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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5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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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지나 빛이 점점 강해지자 하인이 돌바닥을 싹싹 쓸어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금광요는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올 무렵부터 깨어 있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 앞에는 자신이 베고 있는 팔로부터 뻗어나온 손이 놓였고 다른 손은 허리를 감싸안고 있었다. 크고 따스한 육신에 안긴 채 머리 위로 고른 숨결이 느껴지니, 이대로 백년쯤 누워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남희신의 숨소리가 달라지자 제가 누구의 침상 위에, 누구의 품에 있는지 번개같이 자각한 금광요가 튕겨오르듯 일어났다. 안락했던 기분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고 급격한 수치심이 대신했다.
금광요가 침상 밖으로 달아나기 직전에 뻗어온 손이 허리를 잡아당겼다. 손쉽게 금광요를 잡은 남희신이 반신을 일으키며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금광요는 크게 숨을 삼킨 뒤 호흡이 얕아졌다 빨라졌다 했다.
귀여워하는 듯 옆머리를 비비던 얼굴이 미끄러지더니 금광요의 눈썹 끄트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이어서 뺨, 입가를 경유하던 입술이 지그시 어깨로 내려와 옷 위를 눌렀다. 그 때마다 나는 가벼운 소리가 금광요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이윽고 금광요의 목덜미에 머리를 묻은 남희신이 기분 좋은 듯 양 팔을 죄었다.
어느 순간 금광요는 기가 탁 풀린 듯 힘이 빠지고 말았다.
“형님...”
“음.”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아요... 앞으로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야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지. 뭘 하고 싶으냐?”
“그냥... 형님 곁에 있고 싶어요.”
“물론이지.”
“형님과 금을 타고 싶고요.”
남희신은 대답 대신 금광요의 깊숙한 목 안쪽에 입맞춤을 했다. 당황한 금광요가 더 작아진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아릉... 왠지 아릉이 보고 싶어졌어요.”
“그래. 같이 보러 가자. 또 무얼 할까?”
금광요가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졸려요...”
“몸이 너무 약해져서 그렇다. 좀 더 자거라.”
남희신은 금광요를 눕히고 막 잠이 들려는 그를 바라보았다. 작달막한 몸이 얇고 흐트러진 옷매무새에 감싸여 늘어진 모습이 애틋하고도 소중하여 몇 번이고 이마를 쓸어올리며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반쯤 눈을 뜬 금광요가 중얼거렸다.
“형님. 그 향로... 참 재미있었어요.”
남희신이 웃으며 말했다.
“알았다. 갖다가 네게 주마.”
며칠이 지나 금광요가 기운을 차린 후 두 사람은 금린대로 떠났다.
그새 부쩍 자란 금릉을 안은 금광요는 기탄없는 즐거움을 누렸다. 아이는 한동안 보지 못했던 금광요를 잘도 알아보고 웃으며 짧고 통통한 손을 뻗었다. 남희신은 간신히 전처럼 웃게 된 금광요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금광선은 남희신이 왔다는 전갈을 받고도 손님이 있다는 핑계로 한참을 나타나지 않았다. 금광요는 눈치를 챘으나, 어차피 금자헌 가족과 어울리며 기분이 좋은 남희신은 알 리가 없었고, 안다 해도 신경쓰지 않을 터였다. 여전히 상대를 읽어가며 행동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금광요는 쓰게 웃었다.
금광선은 투연청에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남희신은 예의바르게 몇 마디를 주고 받은 후 용건을 꺼내었다. 특별한 용건이 있는 줄 몰랐던 금광요가 의아해하며 쳐다보았다.
금광선은 남희신이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하니 금세 눈빛이 번들번들했다.
“무슨 일이오? 하하, 설마 광요를 아주 데려가 버리겠다는 그런 말씀은 아니겠지. 요즘 저 애 없는 빈자리가 아주 크거든.”
“어쩌면 비슷한 얘기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희신이 단정하게 예를 표하더니 말했다.
“제가 금광요과 도려를 맺고자 합니다. 그러니 그의 부친인 금종주께서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에, 금광선은 물론 금광요까지 충격을 받아 말을 하지 못했다.
남희신과 금광요는 이미 그들만의 혼약을 맺었고 아직도 붉은 띠가 소매 속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감겨 있었다. 그렇지만 남희신은 도려라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일단은 고소 남씨와 연관된 일이라, 금광선은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두 사람이 각별한 사이인 줄은 짐작했지만 그 정도일줄은 몰랐구려. 물론 좋소. 좋고 말고! 나의 아들이 고소 남씨의 주인과 도려를 맺는다는데 어찌 반대하겠나?”
남희신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금종주께서 반드시 축하해 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조만간 운심부지처에서 예식을 올리고 가연을 열 예정이니, 초청장을 드리면 난릉 금씨의 모든 가족이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뜬 후 금광선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고소 남씨와 한층 더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건 사실이지만 과연 좋기만 한 일인지, 이해득실에 예민한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여러 가지 방향에서 이 사건을 조명해 보았다. 도려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혼례와 같다. 도려를 맺는 것이니 큰 예물이 오가진 않지만 애초에 부유한 금광선은 재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도, 도려든 혼례든 일반적으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 버리기 십상이었다. 종주인 남희신이 운심부지처를 비울 순 없으니 필히 금광요가 그 편에 묶이게 될 터였다. 지금도 금광요는 일년의 반절 이상을 운심부지처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데, 그렇다면...
‘흥. 그런 녀석 하나 사라지는 게 금씨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평소 맘에 들지 않던 금광요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느껴지자마자 고까워진 금광선은 코웃음을 치며 그의 수단이 좋고 능력이 대단한 것을 애써 무시해버렸다.
어쨌든 금광요가 서자라도 난릉 금씨의 핏줄이긴 하니, 인연이 더 깊어질 것은 사실이었다. 여지껏 두 사람의 친분이 난릉 금씨의 일에 별반 도움이 된 적은 없었지만, 아무튼 아닌 것보다는 낫지 않나 싶은 정도의 얘기였다.
결론은 이도 저도 아닌 느낌이라 그들이 도려가 된다는 충격만 남을 따름이었다. 기분이 싱숭생숭하던 금광선은 다른 일처럼 이 일도 며칠이 지나자 가볍게 잊어버렸다.
연도를 걸어나오는 동안 남희신은 말이 없었다. 결국에 참을 수가 없어진 금광요가 입을 열었다.
“형님. 난데없이... 갑자기...”
그는 도려라는 한 마디가 차마 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혼례는 할 수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혼례는 그렇지. 하지만 도려는 얘기가 다르지 않느냐.”
“굳이 사람들이 다 알도록 그렇게...”
“당연히 모두가 알아야 한다. 나는 고소 남씨의 주인이고, 너는 난릉 금씨의 귀한 자제가 아니냐.”
연도의 끝에 이르러 어검을 하기 전에 남희신이 말했다.
“염방존. 이 나의 도려가 되는 게 싫으신 건가?”
그가 일부러 짓궂게 말하는 것을 알고 금광요는 입 속의 살을 살짝 깨물었다.
“...형님께서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는 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앞으로 아무도 몰랐던 내 면모를 많이 알게 될 거네, 아우.”
그렇게 두 사람이 다시 운심부지처로 돌아온 후에는 고소 남씨가 발칵 뒤집혔다.
의외로 남계인만이 두 사람의 친분이 깊은 것을 알았던데다 겉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금광요를 좋게 보고 있었으므로 놀라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 본래 고소 남씨는 도법을 중시하는 가문이라 대를 잇는데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한결같이 남망기에게 들러붙어 있는 위무선만이 눈엣가시일 뿐이었다.
남희신은 의례 준비 일체를 금광요에게 맡겼다. 금광요가 손대기 힘든 부분은 남망기의 도움을 받도록 했다.
그가 일부러 의도하여 시킨 일인지는 몰라도, 금광요는 본디 일을 할 때 생기가 돌고 활발해지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자기 가문도 아닌 고소 남씨의 일을 좌지우지 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지만, 남희신이 끈질기게 권고하는대로 따르다 보니 빠르게 적응했다.
금광요가 원래부터 이런 직무에 능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고소 남씨도 그가 택무군의 도려가 된다고 하니 마치 그가 종주인 양 성심껏 받들었다. 고소 남씨에 종속된 가문들에게 보낼 초청장 등 금광요가 알기 어려운 부분은 남망기가 메워 주었다.
대례 당일에는 난릉 금씨의 혈족과 운몽 강씨의 삼독성수, 청하 섭씨 형제 등 세가의 주요 인물들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 외의 주요 명사들과, 고소 남씨의 혈족, 객경들, 문하생 전원이 모인 가운데 남희신과 금광요는 서로에게 머리를 숙여 영원히 변치 않는 도려가 될 것을 약조하고 만인의 인가를 받았다.
예식이 끝난 후에는 다소 운심부지처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연회가 열렸다. 잔칫상은 아무래도 육류를 삼갔지만 최대한 다채롭고 맛깔스럽게 차려 냈고, 연회석도 수련생들이 줄줄이 앉듯이 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도록 배치했다. 물론 모든 것이 금광요의 계획으로써 고소 남씨의 엄숙함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크게 법도를 거스르지도 않았다.
남희신과 금광요가 도려를 맺은 것은 수진계 전체에서도 뜻밖의 사건이지만, 어쨌든 경사라면 경사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운심부지처에서 이런 연회가 열리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색다른 상황에 신기해하며 한껏 즐겼다. 운심부지처도 지금에 와서는 번듯하게 재건되어 손님들의 발이 닫는 곳은 어디든지 수려한 아름다움을 뽐내었다.
초청장을 받고 온 강만음은 오랜만에 위무선을 만났고, 섭회상도 모처럼 섭명결의 감시에서 벗어나 또래들과 어울렸다. 위무선이 보기에도 고소 남씨답지 않은 연회가 제법 즐거웠으므로, 불행해 보이는 사람은 남망기 하나 뿐인 것으로 보였다.
위무선은 다만 연회에 술이 빠진 것만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 문제만큼은 금광요도 어쩔 수 없었다. 대신 달콤한 간식거리와 매운 음식을 많이 준비했으므로 사람들은 그것으로 만족하고 즐길 수 있을만큼 즐겼다.
위무선은 날이 저물어 손님들이 다 떠나갈 무렵에야 남망기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오랜만에 강징을 만나 실컷 떠들고, 때로는 남씨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주먹다툼까지 하며 요란하게 노느라고 미처 그를 돌아보지 못했다.
“남잠, 왜 그래? 음식이 네 입에 안 맞아서 배탈이라도 난 거야?”
사방은 떠나는 손님들의 배웅이 끝나고 머무를 사람은 객실로 들고, 하인들이 어지러운 연회의 뒤끝을 마무리하느라 분주했다. 해시까지 끝내지 못하면 도중에 손을 놓아야 할까봐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남망기는 으레 그러듯이 쉽게 속을 털어놓지 않았고, 위무선은 그의 생각을 알아맞추기를 즐겼으니 곧장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연회가 너무 떠들썩해서 불쾌했어? 너는 운심부지처가 무슨 난꽃처럼 보존되길 바라니까. 벌레 한마리 안 붙어 있게, 시든 잎 하나 없게.”
“...”
“아, 아니다. 네 형장을 염방존에게 뺏긴 거 같아서 심란해졌구나?”
이 말에 남망기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하하하. 그래. 넌 어린애가 아니니까. 미안!”
남망기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내뱉았다.
“위영.”
“응!”
“너는 나와 도려가 되고 싶지 않아?”
왜 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던지. 위무선은 잠시 멍했다. 놀란 다음에는 남망기의 고민이 우습게 생각됐고, 그리고는 가슴 속에 간질간질한 기쁨이 치밀어올랐다.
“남잠...”
한동안은 감동을 받아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위무선이 남망기의 어깨를 껴안고 말했다.
“생각해 봐, 남잠. 너랑 내가 도려를 맺는다고 하면 난리가 날 거야. 천방지축 위무선이 드디어는 함광군까지 타락시켰다고 욕을 할 거라고. 이 몸은 힘도 들이지 않고 그만 공공의 적이 되고 말걸?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남선생님께서 눈빛만으로도 나를 말려 죽이고 말 거라고. 그러니 그런 생각일랑은 제발 접어 둬.”
위무선은 남들 앞에서 맺는 예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잔뜩 농담만 지껄였다. 그러자 남망기는 못마땅한 듯 걸음을 재촉하여 위무선을 떨쳐내고 저만치 걸어가버렸다.
“나 참.”
얼른 남망기를 따라잡은 위무선이 그를 앞에서 뒷걸음질을 치며 달랬다.
“골 내지 마, 남잠. 그런 게 뭐라고 그래? 우리만 좋으면 됐지. 안 그래?”
그래도 남망기는 위무선이 정실로 따라 들어올 때까지 굳은 태도를 풀지 않았다.
위무선은 남망기가 말없이 패검을 걸어놓고, 불을 밝히고 겉옷을 벗어 정돈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정말 어이가 없네, 남잠! 너 그런 거 가지고 화낼 때야?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으면서!”
이 말에 남망기의 등 뒤에서 피어오르던 음습한 노여움이 한풀 꺾이는 듯했다.
그가 등을 돌린 채 작게 말했다.
“...그럴 리가.”
“안 했어. 자, 어서 해봐.”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 싶은 위무선은 얼른 남망기의 앞으로 돌아가서 어깨를 잡았다.
“...”
“또 부끄러워?”
남망기는 어깨의 손을 뿌리치고 다른 곳으로 도망을 쳤다.
“하하하. 알겠어? 나랑 도려가 되고 싶으면, 사랑한단 말 정돈 할 수 있어야지.”
위무선은 도려는 고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못 들어도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런 말을 못 하는 남망기가 귀엽고, 마음이 너무 깊어 그렇겠거니 싶어 더욱 사랑스러웠다.
그에 욱하는 감정이 터져나오는 걸 참지 못하고 와락 매달려오는 위무선을 남망기가 아주 힘겹게 떼어놓았다.
“...안 돼.”
위무선은 안간힘을 다 했지만 남망기가 끝내 자신의 손을 물리치자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왔다. 이제는 금단을 무사히 맺는다 해도 남망기를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완력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심지어 주술도 쓰지 말라 하니, 승부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러니 위무선이 말이 많아지며 교활해지는 것에는 죄가 없었다.
“남잠, 운심부지처 밖이 아니면 손도 못 잡게 하는 건 너무 심해. 너 좀처럼 나가지도 않으면서. 우린 서로 사랑하니까, 손을 잡는 게 아니라 날이 새도록 네가 내 안에 들어와 있어도 음란한 게 아니라고.”
남망기는 말도 없이 귓불이 확 붉어졌다.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위무선과 저지르는 짓들을 떠올려 보면 음란한 게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양심이 아팠다.
갑자기 위무선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맞다, 남잠, 그러면 우리 삼배를 올리고 부부가 되자. 그럼 음란한 거 아니지? 그렇지?”
이 말에 남망기는 노골적인 음담을 들었던 때보다 더욱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위무선은 농담이 아닌 듯 냉큼 그 자리에 꿇어앉더니 남망기에게도 꿇으라고 강요했다.
의외로, 이번에는 남망기가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당장 삼배를 하고 덮칠 듯한 기세던 위무선도 가만히 남망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새 장난기는 싹 사라졌고, 좀처럼 보기 힘든 점잖고 따뜻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남망기도 당황했던 마음을 잊고 점점 눈빛이 깊어져갔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음이 흘러넘쳐버릴 듯할 때, 두 사람은 동시에 머리를 숙여 맞절을 했다.
한 번. 그리고 고개를 들고 또다시 눈을 맞추며 시선으로 서로를 어루만진 뒤.
또 한 번.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을.
그 후에도 꿇어앉은 채 오래오래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흔치 않은 엄숙함이 오히려 한창 몸을 섞을 때의 애타는 감정보다도 뜨겁고 황홀하게 느껴졌다.
“남잠, 나는 영원히 네 거야.”
남망기는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지만, 잠시 후 나직하게 말했다.
“위영. 나는 영원히 네 거야.”
위무선이 웃었다.
“남잠, 그럼 우리 여기서 첫날밤을 치뤄도 돼?”
남망기는 위무선을 응시하면서 말이 없었다. 위무선의 눈에는 남망기의 고지식한 머릿속에서 사고의 조각들이 차례차례 맞물려들어가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규훈. 혼약. 규훈.
이윽고 남망기가 입을 열었다.
“이리 와, 위영.”
...애정.
비슷한 시각, 한실에서는 남희신이 금광요의 왼쪽 어깨를 돌보고 있었다.
중요한 뼈가 박살이 나버렸으니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금광요는 한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고통도 잘 느끼지 못하고 혹사를 해 버리는지라 좀처럼 호전이 되지 않았다.
금광요는 남희신이 어깨를 보자고 할 때가 되어서야 혹사를 했던 걸 깨닫고 당황하며 안절부절 못했다.
뼈와 굳은 혈의 상태를 살피고 나면 반드시 따라오는 애무와 속상해하는 말투. 한쪽 어깨가 발가벗기워진 채 남희신의 입술과 손가락이 와닿는 느낌은 숫제 고문과도 같았다. 그 때마다 금광요는 온 몸이 꽉 죄어오는 듯한 긴장감이 들어 너무 힘들었다.
본래는 싸움이나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그런 일에는 거침이 없었고, 인내심도 대단한 금광요였다. 그는 마치 자신의 몸을 목적을 위한 도구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타인의 부드러운 손길에 대해서는 오히려 약화되고 평정심조차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어이없었다.
남희신의 손만 닿으면 금광요는 심하게 동요하고 무력해지며, 그런 반응을 남희신이 눈치챌까 조마조마했다.
자신이 본래 그런 행위에 약한 사람인지, 아니면 남희신의 손길에 대해서만 그런 건지, 앞으로는 그것을 알아볼 기회도 없었다.
남희신이 성에 찰 만큼 상처를 어루만지고 난 다음 옷을 입혀주자 금광요는 겨우 한숨을 쉬었다.
“형님.”
“응?”
“저는 그럼... 이제부터 계속 운심부지처에 머무르면 되는 겁니까?”
남희신이 실소를 터뜨렸다.
“전혀 이해를 못 했구나.”
“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난릉에 가고 싶어지면 가고, 다시 돌아오고 싶어지면 오면 된다. 이제까지 그래 왔듯이.”
“...예. 알겠습니다.”
금광요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그 동안 남희신은 엄청난 사랑과 관심을 쏟아부었다.
매일 금광요의 눈빛으로부터 손끝 발끝까지의 안부를 다 살피고, 혼약으로 마음을 사로잡고, 도려를 맺었음을 공공연히 알렸다. 그러니 금광요는 당연히 그가 자신을 독점하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묘하게도 가장 알기 쉬운 줄 알았던 남자가 유일하게 예측불가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아요. 너 정말로 금린대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아무튼 너는 아릉을 사랑하지. 그리고 크고 화려한 자리를 만들거나 사람을 만나는 일을 즐기는 것 같거든.”
들어보니 정말 그런 듯도 했다. 사람을 좋아하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금광요는 커다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자기 마음대로 실체화되어가는 과정을 즐겼다.
“그들이 가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금린대에 가서 연회를 열든 청담회를 열든, 그러고 싶다면 하도록 해라. 막을 사람도 없지 않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정말로 과분한 복을 받는 사람 같아서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형님.”
“나만 하겠느냐?”
남희신은 금광요를 뒤에서 끌어안고 매끄러운 뺨에다 자신의 얼굴을 꼭 갖다대었다. 혼약을 맺은 후로 그는 틈만 나면 이런 식으로 꼼짝도 못하게 안은 다음 입술이 닿는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입술에 입맞춤을 했던 건 처음 딱 한 번뿐, 이러다가 남희신이 물러나면 금광요는 안도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오늘은 어떻게 하겠느냐?”
이 말은 어디서 취침에 들겠냐는 뜻이었다. 남희신은 매일 밤 똑같이 물었다. 도려를 맺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금광요는 남희신과 자는 것이 긴장되면서도, 혼자 잠드는 게 더 무서워서 매번 한실을 택하곤 했다.
그렇게 한 침상에서 잠을 잘 때도 남희신은 늘 첫날과 같이 침의를 입은 금광요의 등 뒤에서 팔베개를 하고 안아 주었다. 잠들기 전까지 따뜻하고 가벼운 입맞춤이 계속되고, 다음 날 일어나면 침상을 나가기 전에 또 그렇게 했다.
온종일 그런 식으로 어미닭에게 품어지는 병아리처럼 데워졌다 식었다 하다 보니, 금광요는 심각하게 고민할 틈도 없었다. 그래서 기분 좋게 혼란스러운 가운데 점점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된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침상에 든 후 만족할 만큼 귀애하고 나면 남희신은 고요하게 잠이 든다. 그러면 고소 남씨보다도 잠드는 시각이 늦은 금광요는 비로소 평화로운 상태에서 남희신의 온기를 만끽했다. 그의 숨결, 단단한 가슴, 자신의 몸을 감은 팔을 느끼고 그의 사랑과 관심을 오롯이 느꼈다. 그러면 술에 취한 듯 행복감에 취해서 잠이 들곤 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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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지나 빛이 점점 강해지자 하인이 돌바닥을 싹싹 쓸어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금광요는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올 무렵부터 깨어 있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 앞에는 자신이 베고 있는 팔로부터 뻗어나온 손이 놓였고 다른 손은 허리를 감싸안고 있었다. 크고 따스한 육신에 안긴 채 머리 위로 고른 숨결이 느껴지니, 이대로 백년쯤 누워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남희신의 숨소리가 달라지자 제가 누구의 침상 위에, 누구의 품에 있는지 번개같이 자각한 금광요가 튕겨오르듯 일어났다. 안락했던 기분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고 급격한 수치심이 대신했다.
금광요가 침상 밖으로 달아나기 직전에 뻗어온 손이 허리를 잡아당겼다. 손쉽게 금광요를 잡은 남희신이 반신을 일으키며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금광요는 크게 숨을 삼킨 뒤 호흡이 얕아졌다 빨라졌다 했다.
귀여워하는 듯 옆머리를 비비던 얼굴이 미끄러지더니 금광요의 눈썹 끄트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이어서 뺨, 입가를 경유하던 입술이 지그시 어깨로 내려와 옷 위를 눌렀다. 그 때마다 나는 가벼운 소리가 금광요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이윽고 금광요의 목덜미에 머리를 묻은 남희신이 기분 좋은 듯 양 팔을 죄었다.
어느 순간 금광요는 기가 탁 풀린 듯 힘이 빠지고 말았다.
“형님...”
“음.”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아요... 앞으로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야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지. 뭘 하고 싶으냐?”
“그냥... 형님 곁에 있고 싶어요.”
“물론이지.”
“형님과 금을 타고 싶고요.”
남희신은 대답 대신 금광요의 깊숙한 목 안쪽에 입맞춤을 했다. 당황한 금광요가 더 작아진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아릉... 왠지 아릉이 보고 싶어졌어요.”
“그래. 같이 보러 가자. 또 무얼 할까?”
금광요가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졸려요...”
“몸이 너무 약해져서 그렇다. 좀 더 자거라.”
남희신은 금광요를 눕히고 막 잠이 들려는 그를 바라보았다. 작달막한 몸이 얇고 흐트러진 옷매무새에 감싸여 늘어진 모습이 애틋하고도 소중하여 몇 번이고 이마를 쓸어올리며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반쯤 눈을 뜬 금광요가 중얼거렸다.
“형님. 그 향로... 참 재미있었어요.”
남희신이 웃으며 말했다.
“알았다. 갖다가 네게 주마.”
며칠이 지나 금광요가 기운을 차린 후 두 사람은 금린대로 떠났다.
그새 부쩍 자란 금릉을 안은 금광요는 기탄없는 즐거움을 누렸다. 아이는 한동안 보지 못했던 금광요를 잘도 알아보고 웃으며 짧고 통통한 손을 뻗었다. 남희신은 간신히 전처럼 웃게 된 금광요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금광선은 남희신이 왔다는 전갈을 받고도 손님이 있다는 핑계로 한참을 나타나지 않았다. 금광요는 눈치를 챘으나, 어차피 금자헌 가족과 어울리며 기분이 좋은 남희신은 알 리가 없었고, 안다 해도 신경쓰지 않을 터였다. 여전히 상대를 읽어가며 행동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금광요는 쓰게 웃었다.
금광선은 투연청에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남희신은 예의바르게 몇 마디를 주고 받은 후 용건을 꺼내었다. 특별한 용건이 있는 줄 몰랐던 금광요가 의아해하며 쳐다보았다.
금광선은 남희신이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하니 금세 눈빛이 번들번들했다.
“무슨 일이오? 하하, 설마 광요를 아주 데려가 버리겠다는 그런 말씀은 아니겠지. 요즘 저 애 없는 빈자리가 아주 크거든.”
“어쩌면 비슷한 얘기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희신이 단정하게 예를 표하더니 말했다.
“제가 금광요과 도려를 맺고자 합니다. 그러니 그의 부친인 금종주께서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에, 금광선은 물론 금광요까지 충격을 받아 말을 하지 못했다.
남희신과 금광요는 이미 그들만의 혼약을 맺었고 아직도 붉은 띠가 소매 속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감겨 있었다. 그렇지만 남희신은 도려라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일단은 고소 남씨와 연관된 일이라, 금광선은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두 사람이 각별한 사이인 줄은 짐작했지만 그 정도일줄은 몰랐구려. 물론 좋소. 좋고 말고! 나의 아들이 고소 남씨의 주인과 도려를 맺는다는데 어찌 반대하겠나?”
남희신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금종주께서 반드시 축하해 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조만간 운심부지처에서 예식을 올리고 가연을 열 예정이니, 초청장을 드리면 난릉 금씨의 모든 가족이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뜬 후 금광선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고소 남씨와 한층 더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건 사실이지만 과연 좋기만 한 일인지, 이해득실에 예민한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여러 가지 방향에서 이 사건을 조명해 보았다. 도려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혼례와 같다. 도려를 맺는 것이니 큰 예물이 오가진 않지만 애초에 부유한 금광선은 재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도, 도려든 혼례든 일반적으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 버리기 십상이었다. 종주인 남희신이 운심부지처를 비울 순 없으니 필히 금광요가 그 편에 묶이게 될 터였다. 지금도 금광요는 일년의 반절 이상을 운심부지처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데, 그렇다면...
‘흥. 그런 녀석 하나 사라지는 게 금씨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평소 맘에 들지 않던 금광요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느껴지자마자 고까워진 금광선은 코웃음을 치며 그의 수단이 좋고 능력이 대단한 것을 애써 무시해버렸다.
어쨌든 금광요가 서자라도 난릉 금씨의 핏줄이긴 하니, 인연이 더 깊어질 것은 사실이었다. 여지껏 두 사람의 친분이 난릉 금씨의 일에 별반 도움이 된 적은 없었지만, 아무튼 아닌 것보다는 낫지 않나 싶은 정도의 얘기였다.
결론은 이도 저도 아닌 느낌이라 그들이 도려가 된다는 충격만 남을 따름이었다. 기분이 싱숭생숭하던 금광선은 다른 일처럼 이 일도 며칠이 지나자 가볍게 잊어버렸다.
연도를 걸어나오는 동안 남희신은 말이 없었다. 결국에 참을 수가 없어진 금광요가 입을 열었다.
“형님. 난데없이... 갑자기...”
그는 도려라는 한 마디가 차마 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혼례는 할 수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혼례는 그렇지. 하지만 도려는 얘기가 다르지 않느냐.”
“굳이 사람들이 다 알도록 그렇게...”
“당연히 모두가 알아야 한다. 나는 고소 남씨의 주인이고, 너는 난릉 금씨의 귀한 자제가 아니냐.”
연도의 끝에 이르러 어검을 하기 전에 남희신이 말했다.
“염방존. 이 나의 도려가 되는 게 싫으신 건가?”
그가 일부러 짓궂게 말하는 것을 알고 금광요는 입 속의 살을 살짝 깨물었다.
“...형님께서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는 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앞으로 아무도 몰랐던 내 면모를 많이 알게 될 거네, 아우.”
그렇게 두 사람이 다시 운심부지처로 돌아온 후에는 고소 남씨가 발칵 뒤집혔다.
의외로 남계인만이 두 사람의 친분이 깊은 것을 알았던데다 겉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금광요를 좋게 보고 있었으므로 놀라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 본래 고소 남씨는 도법을 중시하는 가문이라 대를 잇는데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한결같이 남망기에게 들러붙어 있는 위무선만이 눈엣가시일 뿐이었다.
남희신은 의례 준비 일체를 금광요에게 맡겼다. 금광요가 손대기 힘든 부분은 남망기의 도움을 받도록 했다.
그가 일부러 의도하여 시킨 일인지는 몰라도, 금광요는 본디 일을 할 때 생기가 돌고 활발해지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자기 가문도 아닌 고소 남씨의 일을 좌지우지 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지만, 남희신이 끈질기게 권고하는대로 따르다 보니 빠르게 적응했다.
금광요가 원래부터 이런 직무에 능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고소 남씨도 그가 택무군의 도려가 된다고 하니 마치 그가 종주인 양 성심껏 받들었다. 고소 남씨에 종속된 가문들에게 보낼 초청장 등 금광요가 알기 어려운 부분은 남망기가 메워 주었다.
대례 당일에는 난릉 금씨의 혈족과 운몽 강씨의 삼독성수, 청하 섭씨 형제 등 세가의 주요 인물들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 외의 주요 명사들과, 고소 남씨의 혈족, 객경들, 문하생 전원이 모인 가운데 남희신과 금광요는 서로에게 머리를 숙여 영원히 변치 않는 도려가 될 것을 약조하고 만인의 인가를 받았다.
예식이 끝난 후에는 다소 운심부지처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연회가 열렸다. 잔칫상은 아무래도 육류를 삼갔지만 최대한 다채롭고 맛깔스럽게 차려 냈고, 연회석도 수련생들이 줄줄이 앉듯이 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도록 배치했다. 물론 모든 것이 금광요의 계획으로써 고소 남씨의 엄숙함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크게 법도를 거스르지도 않았다.
남희신과 금광요가 도려를 맺은 것은 수진계 전체에서도 뜻밖의 사건이지만, 어쨌든 경사라면 경사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운심부지처에서 이런 연회가 열리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색다른 상황에 신기해하며 한껏 즐겼다. 운심부지처도 지금에 와서는 번듯하게 재건되어 손님들의 발이 닫는 곳은 어디든지 수려한 아름다움을 뽐내었다.
초청장을 받고 온 강만음은 오랜만에 위무선을 만났고, 섭회상도 모처럼 섭명결의 감시에서 벗어나 또래들과 어울렸다. 위무선이 보기에도 고소 남씨답지 않은 연회가 제법 즐거웠으므로, 불행해 보이는 사람은 남망기 하나 뿐인 것으로 보였다.
위무선은 다만 연회에 술이 빠진 것만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 문제만큼은 금광요도 어쩔 수 없었다. 대신 달콤한 간식거리와 매운 음식을 많이 준비했으므로 사람들은 그것으로 만족하고 즐길 수 있을만큼 즐겼다.
위무선은 날이 저물어 손님들이 다 떠나갈 무렵에야 남망기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오랜만에 강징을 만나 실컷 떠들고, 때로는 남씨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주먹다툼까지 하며 요란하게 노느라고 미처 그를 돌아보지 못했다.
“남잠, 왜 그래? 음식이 네 입에 안 맞아서 배탈이라도 난 거야?”
사방은 떠나는 손님들의 배웅이 끝나고 머무를 사람은 객실로 들고, 하인들이 어지러운 연회의 뒤끝을 마무리하느라 분주했다. 해시까지 끝내지 못하면 도중에 손을 놓아야 할까봐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남망기는 으레 그러듯이 쉽게 속을 털어놓지 않았고, 위무선은 그의 생각을 알아맞추기를 즐겼으니 곧장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연회가 너무 떠들썩해서 불쾌했어? 너는 운심부지처가 무슨 난꽃처럼 보존되길 바라니까. 벌레 한마리 안 붙어 있게, 시든 잎 하나 없게.”
“...”
“아, 아니다. 네 형장을 염방존에게 뺏긴 거 같아서 심란해졌구나?”
이 말에 남망기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하하하. 그래. 넌 어린애가 아니니까. 미안!”
남망기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내뱉았다.
“위영.”
“응!”
“너는 나와 도려가 되고 싶지 않아?”
왜 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던지. 위무선은 잠시 멍했다. 놀란 다음에는 남망기의 고민이 우습게 생각됐고, 그리고는 가슴 속에 간질간질한 기쁨이 치밀어올랐다.
“남잠...”
한동안은 감동을 받아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위무선이 남망기의 어깨를 껴안고 말했다.
“생각해 봐, 남잠. 너랑 내가 도려를 맺는다고 하면 난리가 날 거야. 천방지축 위무선이 드디어는 함광군까지 타락시켰다고 욕을 할 거라고. 이 몸은 힘도 들이지 않고 그만 공공의 적이 되고 말걸?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남선생님께서 눈빛만으로도 나를 말려 죽이고 말 거라고. 그러니 그런 생각일랑은 제발 접어 둬.”
위무선은 남들 앞에서 맺는 예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잔뜩 농담만 지껄였다. 그러자 남망기는 못마땅한 듯 걸음을 재촉하여 위무선을 떨쳐내고 저만치 걸어가버렸다.
“나 참.”
얼른 남망기를 따라잡은 위무선이 그를 앞에서 뒷걸음질을 치며 달랬다.
“골 내지 마, 남잠. 그런 게 뭐라고 그래? 우리만 좋으면 됐지. 안 그래?”
그래도 남망기는 위무선이 정실로 따라 들어올 때까지 굳은 태도를 풀지 않았다.
위무선은 남망기가 말없이 패검을 걸어놓고, 불을 밝히고 겉옷을 벗어 정돈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정말 어이가 없네, 남잠! 너 그런 거 가지고 화낼 때야?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으면서!”
이 말에 남망기의 등 뒤에서 피어오르던 음습한 노여움이 한풀 꺾이는 듯했다.
그가 등을 돌린 채 작게 말했다.
“...그럴 리가.”
“안 했어. 자, 어서 해봐.”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 싶은 위무선은 얼른 남망기의 앞으로 돌아가서 어깨를 잡았다.
“...”
“또 부끄러워?”
남망기는 어깨의 손을 뿌리치고 다른 곳으로 도망을 쳤다.
“하하하. 알겠어? 나랑 도려가 되고 싶으면, 사랑한단 말 정돈 할 수 있어야지.”
위무선은 도려는 고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못 들어도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런 말을 못 하는 남망기가 귀엽고, 마음이 너무 깊어 그렇겠거니 싶어 더욱 사랑스러웠다.
그에 욱하는 감정이 터져나오는 걸 참지 못하고 와락 매달려오는 위무선을 남망기가 아주 힘겹게 떼어놓았다.
“...안 돼.”
위무선은 안간힘을 다 했지만 남망기가 끝내 자신의 손을 물리치자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왔다. 이제는 금단을 무사히 맺는다 해도 남망기를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완력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심지어 주술도 쓰지 말라 하니, 승부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러니 위무선이 말이 많아지며 교활해지는 것에는 죄가 없었다.
“남잠, 운심부지처 밖이 아니면 손도 못 잡게 하는 건 너무 심해. 너 좀처럼 나가지도 않으면서. 우린 서로 사랑하니까, 손을 잡는 게 아니라 날이 새도록 네가 내 안에 들어와 있어도 음란한 게 아니라고.”
남망기는 말도 없이 귓불이 확 붉어졌다.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위무선과 저지르는 짓들을 떠올려 보면 음란한 게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양심이 아팠다.
갑자기 위무선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맞다, 남잠, 그러면 우리 삼배를 올리고 부부가 되자. 그럼 음란한 거 아니지? 그렇지?”
이 말에 남망기는 노골적인 음담을 들었던 때보다 더욱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위무선은 농담이 아닌 듯 냉큼 그 자리에 꿇어앉더니 남망기에게도 꿇으라고 강요했다.
의외로, 이번에는 남망기가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당장 삼배를 하고 덮칠 듯한 기세던 위무선도 가만히 남망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새 장난기는 싹 사라졌고, 좀처럼 보기 힘든 점잖고 따뜻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남망기도 당황했던 마음을 잊고 점점 눈빛이 깊어져갔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음이 흘러넘쳐버릴 듯할 때, 두 사람은 동시에 머리를 숙여 맞절을 했다.
한 번. 그리고 고개를 들고 또다시 눈을 맞추며 시선으로 서로를 어루만진 뒤.
또 한 번.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을.
그 후에도 꿇어앉은 채 오래오래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흔치 않은 엄숙함이 오히려 한창 몸을 섞을 때의 애타는 감정보다도 뜨겁고 황홀하게 느껴졌다.
“남잠, 나는 영원히 네 거야.”
남망기는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지만, 잠시 후 나직하게 말했다.
“위영. 나는 영원히 네 거야.”
위무선이 웃었다.
“남잠, 그럼 우리 여기서 첫날밤을 치뤄도 돼?”
남망기는 위무선을 응시하면서 말이 없었다. 위무선의 눈에는 남망기의 고지식한 머릿속에서 사고의 조각들이 차례차례 맞물려들어가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규훈. 혼약. 규훈.
이윽고 남망기가 입을 열었다.
“이리 와, 위영.”
...애정.
비슷한 시각, 한실에서는 남희신이 금광요의 왼쪽 어깨를 돌보고 있었다.
중요한 뼈가 박살이 나버렸으니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금광요는 한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고통도 잘 느끼지 못하고 혹사를 해 버리는지라 좀처럼 호전이 되지 않았다.
금광요는 남희신이 어깨를 보자고 할 때가 되어서야 혹사를 했던 걸 깨닫고 당황하며 안절부절 못했다.
뼈와 굳은 혈의 상태를 살피고 나면 반드시 따라오는 애무와 속상해하는 말투. 한쪽 어깨가 발가벗기워진 채 남희신의 입술과 손가락이 와닿는 느낌은 숫제 고문과도 같았다. 그 때마다 금광요는 온 몸이 꽉 죄어오는 듯한 긴장감이 들어 너무 힘들었다.
본래는 싸움이나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그런 일에는 거침이 없었고, 인내심도 대단한 금광요였다. 그는 마치 자신의 몸을 목적을 위한 도구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타인의 부드러운 손길에 대해서는 오히려 약화되고 평정심조차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어이없었다.
남희신의 손만 닿으면 금광요는 심하게 동요하고 무력해지며, 그런 반응을 남희신이 눈치챌까 조마조마했다.
자신이 본래 그런 행위에 약한 사람인지, 아니면 남희신의 손길에 대해서만 그런 건지, 앞으로는 그것을 알아볼 기회도 없었다.
남희신이 성에 찰 만큼 상처를 어루만지고 난 다음 옷을 입혀주자 금광요는 겨우 한숨을 쉬었다.
“형님.”
“응?”
“저는 그럼... 이제부터 계속 운심부지처에 머무르면 되는 겁니까?”
남희신이 실소를 터뜨렸다.
“전혀 이해를 못 했구나.”
“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난릉에 가고 싶어지면 가고, 다시 돌아오고 싶어지면 오면 된다. 이제까지 그래 왔듯이.”
“...예. 알겠습니다.”
금광요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그 동안 남희신은 엄청난 사랑과 관심을 쏟아부었다.
매일 금광요의 눈빛으로부터 손끝 발끝까지의 안부를 다 살피고, 혼약으로 마음을 사로잡고, 도려를 맺었음을 공공연히 알렸다. 그러니 금광요는 당연히 그가 자신을 독점하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묘하게도 가장 알기 쉬운 줄 알았던 남자가 유일하게 예측불가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아요. 너 정말로 금린대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아무튼 너는 아릉을 사랑하지. 그리고 크고 화려한 자리를 만들거나 사람을 만나는 일을 즐기는 것 같거든.”
들어보니 정말 그런 듯도 했다. 사람을 좋아하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금광요는 커다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자기 마음대로 실체화되어가는 과정을 즐겼다.
“그들이 가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금린대에 가서 연회를 열든 청담회를 열든, 그러고 싶다면 하도록 해라. 막을 사람도 없지 않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정말로 과분한 복을 받는 사람 같아서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형님.”
“나만 하겠느냐?”
남희신은 금광요를 뒤에서 끌어안고 매끄러운 뺨에다 자신의 얼굴을 꼭 갖다대었다. 혼약을 맺은 후로 그는 틈만 나면 이런 식으로 꼼짝도 못하게 안은 다음 입술이 닿는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입술에 입맞춤을 했던 건 처음 딱 한 번뿐, 이러다가 남희신이 물러나면 금광요는 안도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오늘은 어떻게 하겠느냐?”
이 말은 어디서 취침에 들겠냐는 뜻이었다. 남희신은 매일 밤 똑같이 물었다. 도려를 맺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금광요는 남희신과 자는 것이 긴장되면서도, 혼자 잠드는 게 더 무서워서 매번 한실을 택하곤 했다.
그렇게 한 침상에서 잠을 잘 때도 남희신은 늘 첫날과 같이 침의를 입은 금광요의 등 뒤에서 팔베개를 하고 안아 주었다. 잠들기 전까지 따뜻하고 가벼운 입맞춤이 계속되고, 다음 날 일어나면 침상을 나가기 전에 또 그렇게 했다.
온종일 그런 식으로 어미닭에게 품어지는 병아리처럼 데워졌다 식었다 하다 보니, 금광요는 심각하게 고민할 틈도 없었다. 그래서 기분 좋게 혼란스러운 가운데 점점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된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침상에 든 후 만족할 만큼 귀애하고 나면 남희신은 고요하게 잠이 든다. 그러면 고소 남씨보다도 잠드는 시각이 늦은 금광요는 비로소 평화로운 상태에서 남희신의 온기를 만끽했다. 그의 숨결, 단단한 가슴, 자신의 몸을 감은 팔을 느끼고 그의 사랑과 관심을 오롯이 느꼈다. 그러면 술에 취한 듯 행복감에 취해서 잠이 들곤 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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