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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15.


밤하늘이 수정처럼 부서진 도로에 이제 막 주택가를 빠져나온 차가 들어섰다. 낮에는 잡목림처럼 빽빽했던 도로가 한산했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가 발산하는 상향등에 눈이 부신 아이스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다. 그 순간 강렬한 햇살 아래 오른쪽 눈을 찡그리던 매버릭의 버릇이 떠올랐다.

핸들을 쥔 손은 집을 나설 때와 마찬가지로 떨리고 있었다. 입술이 바싹 말라 타는듯한 갈증을 느꼈다. 아이스는 목마른 사슴처럼 미라마로 향했다. 그곳에 그가 갈망하는 샘이 있었다.

도로 위에 부서진 유리 조각과 별의 잔해가 반짝인 덕분에 밤길임에도 운전은 수월했다. 살짝 내린 창문 사이로 상쾌한 밤바람이 불어와 흥분이 식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가까스로 떨림이 진정되자 아이스는 돌연 불안해졌다. 변덕스러운 매버릭의 마음이 또 변덕을 부려 약속한 장소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매버릭은 연락한 적도 없었다는 것처럼 미라마의 관사를 비우고 또 그 해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

매버릭의 변덕만큼이나 아이스의 기분도 오락가락했다. 처음에는 미친 듯이 요동치던 심장이 지금은 관에 드러누운 시체라도 된 것처럼 느리게 뛰었다. 잠깐의 환희가 사라지고 난 뒤에는 송곳처럼 가슴을 후벼파는 초조함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또다시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돌이켜보건대, 입대하고 처음 전투기에 오르던 날도 지금처럼 떨리지는 않았다.

아이스는 밤길 운전에 사고라도 날까 두려워,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라디오를 틀었다. 음악이라도 들으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사라가 앤드류를 가졌을 때부터 고정된 클래식 채널에서 윌리엄 볼컴이 작곡한 「세 개의 유령 래그」가 흘러나왔다.

첫 번째 곡인 〈우아한 유령〉의 우아하면서도 쓸쓸한 피아노 선율에 아이스는 덜컥 침울해졌다. 이어지는 경쾌한 당김음이 그를 그늘 속에 숨은 외로운 유령에게 끌어당겼다. 아이스는 나지막하게 유령을 부르고, 유령은 주춤거리면서 아이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령이 아이스의 손을 잡는 순간 고전적인 샴페인의 황금빛 갈채가 터져 나왔다. 피아노 반주 위로 바이올린의 선율이 미끄러지고 나지막한 허밍이 이루어내는 완벽한 하모니, 그리고 외톨이 유령과의 환상적인 춤.

마침내 미라마였다.

 
* * *


주차장에 차를 세운 아이스는 다이너 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꼼꼼히 살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식당은 번화가에 있어서인지 새벽임에도 사람이 제법 많았다. 아이스는 매버릭을 찾으려고 식당 안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누가 보아도 불륜 관계인 여자와 남자가 주변을 힐끔거리며 무어라 속삭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건너편에 집에서 논문을 쓰다가 뛰쳐나왔는지 참고 문헌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끙끙거리는 남자도 보였다.

식당 중심부의 테이블에는 야행성 청년 네 명이 대낮처럼 환한 얼굴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하면, 중절모를 쓴 남자가 바에 앉아 레몬 한 조각을 띄운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아이스는 주크박스 옆 그늘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유령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매버릭의 얼굴이 가물가물하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자신은 그의 얼굴을 바로 아침에 만난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매버릭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눈에 띌 정도로 수척해지긴 했지만,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불안정한 시기 특유의 어설픈 치기로 가득했다. 매버릭은 당장에라도 불길로 뛰어들 것처럼 보였고, 제안에서 요동치는 폭력성과 울분을 다스리지 못해 누군가를 흠씬 두들겨 패거나 아니면 자신이 얻어맞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눈치였다. 사랑스럽고 미숙한 설움. 아이스는 1986년의 여름, 매버릭이라는 악몽에 시달렸던 그해 여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단 한 가지,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는 자신의 기억보다 더 특별했고 신선했다.

아이스는 문을 밀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의 시선이 우중충한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말쑥한 남자에게 쏠렸다. 매버릭만이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테이블 모서리의 얼룩을 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새하얀 머리띠를 쓴 통통한 종업원이 반질거리는 뺨을 위로 당기며 인사했다. 아이스는 눈짓으로 그녀에게 인사한 다음 매버릭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종업원의 인사에도 시종 얼룩과 눈싸움 중이던 매버릭은 자신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서야 고개를 들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금발에 살짝 처진 기다란 눈매, 곧게 뻗은 날렵한 콧날과 움푹 들어간 근사한 뺨과 무겁게 깔리는 향수 냄새에 매버릭은 잠깐 눈앞이 아찔해졌다. 

무엇보다도 여유롭고 서글서글한 미소에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던 스트라이커를 보고 아이스를 연상했던 것을 부정하고 취소했다. 아이스가 스트라이커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 재수 없다.

“카잔스키.”

괜히 부아가 치밀어서 매버릭은 아이스를 콜사인 대신에 성씨로 불렀다.

“매버릭.”
“서른 살이 되면 세상이 어떻게 보여?”

매버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쑥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아이스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버릭은 얄밉게 이죽거리며 얼른 대답하라고 눈빛으로 종용했다. 하는 수 없이 아이스는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세상이 변할 줄 알았는데, 달라지는 건 없더라.”
“흰머리가 생기진 않았고?”
“매버릭. 날 자극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좀 더 효과적인 말이 무엇일지 궁리하는 게 좋을 거야.”

두 사람은 동시에 의자에 앉았다.

앉자마자 매버릭은 기지개를 쭉 켜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초록색 인조 가죽 시트가 우거진 수풀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안락한 요람처럼 보였다. 아이스는 배 속이 근질거렸다. 메뉴판을 집는 아이스의 손을 본 매버릭이 눈썹을 크게 들어 올렸다.

“손이 왜 그래?”

매버릭은 아이스의 상처를 가리키며 물었다.

“싸웠어.”
“이겼어?”
“어.”
“잘했어. 그래야 내 윙맨이지.”

매버릭은 자신이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우쭐대면서 아이스의 팔을 툭툭 쳤다. 그러자 아이스는 신기하게도 모스볼에게 주먹질을 할 때, 산 채로 내장이 타는 듯했던 분노가 더는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나도 싸웠어.”

매버릭은 자신의 얼굴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자랑스레 말했다. 그는 자신의 한계와 싸우며 생긴 자랑스러운 상처이니,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대는 아직도 병원에 있겠네.”
“그렇지.”

아이스가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매버릭은 씩 웃었다. 이건 거짓말이다. 양심에 찔려 가슴 한편이 따끔거렸다. 다행히 아이스는 모르는 듯했다. 그는 주춤거리며 다가오는 종업원에게 손짓하며 “토마토 샐러드랑 얼음물 부탁합니다.”하고 말했다. 그 단순한 동작은 세련되고 우아했다. 매버릭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부탁합니다…….”하고 혼잣말로 아이스의 말투를 흉내 냈다.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아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비퍼 없어?”
“비퍼?”
“페… 이저…….”

아마도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매버릭은 버니맨과의 대화를 곱씹으며 드물게 자신감 없는 말투로 말했다.

“아, 있긴 하지.”
“역시.”

매버릭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아이스는 연락처를 교환할 생각으로 물었다.

“난 없어.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 얼마 전에야 알았지.”

매버릭은 반질거리는 눈꺼풀을 긁으며 말했다. 조금 짜증이 난 듯했다. 아이스는 매버릭이 자기 자신에게 불만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연신 눈을 비비며 매버릭은 아주 작게 혼잣말을 덧붙였다.

“……구스가 살아있었다면 알았을 텐데.”

그 말에 등줄기가 서늘했지만, 아이스는 매버릭의 혼잣말을 일부러 못 들은 체했다. 매버릭이 바라지 않으리라 생각해서였다. 그는 특유의 시원스럽고 넓은 보폭으로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에 비치된 전화기로 향했다.

아이스는 수화기를 어깨에 괴고 혼자 남은 매버릭을 주시하며 뻑뻑한 다이얼을 돌렸다. 아직도 다이얼을 돌리는 구식 전화기를 고집하고 있다니. 1960년대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가게답다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나야, 이제 막 도착했어.”
―일찍 도착했네. 그 사람 만났어?

사라는 잠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금방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아이스는 열기가 식는 것을 느꼈다.

“어.”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아이스는 집요한 시선으로 매버릭을 훑었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자 조금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매버릭은 병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몸을 사리고 있었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티가 역력했다.

―밤중에 당신한테 연락한 거 보면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인데, 괜찮대?
“일단 겉보기에는.”

아이스는 매버릭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매버릭은 손톱 거스러미를 뜯기 시작했다. 마음처럼 시원하게 떨어지지 않는지 급기야 주변을 힐끔거린 다음, 입으로 물었다.

―만약에 안 좋은 일이 있던 거면 당신이 잘 위로해줘. 해결책 제시하지 말고, 위로만 해줘. 알았지?

사라가 우스갯소리처럼 당부했다.

“알았어.”
―그 사람, 그래도 당신한텐 속마음 털어놓고 싶은 것 같아.
“내가 위로해주기를 바라고 연락한 건 아닐 거야.”
―그럼?
“심심해서 연락했겠지.”

그사이 매버릭이 “아, 망할!”하고 새된 소리를 내며 어깨를 움츠렸다. 분명 거스러미가 길게 찢어졌으리라.

“누구에게 화풀이할까, 룰렛을 돌리다가…… 아마도.”
―괜한 소리 하지 말고. 이만 가 봐. 난 자야겠어.
“잘자.”
―사랑해.
“그래.”

아이스는 건조하게 통화를 마치고 다시 매버릭에게 돌아갔다. 매버릭은 아이스가 가까워지자, 냅킨으로 피가 맺힌 손가락을 얼른 감싸며 테이블 아래로 감췄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질문을 던졌다.

“항모에선 지낼 만했어?”
“미트볼이 형편없었어. 조리병을 족치고 싶은 걸 참았다.”

아이스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일부러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보란 듯이 차가운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족친다고? 카잔스키 네가?”

매버릭이 흥미로운 모양인지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왜. 못할 것 같나?”

아이스는 발끈한 체하며 반박했다.

“족친다고 표현하는 게 의외라서.”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 줄 알았어?”
“정식으로 항의한다.”

매버릭은 미간을 좁히며 한껏 목소리를 깔고, 진지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부실한 배식으로 장정들의 사기 저하가 우려되므로…….”
“매버릭, 너는.”

목소리를 까느라 무리해서 성대를 긁는 바람에 기름이 끓듯이 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매버릭의 모습에 아이스는 무심코 사랑스럽다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왜?”
“아니다. 잠깐 딴생각 했어.”

아이스는 물을 마저 마셨다. 매버릭은 열없이 미소지었다. 아이스는 그 신기루 같은 미소가 이상스레 강렬하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날이 밝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화제는 그들의 공통관심사인 전투기와 비행과는 거리가 먼 일상의 시시콜콜한 것들이었다. 요즘 인기가 많은 드라마,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크리스마스 정찬, 캘리포니아의 시끄러운 날씨…….

아이스와 대화를 하며 매버릭은 정말 오랜만에 자신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으며, 또 존중받고 있다고 느꼈다. 얼마 만에 이렇게 마음이 놓이는지 모르겠다. 더는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아침 먹을래?”

7시경, 아이스가 환히 밝은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나는 커피만 한잔 더 마실게.”

매버릭은 고민하지도 않고 곧바로 거절했다.

“식사는?”
“저녁에 과식했더니 속이 부대껴서.”
“그래.”

아이스는 매버릭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매버릭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스의 시선을 애써 회피했다. 그는 분명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모처럼 마음이 편해서인지 한동안 잊고 살았던 허기가 밀려들었지만, 몸이 무거우면 날 수 없다. 더 가벼워져야 한다. 더, 더. 매버릭은 배고픔을 달래려고 물을 마셨다. 그때, 오른손 검지가 따끔거렸다. 아까 뜯었던 거스러미에서 다시 스멀스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기분 나쁜 통각이 거슬려서 매버릭은 입술을 뒤틀며 작게 신음했다.

아이스는 일단 성급하게 추궁하는 대신에 매버릭을 좀 더 지켜보기로 하고, 종업원과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퇴근을 앞둔 종업원이 길게 하품하며 딱딱하게 굳은 목을 돌리다가 아이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이스는 치킨 수프와 가정식 애플파이를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은 금방 나왔다. 따뜻한 수프의 구수한 냄새와 애플파이의 상큼한 향기에 매버릭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이스는 매버릭에게 구태여 다시 식사를 권하지 않고 수프를 한 숟갈 떴다.

‘저 자식은 왜 하필 애플파이를 주문한 거지?’ 

매버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애플파이는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매버릭은 서글퍼졌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기 싫다며 생떼를 쓰는 자신에게 얌전하게 다녀오면 애플파이를 구워주겠다고 회유했다. 이제 사진을 꺼내 보지 않으면 어머니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데, 그 애플파이의 노릇노릇한 자태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났다.

아이스는 소리를 내지 않고 점잖게 식사를 이어나갔다. 매버릭은 눈을 비볐다. 억지로 배고픔을 참다 보니 몸이 차가워지며 졸음이 쏟아졌다.

“매버릭, 이마에 뭐 붙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아이스는 지나가는 투로 불쑥 말했다.

“여기?”

매버릭은 이마 오른쪽을 문지르며 물었다. 

“아니.”
“그럼, 여기?”

매버릭은 이마 가운데를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아니.”
“대체 어디에 붙었다는 거야?”

아이스가 거듭 고개를 가로젓자 아니나 다를까, 성격이 급한 매버릭은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아이스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괜찮다면 내가 떼줄게.”
“어, 빨리 떼줘.”

매버릭은 부산스레 손짓하며 재촉했다. 아이스는 이마에 붙은 것을 떼어주는 척하며 매버릭의 이마에 손을 짚고 체온을 쟀다. 조금 뜨거웠다. 아들이 졸릴 때면 몸이 따뜻해져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재본 건데, 설마 매버릭도 그럴 줄은 몰랐다. 이 우쭐거리는 밉살스러운 놈은 여전히 젖살이 빠지지 않았고, 이마와 턱이 둥그스름했다.

“날벌레네.”
“또? 요즘 벌레가 몸에 자주 붙어. 로션을 바꿔서 그런가?”

아이스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하자, 매버릭은 턱에 난 뾰루지를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

“무슨 로션으로 바꿨어?”
“이름이 기억이 안 나. 되게 달콤한 향기가 나. 원래 쓰던 게 안 보여서 대충 그럴듯해 보이는 걸 고른 건데 잘못 샀어. 왜 난 매번 이따위지.”

매버릭은 한숨을 내쉬며 푸념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리를 떨며 거스러미를 뜯고, 눈을 비볐다. 테이블의 물기를 닦기도 했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을 움직이니까 그렇지.”

아이스는 매버릭의 산만함에 혀를 내둘렀다. 두 살배기 아들보다 매버릭이 훨씬 더 정신없었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말이다.

“냄새 좋네. 너는 로션 뭐 쓰는데?”

느닷없이 매버릭이 불쑥 몸을 앞으로 숙이며 코를 킁킁거렸다.

“향수 냄새야.”

아이스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 매버릭에게서 꿀과 열대 과일 냄새가 났다. 벌레가 꼬일 만도 했다. 그 냄새를 의식하는 순간, 머릿속에 적색경보가 울렸다. 위험하다는 생각에 아이스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자. 계산은 내가 할게.”
“고마워, 잘 얻어 마셨다.”

매버릭도 뒤따라 일어났다.

종업원에게 계산서를 받은 아이스는 매버릭이 주문한 것을 확인했다. 반나절 넘도록 함께 있으면서 그가 먹고 마신 것은 커피 석 잔이 전부였다. 아이스는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먼저 다이너를 나섰다.

“카잔스키, 넌 집에 안 가?”

아이스가 주차한 차를 지나치며 성큼성큼 인도로 나가자 매버릭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며 물었다.

“너 바래다주려고.”
“내가 위험할까 봐? 날도 밝았는데?”

매버릭은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네가 위험할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 너한테 잘못 걸린 불쌍한 놈들이 위험해질까 봐 그래.”
“오늘 밤 운 없는 놈은 카잔스키 너 하나면 충분해.”

매버릭은 언제 웃었냐는 듯이 침울한 얼굴로 뇌까렸다. 이따금 그를 괴롭히는 자기 파괴적인 성향이 또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눈이 부신 햇살 아래에 서니, 자신이 간밤에 다짜고짜 아이스를 불러낸 일이 몹시 무례하며 충동적이었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들었다.

“미첼, 난 운 없는 놈이 아니야.”

아이스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매버릭은 놀란 눈으로 아이스를 응시했다. 그는 단호하면서도 진지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매버릭은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순순히 아이스를 따라나섰다.

 
* * *


관사는 다이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함께하는 이 시간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서로 약속한 것처럼 천천히 걸었는데도, 20분 남짓 지나자 어느새 새하얗게 페인트를 칠한 단층 목조 주택이 시야에 보였다.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에도 시간은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그들의 아쉬움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꿈으로 유혹하는 미열은 자신과 무관하다는 것처럼.

먼저 발걸음을 뗀 사람은 매버릭이었다. 이 따사로운 햇살이 이제 그만 아이스를 보내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는 손을 놓은 지 오래라 들쭉날쭉 엉망으로 자란 잔디를 짓이기며 앞서 나갔다.

“잠깐 들어올래?”

하지만 못내 아쉬운 마음을 떨쳐내지 못한 매버릭은 현관문을 등지고 넌지시 물었다. 어쩌면 아쉬움보다는 두려움이 더 큰 걸지도 모르겠다. 아이스가 떠나면 자신은 다시 이 세상에 홀로 내버려질 것이고, 자신을 위협하는 온갖 둔탁하고 날카로운 것들로부터 몸을 숨겨야만 하므로.

“아니.”

그 어설프고 절박한 추파를 아이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대로 매버릭의 제안을 수락하고 그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를 향한 욕망을 더는 절제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저 문을 넘는 순간 자신은 매버릭을 끌어안고 그에게 열렬히 입 맞출 것이다. 분명히.

아이스의 심란한 마음을 모르는 매버릭의 얼굴에 실망감과 호기심이 동시에 떠올랐다. 거절당한 것이 자존심 상하면서도 신선했다. 그는 다시금 아이스와 다이너에서 밤새 대화를 나누며 느꼈던 안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늦었어. 난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아침인데?”

매버릭은 작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아이스는 대답 대신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매버릭은 못내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음이 편안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오늘만 있는 건 아니니까.”

아이스는 매버릭의 울적한 얼굴에 측은한 마음이 들어 부드러운 말씨로 덧붙였다. 그 말에 용기를 낸 매버릭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카잔스키, 만약에 내가 너한테 또 연락한다면…….”
“나올 거야.”

아이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한 시간 뒤라도?”

매버릭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

아이스는 지갑에서 다이너의 영수증을 꺼낸 다음, 볼펜으로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매버릭에게 건넸다. 매버릭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오는 길에 본 호텔 주소랑 연락처야.”

아이스의 말에 매버릭은 더욱 의아한 얼굴이었다. 아이스가 왜 호텔에서 하룻밤 보낸다는 걸까? 그의 집에서 이곳까지는 그리 멀지도 않은데.

“여기서 머물 예정이니까 이쪽으로 연락해. 만약 공실이 없어서 다른 호텔로 가더라도 여기 얘기해둘 테니까 로비에 전화해서 나한테 연결해달라고 해.”
“…….”
“꼭.”

아이스는 망설이는 매버릭의 손에 영수증을 쥐여주고, 강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

“아이스.”

매버릭은 아이스를 카잔스키가 아닌 그의 콜사인으로 불렀다.

“나한테 비밀이 하나 있어.”
“무슨 비밀?”
“사실 난 인간이 아니라 새야.”

매버릭은 환하게 웃으면서 속삭였다.

“그런데 날개가 부러져서 날 수 없고, 다시 날기 위해서 재활 중이야.”
“매버릭…….”
“조만간 다시 날게 될 거야.”
“…….”
“잘 가, 오늘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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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4.03.25 00:0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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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오셨다!!!!!!!!!!!!
[Code: 43a4]
2024.03.25 00:0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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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센세와 동접 ㅠㅠㅠㅠㅠ센세 사랑해 아이스와 매버릭이 드디어 만나는 걸까? 떨리는 가슴 부여잡고 정독하러 간다 ㅠㅠㅠㅠㅠ
[Code: f238]
2024.03.25 00:3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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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줄부터 무릎갈렸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ㅠㅠㅠㅠㅠㅠㅜㅜㅜ센세는 신이야
[Code: f4c4]
2024.03.25 00:4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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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 먹먹함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 아이스가 매버릭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매버릭이 아이스에게 갖고 있는 감정보다 훨씬 뜨겁고 진하고 무거워 곧 끓어넘치기 직전의 아슬아슬함이 느껴져 매버릭은 아직 자기 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고 하지만 본능적으로 아이스와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는 게 찌통이다 ㅠㅠㅠㅠㅠ
[Code: 25a5]
2024.03.25 00: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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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매버릭 관사로 들어가지 그랬어 그냥 끌어안고 입맞추지 그랬어 그렇게 참고 참다가 매버릭이 날아가 버리면 어쩔건데 그렇게 마음을 접고 또 접다가 매버릭이 세상과 인간에게 공격받고 상처받아 절벽끝에서 새가 되어 뛰어 내릴때까지 그의 곁에 있어주지도 지켜주지도 못하게 되버렸잖아 뭐라도 해라 아이스 그냥 매버릭 안아버려 ㅠㅠㅠㅠㅠㅠ
[Code: 25a5]
2024.03.25 00:4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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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군만두 좋아해? 센세를 지하실에 모셔두고 글만 쓰게 하고 싶다 매일매일 어나더를 주셨으면 좋겠다 아이스가 매버릭에 대한 갈증으로 매순간 목이 타는 것처럼 센세의 어나더에 목매는 사람이 있다는걸 센세가 알아주면 좋겠어 아이스매브 얘들 언제 서로 사랑하게 될까? 둘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는걸까? 마음이 아프다 ㅠㅠㅠㅠㅠ
[Code: 25a5]
2024.03.25 01:1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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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미쳤다 센세 사랑해
[Code: b7f7]
2024.03.25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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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버릭 그나마 아이스 옆에 있으니 안정감이.느껴진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새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이스가 날개를 부러뜨려주면 나아질까
[Code: c1c7]
2024.03.25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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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장 한문장 손가락으로 더듬으면서 읽고 싶을 정도로 좋아…
[Code: 288c]
2024.03.25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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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오셨어요ㅠㅠㅠ 내 성실한 센세 오늘도 와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흑흑 드디어 아이스가 매브랑 만났다...
[Code: 80f1]
2024.03.25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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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편을 읽으니 알쏭달쏭했던 제목이 살짝 이해되는것같기도 해 과연 아이스는 자신이 '새' 라고 굳게 믿고있는 매버릭을 위해 어떤것까지 할수있을까......
[Code: 878d]
2024.03.25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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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웠어.” “이겼어?”ㅋㅋㅋ이 대화 너무 귀엽다 매브 진짜 애새끼같고ㅋㅋㅋㅋ아이스 인내심은 오지고ㅠ달콤한 향기가 나는 매브를 참다니ㄷㄷㄷㄷ 초반에 혼도랑 대화보면 둘은 결국 마음을 확인하거나 이어지진 못한거 같은데 저런상태의 매브를 아이스가 어케 도운건지 궁금하다 센세 사랑해!!!!!
[Code: bdf8]
2024.03.2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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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날겠다는건.. 또 뛰어내리려는걸까ㅠㅠ불안불안하다 매버릭의 모든게ㅠㅠ 아이스가 날개를 꺾어서 품안에 가뒀으면 좋겠다ㅠㅠㅠ 어서 매버릭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저런 증세가 심해진게 갱.뱅 당한 이후인거 같은데... 아이스가 복수해줬으면 제발ㅠㅠㅠ 상처를 치유해줄 사람은 아이스뿐이잖아 흑.. 센세 빨리 돌아와줘서 ㅋㅁ! 호텔에서 얼른 재회했으면
[Code: 6118]
2024.03.2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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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아니 새가 되면...ㅠㅠㅠㅠㅠㅠㅜ아 미쳤네 진짜
[Code: f709]
2024.03.25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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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브 자기가 인간이 아닌 새라고 말하면서도... 그 여린 비밀(이라고 믿는 것)을 아이스에게는 맘편히 털어놓을 수 있는게 너무 슬프면서도 짠하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4d41]
2024.03.25 17:44
ㅇㅇ
매편 마다 보면서 감정이 요동치고 내가 설레는거 이거 병인듯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5 유출본 보는거 같아요 선생님
[Code: 5ff4]
2024.03.25 21:05
ㅇㅇ
사랑스러운 매버릭이 겸연쩍고 부끄럽게 미소 짓고, 불쑥 몸을 들이밀며 꿀과 열대 과일 냄새를 풍기는데도 용하게 잘 참고 마지막까지 자기 집에 잠깐 들어오지 않겠냐는 매버릭의 제안을 거절한 아이스의 인내심이 대단하다.. 역시 미래 해군 태평양사령관이 될 재목은 달라! 하지만 나아매비는 아이스가 참고 참다 결국 이성이 끊어진 채 매버릭과 애절하게 사랑을 나누는 걸 보고 싶어 ㅠㅠ
[Code: 88fc]
2024.03.25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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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아이스는 매버릭과 밤새도록 대화한 뒤 아침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약속 장소에 오다가 본 호텔에 머물려는 거지? 매버릭이 자신을 인간이 아니라 새라고 생각한다는 비밀을 알았으니 아이스가 그를 어떻게 치유해서 고쳐 놓을지도 궁금해..
[Code: 88fc]
2024.03.25 23:2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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햐...우아한 유령...ㅠㅠ이때의 유령은 매브구나 외톨이 유령...ㅠㅠㅠㅠ그런데 이게 먹먹해지는게 현재 시점에서 유령은 아이스잖아ㅠㅠ저 시점에서 아이스가 외톨이 유령 매브를 불러내서 춤을 춘것처럼 현재 시점에서는 매브가 아이스를 불러서 춤을 출까 아니면 그냥 보내줄까ㅠㅠㅠㅠ가물가물하기는 커녕 아침에 본것처럼 매브의 얼굴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아이스도 아이슨데 매브ㅋㅋㅋㅋ재수없다니ㅋㅋㅋㅋ재수없다고 쓰고 존나게 잘생겼다고 읽는다 이건가ㅋㅋㅋ지금까지 울면서 읽다가 드디어 둘이 만나니 나붕 숨통이 다 트이는 것 같아서 웃음이 다 나옴ㅠㅠ시시콜콜한 일상대화를 하면서 존중받고 보호받는 느낌을 오랜만에 받는 매브에서 또 눈물이ㅠㅠ그런걸 해주던게 구스였는데...사라와 통화하면서 사라는 사랑한다고 하는데 같이 사랑한다고 하지않고 "그래" 해버리는 아이스 서늘해 죽겠다ㅠㅠ그에반해 매브가 졸려하니까 바로 핑계대며 이마로 체온을 재보다니 아이스 행동 하나하나가 간질거리면서 가슴떨립니다 센세ㅠㅠ
[Code: c378]
2024.03.25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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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예쁜 매븐데 꿀과 열대 과일향이라니 이건뭐 나잡아잡슈 인가ㅠㅠ아이스 머릿속에서 적색경보가 얼마나 요란하게 울려댔을지 오만번 이해감ㅜㅜ한밤중에 불러낸 일로 자책감느끼는 매브에게 "미첼, 난 운 없는 놈이 아니야.”<<<기립박수 오만번!!!!!ㅠㅠㅠㅠ
[Code: c378]
2024.03.25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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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만나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는 아이스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집에 들어오라고 하는 매브의 "어설프고 절박한 추파"를 아이스가 거절한게 선을 넘을 수는 없다는 단호함인줄 알았는데 밀당이었나요?ㅠㅠㅠㅠ아니 지금 거절하면 뭐합니까 매브가 부르면 한시간 뒤라도 나온다는데ㅠㅠ매브 추파는 거절하더니 대놓고 호텔 주소 건내는 밀당의 귀재 아이스맨ㅠㅠ
[Code: c378]
2024.03.25 23:5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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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디어 매브의 비밀을 그것도 매브 입으로 직접 듣게된 아이스...저 비밀을 듣게된, 게다가 "조만간 다시 날게 될 거야.” 이 말까지 듣게된 아이스가 어떻게 나올지ㅠㅠ저 말에서 왜 매브가 옥상에서 뛰어내렸는지 눈치챘을 것 같은데ㅠㅠ
[Code: c378]
2024.03.26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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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돌아버릴거같애 센세는 최고야
[Code: 0f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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