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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6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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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다는 이 결혼이 계약인 만큼 계약서 작정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고 결혼식 준비에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놀랍게도 계약서는 아주 간단했다. 

- 스즈키 노부유키는 마치다 케이타 소유의 광산 및 마치다 공방 소유의 보석을 거래할 때 시세에 맞춰서 마치다 가와 합의한 가격으로 구매한다. 

당연히 이 부분은 마치다의 부모님과 형이 두손 들어 환영했다. 3황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마치다를 강탈당할 위기일 때도 황실에서 보석 가격을 후려칠 걸 각오하고 있었는데 황실보다 더 부자일 거라는 소문이 도는 스즈키 노부유키는 돈이 많아서인지 사람이 된 사람(?)이기 때문인지 정정당당한 가격에 구매하겠다고 했으니까. 

- 마치다 케이타는 스즈키대공가에서 스즈키 노부유키와 함께 생활할 것이며, 결혼 생활의 종료 외의 모든 것은 마치다 케이타가 자유로이 정할 수 있다. 

지나치게 마치다에게만 유리한 내용이었다. 비록 마치다가 블랙 다이아몬드 광산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긴 해도 스즈키 대공은 아마도 그 광산 때문에 청혼한 건 아닐 것이라. 아마도 20년 전의 그때 나눴던 우정이 스즈키가 마치다를 품게 했겠지. 그러고보니 처음에 라소르제국에서 약속했던 보상은 4대광산 소유권이었다. 라소르의 태자는 태자비를 지극히 아끼는지 태자비의 각성을 영구히 막아주기만 하면 뭐든 다 줄 기세였지만 어차피 라소르제국의 뭔가를 준다고 해도 라소르제국에 갈 일이 없는 마치다로서는 처치곤란이기도 했다. 보석광산이 아니면 애초에 의미가 없기도 하고. 때문에 라소르의 태자는 4대광산 소유권을 넘겨주되 관리는 지금처럼 자신이 철저히 해서 광산 관리 때문에 속 썩을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었는데. 

그런데 블랙 다이아몬드 광산은 왜 갑자기 추가된 걸까? 

그때는 태자비의 각성을 막아주고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머리가 잘 안 돌아가서 그냥 왔는데. 

마치다가 옆에 있는 스즈키 대공을 미섬쩍게 바라보자, 스즈키 대공은 고개를 슥 돌려서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왜 그러시오?"

결혼 계약은 아주 단촐했지만 스즈키 대공가에서 결혼식은 아주 성대하게 올리고 싶어했기 때문에 결혼식 준비에 시간이 걸려서 마치다는 그 틈에 미리 스즈키 대공가를 방문해서 집을 둘러보고 있었다. 계약뿐인 결혼이라는 걸 황실 쪽에서 알게 되면 3황자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같은 침실을 써야 한다는 건 조건이 별로 없는 이 결혼에 걸려 있는 몇 안 되는 조건 중 하나였다. 그래서 앞으로 살 집을 보러 온 건데. 

"침실이 마음에 안 드시오?"

마침 두 사람은 두 사람이 함께 쓸 침실에 와 있었는데 침실은 아주 좋았다. 집이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색감인 건 암흑의 대공 집이니 그러려니 했는데 결혼을 한다고 집을 급히 꾸미고 있는지 거실이나 식당 등 몇몇 곳은 급히 화사하게 꾸미려 한 흔적이 보였다. 커튼 색이 묘하게 튀거나 전체적으로 무채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서재에 혼자 화사한 색을 자랑하는 등이나 화병이 놓여 있거나. 

그러나 침실은 특별히 신경써서 꾸몄는지 혼자 튀는 장식 하나 없이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차분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동향! 아침에 눈 뜨면 바로 햇살이 쏟아지는 위치에 놓인 침대! 어린 시절부터 마치다가 늘 꿈꾸던 침실이었다. 

"마음에 들어요. 어릴 때부터 아침에 눈 뜨면 햇빛이 쏟아지는 침대를 원했거든요."
"지금 집의 침실은 안 그렇소?"
"네, 우리 집은 위치는 좋은데 방향이 좀 별로라. 그리고 동남향 방은 부모님 침실이고. 몇 년 전에 대대적으로 집 공사를 하긴 했는데 그때 공방을 내 뜻대로 만드는 대신 침실은 양보해야 했거든요. 나만 사는 집도 아니니까. 그런데 여긴 너무 좋다."

침대로 다가가서 침대를 꼼꼼히 확인하고는 창가로 가서 얇은 미색의 커튼을 걷자 가리는 게 없어서 햇살이 환하게 쏟아지는 정원이 바로 보였다. 이 정도면 마치다가 어릴 때부터 늘 바랐던 환한 아침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입술이 계속 실룩거렸다. 

"너무 좋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마치다를 바라보고 있던 스즈키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다가 청혼을 승락한 이후 내내 보는 사람의 가슴이 술렁일 정도로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대공과 눈을 마주치고 있던 마치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마음 속에 차오르는 의문을 눌렀다. 

"보여줄 곳이 한 군데 더 있소."

이미 집 안은 전부 다 봤다. 대공가에서 마치다를 위해 만들어 준 서재는 물론이고 마치다가 들어갈 일이 있을까 싶은 스즈키 대공의 집무실과 개인 서재도 봤다. 더 볼 곳이 있나? 

그리고 대공은 마치다를 데리고 저택을 나가서 옆에 붙어 있는 단층짜리 건물로 안내했다. 이 건물은 단층이었지만 건물의 면적은 아주 넓었고 상록수들이 가득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데 이 숲 자체가 결계인지 숲을 통과하는 순간 뭔가 막 같은 걸 통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어...?"

마치다가 흠칫 놀라자 스즈키 대공이 돌아보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결계가 있소."
"그럼 대공 전하와 함께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나요?"
"그대 혼자도 드나들 수 있소."
"제가요?"
"그렇소."
"제가 어떻게요?"

스즈키 대공은 마치다의 왼손을 들고 여전히 스즈키 대공의 반지를 끼고 있는 마치다의 손가락을 살짝 들었다. 

"이 반지에 결계를 통과할 수 있는 술법이 걸려 있소."
"어... 그럼 이걸 절 줬으니까 대공 전하는 이제 혼자 못 왔다갔다해요?"

마치다가 눈을 깜박거리며 묻자 스즈키 대공은 피식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왼손을 들어 보였다. 그 왼손에는 마치다의 것과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어?"
"처음부터 쌍으로 만든 반지였소."
"그러고보니까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요. 그날 밤에 대공 전하가 끼고 계시던 반지를 절 주신 거 아니에요? 저보다 마디가 굵어 보이시는데 어떻게 이 반지가 제 손가락에 딱 맞죠?"
"처음부터 그대를 위해 만든 반지니까."

날 위해 만들었다고? 

마치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쳐다보고 있자 스즈키 대공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마치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20년 전에 내가 당신을 잊어버린 후에도 계속 당신을 잊은 친구를 그리워했던 걸까. 차마 그걸 묻지는 못해서 마치다는 다른 말을 했다.

"... 반지를 착용자에 맞춰서 크기를 조절할 수 있어요?"

스즈키 대공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걸 보면서 마치다는 괜히 입술을 삐죽거렸다. 

"보석술사들이 그런 걸 다 할 줄 알면 우린 뭐 먹고 살라구."

그러자 스즈키 대공은 달래듯 다정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아무리 잔재주로 크기 따위를 조절한다고 해도 보석가공사들이 정성스럽게 가공한 것만 하겠소. 우리는 보석을 쓸 줄만 알고 가공할 수는 없으니 그대와 보석가공사들이 소중한 것이오."

같이 싸우자고 꺼낸 말은 아니었지만 괜히 민망해서 투덜거리는데도 그냥 다 받아주니까 더 민망해졌다. 그래서 마치다가 앞으로 휙휙 가 버리자 스즈키 노부유키는 빨리 걷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성큼성큼 걷는데도 금세 마치다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스즈키 대공이 열어준 건물의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문을 열자 아늑하게 꾸며진 응접실이 보였고 문이 4개 보였다. 

"여긴 뭐예요?"
"저 안쪽에 있는 문 2개는 화장실과 욕실이오. 보시겠소?"
"네, 좋아요."

화장실과 욕실은 본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둘러보기만 한 뒤에 스즈키 대공이 안내한 곳은 마치다가 꿈꾸던 공방이었다. 

마치다 가에서도 공방으로 버는 수익이 작지 않지만 그럼에도 큰맘을 먹어도 사기 힘들 정도로 비싸서 사지 못했던 최고급 보석가공 장비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 하루 종일 앉아서 작은 렌즈를 들여다보면서 손을 섬세하게 움직여야 하는 직업 특성상 무리가 가는 눈과 허리, 어깨, 팔, 손을 보호하기 위해서 편안한 의자와 보석가공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가공용 렌즈 및 도구들이 갖춰져 있었다. 침실과 마찬가지로 빛이 잘 드는 창도 있었고, 빛 차단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쉽게 빛을 차단할 수 있게 얇은 커튼과 함께 암막 커튼도 걸려 있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꿈꿨던 공방이 있었어요."
"..."
"보석을 가공하다가 피곤해지면 언제라도 누워서 쉬면서 뒹굴뒹굴할 수 있게 편안한 소파도 있고."

마치다가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놓인 푹신하고 편안한 소파를 바라보다가 섬세한 장식이 새겨져 있는 투명한 장식장을 바라봤다. 먼지 한 톨 들어갈 수 없게 덮개가 달려 있는 투명한 장식장은 평범해 보이지만 공방이 있는 별관 자체가 결계로 둘러싸여 있는 걸 보면 저 장식장의 보안도 뛰어난 수준이리라. 

"내가 작업한 보석들을 바로 볼 수 있는 장식장이 눈앞에 있고."

마치다 가의 공방에는 금고실이 따로 있기 때문에 작업 준비 중인 보석이나 가공이 끝난 보석은 항상 금고실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가공할 수 있게 해 주는 섬세하면서도 튼튼한 장비나 편안한 의자와 책상."

다시 봐도 놀라운 가공 장비들과 책상, 소파를 바라보던 마치다는 상록수들밖에 없어서 푸르고 푸른 숲, 그리고 숲과 별관 사이에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앞에 정원이 있어서 걷고 싶을 때 바로 나가서 걸을 수 있는 나만의 공방."

그리고 마치다는 마치다가 어린 시절부터 꿈꿨던 공방을 눈앞에 그대로 재현해 놓은 스즈키 대공을 바라봤다. 

"내가 그때... 그런 말도 했었어요?"

스즈키 대공은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아침 햇살이 침대로 쏟아지는 밝고 환한 침실이 좋다는 말도?"

스즈키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가 대공에게 뭘 해 줬길래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줘요?"

스즈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마치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나의 유일한 친구였고..."
"..."
"그대는 나를 암흑의 술사로 만들어준 이고..."
"..."
"그대는 나의 목숨과 나의 삶을 구한 구원자요."

마치다는 목에 걸린 목걸이의 블랙 에메랄드 팬던트를 꼭 쥔 채 스즈키 대공과 눈을 마주치고 물었다. 

"내가 모든 걸 다 잊어 버려서...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요?"
"원망한 적 없소."
"그 추억 속에 당신만 혼자 남겨놔서... 외롭지 않아요?"

스즈키는 아무 말 없이 마치다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대와 함께할 시간이 그때 그 시간들만큼 아름답고 소중할 테니 이젠 외롭지 않을 것이오."

스즈키 대공은 웃고 있었지만 마치다는 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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