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1656
2023.05.14 23:49
딱히 이어지지 않는 전편:
카피페 외전 화가 나요 플러팅 사랑해 첫사랑? 해리포터 한문단 선물편 마지막으로 들은 말? 이상형이라고요? 연인이 카드를 준다면 수인이라면? 주량자랑  연애프로 퍽메리킬게임 주차대응 커플별로 너 나 좋아하잖아 듣는다면?
한문단 프리츠와 예일 

이 시리즈와 연결되는 것은 프리츠와 예일 < 이거고 위는 딱히 상관없음 정말 안이어짐 
그냥 커플별로 장문체가 bgsd...는 욕망에 나온 개망작 개뻘글임 
(당연히) R은 루스터 H는 행맨.

*

재생다운로드

R
 

봐라, 난 눈 감고도 불스아이를 맞출 수 있다니까.
그래, 그래. 너 잘났다.
그럼, 이 몸은 미해군 최고의 비밀병기인걸.


부드러운 금발이 정신을 쏙 빼놓을 것마냥 제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잡힐 듯, 혹은 영원히 잡히지 않을 것처럼. 마치 그 어린 시절 아버지가 속삭이던 머나먼 이국의 동화에 등장하는 금빛 요정 같았다. 그게 뭘 가져다준댔더라? 돈, 명예, 혹은- 영원한 사랑? 나이를 먹을대로 먹은 지금에서야 그런 전설 같은 것은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나 신기하고 또 갖고 싶었었다. 아무래도 어린 마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금빛 요정을 얻었는데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걸. 매력적인 금발을 가진 어머니를 요정이라고 부르던 아버지였지만 운명은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누군들 그러하지 않으리- 운명의 수레바퀴 앞에서는 그 무엇이든지 겸허해야 하는 법이었다. 자신조차도, 당연하게.

봐봐, 하비. 네가 눈 가려봐.
뭐?
가려도 나는 불스아이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
너 진짜 쓸데없는 것에 승부욕 있다니까.

 
제 앞에서 일렁이는 금발은 그날의 금발을 떠올리게 했고, 그 옆의 남자는 그 날의 눈물을 떠올리게 했다. 그 시절에 비해 훨씬 자라난 몸과 굳건해진 성격은 당연지사 다를 수밖에 없는데도, 제 눈앞에서 살랑이는 금빛 요정은 여전히 그날을 생각하게 만드니까.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을 탐하기만 했던 그날들이, 운명 앞에서 결국에는 무릎꿇고 말았어야 했던 그날들이. 네가 흘린 눈물 중에 내가 만들어낸 것도 있을까? 어느 날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또 어느 날은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매일을 오락가락하며 고민했다. 

자신은 상실이 익숙한 남자였다. 인생사가 타고나기를 그랬다. 어려서는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조금 커서는 목숨을 맡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대부에게 거절당했으며, 이후에는 동료를 잃었다.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대부가 왜 제가 이 직업을 가지는 것을 반대했는지를 알 법도 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은 것은 이미 중위를 달고 난 이후였다. 좋은 대학을 나와 수병까지 했었으니 꽤 늦은 이해였다. 파일럿을 하고 싶어서 4수까지 해놓고 대부와 의절까지 해놓고서. 이제 와서 다른 직업을 고를까 고민한다니, 누가 듣던 간에 웃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으리라. 파병지는 더욱 극한이었다- 정밀타격을 전공했기 때문에 제가 떨어트리는 포탄은 대부분이 작전 지시대로였음에도 민간인 사상자는 반드시 따라왔다. 내가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었는데, 과연 그랬을까? 매너리즘이 자꾸만 자신을 잡아먹었다. 바닥부터, 머리까지.

중위 제이크 세러신입니다.


새로운 인물이 제 인생에 나타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파병지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도 누구보다도 빛나는 밀빛 금발, 어려서 어머니의 고향에서 주인 몰래 따먹던 청포도 같은 초록빛 눈, 앳된 인상과 호리호리한 체격. 그 인물의 모든 것은 제 구미를 충족시켰다- 그래서 조금 더 다정하게 굴었다, 남들보다도 더. 파병이 처음인지 쉽게 무너지는 정신을 붙잡아 세워주고 조금 더 제 체온을 나눠주었다. 그 사람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멍청하게도, 그게 너를 더 부숴버리는 일인지도 모르고.
 
*

H

결혼에 대한 환상? 그런 것은 어린 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특히 저처럼 꽤 괜찮은 집에서 태어나서, 부모님이 서로만을 쳐다보는 화목한 가정 사이에서 살아간다면 그런 환상 같은 것이 없을 수가 없었다. 형들도 그렇게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고, 제가 가진 대부분의 환상은 가족을 통해 입증되었다. 성장도, 직업도, 결혼도, 하다못해 아이나 노년까지도. 세러신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져온 삶이 익숙했으며 또 당연했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교육도 안전도 아니라, 환상이 늘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깨달음이었어여 했다.

과연, 너 또한 세러신의 아들이구나.

제 인생은 크게 역경이랄 것이 없었다- 잘난 집안의 이름, 잘난 외모, 하다못해 잘난 능력까지도. 모든 것은 다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자신 또한 부여받은 모든 기대감에 충족할 만한 인재였다.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진로를 선택했고 그에 걸맞는 명성도 얻었다. 그게, 제 인생이었다. 중위 때 머나먼 전쟁터로 파병받기 전까지는.

이쪽은 오늘의 작전을 브리핑할 브래들리 브래드쇼 중위입니다. 이쪽은 이번에 파병 나온 비질란테 부대원들이고.
반갑습니다, 중위 제이크 세러신입니다.


인상적인 콧수염을 단 중위가 모두를 앞두고 브리핑을 했다. 적지 한가운데에 포탄을 떨어트리겠다는, 꽤 상식적이면서도 상식적이지 못한 이야기였다. 누군가가 물었다- 그러면 민간인은요. 이미 적군들이 한가운데로 침입한지 오래되어 대부분의 민간인은 다 대피했다는 대답만이 돌아왔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꽤 당연하고 의무적인 질문이었다. 그러면, 전부 괜찮은 걸까?

파병생활은 각오한 것보다도 훨씬 심각했다. 폭격을 맞아 추락해버린 제 동료, 군번줄조차도 회수하지 못한 다른 부대원, 바닥에 쓰러진 민간인들. 정확한 위치에 포탄을 떨궜음에도 반드시 민간인 사상자가 따라왔다. 다들 그게 어쩔수가 없는 희생이라고만 말했다. 구역질 나는 환상이었다, 내가 그린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같이 텐트를 쓰던 제 동료가 죽은 날 캠프의 한쪽 구석에서 토악질을 했다. 자꾸만 신물이 올라와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자꾸만, 자꾸만- 자신이 어떻게든 틀어막았던 그의 상처가, 떠나기 직전의 그 눈이 생각나서.

이봐. 괜찮아?

   
누군가가 제 등을 두어번 두드려댔다. 물 좀 줘? 꽤 익숙한 콧수염이 제 앞으로 들이밀어지고, 남자가 제 쪽으로 물을 들이밀었다. 파병은 처음이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가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괜찮아. 금방 익숙해져. 금방 익숙해진다니, 무엇이? 남자는 제 의문스러운 눈길에도 별 대답 없이 차갑게 식은 제 손을 여러번 문질러주었다. 혼자 잘 수 있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러신 중위지? 내 텐트는 네 텐트 바로 옆이야. 브래드쇼 중위고.
....
나도 동료가 본국으로 떠나서 지금은 혼자 쓰니까, 필요하면 찾아와.


대답 없이 고개를 두어번 끄덕여주자 남자가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쳤다. 들어가도 될까요? 별도 뜨지 않던 새까만 어둠 속, 그의 텐트를 두드린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이었다. 눈을 감아도 동료가 앞에 있었고, 눈을 떠도 동료가 앞에 있었다. 그럼 눈을 떠도 동료가 옆에 있으면 되는 게 아닐까? 동료라도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제정신이라면 생각할 수 없는 대답이었지만 - 누군들 그 참혹한 잔상 앞에서는 제정신일 수 없었다. 문을 열어준 남자 - 브래들리 브래드쇼 중위- 가 자신을 텐트 안으로 들였다. 침대가 하나뿐이라 같이 누워야 하는데 괜찮아? 고개를 끄덕여주자 남자가 조금 옆으로 비켜주었다. 꿈에 차마 잊을 수 없는 그 모습이 다시 나타나서 헉헉거리며 우는 자신을 끌어안은 남자 덕분에 눈을 뜨면 제 앞에 동료가 있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래서 창피한줄도 모르고 반쯤 울면서 남자의 너른 품에 몸을 묻었다. 남자는 별말 없이 자신을 쎄게 끌어안아주었다. 그게, 그와 자신의 첫만남이었다. 

*



맙소사, 저거 비질란테 걔지?
그런 것 같은데.
비행을 누가 저딴 식으로 하는 거야.


다 좋아! 다만 죽을거면 혼자 죽으라고. 리더로 비행했던 제 상관이 아이에게 크게 윽박지르듯이 화를 냈다. 옆에서 같이 있던 비질란테의 상관이 그를 말리는 것 같았다, 일단은. 씩씩거리는 호흡을 내뱉으며 사라지는 제 중대장을 쳐다보며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습기를 머금은 초록빛 눈이 억울한 듯 바닥을 향했다. 제 상관도 일단 화를 내긴 했어도- 분명히 위험한 비행이었으나 올바른 판단이었음을 피차 모르지는 않았으리라. 도그파이트를 코앞에 둔 상황, 피해를 최소화하고 작전목표를 이루려면 분명히 가능한 방향이었던 셈이었다. 아이의 비행은 위험했으나 그만큼 아름다웠다. 그래서 시선을 온통 빼앗겼다, 그게 너를 죽이는 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까. 

비행 잘 하던데.
...놀리는 거예요?


방금 당신 상관한테 혼났는데. 그 날 평소와 하등 다를 것 없이 텐트를 같이 쓰는 와중이었다. 극한의 상황이 얼추 익숙해졌는지 이전보다는 숨소리가 일정하고 안정적이었음이 옆사람에게까지 느껴졌다. 남들보다 평균 체온이 꽤 낯은 편인지 껴안은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아이가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것은, 나와 같이 두근거리는 심장뿐.

아니. 너 진짜 비행 잘한다고 생각했어. 나는 너처럼 못 하거든.
....고마워요.
그래도 웬만하면 위험하게는 하지 마, 잘못하면 동료들 다 죽을지도 몰라.


아이는 대답 없이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리고 입술에 맞닿는, 제 체온보다 훨씬 차가운 온도. 맞닿은 눈, 같이 뛰는 심장. 네가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을까, 아니면 나만의 착각일까?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되물었다. 나랑 자고 싶어? 마주한 청포도빛 눈이 감겼다 다시 떠오르며 어둠 속에서도 그 빛을 자랑했다. 그 주인은 별 말 없이 다시 고개를 올려 제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렇게 이루어진 첫날 밤, 금빛 머리가 제 앞에서 손짓 한 번에 잡힐 듯 아지렁이를 피어내며 흔들렸다. 길을 잃어도 이것만 쫓아오면 된다는 것처럼. 

그래,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거잖아. 훨씬 낫네.

그는 파병에 점차 익숙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비행은 훨씬 안정적으로 변했고- 그럼에도 밤을 같이 보내는 횟수가 늘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저를 향해 몇 번 웃어주었을 때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느꼈다. 그의 예술적인 비행을 보고 있다 보면- 자신이 왜 이 길을 선택했는지 알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곡예 비행을 하던 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 기분. 아버지의 길을 걷고 싶었던 어렸을 적의 자신. 비록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매일을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지만, 그가 그리는 궤적은 제 과거를 몇번이고 헤집고 끌어내었다. 모든 것이 못내 기꺼웠다. 군대 내 파병지에서 우리는 따로 배정받은 막사를 공유하며 많은 것을 나누었다- 미국에서의 생활, 원래 하던 일, 좋아하는 것- 그리고 가끔은 게임도 이루어졌다. 이 곳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큰 도구가 필요없는 것들, 즉 오목이나 행맨과 같은 고전적인 게임들뿐이었지만. 자신은 단 한번도 행맨 게임에서 그를 이긴 적이 없었다- 잘 배운 도련님은 진짜 다른가보다고, 치사하게 고어를 내네. 하면 그는 그저 웃는 얼굴로 제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곤 했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우리는 본국으로 송환이야, 중위.
이렇게 갑자기요?
기쁘지 않아? 이 미친 지옥을 떠나는 거라고.


그렇게 묻는다면야 당연히 기쁘지, 다만 제 요정은? 그의 부대는 소규모 파병을 받아 특별 미션을 나가 있었다. 돌아오려면 4일이나 남았는데, 와중에 저희 팀의 본국 소환령이 떨어진 거였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발을 떼려나보지, 제 상관이 입에 문 담배를 길게 뱉었다. 메모 하나만 남기겠습니다. 그러든지. 서둘러야 했다. 재빨리 제 천막에 들어가 종이 한 장을 찣어 남겼다. 먼저 복귀한다는 내용과 자신의 미국 내 전화번호, 그리고 꼭 연락 달라는 말을 적어 막사 내 침대 위에 올려두고, 그 위에 제 군번줄을 올려두었다. 서둘러, 브래드쇼! 천막을 열고 나오자 툭,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는 담배를 밟은 상관이 명령을 내렸다. 짐 싸라고, 중위. 자네는 가면 대위가 되겠네. 미리 진급 축하해. 그리고 그 순간, 눈 앞에 떨어지는 거대한 덩어리와 그것이 내뱉는 엄청난 열기-

포탄이었다.

그 뒤로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

H

이 나라의 연애 방식이라고 한다면, 일단 '내가 네 것이 되겠다'는 확답을 얻기 전까지는 꽤 여럿과 만나며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 것이 순례였다. 다만 개중에 사귀자는 말을 공식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저도 이 관계가 하등 이상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그동안 그래왔으니까.물론 너라고 예외가 될 순 없어, 그런 말을 한다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5일간의 근교 시찰 미션 후 제 앞에 보이는 것은 반쯤 산산조각난 기지였다. 습격이었나봐, 여기서 포탄이 터졌대. 익숙한 부대 마크였으나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기 있던 사람들은요? 다 죽었겠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부대를 지휘하던 소령은 확실하게 유해가 수습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고 했다. 이미 장례식 중일 거라는 말에 절로 목이 탔다. 그럼, 그럼-

브래드쇼 중위는요?
....부상을 당했다고 하는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군. 일단 본국으로 송환됐어.


저한테 남긴 메모 하나 없이 그는 떠나버렸다고 했다. 부상을 당했으니까, 부상을 당했으니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연 - 반이상이 박살난 막사에 그의 군번줄이 홀로 남아 있었다. 그냥 떠나버렸구나. 나 같은 건 별로 의미도 없었던 거야. 어지러운 심장을 부여잡아주던 손도, 너른 호흡을 나눠주던 따듯한 입술도, 제 모든 것을 포용해주던 품도- 남아 있는 것은 그저 추억과 군번줄 뿐이었다. 군번줄은 왜 남겨두었을까, 왜?

세러신! 우리도 본국으로 돌아가자. 

미국에서 반전 정서가 확대되고, 높으신 분들도 이 전투에 더 이상의 효율은 없다는 판단이 섰는지 - 반쯤 버려진 기지를 버리고 송환하라는 명령은 그로부터 3주 뒤에 떨어졌다.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던 차에 잘 됐지, 개죽음은 피하겠구만. 제 상관이 자신의 등을 두어번 두드려주었다. 돌아가면 자네는 대위가 되겠지. 괜찮은 거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걱정하는 말투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미국에 돌아가면 꼭 제 인맥을 통틀어서라도 한 번 연락이라도 해봐야지, 네가 의도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미안해, 제이크. 병원에 있긴 한데- 너를 만나고 싶지 않대.

이건 예상 밖의 결과였다.

*

R

들었어? 세러신 대위가 미국에 돌아왔다는 것 같은데. 네 번호를 묻더라.

피닉스로부터 아이가 국내로 돌아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도, 한 단계 승진한 대위가 되어서. 그럼, 한 번은 만나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알지 못할 기대감이 가슴 속을 메워냈다. 다시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 하지만 스스로도 잘 알았다- 아이는 자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다정한 집, 아름다운 부모, 완벽한 환경. 그곳에 자신이 끼어든다 한들 그 안에서 남는 것은 오로지 흠집뿐이었다-. 제 이름을 달고 있을 흠집. 그리고 이제는 부상을 당한 연인을 책임져야 하는 흠집. 

연락 한 번 해볼래? 알려줘도 되는 거야?
아니. 알려주지 마.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할텐데. 하는 말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회해도 괜찮아, 너만 후회하지 않는다면. 포탄이 스치고 지나간 제 다리는 제대로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라고 했다. 그래도 직통으로 맞아 그대로 숨진 제 상관이나,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은 행보관에 비하면 훨씬 운이 좋았다는 소리를 듣기에 자신은 지나치게 절박했다. 그래서 요청을 거절했다, 내가 제대로 파일럿으로 복귀하지 못한다면 그에게 남는 것은 의병제대를 당한 애인이 있다는 흠집뿐이었다. 이 보수적인 집단에서 그것이 어떻게 작용할지는 애초에 명백했다- 그래서 너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니까. 그리고 동시에 느낀 것이다- 이 직업은 지나치게 위험하구나.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구나. 내가 겪었던 상실을 너에게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축하합니다. 이제 퇴원해도 되겠어요.
...완치가 맞나요?
그럼요, 전투기도 타도 되고요.


천운이었다. 이제 너를 만날 수 있을 위치라고 생각했는데 - 이제는 그가 자신을 원하지 않았다. 이게 맞는 거야, 이게 맞는 거라고 브래드쇼. 그렇게 속삭이고 또 명심했는데도 가슴이 아팠다. 나만 포기하면 됐던 거잖아, 너는 상실이 익숙한 남자잖아. 그래서 장기 파병을 한 번 더 다녀오고, 탑건 스쿨의 부름에도 응했다. 미라클 미션? 개소리하지 말라지. 어차피 이것 또한 개죽음이 딸려올 미션인 것이 뻔했다. 

거기서 제 요정과 삼촌을 만난 것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아이는 꽤 공격적으로 변해 있었다. 이전보다 훨씬 잘 비꼬고, 무척 자존감이 강해 보였다.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그의 모습에- 남들과도 같이 투덜거리면서도 생각했다. 훨씬 군인다워졌네. 그래서 안도했다. 적어도 파병지에서처럼 혼자 괴로워하고 혼자 울지는 않겠지- 너는 이제 내가 필요하지 않겠구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괴로웠다. 자신을 더 미치게 하는 것은 - 제 글씨체로 새긴 콜사인, 우리가 그 무수한 밤을 함께 공유하며 보내던 것- '행맨'. 너는 왜 그것을 새겼을까, 나를 그렇게 미워하면서.

그래? 네가 그렇게 잘났던가. 네 아버지는 어쩌고?
그만 해, 둘 다 그만! 


그가 자신에게 유난히 심하다는 것은 본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 내가 자초한 결과인걸. 자신의 아버지를 들먹인 그날도 차마 손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 미치도록 아이러니했다. 나한테 더 소중한 건 뭘까. 어느새 그는 아버지의 위치를 넘어서고 만 걸까? 이 모든 관계를 자신이 만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고민하다 겨우 밀친 가슴팍이 닿았던 손끝이 고통스럽게도 뜨거웠다.

난 네가 뭘 갖고 싶어하는지 알아.
뭔 개소리야?
...난 어려서부터 걔를 여러 번 만나서 잘 아는데.


걔는 그런 식으론 절대 못 길들일걸. 근신 처분을 받은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페이백이 하드덱에서 술을 산 날이었다. 반대쪽에서 절친한 친우와 함께 앉아있는 걸 보자니 속이 매섭게 부글거렸다. 그리고 옆에 온 검은 머리의 위험한 남자가 속삭였다- 나는 네가 뭘 가지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다고. 행맨보다도 더 사유없는 위험한 비행을 일삼는, 모두가 콜사인의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속삭이는 남자가 제 옆에 걸터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길들여? 사람을? 너 진짜 미친 새끼구나.
푸하하, 나만 그런 것처럼 말하지 마.


너는 아닌 것처럼 고상 떨지 말라고. 제 앞의 가는 몸이 맥주를 다시 들이켰다. 프리츠, 콜사인만큼이나 미쳐버린 이 남자의 손아귀에 잡힌 것은 무엇일까. 모든 것은 그의 관심사 밖인 것처럼 보였음에도 그 남자는 또 무언가를 자꾸만 제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그래서 저답지 않게 무서웠는지도 몰랐다- 이 녀석의 손아귀에 잡혀들어가는 것이 제 것일까봐. 자꾸만 저답지 않게 사달을 냈다. 본능이 위험하다고 경고하는데도. 

걱정하지 마, 나는 밝은 색 머리보다 어두운 색 머리가 취향이거든. 
뭐?
굳이 말하라면 저 친구보다는 네 쪽이 더 취향이란 이야기야.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너도 아니야, 난 너보다 단단하고 심지가 굳은 사람이 좋거든.
... 심지가 굳은 사람?
그건 네가 신경쓸건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냥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야.


나는 그저 동맹을 묻는 거야. 내 손을 잡을래, 말래?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이 미친 남자가 원하는게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자신은 결국에 이 뱀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

H

그가 다시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 놈은 자신이 원할 때만 나를 잡았는데. 그럼에도 자신은 구질구질하게도 그를 잊지 못했다- 콜사인까지 그 놈의 글씨체로 새겼으니까. 조심해야 해, 멀어져야 해. 저 새끼는 너를 그대로 잡아먹고 말 거야, 산 채로, 통째로. 매일을 속삭이고 매일을 다짐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속절없이 빨려들었다- 그는 여전히 다정했고 여전히 매서웠으니까. 항모부터는 방을 같이 써서 더 그랬다. 마치 예전을 생각나게 하니까. 예전처럼 악몽을 꾸면, 아니 꾸는 것처럼 헉헉대는 소리만 들려도 그는 위층 침대에서 내려와 자신을 살폈다. 그리고는 자신이 잠들 수 있도록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마치 예전처럼. 

대거 2, 브래드쇼 대위.

그래서일까? 이 미친 미션에 네가 호명되었을 때도 나는- 나는. 목에 부적처럼 걸고 다니는 그의 군번줄이 목에서 달랑이며 슬픈 소리를 울려댔다. 마치 네 죽음의 장송곡을 부르듯이. 그래서 미션 바로 전날 네가 손을 잡았을 때 모르는 척 그 손을 힘주어 마주잡았다. 평소라면 축 늘어졌을, 예상하지 못했던 힘이 번뜩 들어서자 저보다 훨씬 체온이 높은 손이 움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손을 빼지 않았다. 그저, 더 힘을 주어 겹쳐 잡을 뿐. 그래서 물었다- 나랑 자고 싶어? 그 손에 기꺼이 입맞추면서. 그의 손이 더 아래로 내려오고, 독하고 치명적이게도 뜨거운 재회가 이루어졌다.

...지옥을 보여줘 버려, 죽으면 가만 안 놔둬. 내가 지옥까지 쫓아갈 거야.
그래, 알아.


그가 웃었다. 그리고는 제 귀에 속삭였다- 네 군번줄을 줄래? 내 거는 네가 목에 걸고 있잖아. 자신은 그에게 목에 건 군번줄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의문은 이미 저 기억 너머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게 죽음에서 날 보호해줄 거야. 내가 널 보호했으니 이번엔 네가, 나를 보호해줘.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때처럼 여상했다. 아아, 고통스럽게도. 

대거가 레이더에 잡히는 것 같은데.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중요하지 않았다. 네가 살아 있기만 한다면. 사이클론이 출격 허가 명령을 내리고, 포탄을 단 채로 교관과 루스터 위를 맴돌면서 생각했다. 너를 처음 만나면 뭐라고 말할까. 그러나 곧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 구세주가 말씀드립니다. 

너라면, 무슨 말을 한들 기뻐해줄 거라고- 분명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조용히 빌었다. 내 생각이 맞기를.

거봐, 네 군번줄이 날 보호해줄거라고 했잖아.
....입만 살아서는.


거짓말 아닌데. 덕분에 이렇게 잘 살아 돌아온거 봐. 죽기 직전에 네가 구해줬잖아.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제 앞으로 훌쩍 가까이 다가섰다. 주변의 웅성거리는 무리들은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그리고는 제게 제안했다 -

내 요정님. 나랑, 연애해줄래.
죽다 살아돌아와서 하기 딱 좋은 말이네.

제 앞의 수탉이 처음 보는 얼굴로 밝게 웃었다. 그리고는 더 가까이 다가와 제 귀에 나긋하게 속삭였다 - 그럼, 최고의 날이지. 

*
프리츠에 비해서는 아직까지(?) 제정신인 루스터. 파병지에서 만난 루스터와 행맨의 연애사. 
루스터를 구한 건 행맨일까 프리츠와의 동맹일까..

루스터행맨 프리츠예일
 
[Code: fe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