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이명헌 딸내미 만나는게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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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
9편


 

*한국배경 au임

*이것저것 다 주의







 

. 맞다삐.”

뭐어? ... 몰라 계속 얘기해.”

 

그러자 명헌이 동오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한 대 더. 동오는 잠시 망설이다 마지막 남은 한 개피를 쥐어주었다. 명헌은 담배를 물고 혼자 저만치 걸어가기 시작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개새끼 일화가 나올 것같은데. 근데 젠장, 너무 궁금하네. 대만은 머리를 긁적이며 명헌을 따라서 뛰어갔다.

 

 

 

 

요약하자면 명헌은 그 애를 가지고 놀았다. 먼저 아는 척하고 먼저 접근했다. 그러면서 명헌은 해묵은 고민을 다시금 되내었다. 남자를 좋아하니까 게이라고? 그게 정말인가? 그리고 새로운 고민도. 나는 정우성이 아니더라도 남자를 받아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다음과 같았다. 꼭 정우성이어야만 하는가? 이를 알아보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밤늦게 농구 연습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 명헌은 유난히 연습에 집중하지 못했던 후배를 따로 불러냈다. 기숙사 뒤편으로 걸어가는 명헌에게 우성이 멀리서 소리쳤다. ! 후배들 너무 혼내지 마요, 명헌이 형 정색하면 진짜 무서운거 알아야 해- 그렇게 외치며 기숙사로 먼저 뛰어가는 우성에게 명헌은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명헌은 후배에게 이렇다할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이 놈을 기숙사 담벼락에 세워놓고 나니 딴 생각이 올라오는 것이다. 명헌에겐 뻔히 보였다. 담담하게 그를 마주하는 눈. 그 안에 담긴 조용한 마음. 어떻게 보면 참 나랑 닮았어. 그런데 어떡하냐. 고작 2년을 더 살았다는 이유로 나는 네가 들여다 보이는 걸.

 

■■■이어야만 하는가?

 

 

명헌은 그의 연습 태만을 지적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걸로 후배의 속을 쿡 찔러보았다.

 

, 나 좋아하지?”

 

그러자 후배의 눈이 일렁인다. 호수에 돌을 던진 것마냥, 검게 가라앉아있던 눈동자가 잘게 떨린다. 그런데 당황스럽기는 명헌도 마찬가지였다. 저 거지같은 대사, 예전에 들어봤다. 어디서? 존나게 거지같았던 그 날 밤에.

 

이걸 씨발 내 입으로 얘기하다니.

 

뒷목이 뻐근하게 당겼다. 어떡할까? 명헌은 고심했다. 넘겨짚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할까, 아니면 모른척 훈련 이야기로 넘어갈까. 그런데 명헌은 따로 하고 싶은 게 있었다.

 

명헌은 뒷짐을 지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작게 벌어진 후배의 입술 위에 자신의 것을 꾹, 가져다대었다. 그 순간 왜 키스를 하고 싶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첫사랑 선배에게 다정한 입맞춤 한 번 받아보지 못한 게 못내 섭섭했던 것일지도. 아니면 때묻지 않은 사랑으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우성 때문에 꼬여가던 심기가 결국 튿어져 버린 것일지도. 중요한 건 모든 이유들 중에, 그가 입을 맞추고 있는 후배는 쏙 빠져 있었다는 거다.

 

당황한 후배가 눈을 감는다. 명헌은 눈을 똑바로 뜨고 후배를 관찰했다. 후배의 손이 명헌의 셔츠 위로 살포시 올라왔다. 명헌은 부드럽게 입술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서서히 틀었다. 이는 그가 키스를 할 때면 항상 따라가는 루틴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키스를 우성이한테 배웠구나. 명헌이 그런 미친 생각을 하던 그 때, 가장 그 자리에 있어선 안되는 인물이 둘 사이를 거칠게 떼어놓았다.

 

씨발! 너 뭐야!”

 

. 후배에게 주먹을 날리려는 우성의 앞을 가로막은 명헌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우성의 주먹이 명헌의 어깨를 가격했다. 우성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후배와 명헌을 번갈아보다가, 입을 틀어막고 비틀거리며 담에 기댔다.

 

오해하지마. 얘한테 감정 있어서 이런 거 아니니까."
"...네?"
"너 그리고 
사람 때리다 걸리면 너 출전정지잖아. 어디서 손을 올려.”

 

, 방금 좀 둘다한테 심했나. 가만히 명헌의 말을 듣고 있던 후배가 고개를 푹 숙이고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도망가는 후배 뒤에 남은 둘 사이에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우성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진다.

 

. 방금 뭐예요?”

 

방금 뭐냐고! 내가 잘못 본거죠? 뭐라고 말 좀 해봐... 이명헌! ? 명헌은 우성의 앞에 서서 소매로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 여기서 싸우면 애들한테 다 들리겠는데. 그는 우성의 팔을 질질 끌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방문을 열고 우성을 밀어넣은 명헌이 문고리를 잠그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쟤 나 좋아해. 그래서 가지고 놀았어. 그 뿐이야.”

그럼 나는요? 나도 형 좋아하잖아.”

아니. 너는 아닌데. 가지고 논 거.”

지금 내가 하...”

 

나한테는 안 그래줘서 고맙다고 해야돼요? 미친거 아냐. 우성은 이를 악물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비척거리며 명헌에게 다가왔다. 그는 명헌의 양 팔을 붙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 왜 그래요. 대체!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그래도 나는 괜찮았단 말이야! 내가 그만큼 선배를 더 좋아하니까! 근데 이게 뭐야.”

 

그는 미동없는 명헌에게 매달리며 한탄하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왜 나랑 농구 안 해줘요? 왜 나랑 같이 밥 안먹어요? 왜 나랑 같이 공부 안해요? 왜 내가 준 쿠폰 안써요? 내가 어디까지 설레발치나 구경하는 거예요? 선배는 그게 재밌어? 제발 좀! 가지고 놀지만 말고!

 

나 좀 봐달라고. .

 

우성은 서럽게 울음을 토했다. 그런데 명헌은 그저 머리가 멍했다. 극도의 피로감이 뇌를 적셨다. 명헌은 우성을 떼어놓았다.

 

나 너한테 많이 맞춰줬어.”

 

그 말에 눈이 돌아간 우성은 억지로 명헌에게 입을 맞췄다. 명헌이 피하려고 해봤지만 우성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가 명헌의 셔츠를 쥐어뜯는다. 여기 아까 그 새끼가 손댔죠? 명헌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우성이 다소 강압적인 키스에 맞춰줄 뿐이었다. 그걸 눈치챈 우성의 뺨으로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둘은 몰랐다.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울며 배회하던 후배가 명헌의 방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커튼 사이로 우성과 명헌이 실랑이를 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는 것을.

 

 

 

 

 

 

 

 

수고하셨어요, 감독님.”

감사합니다. 다음주에는 사정상 못 나올 것 같아요. 나중에 보강해도 될까요?”

 

. 스케쥴은 차차 논의해보기로 해요. 우성은 인솔 교사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아이들이 귀가할 준비를 하는 동안, 우성은 물을 마시며 뉴스를 확인했다. 오늘은 어떤 신종 개소리가 떴나 볼까. 그런데 실시간 뉴스에 들어가기도 전에 매니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동시에 옆에서 농구 교실의 학생 하나가 싸인을 해달라며 스케치북을 가지고 왔다. 그는 어깨와 귀 사이에 힘들게 휴대전화를 끼고 전화를 받았다.

 

- 네 형. 예지야 잠깐만. 감독님 전화만 받고.

- 우성아 당장 튀어나와.

- ? 벌써 오셨어요? ! 알았어, 알았다고! 감독님 바지 내려간다. 뭐라고 싸인해줄까?

- 당장 펜 내려놔! 지금 기자들 오고 있다고!

-...?

 

여기로요? 전화기 너머로 날카로운 클락션 소리가 울렸다.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 된 우성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홀리 퍼킹 씨발.

 

선생님. 지금 도착하신 학부모님들이 계실까요?”

. 수업 끝나는 거 기다리고 계신대요?”

당장 오시라고 해요. 그리고 정말 죄송한데, 그 분들 차에 애들 나눠 태워서 일단 멀리 대피시키세요.”

? 무슨 일 났나요?”

무슨 일이 나도 졸라 크게 났죠. ...”

 

지금 기자들이 여기로 오고 있거든요. . 제가 자원봉사하는 시간이 유출되었나봐요. 우성은 그렇게 말하고 재빨리 농구 교실의 문을 열었다. 그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학부모들의 창문을 두드리고 사정을 빠르게 설명했다. 그리고 인솔 교사와 함께 아이들을 짐짝처럼 들어다 계단 밑으로 날랐다. 어른들의 속은 타들어갔지만 애들은 그 긴박한 상황이 그저 재밌기만 한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을 대여섯명씩 차에 태워보내고 난 후, 우성은 메니저의 차량을 찾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미처 차에 태우지 못한 애 하나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우성의 턱이 툭 떨어졌다.

 

이수현! ! 너 왜 거기있어!”

화장실 다녀왔는데요.”

아악!”

 

우성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기시킨 매니저 형은 우성을 재촉하듯 정신없이 경적을 울렸고, 기자들이 탄 검은 차량들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이수현이 있다. 이명헌의 딸내미가 정우성 자신은 이미 기자들에게 너덜너덜 물어뜯겨 뼈만 남았다. 이런 일에 족히 익숙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수현은 아니잖아. 이명헌의 딸이 정우성에게 농구 교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퍼져나간다면? 인터넷이 또 어떤 식으로 뒤집어질지 알만했다. 이명헌이라는 세 글자가 알려진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목졸라 죽이고 싶은데 만약 거기에 수현이라는 이름까지 등장하게 된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우성은 수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대뜸 그를 달랑 안아들어 농구공마냥 옆구리에 꼈다. 우성이 주차장을 질주한다. 그 와중에 수현이 입을 열어 조잘거린다. 비록 그리 승차감이 좋지 않은 정우성의 옆구리에 끼워져 위아래로 덜컹거리는 바람에 말이 뚝뚝 끊겼지만. , , . , , , , -

 

메니저는 차 문을 활짝 열어놓고 우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하도 나오지 않는 우성이 걱정되었는지 아예 운전석 밖으로 나와 초조하게 발을 구르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기서 달려오는 그의 담당 선수가 홀몸이 아니다. 옆구리에 달고 있는 저건 뭐지. 무슨 검은 농구공 같은 게 흔들리는데. ...? 수현을 알아본 메니저가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성은 수현을 땅에 내려주었다. 빨리 타! 사방에서 요란한 타이어 소리가 들렸다. 우성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금 기자들한테 잡히면 진짜 좆된다. 그럼 명헌이 형이 진짜 나 안본다고 할 수도 있어.

 

그런데 수현이 냉큼 앞좌석에 타버렸다. 꾸물꾸물 운전석에 기어올라간 수현이 우성을 빤히 쳐다본다. 그러나 기자들은 이미 주차장의 입구로 밀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고, 잘못된 자리에 타버린 수현을 이제와서 뒷자리로 보낼 시간적 여유따윈 없었고... 결국 우성은 앞문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수현에게 소리쳤다. 조수석으로 가!!

 

끼이익- 회색 승용차 한 대가 마찰음을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우성의 차임을 알아본 기자들이 따라붙는다. 그런데 회색 승용차는 신출귀몰하게도 비좁은 골목을 요리조리 질주하더니 하나 둘 꼬리를 떼어냈다.

 

, 수수수현아. 이제 어디로 가? 어디!”

전방에 과속방지턱이요.”

아니, 그거 말고!”

. 20m 후 좌회전.”

 

네 거기 떡볶이집이요. 노란 간판. 그 집 어묵이 맛있어요.

느아악!

 

운전대를 잡은 우성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 옆에 야무지게 손잡이를 양 손으로 잡고 안전벨트까지 한 수현이 앉아있다. 그는 지금 인간 네비게이션이 되어, 주변 지리라곤 쥐뿔도 모르는 양놈 정우성에게 이씨가문에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다는 집 가는 지름길을 안내해주는 중이었다.

 

앞자리를 차지한 두놈 때문에 얼떨결에 뒷좌석에 앉게 된 메니저는 지금 속으로 그가 아는 모든 신의 이름을 한번씩 외치는 중이었다. 그의 몸이 뒷자석을 마구 굴러다닌다. 예수님 부처님 알라님 마이클 조던님 저 놈 자식 장롱 면허는 아니겠죠?

 

골목길 모퉁이에서 드리프트 하기, 절묘한 타이밍 조절로 신호등 안 걸리기, 속도 제한 준수하며 국도 질주하기 등등 이수현의 전두지휘 하에 고난이도 스킬을 발휘하며 난데없는 추격전을 벌이던 우성은 결국 기자들을 모두 떼어낼 수 있었다.

 

우성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수현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그 옆자리에서, 머리가 헝클어진 수현이 손잡이를 잡느라 얼얼한 손을 탈탈 털었다. 그에게 우성이 주먹을 내밀었다. . 수현아, 피스트범프. 그러자 수현이 조막만한 손을 말아쥐었다. .

 

먼 길을 한참 빙빙 돌아 단풍나무 아파트로 가는 길. 창틀에 턱을 올리고 바깥을 구경하던 수현이 물었다. 아저씨, 아니 감독님.

 

? 나 불렀어?”

저랑 같이 우리 집에서 아빠 기다릴래요?”

...?”

 

뇌 정지. , , , 그래야하나? 수현의 제안에 눈 앞이 아찔해진 우성이 어물거렸다. 그 때 담당 선수가 봉사 활동에서 만난 아이와 사적인 만남(?)을 이어가는 게 마음이 걸렸던 매니저가 냉큼 입을 열었다.

 

너 애기 아버지 분이랑 아는 사이야?”

. 감독님이 우리 아빠 후배.”

? 아버님이 산왕 출신이셔? 누군데?”

 

, 아아아! 잠깐잠깐잠깐! 핸들을 돌리던 우성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수현은 그간 우성이 숨기던 진실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이명헌이요.”

 

? 사람이 너무 놀라면 말문이 막히기도 한다. 예상치 못한 이름에 당황한 매니저는 눈을 끔벅거리다 운전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홱 돌린다. 우성을 바라보는 그의 희번덕거리는 눈.

 

정우성.”

“...”

지금 애기가 뭐라는거냐?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아?”

“...하하하.”

야이, 미친!”

 

! 정우성! 매니저가 사자후를 질렀다. 니가 정신이 있어 없어! 애까지 신상 털리는 꼴 보고 싶어? 지나가던 기자한테 둘이 농구 연습하는 모습이라도 들켰어 봐! 아오, 이걸 그냥! 매니저는 우성의 팔을 힘껏 쥐어박았다. 그러나 운동으로 다져진 그의 전신은 철저히 설계된 치밀한 근육 덩어리였고, 결국 매니저는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부여잡고 악 소리를 냈다.

 

... 형 죄송해요.”

하나도 안 미안하게 들리거든!”

그래서 오실거에요? 저희 집?”

아니아니아니. 내가 대가리에 총 맞았니, 수현아.”

안 오셔도 괜찮아요. 알아서 혼자 밥 챙겨먹을 수 있어요. 그냥 밤까지 혼자 있을게요.”

 

혼자.

 

그 말에 우성과 매니저의 머릿속에는 한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쓸쓸하게 아버지를 기다리는 수현의 모습이. 으으- 침음을 삼키던 우성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매니저를 불렀다. 혀엉.

 

매니저형.”

.”

“...진짜 수현이 혼자 보내요?”

아오, 미친놈아. 나 오늘 진짜 바빠.”

저라도 가서 봐줘야 하는거 아닐까요.”

아저씨, 단풍나무 아파트 702404호로 가주세요.”

 

수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집주소를 읊었다. 택시 기사한테 주소를 부르는 것마냥 천연덕스럽게. 그러나 매니저는 단호했다. 가긴 어딜가, 정우성. 얌전히 집에 들어가. 그 야차같은 기세에 우성은 꼬리를 내렸다.

 

...수현아. 미안하다.

너네 집 가면 감독님 죽어.

 

일단 우성은 단풍나무 아파트 앞에서 수현을 떨궈주었다. 뾰로통하게 입을 내민 수현이 타박타박 걸어간다. 삑삑삑삑. 수현이 아파트 출입문 앞에 달린 패드를 누르고 안으로 사라진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둘은 차를 돌렸다.

 

주차장에 내린 우성은 기지개를 폈다. 기자들을 피해 돌아다니느라 긴장한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던 그는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빼꼼.

 

주차장 기둥 뒤에서, 수현이 고개를 내밀었다. 우성이 입을 틀어막았다. ...! 너 집에 안들어가고 뭐해! 우성에게 다가온 수현이 그의 셔츠 밑단을 잡아끌었다. 뭐지. 설마 자기 집에 가자는 건가. 매니저 형이 수현이네 갈 생각을 꿈도 꾸지 말랬는데. 갔다가 기자한테 걸리면 알아서 하라고 했는데. 그러나 수현의 솔직한 한마디를 듣는 순간 복잡한 우성의 머릿속은 텅 비워졌다.

 

집에 혼자 있기 싫어요.

 

우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빈 집에 홀로 남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우성은 너무도 잘 안다. 사무치는 외로움. 고여가는 잡념과 떠나지 않는 후회들. 그 시간을 수현이 혼자 버틸 수 있을까. 우성은 수현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아이의 키에 맞춰 허리를 살짝 숙이고, 팔을 앞뒤로 흔들며 둘은 말없이 놀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한 번 아파트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수현에게 우성이 말했다.

 

나도 싫어해.”

뭐가요.”

혼자 있는거.”

감독님은 어른인데?”

“...그러게.”

 

그러니까 감독님이랑 같이 있어주라. 우성은 씩 웃었다. 지잉, 유리문이 열렸다. 수현이를 앞세운 우성은 층계참을 올랐다. 늦은 오후의 붉은 노을이 드리운다. 그 햇살 사이를 부유하는 먼지들. 노란 고지서들이 꽂혀 있는 우편함 옆을 지나는데, 지하실 쪽에서 쿰쿰한 냄새가 올라왔다. 확실히 오래된 아파트다. 그러나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낡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촌스러운 빨간색의 난간 손잡이라던가, 집집마다 붙어있는 빛바랜 전단같은 것들. 404호 앞에 멈춰선 수현이 도어락을 열고 자판을 눌렀다. 현관문에 수현이 학교에서 그려왔을 그림이 붙어 있다.

 

<이수현의 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제서야 우성은 조금씩 현실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수현의 집에 들어간다. 다시 말해, 이명헌의 공간에. 이게 얼마만인가. 10?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이명헌의 공간은 산왕의 기숙사였는데. 우성은 손가락을 꿈질거렸다. 손 끝이 간질거리고, 숨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철컥.

 

현관문이 열렸다. 수현은 문을 열고 안으로 쏙 걸어들어갔다. 실례합니다- 그의 말에 대답할 사람은 지금 이 집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성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천천히 현관에 발을 들였다. 가장 먼저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신발들이었다. 신발장이 반질반질한 검은색 구두와, 파스텔 색 운동화로 가득 차 있다. 그 중에 농구화는 한 켤레도 없어서, 우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신고 온 농구화를 벗어다 수현이 벗어놓은 운동화 옆에 놔두었다. 그리고 우성은 심호흡을 하며 명헌의 거실로 걸어갔다.

 

그런데 아-. 포근한 비누냄새가 난다.

 

감독님 여기예요.”

 

쇼파에 가방을 던져둔 수현이 우성을 불렀다. 하지만 우성은 말이 없다. 뭐지, 싶어서 현관쪽을 쳐다보았다. 거기서 뭐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우성이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다. 뭔가에 놀란듯한 반응. 하지만 수현은 우리 집에 뭐 그리 특별한 게 있나 싶었다.

 

옷은 여기 코트 걸이에 걸어두세요.”

“...”

감독님?”

“..., .”

 

더듬거리며 대답한 우성이 삐걱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져지의 지퍼를 내리는 그의 얼굴이 새빨갛다. , 감독님 얼굴.

 

아하하. ! 좀 덥네.”

 

어색하게 웃음을 흘린 우성은 뒤를 돌았다. 거실의 전면창 너머로 베란다가 보였다. 우성은 홀린듯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창 밖에서 하얀 이불이 흔들린다. 빨랫줄에 걸린 이불 위에 입술이 두꺼운 물고기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우성이 그것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뒤에서 수현이 해명했다. 그거 제거 아니고, 우리 아빠 꺼. 그러나 우성은 그 웃기게 생긴 그림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코 끝을 맴도는 세제냄새에 머리가 멍하다. 그 순간 우성은 산왕의 기숙사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10년 전 가끔 명헌의 방에 놀러갔을 때, 침대에 앉아 빨래를 개던 명헌에게서 풍기던 바로 그 향기. 그리고 그 해 여름 명헌이 읊조리던 바로 그 문구.

 

-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귓가에 울려퍼지는 나지막한 명헌의 목소리에, 우성은 뺨을 붉혔다.

 

 

 

 


**

축 정우성 이명헌네 집 입성


오늘도 봐줘서 고맙뿅
 


우성명헌
태섭대만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