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이명헌 딸내미 만나는게 보고싶다.





 

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또 대충 어울리는 노래 찾아옴
들으면서 봐도 좋고 아니어도 좋고






*한국배경 au임

*이것저것 다 주의















 

나 왔어뿅.”

 

명헌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한 대로 부엌에 불이 켜져있다. 왜 거기 앉아있냐뿅. 명헌은 의자에 가방을 걸어놓았다. 식탁에 앉아 명헌을 기다리던 수현으로부터 시니컬한 대꾸가 흘러 나온다.

 

아빠 이제 뿅 안쓰잖아.”

가끔 쓰거든뿅.”

알겠어.”

 

탁상 시계는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 수현이 잠에 드는 시간은 9. 수현으로 치자면 지금은 새벽인 셈이다. 그런데 밤이 다 되도록 타의적 야근을 하고 돌아온 명헌에게, 수현은 졸린 티를 하나도 내지 않았다.

 

눈이 충혈되어 벌게진 주제에 천연덕스럽게 물잔을 내민다. 그게 아빠의 귀가를 반기는 수현 나름의 방식인 걸 아는 명헌은 물잔을 받았다. 벌컥벌컥, 타는 목을 축이는 그에게 수현이 오늘과 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어제는 현철 삼촌이 재워주고 갔어. 그렇다. 명헌은 결국 어제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어젠 책 못 읽었겠네....”

그지.”

 

방으로 쏙 들어가 순식간에 헐렁한 티셔츠로 갈아입고 나온 명헌이 말했다. 양치하고 와라뿅. 책 읽고 자러 가자뿅. 자는 시간을 미루는 한이 있어도 독서타임은 꼭 지켜야했다. 이건 수현이 글자란 걸 배운 이후로 한 번도 깨진 적 없는 둘만의 루틴이었다... 어제 처음으로 건너뛰긴 했지만.

 

서재로 들어간 명헌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오늘은 뭘 읽을까 고민하는 동안, 양치를 마친 수현이 다가왔다. 그가 명헌과 똑같은 자세로 허리에 손을 올린다. 각자의 눈높이에서 둘은 책을 한 권씩 뽑아들었다. 그리고 거실로 나와 쇼파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 사이에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나지막하게 울렸다. 명헌은 수현에게 책을 읽어주지 않는다. 그저 함께 독서할 뿐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명헌은 독서에 몰두하기 힘들었다. 그는 책을 읽는 척 수현의 머리통을 내려다 보았다. 명헌은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그만 두었다. 이게 평범한 부녀의 거리감은 아니지. 그렇다면 친구일까? 명헌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것보단 가까운데... 한참 생각을 하다 그나마 적당한 답안을 찾아낸 명헌은 작게 웃었다. 딸한테 동지애를 느껴도 되는건가.

 

30분이 지나고, 수현은 칼같이 책을 덮었다. 타박타박 물 한잔을 들고 잘 준비를 하는 수현을 두고, 명헌은 수현의 책가방을 들어올렸다. 내일은 수현이 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하는 날이다. 퇴근하는 길에 확인한 알림장에는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이 준비물로 적혀 있었다. 명헌의 긴 손가락이 책가방을 뒤진다. 크레파스, 있고. 스케치 북, 있고.

 

알아서 잘 챙겼네?”

아빠.”

.”

뿅 안붙였어.”

“...”

그러게, 안 쓰던 말버릇을 붙이려니까 헷갈리지.”

“...그래. 너 잘났다뿅.”

그럼 아빠 닮아서 잘났지.”

 

아무튼 한마디도 안 져.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명헌은 마저 가방을 들여다보았다. 수현의 가방 속에는 소설도 몇 권 들어 있었다. 명헌은 가방의 밑바닥을 굴러다니는 고전 문학책을 가지런히 정리해주다가 한 권이 비는 걸 알아챘다.

 

그거 어딨냐뿅? 광염소나타.”

 

아 그거. . 왠일로 바로 대답하지 않고 몇초간 말을 고르던 수현이 폭탄을 던졌다.

 

건너편 아파트에.”

 

?

 

명헌은 눈을 끔벅였다. 뭔 소리야. 명헌이 추궁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수현을 바라보았지만, 수현은 휘파람을 불며 침대로 쏙 들어가버렸다. 명헌은 문간에 기대 손을 흔들었다. 잘자, . 내일 봐. 아침으로 계란 후라이해달라고? 알지, 케챱 많이. 이제 진짜 자. 늦었다뿅.

 

“....”

 

명헌은 방 문을 닫고 나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 그거 땡기네. 명헌은 일부러 천천히 물을 마셨다. 애써 딴 짓을 하며 참아보려 했으나 결국 내면의 속삭임에 패배한 그는 식탁에 걸어둔 서류 가방을 뒤적였다. 네모난 종이곽이 하나 잡혔다. 담배다. 명헌은 회사원이 된 이후 담배를 배웠다.

 

평소에는 한달에 한 개피나 펼까 말까 하는데, 오늘은 당장 담배가 간절했다. 라이터와 담뱃갑을 들고 도어락의 열림 버튼을 누르려던 명헌은 눈을 콱 감았다. 또 시작이다. 어두운 복도를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 나갔다가 기자들한테 걸리면 어떡하지? 집 앞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하지? 한참 망설이던 명헌은 결국 베란다로 나갔다.

 

밤 늦은 시간이라 다행인가. 그는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사방을 훑어보았다. 혹시 모르잖아, 옆 집 사람이 베란다에 나와 있을 수도. 죄송합니다. 이웃 여러분. 속으로 백번 사죄한 그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손으로 바람을 가리고 라이터를 켰다. 빨간 불꽃이 일렁인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곧 하얀 담배 끝에 불이 옮겨붙었다. - 매캐한 연기가 폐를 가득 채운다.

 

명헌은 눈을 감고 가슴을 꽉 채우는 니코틴을 만끽했다. 머리가 맑아진다. 아니, 텅 비워진다. 그는 연기를 잇가로 뱉어내자마자 성급하게 다시 담배를 물었다. 담배 끝의 빨간 불빛이 커졌다, 작아졌다한다.

 

단풍나무 아파트의 한 가지 장점이라고 한다면, 주택가의 가로등이 아파트를 비껴간다는 것이다. 밤이 되면 단풍나무 아파트 건물은 어둠 속으로 숨었다. 그러니 저 화단 어딘가에서 기자들이 카메라를 든다 해도 멀쩡한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하리라. 검은 배경에, 담뱃불만 한 점 낙서처럼 찍히겠지.

 

...건너편 아파트라. 명헌은 중얼거렸다.

 

며칠 전 새벽. 명헌은 잠결에 누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뭐지... 싶어서 베란다와 통하는 안방 창문을 열었는데, 창턱 밑에 동그란 머리통이 있었다. 놀라서 잠이 확 깨버린 명헌이 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수현의 머리카락을 톡 건드렸다. . 뭐해. 명헌과 마찬가지로 수현도 자다 나온건지 뒤통수 한쪽이 눌려 있다. 거기다 급하게 베란다로 튀어나오느라 맨발이다. 깼어. 그런데 그 짧은 대화 후로 귀신같이 주변이 잠잠해져서, 둘은 우리가 잘못 들었나...하면서 다시 자러갔다.

 

그런데 영상이 뜬 것이다. 하도 인터넷이 난리인지라 명헌도 지나가다 문제의 라방 클립을 봐버렸다. ...정우성? 그런데 영상 속의 집이 건너편 아파트였다. 수현과 살 곳을 구하러 다니면서 봤던 곳이라 명헌으로선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안에 가구라도 있었으면 그나마 조금 어려울 뻔 했는데 말이지. 명헌은 쓰게 웃었다.

 

계속해서 혈관 속에 니코틴을 우겨넣던 명헌은 반대편 아파트를 쳐다보았다. 정우성, 너 정도면 에이전시에서 번듯한 펜트하우스를 대신 구해다 줬을텐데. 아니, 그래. 사준 것 같더라. 뉴스에서도 펜트하우스 얘기가 계속 나오는걸 보면. 근데 여기 있단 말이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

 

건너편 아파트의 발코니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한 명헌은 얼어붙었다. 당황한 명헌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그 사이로 스며나온 연기가 아스라한 밤 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저기, 정우성이 있다. 가로등 불빛이 우성의 얼굴을 비춘다. 명헌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려 담뱃불을 감췄다. 어둠 속으로 노란 불티가 떨어진다.

 

발코니에 선 우성이 명헌의 집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명헌의 손에 들린 담배는 눈치없이 계속 타들어갔다. 눈썹을 찌뿌리던 명헌이 숨을 삼켰다. 우성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미 들켰구나. 치부를 내보인 기분이다. 희미한 수치심이 명헌의 손 끝에서 번져나갔다. 명헌은 이 감정의 원인을 안다. 담배, 라는 것은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농구를 하지 않는 이명헌의 상징.

 

대체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던 것일까.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 발코니로 나왔을 때? 그것도 아니면 설마 퇴근길부터? 이렇게나 우리 집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라니. 혹시 일부러 저길 고른 건가. 펜트하우스를 놔두고 평범한 아파트를 고른 이유가 설마...

 

그러나 모든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헌은 느리게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우성과 눈을 맞춘 그는 담배 연기를 깊게 흡입했다. 불씨가 더 크게 타오르도록.

 

 

 

 

 

이명헌이 산왕공업고등학교 2학년이 된 해, 연속해서 전국 우승을 쟁취한 산왕은 안정적인 농구 강호의 궤도에 올랐다. 그리고 모두들 주전으로 발탁된 이명헌이 후년 주장 자리를 물려받아 산왕공고의 아성을 이어가리라 예상했다. 왕도를 걷는 제왕, 그것이 산왕공고였을 터인데.

 

하필 같은 시기,

명헌의 내면은 격변을 겪고 있었다.

 

 

 
 

 

명헌의 취미는 자아성찰이다.

 

나는 왜 이렇게 생각했는가. 나는 왜 이렇게 느꼈는가. 그래서 나는 왜 이렇게 행동했는가. 그는 습관적으로 스스로의 행동과 생각과 감정에 대해 고찰했다. 간단한 일은 아니다. 이명헌은 남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자기에 대한 실마리를 주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극한의 자아성찰을 한번 거치고 나면 생각과 감정이 하나로 고요하게 합치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명헌은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라는 개념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이명헌을 파악하고 있는 명헌에게 남의 속을 읽는 건 식은 죽먹기였다. 나를 해석하고, 남을 간파하는 사람. 그것이 이명헌이라는 사람, 그것이 산왕공고의 포인트가드. 포인트 가드의 주 업무는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경기라는 계는 선수라는 사람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이명헌의 적성에는 포인트가드가 제격이었다. 그런데 세상 일이라는 게 항상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는 건 아니다 보니 명헌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찾아온 첫사랑이었다. 남자. 같은 농구부. 그리고 하필이면 곧 떠날 3학년.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나오는 문제였다. 내가, 남자를, 좋아해? 남자를, 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좋아해, 쪽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좋아하는 건지도 몰랐다. 특별한 계기도 없고 딱히 이유도 없었다.

 

그 불확정성이 싫었던 명헌은 어느 날 선배를 좋아하게 된 계기에 대해 스스로를 독해하려 했으나,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너무 울렁거려서 포기했다.

 

포기라니요! 이명헌이, 포기라니요. 그런데 그냥, 그랬다.

 

개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봄이 왔다. 그리고 그 때까지 개미를 관찰하며 자아를 성찰하던 명헌은 관찰 대상을 바꾸었다. 개미에서 번데기로. 지나가다 번데기를 발견하는 날이면, 명헌은 뒷짐을 지고 바람에 작게 흔들리는 번데기를 구경했다.

 

번데기란 애벌레가 성충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과도기다. 그거 아는가. 번데기 시기를 거치는 곤충의 성장 방법을 완전변태라고 부른다는거. 스스로 고치집을 지은 애벌레들은 자신을 녹인다. 흐물흐물. 그럼 더듬이부터 꼬리까지 에벌레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 한데 뒤섞인다. 그런 곤죽같은 상태에서 나비로 재조립된다.

 

, 혹시. 나도 지금 번데기 상태인가. 문득 명헌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손목을 벅벅 긁었다. 생전 자신을 다른 물체에 비유해본 적 없는 명헌은 묘하게 불편함을 느꼈다. 이명헌은 오직 이명헌으로서 존재해야 하는데.

 

그런 미적지근한 상태로 명헌은 인터하이 준비에 돌입했다. 경기력은 여전히 최상이지만 정신을 빼놓고 다니는 듯한 명헌에게 농구부 친구들이 아는 척을 해왔다. . 니 요즘 무슨 고민있냐? 그러나 명헌은 도움을 거절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 명헌의 부모는 애초에 동성애라는 개념이 머리에 없는 사람들이었고 같은 농구부원들에게 이런 문제를 함부로 상담할 수도 없었다. 거기다 상담을 받아서 공감과 위로를 얻는 것과 명헌이 스스로 본인의 감정 정리를 하는 건 별개였다. 따라서 별 도움이 안 될 게 뻔했다.

 

차라리 그 3학년 선배라는 작자가 편협한 인간이어서 명헌을 밀어냈다면 몰라. 명헌의 마음을 어떻게 눈치챈건지, 어느 순간부터 3학년 선배는 명헌과의 거리감을 좁혔다. 그게 또 명헌은 자존심이 상했다. 자존심이 상했다고? 사실 이게 또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포인트가드 이명헌은 속내를 들켜 기분이 나빴으나 후배 이명헌은 선배가 마음을 알아주니 좋았다...내심. 그리고 선배도 명헌을 은근하게 대했다. 지금까지 명헌은 외부에서 그 어떤 풍파가 몰아쳐도 밀리지도 당겨지지도 않은 채 곧게 서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좋아한다는 감정의 주체가 자신이었기에, 명헌의 마음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안 그래도 복잡해 죽겠는데 새로 들어온 놈이 눈치없이 치댄다. 심지어 얘는 얼마 전까지 여자친구도 사귀었다. 정우성. 자꾸 농구를 해달래. 좋아해요, 선배. 라고 말만 안했지 다 보였다. 그리고 자꾸 쿠폰을 준다. 정우성이랑 농구하기, 정우성이랑 청소하기, 정우성이랑 급식먹기. 이걸 어디다 쓰냐고.

 

근데 명헌은 버리면 그만일 종이 쪼가리를 버리지 않았다. 되려 책 사이에 끼워놓았다. 책 한권에 책갈피 한 개씩. 명헌의 방에는 책갈피를 필요로 하는 책이 아주 많았다. 설마 이걸 다 채우겠어. 아마 조금 저러다 말겠지. 몰두에 서툰 놈이니까. 농구를 하는 중에도 종종 주의집중이 흐트러지지 않는가. 명헌이 분석하기로 우성은 철저하게 흥미본위의 사람이다. 그걸 명헌은 굳이 우성에게 말하지 않았다. 기분 나빠할 것 같아서. , 우성을 생각하는 거냐고? 정반대다. 들켜서 우성이 우는 소리라도 하면, 내가 귀찮잖아.

 

그런데 왠일로 우성은 지칠 줄 모르고 쿠폰을 만들어 건넸다. 책장 한 칸을 가득 채우는 문고 전집. 그 절반에 책갈피가 끼워졌다. 그제서야 명헌은 우성의 마음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헌에게 이름표를 붙일 수 없는 감정이 찾아왔다.

 

나는 우성이의 표현이 [___]?

 

[고맙다]? 아니야. 긍정적인 기분은 아니다.

 

[혐오스럽다]? 이것 역시 아니다. 이렇게 강렬한 단어는 아닌데.

 

...[거슬린다].

 

거슬린다. 명헌은 우성의 표현이 거슬렸다. 우성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게 뭔지 그 땐 몰랐다. 그 후로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그러나 선배와 후배 사이에 끼어 두배로 시달리느라 명헌은 서서히 정신줄을 놓았다.

 

그러다 결국 주문 실수를 한 것이다. 졸지에 졸업식 전날에 방에 틀어박혀 만년필 포장을 하게 되었지만, 명헌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내 실수인 걸, 누굴 탓하리오... 그런데 또! 우성이 달라붙는다. 묻지도 않은 말들을 떠들면서. 명헌은 그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그래도 눈치라는 게 존재는 하는 건지 그는 전 여자친구들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래... 그거면 됐다.

 

그런데 우성의 입에서 3학년 선배의 이름이 나왔다. 명헌은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명헌은 우성을 내쫒고 그의 이름이 각인된 만년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졸업을 축하합니다.

산왕공업고등학교 23

 

졸업을 축하한다고? 내일 나는 선배를 축하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는데. 잠시 생각하던 명헌은 주먹을 쥐었다. 그래. 직접 전해주자. 헤어지는 마당에 이 정도는 괜찮겠지. 고백도 아니고, 그냥 단체주문한 졸업 축하 선물을 전해주는 것 뿐이잖아. 명헌은 책장에 늘어선 고전소설들의 노랗게 바랜 책등 위로 빠끔히 튀어나온 종이 쿠폰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저런 놈도 있는데.

 

그리고 졸업식 날.

꾹꾹 눌러참던 명헌의 자기모순이 폭발했다. 원래 졸업식이 끝나고 한번에 주려 했던 만년필이다. 그런데 명헌은 그를 그렇게 평범하게, 남들과 함께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명헌은 아침에 조용히 선배의 방에 찾아갔다.

 

똑똑.

 

선배. 명헌입니다. 잠시 기다리니 문이 열렸다. 그런데 문 틈 사이로 명헌을 마중나온 선배의 손이 명헌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명헌은 선배의 방에 그대로 잡혀들어갔다. 신발장 앞에 서선 명헌이 멀뚱멀뚱, 선배를 바라본다. 그런 그에게 선배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했다. , 나 좋아하지?

 

지금까지 몰라도 아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 명헌의 주위를 맴돌던 선배가 갑자기 선을 넘었다. 갑작스러운 가정방문도 당황스러운데 선배는 명헌을 자기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이명헌은 바보가 아니다. 그래. 마지막이니까 한 번 대주는 건 괜찮았는데, 선배가 명헌이 내민 만년필을 그냥 책상 위에 대충 던져버렸을 때... 이명헌은 조금 비참해졌다.

 

좋아요.

슬퍼요.

싫어요.

화나요.

아파요.

 

명헌은 갑작스럽고 배려심없는 관계가 촉발시킨 원초적인 감정들을 관망하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뭐야. 하나 빼면 전부 부정적인 말들이잖아. 그 와중에 아프다는 건 뭐야, 명헌아? 그건 감정이 아니고 상태인데.

 

그런데 졸업식이 한창이라 사람이 없어야 할 기숙사에 발소리가 났다. 여기도 없네. 명헌이형 대체 어디간거야. 중얼중얼. 그 목소리에 명헌이 움찔하며 허리를 불편하게 뒤틀자 선배가 짓궂게 속삭였다. . 너 지금 존나 조여. 이거 아주 변태새끼네. 그 말을 듣는데 확 기분이 상했다. 속된 말로 삔또가 나간다고 하지. 그래서 명헌은 양 팔을 선배에게 두르며 엉겨붙었다. 그리곤 쾌락을 흉내냈다.

 

, 으응, 선배...!”

“...뭐야.”

! , 흐읍... , !”

. 얘 봐라?”

 

흐응, , 하윽... 정우성. 계속 나 좋아할거야? , 으응, ... 이래도? , 아앙, ! ! 아앙! 이래도? ! 가아, ! 아앙! 이래도...?

 

잠시 허릿짓을 멈추고 명헌이 하는 양을 멍하니 지켜보던 선배가 중얼거렸다. 너 개또라이구나? 그런데 그의 입가로 진한 웃음이 번졌다. 그걸 보니 명헌이 짝사랑하던  선배도 만만찮은 개또라이였나보다. 탁탁탁. 우성이 도망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방해꾼도 사라졌는데, 마저 할까? 명헌이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만년필 상자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 대답했다.

 

졸업 축하해요, 선배.

 

 

 

 

그리고 명헌은 구겨지고 젖은 옷을 추스르며 문을 열었다. 선배는 그를 따라 나오지 않는다. 잘 가란 말도 하지않는다. 이게 그와 나의 끝인거다- 명헌은 직감했다. 감독님이 나 찾을텐데. 체육관 가기 전에 내 방에서 바지나 갈아입어야지. 그리고 그는 복도로 발을 내딛었다.

 

바스락.

 

밑창에 뭐가 밟힌다.

 

설마. 명헌이 우두커니 선 채로 꼼짝하지 않자, 뒤에서 선배가 빨리 나가라며 그를 떠밀었다. . 뒤에서 문이 닫혔고, 명헌은 복도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노란색 쪽지가 있다. 선명한 신발 자국이 남은.

 

정우성. 계속 나 좋아할거야?

 

명헌은 손을 뻗어 우성이 남기고 간 대답을 그러쥐었다.

 







**


오늘도 봐줘서 땡큐

그리고 엄청 유명한 소설들이긴 한데 혹시 모를 수도 있으니까 줄거리 긁어왔다
일단 수현이의 최애(?) 소설인 광염소나타는 천재적인 작곡가를 주인공으로, 그가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거듭 방화와 살인을 감행함으로써 새 작곡을 한다는 정신병자의 생활을 그렸다...라고 함. 전반적인 작품의 수위가(not only 선정성 but also 폭력성) 많이 높다. 
이명헌의 최애 소설인 젊은 느티나무는 서울 주택가와 시골 과수원을 배경으로 부모의 재혼으로 만난 주인공 숙희와 이복오빠 현규와의 순수한 사랑과 갈등을 숙희의 관점에서 묘사한 소설...이라고 함. 다들 알다시피 배덕 max인 소설임.

뭐 그렇다. 진짜 재밌는 책들이니까 안읽어봤으면 한번 찾아보시오~~~~~







우성명헌
태섭대만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