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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5 01:18

거기서 이명헌 딸내미 만나는게 보고싶다.

 



 

* 한국배경 au

* 아무튼 다 주의

 

 







*




 

[NBA 스타 플레이어 정우성 은퇴 선언’, 국내 리그 전망은...]

[정우성 염문설자필 사과문 경솔한 행동...변명의 여지 없어”]

[돌아온 탕아 정우성’, 자숙 기간 가질 것]

 

 

정우성은 짜증스럽게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휴대전화를 트레이닝 복 바지에 찔러넣은 우성은 이마의 땀을 훔쳤다. 무더위가 기승이었다. 불쾌 지수는 연일 한계를 모르고 치솟았다. 마치 정우성의 기분처럼.

 

30, NBA 은퇴. 후회는 없었다, 적어도 선수 생활에서는. 그러나 다른 부분은? 정우성은 버스 정류장에 앉아 등을 수그리고 손부채를 부쳤다. 부우웅- 하며 버스가 한 대 지나갔다. 정우성의 귀국을 축하합니다. 뭐 그런 광고가 붙어있다. 그런데 그걸 봐도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띠링, 띠링, 띠링. 휴대전화의 알람 소리가 멈출 줄 모르고 울려댔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와 휴대전화의 알람이 그의 귀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정우성은 힐끔 버스정류장의 전광판을 확인했다. 8. 너무도 애매한 시간. 8분동안 얼마나 많은 연락이, 누구에게 올까. 정우성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휴대폰을 꽉 쥐었다. 그러자 진동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우선, 우리 좆같은 에이전시, 수많은 언론사의 좆같은 기자들. 그리고 국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산왕의 선배들.

 

그러나 그 중에 정우성이 진실로 간절하게 기다리는 연락은 없을게 뻔했다. 씨발, 정우성은 눈을 벅벅 긁었다. 한참동안 알람소리와 기 싸움을 하던 정우성에게 그가 기다리던 버스가 다가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까슬까슬한 머리카락 위로 캡모자를 뒤집어썼다. 별 도움은 안되겠지만, 그래도 귀찮은 일은 조금이나마 막아줄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오랜만에 써보는 교통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는 대신 손잡이를 잡았다. 지금 등이고 목이고 땀이 흘러 축축한데 차마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티셔츠 목을 죽 늘려 팔랑팔랑, 어떻게든 더위를 식혀보려는데 등 뒤에서 찰칵하는 셔터 소리가 났다.

 

우성의 눈가가 떨렸다. 수군수군거리는 소리가 개미처럼 그를 물어뜯는다. 정우성 아니야? , 그 바람둥이. 유부녀랑 바람났다며? 근데 그 남편이 경쟁팀 감독이었나, 아님 구단주였나. 야 감독이랑 구단주는 차이가 너무 심한거 아니냐. 야야, 정우성 돌아본다. 조용히 해. 근데 우리가 뭐 잘못했어? 바람 편 사람이 잘못이지. 승부조작 뭐 그런거 아니냐? 아랫도리로 사람 꼬셔서 시합 이겨 보려고. 근데 정우성이 왜 그런 짓을 해? NBA에서 나름 잘나갔잖아. 글쎄, 나야 모르지.

 

결국 듣다못한 정우성이 대꾸했다.

 

그렇지. 당신은 모르지.”

 

그러자 가쉽을 떠들던 사람들은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우성은 한숨을 쉬며 하차벨을 눌렀다. 정류소에 내리는 그의 뒤로 와, 뻔뻔한 것 좀 봐- 하는 뒷말이 달라붙었다.

 

190cm의 남자는 어디서나 이목을 끄는 법이긴하다. 근데 정우성에겐 신체조건 말고도 이목을 끌 수 있는 요소가 너무 많았다. 30살의 천재 플레이어. NBA 은퇴함. 유부녀와의 염문설.막 귀국함. 그런데 아직 그 어떤 러브콜에도 답변하지 않음. 추가적으로, 본인 입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전여친 뿐만 아니라 전남친도 넘쳐남.

 

뭐 정확히는 전남친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정우성 인생에 딱 한명인데 그 전남친씨의 요청아닌 요청으로 무한 엠바고가 걸렸다. 그 사람들 다 연인 아니구요. 제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한명뿐인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해명할 수가 없어서 정우성은 그냥 전국구적 창놈으로 살기로 했다.

 

, 그냥 내가 한국의 믹 재거가 될게요. 씨발. 향간에는 정우성이 여자 오천명, 그리고 남자 오백명과 잤다는 소문이 발 없는 말처럼 천리를 돌아다녔다. 그건 조금 억울해서 우성은 몇 번 같은 팀 동료들에게 아니 기껏해봐야...! 라며 변명을 꺼내려다 정확히 몇 명과 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포기했다. . 머릿수를 기억 못하는 거면 이건 내 잘못이 맞지.

 

아니 진짜 바람둥이가 누군데! 하지만 허공에 혼잣말을 늘어놓아봤자,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린 만무했다.

 

하하.

 

정우성은 착잡하고도 조금은 서글픈 상념에 잠겨 보도블럭 위를 걸었다. 발 닿는대로 걷다보니 목적지였다. [국가대표 유소년 농구 클럽] 뭐 그런 간판이 걸려있다. 번듯한 빌딩은 아니고 낡아빠졌다. 빛바랜 필름지가 덜렁거리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좁다란 계단이 나왔다. 계단 높이가 뒤지게 높다. 정말 깜박 잘못하면 엎어져서 코 깨지기 십상인 건물 설계다. 대체 유소년들이 여기를 어떻게 오를 수 있나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정우성은 [300계단 운동법]의 개발자답게 별 힘든 기색없이 층계참을 올랐다. 다행히 농구 클럽은 2층이었다. 딸랑하는 종소리가 울리자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수십개의 동그란 머리통이 일제히 그를 응시했다.

 

와아! 정우성이다!”

어허, 감독님이라고 해야지. 아이고. 죄송해요. 애들이 아직 어려서.”

안녕, 정우성입니다.”

 

잠시 얼어 있던 우성은 아이들을 향해 사람좋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아이들이 우성을 향해 쏟아지듯 달려왔다. 오른쪽 다리에 일곱명, 왼쪽 다리에 여덟명, 어느 새 양쪽 팔에도 한명씩. 그리고 온갖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감독님, 영어 잘해요? Sure indeed. 이젠 좀 해요. 햄버거가 좋아요 밥이 좋아요? 하하, 못 고르겠네. 감독님 몇 살이에요? 딱 서른입니다. 감독님은 아빠 있어요? 아니 야. 그 질문은 좀.

 

얘들아, 잠깐 감독님 선생님 좀 빌려줄래? 인솔교사는 익숙하게 아이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는 아이들 사이에 농구공을 다섯 개쯤 풀어놓으니, 알아서 공을 잡고 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우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법 같네요.”

저야 아이들을 오래 봐왔으니까요. 아무튼 정우성 선수님, 선뜻 코치 자리를 맡아주시겠다고 해서 정말 감사해요. 한달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

, 말씀하세요.”

저희 농구 클럽 모토가 즐기면서 농구하자, 거든요. 그니까 선수님도 즐기다 가셨으면 좋겠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었네요.”

, , .”

 

정우성은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또 가면같은 웃음을 띄웠다. 일부러 작위적으로 보이게. 그러자 인솔교사라는 사람은 뻘줌하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우성과 아이들을 남겨두고 사무실로 들어가버렸다.

 

유소년 농구 클럽 1달 봉사. 이게 에이전시에서 우성에게 제안한 자숙의 일환이었다. 즐겨? 즐기라고? . 말이 제안이지, 잘 쳐줘야 간곡한 부탁이었고 사실 강요나 다름없었다. 아 안한다구요. 싫어요. 강원도 본가 내려가서 감자 농사나 지을래요. 땅도 사놨어요. 진짜 농사 지으려고 샀냐구요? 아님 투기냐구요? 투기이?? 씨발, 지금 에이전시가 선수를 투기범으로 몰아가는거에요? 어이없네. 투기 아니고요. 나중에 저 죽으면 거기 묻어달라고 하려고요. . 선산이요, 선산. 들으셨죠? 선산하려고 산거니까 묻어주세요. 사인은 홧병이구요. 태우면 사리 나오니까 그냥 그대로 매장해주세요. 삽질은 꼭 직접 하시구요.

 

, 뭐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우성은 에이전시에서 짜준 유소년 단기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첫날은 레벨테스트였다. 그래야 농구를 잘하는 친구, 못하는 친구, 농구를 좋아하는 친구, 안 좋아하는 친구. 이렇게 부류를 나눠야 애들 성향에 맞춰서 가르칠 것이 아닌가.

 

자의로 맡게된 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성은 한 번 시작한 일을 무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할 거면 확실하게. 정우성은 농구화로 바닥을 툭툭 치다가 다시 웃으며 아이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 얘들아. 농구하자.

 

 

 

 

 

보통 일이 아니었다. 팔팔한 초등학생 20명을 혼자 통솔한다는 건. 날고 긴다는 포인트 가드들을 수비하는 것 만큼이나 힘들었다. 우성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에어컨의 온도를 낮췄다. 23? 이걸 누구 코에 붙여. 당장 18도로 해, 18도로. 삑삑삑삑삑. 하고 다섯 번 리모컨을 누르고 에어컨 앞에 서서 순식간에 서늘해지는 바람을 만끽했다.

 

우성은 뜨겁게 달궈졌던 몸이 점차 식는 것을 느끼며,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설적이게도 몸은 지칠대로 지쳤는데 숨통이 트였다. 차라리 애들 사이에 끼어있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그의 핸드폰은 저기 정수기 위에서 계속 띠링, 띠링하며 작게 울려대고 있었다. 요즘 일련의 소요를 겪으면서 정우성은 사람이 싫어졌다. 물론 정우성 그 자신도 30살이다. 그래서 우성의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목록에는 정우성이라는 세 글자도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애들은 bias가 없잖아. 그래서 마음이 편했다. 아아아, ---. 그게 한국말로 뭐더라. 나 완전 양키 다 되버렸네.

 

, 데구르르.

 

그의 발치로 공 하나가 굴러갔다. 허리를 숙여 공을 잡아든 우성은 자연스럽게 팀 동료들한테 주던 것처럼 공을 도로 패스했다. 시선을 18도를 가리키는 에어컨의 패널에 고정한 채.

 

.

 

손바닥에서 공이 떠나자마자 우성은 아차 싶었다. 나 지금 미국 아니고, 애들이랑 농구하고 있었지. 심장이 덜컹거렸다. 첫날부터 애기들 이마 깨트리면 안되는데- 하며 다급하게 공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웬걸.

 

공을 그따구로 패스한 건 나 받으라는 친절인가?”

“...?”

 

키가 2mNBA 선수도 아니고, 10년동안 호흡을 맞춰온 팀원도 아니고, 기껏해야 정수리가 우성의 명치에나 올까 싶은 애기가 공을 제대로 받았다. 그래도 손바닥이 좀 얼얼한지 미간을 살짝 찌뿌리며 손을 털었다. 탈탈. 그런데 손을 털면서도 반대쪽 손으로 능숙하게 바닥에 공을 튀긴다.

 

검은 머리카락이 귀 밑에서 똑단발로 잘려 있었다. 공이 퉁, 하고 바닥을 치고 다시 애기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갈 때마다 살짝 땀에 젖은 앞머리가 찰랑거린다. 젖살이 내리지 않은 양 뺨은 한시간 내리 이어진 농구 덕에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얘 좀...하는데?

 

얼빠진 정우성이 멍하니 아이를 향해 손을 뻗은채 입을 어물거리자, 그 옆에서 아이의 친구가 우성을 툭 건드렸다.

 

수현이가 패스 똑바로 하래요.”

 

자연스럽게 아이의 대사를 통역해준 친구는 쿨하게 공을 들고 다른 쪽으로 떠나버렸다. 수현이라고 했나? 우성은 수현이에게 손을 까딱거리며 자세를 낮췄다. 수현이, 라고 불린 애는 왼손으로 계속 공을 퉁기면서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물끄러미, 가만히 우성을 응시할 뿐.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어우 숨막혀.

 

수현아? 미안하다. 내가 습관이 돼서.”

“...”

다시 공 좀 넘겨줄래?”

 

그리고 우성은 하하, 웃었다. 그래도 수현의 낯빛은 그대로였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 잘못하긴 했지. 첫만남에 이마를 깰 뻔했잖아. 그래도 이 기묘한 대치를 어떻게든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우성은 본인의 시그니처를 보여주기로 마음 먹었다.

 

-!

 

. 이건 어떠냐. 과연 이걸 보고도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는 허리를 숙이고 손바닥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리곤 바지를 끌어올리며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탄성이 터졌다. ! 도발이다! 감독님이 수현이한테 도발했어! 감독님 이제 수현이한테 혼났다!

 

...? 마지막 말이 좀 이상한데. 아이들에게 찡긋 윙크를 날리던 우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성은 삐거덕거리며 수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농구공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오!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공을 잡아챈 우성은 눈을 끔벅거렸다. 이거 참. 이마는 내가 깨질뻔했네. 농구공을 천천히 내리자, 난폭하게 패스한 범인이 바로 앞에 서있었다.

 

이수현이에요.”

...그래. 나는 정우성이야.”

 

내가 왜 자기소개를 하고 있지.

 

알아요.”

 

수현은 우성의 손에 들려 있는 농구공을 야무지게 뺏어다가 본인의 친구에게 달려갔다. 그리곤 가볍게 공을 넘겼다. 간발의 차이로 수현의 친구는 공을 놓쳤고, 또 수현은 문어체로 말하기 시작했다.

 

농구공을 패스했는데 왜 받지를 못하니.”

, 좀 살살하라니까!”

 

쟤 진짜 독특하다. 혼란에 빠진 우성에게 친구가 다가와 또 슬쩍 설명을 늘어놓았다. 수현이는 원래 이래요. 농구 엄청 잘하는데, 완전 책벌레라서 말을 좀 이상하게 하걸랑요. 근데 친해지면 재밌어요.

 

책벌레라고?

 

우성은 친구들 사이에 섞여서 패스를 주고 받는 수현을 쳐다보았다. 동그랗고 검은 눈동자가 쉴새없이 돌아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그러나 우성이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깊게 파고들기 전, 사무실에서 인솔교사가 나와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집에 갈 시간이에요~”

 

뒤늦게 우성은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한시간 반이나 지났나. 시간 참 빠르네. 티셔츠를 당겨 식은땀을 훔치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고개를 돌리니, 수현이가 덤덤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다. 손에는 동그란 농구공을 꽉 쥐고 있다.

 

이게 뭐지?

 

왜 나를 바라보지? 당황한 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둘 사이로 아이들이 썰물처럼 지나갔다. 농구 클럽에 찾아온 부모들이 아이들을 안아들고 계단을 내려간다. 개중에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은 계단 아래서 팔을 벌리고 있는 부모들을 향해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내려가기도 했다. 그런데 수현이는 우두커니 공을 들고, 그를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서 우성은 물었다.

 

“...수현아. 너는 안가?”

, 수현이 아버님도 곧 오실거예요.”

 

대답은 수현이가 아니라, 사무실 안쪽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인솔교사에게서 흘러나왔다. 우성은 별 생각없이 수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공 줘. 내가 정리할게. 그러나 수현은 깔끔하게 그의 도움을 거절하고 직접 카트로 갔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고 공을 던져넣었다. 아니 얘 봐라. 우성이는 뻘줌하게 바지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아버님 오셨어요?”

, 안녕하세요.”

 

수현아.

 

뒤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수현이 우성을 지나쳐 클럽의 입구를 향해 뛰어갔다. 우성의 등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는 턱을 꽉 다물고, 벌벌 떨리는 다리를 추슬러 겨우 뒤를 돌았다. 새하얀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은 남자가 수현이의 손을 잡고 서있었다. 똑닮은 두 사람이 우성을 쳐다본다. 그제야 우성은 수현에게서 느껴지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이의 독특한 말투와,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 초연한 태도, 그리고 언어 습관을 이루고 있는 문구들이 너무도 명백하게 한 사람만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대체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피가 차갑게 식어내린 우성의 입 안에서 비명같은 혼잣말이 기어나왔다.

 

...?

 

우성은 더듬더듬 수현의 아비를 향해 다가갔다. 그에게선 서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수현으로부터 한발짝, 명헌으로부터 두발짝 떨어진 곳에서 우성은 걸음을 멈췄다.

 

“...오랜만이네.”

“...”

수현아, 인사해. 이쪽은...”

고등학교 때 같은 팀이었어. 나는 에이스, 선배는 주장이었고.”

 

우성은 명헌의 말을 가로챘다. 같은 코트 위를 뛰었던 사이. 딱 거기까지라고 먼저 선을 그었다. 그의 말을 듣는 명헌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수현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릴뿐이었다. 우성이 늘어놓은 짧은 과거사에 수현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 아빠가 주장이었구나.”

“...”

어쩐지. 가르치는 건 저희 아빠가 더 잘하더라.”

 

셋의 기묘한 대치를 지쳐보던 인솔교사가 살며시 끼어들었다. 수현이 아버님, 감독님. 저희가 체육관 문을 닫을 시간이어서요. 더 할 이야기가 있으시면 사무실로 들어오시는 건 어떠실까요? 그의 말에 우성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아뇨, 저도 이만 가야죠.

 

무슨 정신으로 대답을 하는 건지 몰랐다. 눈 앞에는 근 10년만에 만난 첫사랑이 있었고, 그런데 그 첫사랑이 애가 있었고, 그걸 우성은 몰랐고. 가야한다고 말하면서도 우성은 애타게 명헌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길게 자라 눈썹을 가린 앞머리, 목 끝까지 잠긴 셔츠. 아직 단단해보이는 팔뚝, 그러나 다소 마른 듯한 허리. 한참 동안이나 명헌에게 머물던 시선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손가락 사이에 남아있는 볼펜 자국에 멈췄다. 볼펜 자국? 그러고 보니 아주 희미하게 담배냄새도 났다.

 

이제 농구 안해요?

 

이젠 너무 늦어버린 질문이 튀어나오려는 걸 우성은 간신히 참았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수현이 그런 우성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저씨, 선물.”

 

우성은 무심코 그것을 받아들었다. 손바닥을 펼쳐보니 네모난 종이조각이 있었다. 이게 뭐지? 우성은 낡고 꼬깃꼬깃한 종이 위에 적힌 삐뚤빼뚤한 볼펜 글씨를 읽었다.

 

[이수현 농구교습 쿠폰]

[장소: 단풍나무아파트 702동 앞 놀이터]

 

이번에는 제대로 패스해주세요.”

 

수현의 말은 우성에게 닿지 못했다. 멍하니 수현이 자체 제작한 농구 개인교습쿠폰을 내려다보던 우성의 머릿속에 아주 오래 전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헤지고 바랬지만 우성은 알아볼 수 있었다. 노란 배경지에 분홍색 선이 그어져 있던, 우성이 고등학교 시절 내내 쓰던 바로 그 노트. 수현이 건넨 쿠폰은 바로 그 노트를 찢어 만든 것이었다. 우성은 쿠폰을 뒤집어 뒷면을 확인했다.

 

[정우성 농구교습 쿠폰]

[장소: 산왕공고 남자생활관 302]

 

“...”

 

숨이 탁 막혔다. 정우성 자신의 글씨체로 쓰인 쿠폰. 정우성 자신이 쓰던 연필로 쓰인 쿠폰, 정우성 자신이...

 

12년전의 이명헌에게 보낸 쿠폰.

 

선배. . 명헌이형. 저랑 농구해주세요. 저 이번학기 302호 쓰는거 알죠.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뭐 그런 말을 했었다. 까마득한 옛날에. 그걸 아직도 이명헌이 가지고 있을 줄은, 그런데 이렇게 돌려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떡하지. 속이 꼬였다. 그가 만든 쿠폰을 여즉 이명헌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에 기뻐해야하나, 아니면 거기다 애가 낙서를 하게 내버려 뒀다는 점에 슬퍼해야하나.

 

정우성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형은 진짜 나한테 잔인하네요. 그런 정우성을 버리고, 이명헌은 이수현과 함께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

난 왜 이명헌이 자기랑 똑같은 딸이랑 둘이 살 것 같냐
애딸린 이혼남 이명헌 개좋다

우성명헌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