전부였다. 헌데 눈꼽도 안 뗀 강백호가 그리 허겁지겁 나가면서도 뒤돌아보더니 외쳤다.
[어젠 고마웠다! 영감님한테 내가 꼭 허락받을 테니 걱정 마!]
그 호언장담에 순간 대협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해서 뭐라 말도 못 한 사이 현관문이 닫히더니 강백호는 사라졌다. 그리고 아쉬울 것도 없이 그날 저녁, 바로 전화가 왔다.
[야! 윤대협! 영감님이 와도 된데! 거봐, 내가 된다고 했잖아!]
잔뜩 신난 강백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자신의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대협은 기쁘면서도 어이가 없어 바람 빠지는 것처럼 새는 웃음을 참지 못 했다. 학교에 가서 감독을 보자마자 졸라댔을 강백호의 모습을 상상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말했을까, 상상은 나아갔다. 어느 순간부터 대협의 머리 속 강백호는 제멋대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영감님, 설날에 윤대협이랑 같이 영감님 집에 가도 되요? 윤대협도 설날에 혼자래요.
왠지 대협의 머리 속 강백호는 그리 말했다. 그렇게 계속 대협의 이름을 말하면서 감독에게 치댔다. 커다란 몸을 귀엽게 쭈그리면서 툴툴거리듯이 말하다가 애교도 부리다가 했다. 그리고 꼭 마지막엔 솔직한 기쁨을 담아 씩씩하게 말했다. 마치 지금처럼.
[너 오는 거다! 오는 거야!]
입꼬리가 귀에 걸리는 걸 느끼며 대협은 그래그래, 응응, 하고만 답했다. 수화기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한없이 생생한 강백호의 목소리에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날은 아주 천천히 찾아왔다. 사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 대협에게는 어이없을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그 사이 혼자 별 생각을 다 한 대협은 이삿짐도 미리 다 싸버렸다. 애초에 기숙사인지라 큰 짐은 없었다. 딱히 물건에 대한 애착이 있는 편도 아니라서 짐이랄 것 자체가 별로 없기도 했다. 그런데 강백호가 도와주러 온다고 생각하니까 속옷도 그렇고 뭔가 강백호한테 보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의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었다. 보다 보니 한 두개도 아니었다. 거기다 아직 몸이 완벽해 보이지 않던 강백호가 건드려도 될까 싶은 좀 무거운 것들도 보였다. 강백호랑 둘이서 도란도란 오래오래 이삿짐을 싸려던 계획은 그렇게 중간에 수정되었다. 게다가 대협 앞에서는 맨날 늦게까지 늘어져 잔 주제에 원래는 일찍 일어난다고 자꾸 우기던 강백호가 아침부터 짐 싸자고, 자기가 아침 일찍 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대협은 당일 새벽에 말도 안 되게 일찍 일어나 집을 좀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짐이 없는 편인데 아직 정리하기엔 애매한 짐도 많아 쌀 것만 싸고 나머지는 놔뒀더니 이사가는 집처럼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벌써 짐을 쌀 필요도, 심지어 대협이 직접 쌀 필요도 없었다. 지금까지 대협에게 이사는 그냥 자신의 몸만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협이 했던 일이라곤 어딘가로 가고 싶다고 말하는 게 다였다. 사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갈 것이라는 말이 아직 안 나왔을 뿐, 과정은 언제나와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좋든 싫든 이제 진짜 갈 곳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랑 통화를 하는 게 좀 귀찮기도 하고 성가시기도 해서 피하고 있었는데 명절이 끝나면 어떻게든 말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주섬주섬 바깥에 나갈 옷을 챙겨 입으며 대협은 생각을 이어 나갔다. 강백호가 올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난번 강백호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마중을 나갈 생각이었다. 강백호가 뜻하지 않게 자신을 발견하고 놀랄 걸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하지만 나름 차림새를 신경 쓴다고 목도리를 고르는 와중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윤대협! 나 왔다!”
오겠다고 한 시각보다 30분은 일렀다. 놀라 서둘러 나간 대협은 현관 앞 거울에서 급하게 머리를 한번 만지곤 얼굴을 살펴본 다음 문을 열었다.
“백호야-”
“안녕, 윤대협.”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강백호에게서 바깥의 찬 기운이 느껴졌다. 추위를 정말 안 타는 게 분명한 강백호의 볼이 빨갛게 얼어있을 정도로 시린 날씨에 대협은 서둘러 강백호를 안으로 들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천재라서 원래 일찍 일어난다고 했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 말한 강백호는 이 몸이 왔도다! 하고 외치곤 팔을 큼직하게 휘져으며 들어섰다. 거기에 무슨 자동 반사처럼 웃음이 나와서 대협이 소리내어 웃으니 강백호가 손에 뭔가 달랑달랑 들고 있던 걸 부엌의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일단 먹고 하자, 윤대협!”
그러면서 친절하게 대협의 의자까지 빼준 강백호가 비닐봉지를 까자 사라다빵 몇 개가 나왔다. 저도 모르게 무슨 돈으로? 하는 생각부터 해버린 대협은 좀 놀랐다. 그래서 고맙다던가 맛있겠다던가 하는 소리는 하지도 못하고 빵과 강백호 얼굴만 번갈아 보고 있으니 엥? 하는 표정을 지은 강백호가 말했다.
“너 이거 안 좋아하냐? 맛있는데?”
그러면서 자기가 먼저 한 입 먹는데 입이 커서 그런지 한번 입질하니까 그 큰 빵 반이 사라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돈이고 뭐고 다시 웃음이 터져버리는 바람에 대협은 쓸데없는 생각을 머리 속에서 치웠다. 하긴, 여기서 돈 이야기를 할 것도 아니고 강백호가 자신을 위해 뭔가 먹을 걸 사왔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고마워, 백호야. 나도 좋아해. 잘 먹을게.”
그래서 대협은 일단 기뻐하며 빵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입 안이 가득 차 볼이 빵빵해진 강백호가 얼른 먹으라며 턱짓을 했다. 사실 대협은 이런 종류의 빵을 좋아하지도 않고 거의 먹지도 않았지만 강백호와 있으면 늘 그랬듯이 요상하게 맛있었다. 사람은 둘인데 빵은 7개. 강백호의 먹는 양을 이제 아는 대협이 느릿느릿 빵 하나를 반쯤 해치웠을 때쯤 빵 하나 두 입 컷이던 강백호는 이미 5개를 먹어 치운 후였다. 눈치가 빤해서 대협은 남은 1개를 강백호 쪽으로 밀어주었고 예상대로 강백호는 행복해하며 그 하나를 아주 맛있게 먹어 치웠다. 그런 강백호에게 물을 한 컵 따라주며 남은 빵을 마저 먹는데 입 안에서 알 수 없는 달콤함마저 맴돌아, 대협은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어, 진짜? 짐 다 쌌다고?”
“응, 얼마 없어서 그런가, 오늘 일찍 일어난 김에 몇 개 쌌더니 금방 끝나더라고. 안 싼 것들은 이사 가기 전까지 써야 되는 것들이고.”
“…이거 다, 너 혼자?”
바닥에 늘어져 있는 이사 박스들을 보며 강백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많아 보이게 여기저기 던져놓긴 했지만 사실 얼마 안 되는 짐들에게서 대협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찌푸려진 미간에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겹쳐진다. 이게 뭐라고, 어쩔 줄 몰라하면서 눈을 깜빡이며 대협을 바라본다. 강렬하게 솟은 눈썹이 아래로 쳐지며 순식간에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강백호를 마주한 대협은 손톱 끝까지 힘을 주며 가슴 속에 들이치는 어떤 충동을 내리누른다. 그런 강백호의 모습이, 표정이, 눈빛이 대협의 안에서 뭔가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뭔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게 했다. 지금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얼마나 연약하면서도 무구하게 비치는지, 그리고 그 사실이 대협을 어떻게 자극하는지 상상조차 못할 강백호를 바라보며 대협은 머리카락이 삐죽 서는 감각을 홀로 견뎌낸다.
“이씨, 같이 하기로 해놓고 혼자 다 하면 어떡하냐.”
민망한 듯 이어지는 말은 입술의 삐죽거림과 웅얼거림이 함께였다. 토싵토실한 입술을 씹어대며 뭐야, 이게. 하고 투덜거리는 강백호를 따라 미간을 찌푸린 대협은 미소만 지었다. 그러자 툴툴대며 빈 빵봉지를 뽀시작거리던 강백호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야. 그럼 우리 뭐해. 영감님 집에 점심 때 가기로 했는데.”
그러면서 빵 봉지를 확 구겨버린 강백호를 향해 빙그레 웃은 대협은 뭐 그런 걱정을 다 할까, 생각하며 남겨놓은 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뒤따라 고개를 돌린 강백호의 시선 끝에 NBA 녹화 비디오들과 만약을 대비해 장르별로 빌려 놓은 영화 비디오들, 그리고 팝 cd와 책들을 정리해 놓은 책장이 있었다. 비디오들은 당연히 이 시간을 때울 목적으로 준비해 놓은 거였고 cd와 책들은 일부러 안 싸고 놔둔 거였다. 웃기게도 그 cd와 책들은 다 예전에 만나던 누군가가 사주긴 했는데 정작 대협은 그들이 누군지 기억 못하고 있는 물건들로, 대협은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이 오로지 강백호에게 잘 보이겠다는 목적 하나로 그 물건들을 이사 박스에 넣지 않았다. 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강백호가 책이나 팝송에 관심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고 솔직히 대협 역시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보이고는 싶어서 저지른 수작질의 결과였다. 그런 스스로가 유치하거나 옳지 않다는 자각은 사실 없었다. 있어 보이고 싶었다. 멋져 보이고 싶었다. 더 어른스럽고 뭘 좀 아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열여덟의 첫사랑은 그렇게 대협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안 하던 짓을 하게 했다. 그런 짓을 해놓고 강백호의 반응만 기다리게 만들었다.
“…”
그런데 강백호는 말이 없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얼굴도 무표정해져서 순간 대협은 당황했다. 어 소리도 못 내고 있는데 강백호가 조용히 일어나서는 비디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비디오들의 제목을 잠시 보다가 다른 것들도 살펴보았다. 그 옆얼굴을 보며 대협은 마른 침을 한번 삼켰다. 강백호는 cd도 보고 책도 보더니 몇 개는 꺼내서 안을 열거나 펼쳐보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흠, 하고 안을 자세히 보기도 했다. 보고 나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협을 빤히 바라보기도 했다. 대협은 그런 강백호를 향해 활짝 웃기는 했지만 가슴 속이 조마조마했다. 그러고 있는 강백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적이 이제 처음은 아니었다. 세상에서 제일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라 해도 될 강백호였지만 그 투명한 눈동자 너머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는 걸, 대협은 어느 순간부터 깨닫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이 분명한 색을 띄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 그랬다. 그리고 그 사실은 대협은 조금씩 두렵게 만들고 있었다.
“너 이 책들 다 읽었냐?”
응? 하고 대협이 애매하게 반응하자 다시 대협의 맞은 편으로 와 앉은 강백호는 코 밑을 한번 훔치며 한번 더 물었다.
“책들, 꽤 많은데 다 읽은 거냐고.”
“어, 아니, 읽은 것도 있고, 안 읽은 것도 있고.”
“…그래?”
자신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cd는 몰라도 책은 표지도 안 펼친 게 절반을 넘어가니 더 그랬다. 그리고 묘한 침묵이 있었다. 강백호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지, 대협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농구든 뭐든 같이 나란히 앉아서 비디오 보면서 즐겁게 떠들기나 하려던 계획이 일그러진 것만 확실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뭔가 강백호의 기분이 안 좋아보였다. 이유를 알 수가 없어 필사적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는데 강백호가 툭 하니 대협의 팔을 치며 말했다.
“야, 소화나 시킬 겸 1:1이나 할래?”



“안 추워? 백호야?”
“왜? 윤대협 넌 춥냐?”
사실 추웠다. 밖에 나오니 뉴스에서 한파 주의보라고 떠들며 가능한 실내에 머무르라고 한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허나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은 대협은 자신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서 강백호에게 둘러주었다. 바깥에 나오니 금방 빨개진 강백호의 코 끝과 썰렁한 목덜미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대협의 방 한 쪽에 뒹굴고 있던 농구공을 가지고 나와 꼭 끌어안고 있던 강백호는 의외로 얌전히 대협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조금 번거로워하는 티는 났다. 아무래도 강백호는 몸에 뭘 걸치는 것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런 날씨에 양말도 또 안 신었다. 신겨서 데리고 나올 걸 하는 생각에 아차 하다가 북산에서는 신입생한테 이런 것도 안 가르쳐주나, 그 잘난 양호열은 뭐 하나, 싶어진 대협은 소리없이 혀나 한번 차며 그냥 목도리나 단단히 여며주고 말았다.
“이기는 사람 하고 싶은 거 해주기!”
바닥에 공을 튕기며 외치는 강백호가 한 음절씩 내뱉을 때마다 하얀 입김이 올라왔다. 어깨를 풀고 있던 대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잡았다. 다행히 드리블을 시작하자 아까 기분 나빠보였던 건 뭐냐는 듯 대협이 잘 아는 강백호로 돌아와 있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주제 모르고 호전적인 그 강백호로 말이다. 아마 농구 실력도 그때와 비슷할 강백호를 보며 대협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감정을 똑바로 자각한 후로, 대협은 종종 강백호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곤 했다. 아주 이상한 날이었고, 이상한 첫 만남이었다. 하필이면 그 전날 밤낚시를 갔던 대협은 찌 한번 흔들리는 것을 못 보고 새벽에 들어와 잠들어서 희한한 꿈을 꿨었다. 세상 모든 새빨간 것들이 다 나와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개꿈이었다. 새빨간 토마토랑 새빨간 호랑이, 새빨간 딸기, 그리고 이름 모를 새빨간 꽃들이 노을 진 분홍빛 하늘을 동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신기해서 올려다보자 갑자기 다같이 쪼르르 아래로 내려오더니 대협을 둘러싸곤 꺄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더랬다. 충분히 불길한 느낌이 들 법한 광경이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은 하나도 안 들고 그냥 다 귀엽고 바보처럼 보여서 같이 한참을 웃다가 깨니까 연습 경기 시작할 시간이었다. 난리 칠 유감독님이랑 영수 생각에 허겁지겁 뛰어오니 이상한 새빨간 게 또 있었다. 순간 대협은 나 아직 꿈꾸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순간 눈 앞에 나타난 강백호의 존재와 모습이 그 자체로 그랬다. 현실이 아닌 무언가처럼 보였다. 그 정도로 새빨간 머리라면 아무 짓을 안 해도 시선이 갈 텐데 그걸 또 엄청나게 부풀려선 나 양아치요, 하고 대놓고 외치는 스타일을 하고선 깡패처럼 걸어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는 꼴이 정말 어이도 없고 황당하기도 한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뚫어져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꿈 속에서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이미 많은 게 정해진 걸지도 모른다.

“이익! 비켜 윤대협!”
농구 실력은 그때 그 수준이지만 몸 상태는 그때 같지 않은 강백호는 계속 분해하며, 그리고 그 분통을 입으로 다 터트려대며 달려들었다. 되든 안 되든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뛰어들었다. 늘 그랬듯이 대협은 그런 강백호가 좋았다. 왜 이렇게 좋은지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심하게 좋았다. 그래서 그런 강백호를 어떻게든 봐주면서, 또 자신이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강백호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애쓰면서, 허나 자신이 봐주고 있다는 걸 강백호가 알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몸을 움직였다. 자신이 작정하면 강백호가 공을 만질 수도 없게 할 수 있다는 걸 강백호가 이제 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조차 않았다. 허나 강백호는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대로 성질을 내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나의 강백호처럼 처음 봤을 때의 강백호처럼 놀랍도록 뜨겁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대협을 노려보며 코트 위를 날뛰었다. 그리하여 결국 어느 순간부터 대협은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농구가 너무 즐거워서, 심지어 자신이 다 봐주고 있는 이 뻔한 승부의 과정 하나하나가 짜릿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지 이게 강백호였다. 때로는 넋을 잃고 때로는 눈 앞의 상황도 자기자신도 잊은 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강백호라는 별이었다.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오는 게 슬픔 때문인지 그마저도 넘어선 쾌감 때문인지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 대협은 그 통증인지 뭔지도 모를 것을 내내 품은 채 1:1을 이어 나갔다. 확실히 둔해진, 강백호 특유의 동물적인 스피드와 점프력을 잃은 움직임이 아쉽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기본기는 놀라울 정도로 탄탄해져 있었고 농구 선수다워진 자세와 자리 선정에 돌아온 파워는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협은 그 가능성을 믿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넘어서서 여전히 이렇게 대협을 설레게 하는 강백호의 가능성을 그 누구보다 굳게, 그저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에이씨. 진짜!”
어느 새 시간이 지나 승부가 결정되었다. 대협이 이겼다. 강백호를 위해서라도 져주는 것까지는 할 수 없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결과에 열 받은 강백호는 농구공을 바닥으로 던져대며 마구잡이로 고함을 질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서울 정도로 성질을 부리며 분함과 서러움을 털 끝만큼도 숨기지 않고 낱낱이 토해냈다. 그리고 그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협은 거기에 이상할 만큼 안도하는 스스로를 느꼈다. 저런 강백호에게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리란 생각과 자신 앞에서 저렇게 정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강백호에 대한 기쁨이 교차하는 가운데 많은 것이 갑자기 감사했다. 그저 강백호가 계속 이럴 수 있기만를 바랬다. 자신의 품 속에서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던 그날 밤처럼, 바로 지금처럼 자신의 앞에서 그 무엇이라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랬다.
“야, 윤대협.”
한참 그러고 나니 그럭저럭 풀렸는지 다시 농구공을 끌어안은 강백호는 씩씩대는 기운이 남아있는 목소리로 대협을 불렀다. 응? 하고 답하자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말한다.
“하고 싶은 거 말해봐.”
“어?”
그거 진짜였나? 딱히 그 말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대협은 강백호의 의외로 진지한 태도에 저도 진지한 척을 하며 땀을 닦았다. 그리고 뭘 생각하기도 전에 움직임을 멈추니 땀이 식으면서 급격히 추워지는 걸 느꼈다. 강백호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말했다.
“백호야, 이제 진짜 좀 추운데 일단 들어가서 생각할까?”

그리곤 둘 다 추워서 말 그대로 달달 떨면서 대협의 기숙사로 돌아갔다. 따뜻한 물로 한번씩 씻고 나오니까 북산 할아버지 감독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미리 준비해놨던 설날 선물 세트를 챙기고 하다 보니 하고 싶은 것 말하는 건 둘 다 까먹었다. 강백호는 대협이 챙겨나온 커다란 종이 가방을 보고 뭐냐고 묻더니 감독님 드릴 설날 선물이라는 말에 놀라며 그런 거 안 가져가도 된다고 했다. 허나 난처한 듯 웃으며 난 처음이잖아, 하고 말하는 대협을 보곤 뒷머리만 긁적이고 말았다. 감독 집은 버스 타고 한 시간은 가야 했다. 버스 뒷자리에 둘이 나란히 앉아서 가는 시간이 처음에는 두근두근 좋았다가 내릴 때가 되니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면서 입가가 굳었다. 강백호가 이제 두 정거장 지나서 내리면 된다고 하는데 뻣뻣해져선 제대로 대답도 못 할 정도였다. 강백호의 야, 왜 그래? 하는 물음에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겹쳐져 대협은 자신이 긴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북산 할아버지 감독은 강백호의 부모가 아니었다. 대협도 알았다. 그리고 자신도 강백호와 친구 비슷한 사이에 불과하다는 걸, 대협은 정말 잘 알았다. 그런데 마치 사귀는 사람의 부모님을 보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아무도 그런 생각 안 한다는 걸 잘 아는데, 자기 혼자만 하는 생각인 걸 너무 잘 아는데 그런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영감님! 나 왔어요! 윤대협이랑 같이요!”
익숙하게 대문 옆의 벨을 누르고 말하는 강백호의 뒤에 서서 대협은 그 추운 날씨에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강백호 뒤를 따라 덜컹 소리와 함께 열린 대문 안 쪽 넒은 마당을 걸어 들어갔다. 굉장히 잘 꾸며진 정원은 한겨울에도 그 운치를 느낄 수 있었지만 긴장한 대협의 눈에 그런 건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협의 눈에는 마당 끝 열린 현관문 앞에 서있는 북산의 할아버지 감독과 그 옆에 곱게 차려입고 서있는 초로의 여인만 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불러야 되지? 어떻게 인사해야 되지? 하는 생각에 입도 못 떼고 있는데 앞서 가던 강백호가 크게 외치며 달려갔다.
“할머니!”
마치 진짜 자기 할머니를 만난 손자 마냥 뛰어간 강백호는 그 길로 감독의 사모로 생각되는 여인을 꼭 끌어안더니 아이처럼 볼을 부볐다. 그 충분히 부담스러울 수도, 과할 수도 있을 강백호의 행동에 감독의 사모는 그저 다정히 답하며 강백호를 마주 안고는 허리께를 다독였다. 그 옆에서 홋홋 소리를 내며 웃고 있는 북산 감독의 모습까지 어떤 의미로 완벽했다. 누가 봐도 명절에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와 손자로 밖에 보이지 않아 약간 얼떨떨해진 대협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서있는 걸 발견한 건 북산 감독이었다. 기억에 남아 있는 목소리가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대협군.”


 그렇게 북산 감독의 집에 들어선 대협은 한동안 계속 놀랐다. 그리고 잠깐 동안 강백호가 알고 보니 진짜 이 집 손자였던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격이 없는 손님 같은 게 아니었다. 강백호는 정말로 그 집 식구처럼 행동했다. 특히 감독 사모와는 진짜 가족 같았다. 할머니, 있잖아- 하고 과자와 과일을 먹으며 둘이 정답게 얘기하는 걸 보는데 북산 감독에게 해대는 영감님 소리만 아니었다면 이 집 손자라는 의심을 진지하게 계속하며 강백호 출생의 비밀에 의문을 품었을 지도 몰랐다. 그 오붓한 둘 옆에 앉아 주는 차를 마시며 웃는 역할이나 충실히 하던 대협의 이런저런 의문에 답해준 것도 감독 사모였다. 집에서의 북산 감독은 강백호를 만나기 전처럼 앉아서 홋홋 소리만 내고 있었다. 감독 사모가 말해준 것에 따르면 이 집은 전통 가옥을 현대식으로 개조한 집이었다. 꽤나 넓어 보였는데 별채까지 따로 있다고 했다. 헌데 자녀들이 모두 결혼하고 외국에 있어 부부 둘만 지낸다고, 안 쓰는 방이 더 많다고, 그래서 명절에는 적적한데 백호가 와줘서 정말 좋다고, 감독 사모는 아주 행복해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그 옆에서 똑같이 행복한 얼굴을 한 강백호가 감독 사모의 어깨에 머리를 부비며 말했다.
“나도 할머니랑 있어서 너무 좋아. 그리고 할머니가 음식 도와주잖아!”
그러자 감독 사모가 간지러운 듯 웃으며 그럼그럼 하고 답했다. 거기서 음식 도와준다는 게 무슨 소린가 싶었던 대협은 멋도 모르고 분위기 따라 웃다가 곧 주어진 앞치마를 매고 부엌 테이블 앞에 앉게 되었다.
“우와, 할머니! 추석 때보다 더 많다.”
“그때 좀 모자란 것 같길래 이번엔 더 마련했지.”
자신과 똑같은 분홍색 꽃무늬 앞치마를 매고 맞은 편에 앉아 그런 대화를 나누는 강백호와 감독 사모를 대협은 약간 당황해선 바라보았다. 커다란 부엌 테이블 위는 본적 없는 크기의 넙적한 버너와 온갖 음식 재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부엌 바닥은 물론 싱크대 위와 거실 한쪽까지 갖은 채소와 과일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명절 음식을 하려한다는 걸 알 수는 있었다. 강백호의 먹는 양을 아는 대협으로서는 그럴 수도 있지 싶은 양이기도 했다. 허나 자신이 이렇게 차려입고 그 요리 과정에 동참할 것이란 생각은 차마 못 했다. 그렇지만 북산 감독도 똑같은 앞치마를 입고 대협의 옆에 앉아 있는 마당에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백호야, 뭐부터 할까?”
“할머니, 고구마! 고구마전부터!”
강백호는 고구마를 집어 들고 기운좋게 외쳤다. 그리하여 그 후로는 노동의 연속이었다. 굴욕의 연속이기도 했다. 살면서 이런 일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던 대협은 좀 걱정은 되긴 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왠지 이런 쪽으로는 자신보다 손재주가 없을 것 같은 북산 감독을 힐끔대며 강백호와 감독 사모가 하는 걸 따라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협은 그날의 부진아였다. 원래 솜씨가 좋아보이던 감독 사모야 말할 것도 없고 강백호는 먹을 걸 좋아해서 그런지 뭔지 큼직한 손으로 뭐가 됐든 그럭저럭 괜찮게 했다. 놀랍게도 북산 감독 역시 느린 속도긴 했지만 꽤나 반듯하게 만들어대며 대협에게 미묘한 배신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분명히 다 똑같은 걸로 똑같이 하고 있는데, 대협이 만진 것들만 계속 이상했다. 못 생기고 삐뚤삐뚤하고 형태도 맛도 온전치 않았다. 실컷 웃으며 그런 대협을 놀려대는 강백호를 따라 웃는 감독 내외 사이에서 대협은 간만에 제대로 민망해졌다. 게다가 전이든 튀김이든 대협이 할 때마다 자꾸 기름이 크게 튀어서 다들 몇 번씩 위험해지고 나서는 결국 설거지 담당으로 좌천되기까지 했다.
“야, 너 또 접시 깨먹으면 안 된다!”
음식 재료도 접시들도 어찌나 씻을 게 많던지, 고무 장갑 끼고 정신없이 씻어대는 대협의 뒤에서 강백호가 큰 소리로 그리 말하자 감독 내외가 또 와르르 웃었다. 거기에 뒷목까지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생전 처음 보는 채소와 그릇들을 어떻게 씻어야 할 지 몰라 얼마나 끙끙댔는지 모른다. 나중에는 뭔가 혼이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느새 다가온 익숙한 체온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였다.
“할 만하냐, 윤대협?”
그 말은 귓가에 숨결과 함께 닿아왔다. 그 순간 또 저도 모르게 움찔한 대협을 강백호는 재빨리 피했다. 두 번은 안 당하지, 하고 말하던 장난꾸러기같은 얼굴에 히죽히죽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그리곤 대협이 뭔 말할 새도 없이 불쑥 입가로 들이댄 노란색에서 달달한 냄새가 올라왔다.
“이제 딱 맞게 식었으니까 맛 한번 봐라.”
그러면서 대협의 입술 사이로 아까 만든 고구마전을 밀어 넣는데 씹으니 바삭 소리가 났다. 곧바로 입 안에 퍼지는 환상적인 맛에 대협은 눈을 크게 뜨며 빠르게 입 안의 고구마전을 씹어삼켰다.
“어떠냐? 맛있지? 맛있지?”
맛있게 먹는 대협을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보며 묻는 강백호에게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맛있었다. 진짜 맛있었다. 그러자 큰 입을 활짝 벌리며 우하하하 웃은 강백호가 역시 천재가 한 건 다르지! 하는데 마저 우물대며 고개를 더 크게 끄덕였더니 다른 것들도 먹어봐라, 하면서 접시에 뭘 한 가득 담아왔다. 그리곤 설거지하는 대협의 옆에 서서 하나씩 먹여주었다. 오징어 튀김에 새우 튀김, 버섯전과 동태전과 산적 꼬치까지 차례대로 다 먹여 주었다. 정말이지 전부 다 황당할 정도로 맛있어서 고무장갑을 낀 채로 엄지손가락을 들어주니 강백호가 캬캬캬 소리를 내며 웃었다. 거기에 자신도 웃음이 나서 아직 입 안에 남아있는 산적 고기를 씹으며 따라 웃으니까 강백호가 짜식이, 하면서 어깨를 부딪쳐왔다. 기분이 두둥실 떠올라 저도 어깨를 맞부딪히며 설거지를 마저 하던 대협은 자신이 얼마나 풀어진 얼굴로 웃고 있는지 몰랐다. 그런 자신들을 뒤에서 흠, 소리를 내며 바라보던 북산 감독 내외의 시선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음식을 다 만들고 치우기까지 하고 나니 저녁 시간이었다. 대협은 강백호가 먹여준 것들 때문에 사실 배가 하나도 안 고팠는데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 것 같았다. 특히 강백호가 그랬다. 대협은 더 이상 그 사실이 놀랍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도 먹으려면 먹을 수는 있었다. 오늘 저녁은 배달해서 먹자고 말한 것도 강백호였다. 북산 사모가 그럴까? 하고 말하자마자 벌떡 일어나서는 어딘가에서 중국집 메뉴 종이까지 가지고 왔다. 완전 자기 집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여기 오랜만이다, 하는 소리까지 해댔다.
“그러게, 백호는 오랜만이겠네. 뭐 먹을래? 간짜장?”
그리곤 북산 사모가 그리 묻자 고민하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오늘은 매콤한 것도 먹고 싶다며 짬뽕 이야기를 해댔다. 강백호라면 당연히 둘 다 시킬 줄 알았던 대협은 저리 고민하다니 강백호도 음식하면서 꽤 주워 먹긴 했나보다 싶어서 나눠줘야 되겠다는 생각에 자신이 짬뽕을 먹겠다고 했다. 그러자 강백호가 반색을 하며 그럼 난 간짜장 곱빼기! 하고 외치더니 자기가 알아서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감독이랑 감독 사모 것까지 시키곤 제멋대로 해물 누룽지탕까지 추가시켰다. 대협의 짬뽕을 곱빼기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시키는 사람이 많은지 오는데 30분 넘게 걸린다고 했다. 북산 사모가 그래도 시키라고 하더니 강백호가 전화를 끊자 그럼 잠깐 산책이나 다녀올까,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사모를 따라 강백호가 같이 일어나며 할머니, 나도! 하고 외쳤다. 대협은 북산 감독과 둘만 있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자신도 따라 일어나려 했다. 헌데 어깨를 묵직하게 눌러오는 손길이 있었다.
“대협군.”
“? 네?”
대협의 시선이 패딩 점퍼를 챙겨입던 강백호에게서 어깨에 올려진 손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북산 감독의 허연 안경알에 비친 빛이 한 가닥 반짝였다. 어깨 위의 손에 힘을 빼지 않은 채로, 감독은 말했다.
“우리 집 창고방 형광등이 요즘 좀 이상해. 미안한데 가는 것 좀 도와주겠나?”
“아…네?”
그 뜬금없는 소리에 대협은 그렇게 밖에 반응하지 못 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다녀올게요- 하는 인사와 함께 감독 사모와 강백호가 팔짱을 끼고 나가버렸다. 당황한 대협이 나가는 두 사람의 뒤를 향해 어 소리를 내자 감독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그 움직임에 돌아본 대협의 얼굴 위로 풍채가 있는 몸집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빛을 등지고 선 데다가 안경까지 끼고 있는 감독의 눈동자는 검었고 시선의 끝도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협은 그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고요하고 면밀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라, 싶었다. 
“저 쪽이네.”
그리 말한 감독이 향하는 곳으로 따라가며 대협은 눈앞의 크고 둥근 등을 조금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착한 방에서 대협은 정말로 수명을 다한 형광등 하나를 새로 갈아 끼웠다. 말없이 그런 자신을 지켜보는 감독의 여전한 시선 아래 할 일을 마치자 감독은 고맙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내가 하려고 했는데 허리가 안 좋아서 말이야. 집사람이 하기에는 너무 높고. 신세를 졌네.”
대협은 거기에 아니에요. 하고 답하곤 어깨를 한번 으쓱이며 덧붙였다.
“저도 오늘 맛있는 것도 얻어먹고 하룻밤 신세도 지잖아요.”
그러면서 일부러 싱긋 웃으며 감독을 바라보았지만 감독은 웃지 않았다. 물끄러미 그런 대협을 바라볼 뿐이었다. 언젠가 북산의 감독이 예전엔 대단히 엄격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막상 들었을 때는 그래? 하고 말았고 누구에게 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데다가 강백호가 영감님 영감님 해대는 걸 보고는 완전히 까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말없이 등을 돌려 나가는 걸 보고는 아까처럼 다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다시 거실로 나와서 먼저 쇼파에 앉고서는 대협에게 맞은 편에 앉으라며 손짓을 하는데 저도 모르게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침묵은 조금 더 이어졌다.
“…요즘 백호군과 잘 지낸다고.”
고개를 들고 대협을 바라보며 감독은 말했다. 평소와 달리 등에 힘이 들어간 채 정자세로 앉아있던 대협이 네, 하고 짧게 대답하자 옅게 웃으며 감독이 말을 이어나갔다.
“백호군이 대협군 이야기를 자주 해. 서로 집에서 자고 간 적도 있다고.”
지난번에 양호열이 말했던 것도 그렇고, 정말로 강백호가 남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긴장한 와중에도 자신이 그만큼 강백호의 삶에 들어가 있다는 게 기쁘면서도 신기해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러자 감독이 유감독님 이야기를 꺼내며 말했다.
“유감독이 자네를 처음 데려왔을 때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나에게 말하던 기억이 나네.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농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었지.”
자주 들었던 말에 대협은 특유의 은은한 미소로 답했다. 그 당시 자신의 결정과 그 이유에 대해서 남들이 아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다들 자기 편할 대로 이유를 생각하곤 했는데 대협도 그게 편해서 그 이야기가 나오면 늘 그렇게 반응했다.
“백호군도 혼자 지내지.”
거기까지 말하고 감독은 작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그리고 얼굴이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백호군 집이 어떤지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
“…네.”
“여기서 지내면 좋을 텐데. 거기서 계속 지내고 싶어 하지.”
거기까지 말하고 감독은 이마를 한번 쓸었다. 대협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것 같았다. 감독 내외와 강백호의 사이가 지나치게 각별한 이유도 짐작이 갔다. 얼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강백호는 여기서 지냈다. 이 집에서 정말로 감독 내외와 함께 살았다. 확실했다. 아마 몸상태가 지금보다 더 안 좋았을 때였겠지. 그리고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강백호의 어떤 고집 때문에.
“그래도 자네 같은 또래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며 감독은 둘이 나이도 비슷하고 혼자 지내니까 서로 잘 도와주면서 지내면 좋을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강백호에게 좋은 형이 되어주고 있어 고맙다는 이야기를 한참이나 했다. 대협은 예의 바르게 앉아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다 좋은 이야기였다. 나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대협은 기분이 조금씩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건 단순한 지루함이 아니었다. 가슴 속 깊은 곳을 까슬까슬하니 거슬리는 무언가가 한뼘씩 긁어내리며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감독의 입에서 나오는 강백호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깊고 따뜻한 사랑에서 나온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그 알 수 없는 불쾌함에 이게 뭐지, 하고 있는데 불현듯 머리 속 한 켠에서 양호열이 말했다.
[백호 챙겨주는 사람 많아.]
그 말을 하던 양호열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재수없게 오만하고 차갑던 눈동자가 감독의 안경알과 겹쳐졌다. 지금 감독이 하는 말은 그런 게 아닌 걸 아는데, 그렇게 보였다. 그렇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사실이 대협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종잡을 수 없게 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부담은 가지지 않아도 되네.”
그리고 그런 대협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감독은 그렇게 말했다. 
“그냥 지금처럼 잘 지내주기만 하면 고맙겠네. 농구도 그렇고.”
거기에 대협이 답없이 눈만 깜빡이자 감독은 희미하게 한번 웃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대협군, 혹시 백호군과 최근에 농구를 해본 적이 있나?”
“…네.”
오늘 오전이요, 하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하기도 전에 감독이 답지 않게 먼저 묻기도 했다.
“대협군이 보기엔 어땠나?”
뭐가요? 하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대협은 감독이 뭘 묻는지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라면 감독이 더 잘 알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까지 물어보는 감독의 마음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이 강백호에게 정말로 진심이라는 걸, 온몸으로 알 수 있었다. 대협은 혼란스러운 자신의 마음은 한 쪽으로 밀어두고 일단 그 진심에 합당한 답을 찾았다.
“괜찮아 보입니다.”
“그런가?”
“저는, 곧 회복할 거라 생각합니다.”
절대 객관적이지 않은 절대적인 믿음을 굳게 담아, 대협은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안경알 너머의 눈동자가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래요, 하고 고개를 숙이던 감독의 얼굴에 작은 안도가 퍼져 나갔다. 거기서 대협은 갑자기 뱃속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열리더니 말이 튀어나왔다.
“걱정되세요?”
그 말에 다시 고개를 든 감독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대협을 바라본 시간이 꽤나 길었다. 그리하여 대협은 깨달았다. 자신도 아는 어떤 두려움을 감독도 가지고 있다는 걸. 그 두려움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무서워 망설이고 있다는 걸. 강백호의 농구가, 그 아이의 꿈이, 그 아름다운 재능이 꽃 피지 못하고 져버릴까봐 사실은 너무너무 겁이 나서 이토록 애타하고 있다는 걸.
아, 이 사람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을까, 자신이 생각한 만큼일까? 그 이상일까?
대협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얼굴로 말하는 감독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힘겹게 나온 말이 뒤로 갈수록 들릴락 말락 작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사실, 조금은.”






이런 연재 속도에 계속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랍고 면목이 없다...
다들 남은 연휴 잘 보내고, 대협백호 대협백호 해요.

슬덩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