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이명헌 딸내미 만나는게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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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배경 au임

*이것저것 다 주의









나 좀 봐줘.

 

 

길고 긴 시간 끝에 돌려 받은 어린 날의 간절한 바람. 나 정말 형한테 화나고 섭섭했는데. 콱 안 볼 각오로 여기 온 건데. 그러나 정우성의 해묵은 설움은 명헌이 내민 작은 종이쪽지 하나에 모두 풀려버렸다.

 

우성은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진짜 치사하고! 이기적인 이명헌! 하지만 그 이명헌이 마지막으로 한 번만 사과를 받아달라고, 나 좀 봐달라지 않는가. 그래,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

 

 

 

 

 

쪽지를 받아든 우성은 가만히 주먹을 쥔 채 아무런 말이 없다. 그 모습에 명헌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떨리는 입술을 감추려 이를 꽉 깨물었다. 인생이 명헌을 벼랑 끝까지 내몬 순간. 명헌은 벌거벗은 기분이었다.

 

이명헌을 아끼지만 그를 잘 모르는 홍보팀의 동료들, 그를 떠나간 아내와 그의 곁에 남은 이수현, 끝까지 친해지지 못한 대학의 동기들, 가족이나 다름없지만 결국 그의 꼬인 마음을 풀어주지 못한 친구들, 그리고 정우성. 그들을 만나기 이전, 농구와 문학을 사랑했던 순수한 이명헌이 되어.

 

이제껏 살면서 이토록 간절하게 누군가의 용서를 바랐던 적이 있었나? 떠나간 이와 남은 이,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이명헌의 자아는 겁에 질렸다. 그를 헐뜯는 기자들로 가득한 방에 처들어와 마이크를 쥐고 그간 숨겨왔던 자신을 내보인 그가, 정우성 앞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작아진다.

 

명헌은 뒷짐을 지고 심판을 기다렸다.

 

그는 자신이 외면하고 밀어낸 우성이 그를 심판하길 감히 바란다. 나를 때려도 좋아, 욕해도 좋아.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은 정우성의 무시다. 그래, 무시. 지금껏 이명헌이 우성에게 저지른 짓.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우성에겐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명헌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너무 늦었을까.

 

그 때, 카메라의 셔터음을 뚫고 명헌의 귀에 작은 웃음소리가 와닿았다.

 

하하.

 

놀란 명헌이 눈커풀을 뜨고 우성을 마주보았다. 정우성이 웃고 있다. 밝은 미소를 띄운 채. 마지막으로 그의 웃음을 봤던 게 언제던가. 그제서야 명헌은 그가 흘려보낸 세월의 무게를 깨달았다.

 

우성은 크고 환하게 웃었다. 그가 명헌에게 안긴다. 무게를 싣자 살짝 휘청이는 명헌의 어깨에 우성이 고개를 파묻었다.

 

뒷짐을 지고 있던 명헌은 잠시 당황하다가, 손을 풀고 우성을 마주 안았다. 그의 손길에 우성이 흠칫 놀라더니 서서히 긴장을 푼다. 몸을 늘어트린 그가 명헌의 셔츠에 콧잔등을 문지른다. 명헌은 가만히 우성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자 우성이 입을 열었다. .

 

드디어 써줬네요, 쿠폰.

미안해.

저 정말 오래 기다렸어요.

알아, 미안.

미안하단 말 듣고 싶은거 아닌데.

...그래. 고마워.

 

명헌의 대답에 우성의 등이 크게 울렁였다. 간신히 억눌러 참던 울음이 터진다. 결국 정우성은 이명헌의 셔츠 한쪽을 눈물로 푹 적셨다. 부끄러운지도 않은지 기자 회견실이 떠나가라 엉엉 운다.

 

명헌은 그런 우성을 안고 동그란 머리통을 묵묵히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그는 우성의 귓가에 속삭였다. 남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하게,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우성만을 위한 말들을.

 

웃을 만큼 웃어. 울 만큼 울어. 이제부턴 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돌이켜보면 너는 언제나 스스로 솔직했지.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또 네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여태껏 모질었던 나에게마저 솔직하던 너인데. 형이 네 진솔한 마음의 소중함을 너무 늦게 알아줬구나.

 

명헌의 속삭임에 우성의 울음은 점차 잦아들었다. 그가 코 먹는 소리를 낸다. 훌쩍.

 

 

그 때, 인파 사이에서 누군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정우성!!!

 

 

!!! 이 미친놈아아아!!! 은퇴하면 안! !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아니지! 당장 누가 내 눈에 모래를 처넣어도 은퇴는 결사 반대야!”

 

맥이 탁 풀린 명헌이 우성을 얼러 세웠다. 대만이 기자들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오고 있었다. 명헌은 한숨을 내쉬며 대만을 바라 보았다. 그래, 정대만이 기사를 못봤을 리가 없지. 나처럼 기자 회견실에 처들어오는 또라이가 또 있을까 했더니. 저기 있네. 명헌을 알아본 대만의 눈이 동그래진다.

 

“...어엉? 이명헌? 니가 여기 왜 있냐?”

푸흡.”

 

, 정대만 진짜.

 

명헌은 고개를 돌리고 쿡쿡 웃었다. 대만의 등장이 문제가 아니다. 그의 차림새가 아주 기가 막혔던 탓이다. 대만이 머쓱하게 머리에 둘러맨 수건을 고친다. 수건 뿐이랴. 그는 후드집업에, 그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에, 손목 보호대에, 반바지에, 무릎 아대에, 양말에, 신발까지 전부...

 

이명헌네 회사 로고로 도배를 하고 나타났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인가 싶어, 우성이 명헌의 어깨 너머로 빼꼼히 머리를 내밀었다. 그의 얼굴이 온통 눈물 범벅이다. 발갛게 부어버린 눈을 한 우성이 대만을 보고 피식 웃었다.

 

 

 

 

 

 

 

 

 

 

한국 프로 농구 최후의 날이 될 뻔했던 정우성의 기자회견은 이명헌의 등장으로 반전을 맞이했다. 사진 속 본인이 아니라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우성은 은퇴하겠다는 말을 번복했고, 정말 그가 그대로 가버리는 줄 알고 사방에 전화를 돌리던 프로 농구팀 관계자들의 수명이 십년씩 줄어든 것을 제외하면 기자 회견은 잘 마무리 되었다.

 

그렇게 명헌은 농구팀 관계자들과 우성이 소속된 매니지먼트의 영웅이 되었다하마터면 NBA 출신 자국 선수가 강원도 산골로 잠적해버릴 뻔했는 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회사원 한 명이,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통 들어먹질 않아 골머리를 앓게 만들던 그 정우성의 마음을 돌려놓지 않았나! 그러니 농구계 입장에서 이명헌이라는 사람의 성별이며 성향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물론 명헌이 각오한 대로, 그의 삶은 여러 방면으로 뒤집혔다. 하필 사원증이 기사 사진에 같이 나와버리는 바람에, 명헌은 그 날을 기점으로 거의 공인이 되었다. 지금껏 산왕공고 시절의 경기 클립만 돌던 게 기적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이명헌의 이름으로 생겨난 나무위키 항목에는 그의 대학 리그 시절 영상들의 링크가 걸렸다. 대체 어떻게 발굴한 건지 비공개로 진행된 연습 경기들까지 전부.

 

그런데 그 이명헌이라는 전 농구선수가, 지금은 스포츠 용품 회사의 홍보팀이란다. 기자 회견이 전파를 타고 난 후, 명헌의 동료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것 역시 명헌의 성향때문은 아니었고...

 

- ! 어쩐지! 이대리님 체육대회 때마다 농구 졸라 잘하더라!

 

뭐 이런 이유였다.

 

실제로 체육대회 때마다 이명헌은 취미 체육을 즐기는 회사원들을 압살하는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명헌이 무서운 눈으로 코트를 종횡무진할 때마다 동료들은 억울하다는 듯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대리님. 프로죠? 농구 선수는 맞지만 프로까진 안 갔으니 엄밀히 말하면 틀린 문장이라, 그런 질문이 들어오면 명헌은 너스레를 떨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렇게 명헌이 체육대회에서 타 온 한우가 한두 근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받은 한우는 고이 구워 이수현의 입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명헌은 본인이 치사하게 굴고 있다는 자각은 했다. 그래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후, 명헌은 나무위키의 이명헌/선수 경력 항목이 띄워진 화면을 당사자의 면전에 들이밀며 황당해하는 팀원들에게 고기를 돌려 입을 막았다.

 

약간의 사기 행각이 밝혀진 걸 제외하면, 사내에서 명헌의 입지는 의외로 더 탄탄해졌다. 명헌의 회사는 정우성이라는 스타 플레이어의 독점 계약을 손쉽게 따냈다. 거기다 바로 그 이명헌이 정우성이 가지고 있던 나쁜 이미지를 제 한몸 언론에 바쳐 뒤바꾸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정우성은 한순간에 세기의 사랑꾼으로 돌변했다. 사실 명헌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우성이 자신을 사랑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미국에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자고 다녔다는 건 부정할 수 없으니. 그런데 적어도 우성이는 한번 다녀오진 않았잖아. 그럼 이혼남인 나랑 쌤쌤인거 아닌가?

 

한 가지 더. 우성의 광고가 릴리즈 되기 전, 명헌의 회사 매출은 갑작스러운 상승세를 기록했다. ? 이건 정대만 덕분이었다. 대만과 대학 시절 같은 방을 쓰며 별 꼴을 다 보고 지낸 명헌은 몰랐지만 정대만은 실력에 더해 상당한 외모로 유명세를 끄는 선수였다.

 

다소 과하긴 했지만 기자 회견장에 입고 나온 셋업의 구성이 나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그가 머리에 두르고 나온 수건이 큰 화제가 되었다. 그 수건이 얼마나 불티나게 팔렸냐면, 온 동네 원단 가게들 월 매출의 3할은 다 정대만한테 나왔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렇게 명헌은 회사와 언론 쌍방에 존프레스를 당하는 와중에 수현까지 캐어하며 쎄빠지게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우성 또한 바쁘긴 했지만, 지금 그는 어느 때보다도 행복에 젖어 있었다.

 

매니저는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그를 떫은 표정으로 지켜보다가도, 우성이 아 매니저 형 잘못했어요. 내가 그동안 형한테 너무했다! 라며 붙임성 좋게 달라붙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모른척 져 주었다. 진짜 너를 어쩜 좋냐, 정우성.

 

 

 

 

 

 

 

그리고 농구 교실의 마지막 날.

 

우성은 그 새 정이 들었는지 우는 얼굴로 자신을 배웅하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안아주었다. 감독님이 앞으로 종종 놀러올게. 감독님 보고 싶으면 수현이한테 연락해. 왜 이수현이냐고? 흐흐. 그럴 일이 있다. 어허. 방금 감독님 웃음소리 느끼하다고 한 사람 나와. ? 감독님 수현이 아빠랑 다시 사귀냐고?

 

한참 질문 타임을 주고 받던 중 한 아이가 던진 말에 우성은 수현의 눈치를 살폈다.

 

“...”

 

그러나 수현은 평소와 같은 평온한 낯으로 우성을 마주볼 뿐이다. 목덜미를 긁적이던 우성이 말했다.

 

... 그러고 싶어.”

 

그 말에 수현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지만 때마침 농구교실의 문을 열고, 학부모들이 들어왔다. 그 바람에 우성은 수현의 얼굴을 확인할 틈도 없이, 화제의 농구 선수에게 싸인을 받으려는 학부모들을 상대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들을 귀가시키고 난 후. 결국 우성은 또 수현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수현아, 아버지 언제 오시냐.”

우리 아빠 보고싶어요?”

 

. 단도직입.

 

그 말에 우성은 헛기침을 하다가, 올라려는 입꼬리를 티나게 끌어내렸다가, 맘대로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등 뒤로 감췄다.

 

.”
 

좋을 때다...”

뭐라고?”

아니예요.”

 

아니, 너 그런 말 어디서 배웠냐? 우성의 추궁에 잠시 딴청을 피우던 수현이 우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성은 혹시 저 손 안에 또다른 쿠폰이 담겨 있을까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수현은 맨손이었다. 우성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중을 물었다.

 

?”

아빠 늦어요.”

? 오늘 우성이 집들이하는 날이라고 그렇게 말했는 데. 그래도 아직 몇시간 남았으니까 그 전까진 오겠지?”

우성이라니...”

 

. 난데없는 삼인칭에 수현이 진저리를 쳤다. 아무튼 아빠가 감독님이랑 우리 집가서 기다리래요. 그 말에 우성은 눈썹을 올렸다. 진짜?. 정말로? ...믿기 싫으면 믿지 마시고요. 수현의 말에 우성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이. 믿기 싫은게 아니라 감독님이, 감독님이 그 말 들으니까 좋아서. 좋아서 계속 물어본거야. 가자. 그는 수현이 내민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수현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 이번에는 우성의 매니저가 운전대를 잡았다. 그런데 넓은 뒷자리를 우성이 혼자 차지하고 앉아있다. 수현은 어디있냐고?

 

“...수현아. 뭐가 달그락거리는데.”

글로브박스요.”

, 잠시만, 열지 말아봐.”

.”

 

이게 뭐죠.

 

조수석에 앉아 글로브 박스를 뒤적거리던 수현이 반딱거리는 네모난 물체을 들어올렸다. 뒷자리 앉아있던 우성이 튕기듯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 그거 이리내!

 

“그게 뭔데요?”

, . 풍선껌.”

다행히 우성의 둘러대기에 수현은 대충 납득했다. 그러나 같은 변명이 매니저에게는 통할 리가 없었고, 우성의 매니저는 택도 없다는 듯 헛기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정우성! 그 새를 못 참고! 바른 대로 고해라. 너 귀국하고 나서도 했냐?”

! 애 앞에서 뭐라는거야 진짜! 안 했거든요! 자숙하라매! 나 못 믿어요?”

. 못 믿어. 그럼 대체 그... 풍선껌이 여기 왜 들어가 있는데. 이거 네 차도 아니잖아.”

만일을 위한 대비인거죠. Sudden accident.”

“...어휴.”

 

두 어른이 설전을 벌이거나 말거나, 글로브 박스에 들어있던 서류들을 꺼내 훑어보고 있던 수현이 물었다.

 

감독님 껌 못 먹어요?”

. 감독님이 미국에 있을 때 껌을 너무 많이 씹어서, 회사에서 더 이상 씹질 말라고 금지령을 내렸어.”

아쉽겠다.”

 

아니, 괜찮아. 이젠 너희 아빠가 있잖아.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들이민 우성이 웃음을 터트리자, 짜증이 난 매니저가 팔꿈치로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진짜, 아오. 정우성. 개소리 작작 좀. 한참 빙글거리며 웃던 우성이 매니저에게 말했다.

 

, 근데.”

 

매니저 형. 수현이네 집으로 바로 가지 말고, 저희 아파트에 내려 주실래요? 챙겨갈 게 있어서요. 몸을 시트에 깊숙히 기대고 뒷좌석 창문을 연 우성은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오늘도 봐줘서 고맙고
별 일이 없는 한
(내가 분량 조절에 또 실패하지 않는 한...)
다음편이 막편임




우성명헌
태섭대만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