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81758748
view 16682
2024.01.25 06:2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3황자의 수작이었다는 것은 명확히 밝혀졌다고 했다. 3황자는 아니라고 버텼지만 3황자가 잡혀갔다는 소식이 퍼지고 다이키치가 묘사한 대로 마치가의 저택에서 꺼지지않는불길 술법이 담긴 다이아몬드를 깬 남자의 인상착의를 그려서 현상수배 포스터가 붙자 며칠이 지난 뒤에 3황자의 지시를 받고 XX 근처에서 루비를 깨서 몬스터 봉인을 풀고 마치다가의 저택 부지에서 다이아몬드를 깨서 꺼지지않는불길을 일으킨 자가 자수해 왔다고 했다. 그 자는 가족은 이미 피신시켜 놨고 3황자에게 받은 루비 조각들과 다이아몬드 조각 몇 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 루비와 다이아몬드에서는 3황자가 남긴 술법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3황자가 증거로 내밀기 위해 가지고 있던 블랙 다이아몬드 조각에는 노부가 썼던 암흑의파도의 흔적과 함께 3황자가 깨진 조각에 억지로 넣어놨던 꺼지지않는붉길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고 했다. 

3황자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처형되지는 않았다. 법정에서 사형이 선고된 후 황족 명단에서 지워지고 보석술사로서의 능력을 빼앗기는 순간 미처 버렸기 때문이다. 평생 황족의 일원이자 차기 황위에 가장 가까운 이로서 그리고 강력한 보석술을 다룰 수 있는 이로서 찬사만 받으며 자긍심과 자만심이 하늘을 찔렀을 텐데 그 자긍심의 원천이 모두 사라지는 순간 견디지 못한 모양이었다. 정신이 나가 버려서 자기가 왜 죽는지도 모르는 이를 처형하는 것이 올은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3황자는 특수감옥에 수감되었다. 

노부는 분한 듯했지만 마치다는 별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 찬란하게 빛나던 인간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평생 어두컴컴한 감방에서 살다가 죽을 거라는 사실은 세간에 널리 알려졌고 그 사건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아무도 노부와 마치다를 노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상관없었다. 





부모님과 형 부부에게는 본관 1층 한쪽에 별도로 임시 공방을 만들어 주었다. 마치다는 자신의 공방을 같이 써도 별 상관 없었지만 노부가 별관은 두 사람만의 공간으로 하고 싶은데 본관 한쪽에 임시 공방을 만들어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 공방이라고 해도 노부가 좋은 가구와 도구들을 잔뜩 넣어줬기 때문에 가족들도 고맙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고. 그래서 마치다가 여느 때처럼 아침을 함께 먹고 노부와 잠깐 산책을 한 다음 노부와 마치다만의 공간인 별관에 있는 공방에 들어와 한창 보석을 가공하고 있을 때였다. 한참 동안 집중하고 있다가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자 노부가 투명하게 빛이 나는 것 같은 맑은 블랙 다이아몬드를 들고 마치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해?"

그러자 노부가 다가와서 엄지손톱만한 블랙 다이아몬드를 꺼내더니 마치다의 손에 올려줬다. 그리고 그 다이아몬드 위로 손을 한 번 휘젓자 아무것도 없는 벽 쪽으로 빛이 쭉 뻗어나가더니 벽 위로 에메랄드와 작은 세공도구를 들고 확대경에 눈을 들여다댄 채로 집중해서 에메랄드를 가공 중인 마치다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와... 이게 영상 기록술이야?
"네."
"진짜 그대로 담기는구나. 영상구라고 하나? 여기에 얼마나 담을 수 있어?"
"가공이 잘 된 보석이라면 10분 정도도 가능할 거예요. 케이 가공 실력이면 더 길어질 수도 있고."
"진짜 신기하다. 되게 선명하게 담기네. 정말 내 모습을 내가 눈으로 보는 것 같아."
"케이의 아름다운 모습은 10분의 1도 안 담겼지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런 말을 하는 노부를 보면서 쑥스러워하던 마치다가 진짜 신기하다고 구경하고 있자 노부가 다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케이도 영상을 기록할 수 있어요."
"아... 그러면 수련해야 하잖아."

케이도 혼돈의 힘이 봉인되지 않아서 보석술을 쓸 수 있긴 했다. 하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보석술 수련을 안 했기 때문에 힘을 쓰려고 하면 혼돈의 힘이 새어나와서 검은 연기가 새어나왔다. 공식적으로 마치다의 힘은 봉인된 상태라 밖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기 때문에 힘을 쓰려면 수련을 해서 혼돈의 힘을 제어하는 것부터 익혀야 했다. 보석가공할 시간도 없는데. 

마치다가 이미 라소르의 광산에서 캐낸 보석들을 1차로 받았다는 소문이 돌면서 요즘 보석가공 의뢰가 쏟아지고 있었다. 공격술에 자주 쓰이는 루비나 치유술에 주력으로 쓰이는 에메랄드 가공 의뢰도 많았고 노부가 암흑의 보석술사라 블랙 다이아몬드 외의 다른 다이아몬드는 쓰지 않는다는 게 알려져 있기 때문에 다이아몬드 가공 의뢰도 많았다. 지금도 마치다는 치유술 전문 보석술사이자 마치다의 절친인 츠지무라를 위해 에메랄드를 가공하는 중이었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리고 있자 노부가 뾰족 나온 케이의 입술에 입을 촉 맞춰주고 달래듯 조근조근 말했다. 

"수련하지 않아도 돼요. 전에 약속했잖아요. 보석술을 쓰지 못하는 사람도 영상구를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겠다고."
"방법 찾았어?"

마치다가 눈을 크게 뜨고 놀라서 바라보자 노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블랙 다이아몬드를 하나 내밀었다. 

"영상 저장술을 이미 보석에 담아놔서 조금 강하게 누르기만 하면 누구든 영상을 저장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와아! 우리 노부 천재다!"

나도 예쁜 노부 찍어줄 수 있다!

마치다가 신나서 노부를 꽉 끌어안고 입술에 입을 촉촉 맞추자 노부도 빙긋 웃더니 마치다에게 입을 맞춰왔다. 신난다, 신난다! 마침 축제가 이제 정말로 코 앞이었다. 축제에서 예쁜 노부 많이 찍어놔야지. 마치다는 4대 보석 중에는 제일 수요가 없는 사파이어들을 꺼내서 노부에게 영상 저장구로 만드는 술법을 담아달라고 했고 그 술법을 배워서 마치다도 몇 개 만들기도 했다. 영상 저장구를 만드는 동안 검은 연기가 폴폴 나왔지만 어차피 보는 사람은 노부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수확제가 다가왔다.


*****


그동안 부지런히 만들어 놓은 영상구용 사파이어를 잔뜩 챙긴 케이는 의기양양하게 스즈키의 팔짱을 끼고 오늘 수확제를 기대하라며 재잘거렸다. 얼마 전에 야오토메 가의 장남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서 뭔가 열심히 물어보더니 축제를 즐길 수 있는 팁을 잔뜩 들었다며 으스거렸다. 자기도 수확제를 많이 안 다녀봤고 친구들 중에도 축제를 즐기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축제광이라는 야오토메에게 팁을 얻었다고. 

"그 사람은 보석술사도 아니면서 장신구를 되게 많이 하고 다니더라고."
"그렇죠."

확실히 야오토메가의 장남은 사람이 반짝반짝했다. 미남이기는 해도 사람 자체가 반짝거리는 것처럼 아름답다는 말이 아니고 장신구가 웬만한 보석술사들보다 더 많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브로치 새로 하나 만들 수 있게 새끼손톱만한 사파이어 두 개 예쁘게 가공해서 줬더니 진짜 고급 팁을 잔뜩 풀어줬어."
"기대할게요."
"나만 믿어!"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말한 케이는 정말로 좋은 팁을 잔뜩 얻어냈는지 미리 짜 둔 노선대로 움직이며 수확제를 한껏 즐기게 해 줬다. 꼬치구이는 수확제 노점 거리에 들어서서 왼쪽에서 세 번째 있는 꼬치구이 노점이 제일 맛있는데 그 중에서도 닭고기를 쓴 게 제일 맛있고 매운 양념보다는 짭짤한 양념이 일품이라고. 야오토메가의 장남이 맛을 보장했다는 그 노점의 꼬치구이는 정말 맛있어서 자극적인데도 불쾌하게 자극적인 맛이 아니라 미각이 살아나는 듯한 맛이었다. 소스가 흐를까 봐 조심해서 먹고 고개를 들자 케이는 꼬치구이는 안 먹고 블랙 사파이어를 들고 영상구에 스즈키를 담고 있었다. 

"케이?"
"헤헤. 우리 노부는 꼬치구이 먹는 것도 예쁘네."

민망해서 웃자 케이는 스즈키의 입술에 입을 촉 맞추더니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슬쩍 핥고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 집 꼬치구이 소스가 맛있네."

당장 케이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이 축제가 끝날 때까진 기다려야지. 

그 후로도 이번 사육제에서 나오는 극단 중 가장 볼만하다는 극단에서 연극도 보고 야오토메가의 장남이 말해준 시간에 그가 말해준 찻집에 가서 하루에 두 번 공연하는데 수확제 기간에만 네 번 공연한다는 악사의 공연 시간에 맞춰 음악을 들으며 차와 다과를 즐기기도 했다. 수확제에 나오는 모든 노점이 어차피 다 작정하고 바가지를 씌우지만 가격 대비 가장 예쁘고 쓸만한 걸 판다는 장신구 노점에서 기념품을 하나씩 사기도 하고 케이가 말했던 과일사탕도 사 먹었다. 설탕을 입혀서 굳힌 거라 과일은 새콤해야 맛있다고 했기 때문에 스즈키는 블랙베리를 케이는 블루베리를 골랐다. 돌아다니는 내내 케이가 스즈키를 찍었지만 스즈키가 과일사탕을 먹지 않고 기다리자 케이가 먼저 과일사탕을 깨물었다. 그리고 스즈키는 그 틈에 얼른 블랙 사파이어를 들고 케이를 찍었다. 케이가 과일사탕을 깨물어먹으며 한쪽 눈을 찡긋해 윙크를 하는 것까지 영상 저장을 마친 스즈키는 케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블루베리 맛있네요. 나도 블루베리로 할 걸 그랬나."

케이의 웃음소리가 명랑하게 길거리로 울려퍼졌다. 





그렇게 한껏 수확제를 즐기며 데이트를 한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등을 파는 거리였다. 케이가 어렸을 때는 불꽃놀이를 했었다고 하는데 몇 년 전부터는 풍등을 날리는 걸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래서 어른이 되고 나서는 수확제를 와 보지 않은 케이도 한 번도 풍등을 날려 본 적은 없다고. 역시나 야오토메가의 장남에게 가장 예쁜 등을 파는 노점이라고 추천받은 곳에 와서 예쁜 등을 하나씩 산 두 사람은 풍등 노점 거리에서 이어지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케이와 언제까지 행복하게 살게 해 달라고 빌어야지. 

스즈키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케이가 풍등을 띄우는 걸 먼저 기록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케이가 풍등에 불을 붙이고 양 손으로 든 다음 신나서 띄우는 걸 블랙 사파이어에 저장하고 있을 때였다. 케이는 불이 붙어서 위로 떠오르는 풍등을 하늘로 보내며 환하게 웃었다. 

"노부랑 나랑 앞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자."

응?

스즈키가 케이를 바라보자 풍등이 둥둥 높이 떠오르는 걸 바라보고 있던 케이가 스즈키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케이, 풍등 띄우면서 기원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누구한테?"
"네?"
"뭐 누구한테 기원해. 하늘한테?"

어... 그냥 딱히 종교가 없어도 이런 건 그냥 기원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우리가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살자! 다짐하고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살면 되지."

그러고보니 케이는 어릴 때도 그랬었다. 스즈키는 어릴 때도 딱히 믿는 신도 없었지만 매일 케이가 스즈키와 몇 시간 동안 놀다가 다시 울타리 밑으로 쇽쇽 기어나가는 걸 보면서 항상. 

'내일도 케이가 날 보러 오게 해 주세요.' 

그렇게 빌었었는데. 케이는 달랐다. 스즈키가 보석술사로서의 능력이 너무 약하고 힘이 너무 약해서 말도 통하지 않는 할머니와 외롭게 산다는 걸 알았을 때도, 몇 달 만에 찾아온 외삼촌에게 맞았다는 걸 알았을 때도. 

'노부가 강해지게 해 주세요!' 라고 비는 대신. 

'노부, 형아가 노부 진짜 강한 보석술사로 만들어줄게' 라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그 다짐을 지켰다. 

그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 같은 거에게 우리의 행복을 기원하는 대신,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살겠다고 다짐하고 그걸 지키면 되지. 그래서 스즈키도 케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영상구를 들고 찍어주는 동안 풍등을 띄우며 다짐했다. 

"케이랑 앞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자."

그게 정답이라는 듯 스즈키가 풍등을 날리는 동안 영상저장을 한 케이가 스즈키의 입술에 입을 촉 맞춰왔다. 상을 주는 것처럼.





두 사람은 그날의 다짐을 착실하게 잘 지켜나갔다. 두 사람이 침실에 마련한 투명 장식장 안에는 'xxxx년 수확제에서 노부' 'xxxx년 수확제에서 케이'라는 영상구들 옆으로 'xxxx년 보석 가공 중인 케이' 'xxxx년 멋지게 방어술을 수련 중인 노부' 'xxxx년 xx월 소풍에서 케이' 'xxxx년 xx월 소풍에서 노부' 'xxxx년 쿠로사와와 야오토메의 결혼식에서 케이' 'xxxx년 츠지무라와 미야무라의 결혼식에서 노부' 'xxxx년 수플레를 만드는 케이' 'xxxx년 정원에 꽃을 심는 노부'하는 영상구들이 차곡차곡 늘어가기 시작했고. 





몇 달이 더 지났을 때. 많이도 늘어난 영상구들 옆으로. 

'xxxx년 햇빛 찬란한 날 우리를 찾아와 준 우리의 소중한 아가 이치로' 라는 영상구가 생겼다. 





#놉맟    #암흑의대공혼돈의가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