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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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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 좋은 와인이었기 때문인지 다음 날 숙취를 각오하고 눈을 떴는데 머리는 맑았다. 게다가 마치다는 늘 보석을 눈 앞에 대고 가공하는 일을 하기 때문인지 눈이 침침하고 어깨와 팔, 허리가 아픈 게 늘 기본 상태였는데 어쩐지 눈앞도 맑아진 기분이고 팔, 다리, 어깨와 허리에도 힘이 팔팔했다. 보석가공 일을 시작하고 난 이래로 처음으로 몸이 너무나 가뿐한 게 신이 난 마치다가 기분좋게 식당으로 들어가자 식탁 앞에 앉아 있던 가족들은 눈밑이 시커매진 얼굴로 마치다를 돌아봤다. 그리고 아버지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짜증과 분노 같은 게 드글드글한 얼굴로 마치다를 노려봤다.

"광휘의 황자가 싫다고 한 게 암흑의 대공과 사귀는 사이라서였느냐."
"...예?"

막 의자에 앉으려던 마치다가 의자 등받이를 잡은 채 굳어 있자 바로 옆자리에 있던 형이 의자를 빼서 마치다를 앉혀주고 마치다의 왼손을 톡 건드렸다. 

"형은 우리 동생 덕분에 블랙다이아몬드 처음 봤다."
"어...?"

이게 왜 여기에 있지? 

그러고보니 어제 마차에 태워준 스즈키 대공에게 반지를 빼 주려 했을 때 스즈키 대공이 내일 마치다 가를 방문할 테니 망토와 함께 돌려달라고 했었다. 

- 그래도 될까요? 이거 귀한 걸 텐데.
- 블랙 다이아몬드 연구하고 싶지 않았소? 가서 좀 살펴봐도 되니까 오늘은 가지고 가시오.
- 그럼... 감사합니다. 

그때의 대화와 함께 지난 밤에 테라스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광휘의 황자를 소개해 주겠다는 아버지와 광휘의 황자 본인을 피해서 도망다니다가 구석의 테라스로 숨었더니 그곳에는 잘 차려진 차가운 음식 한 상과 시원한 화이트 와인이 한 병 있었다. 주인도 모르고 먹어치운 건 지금 생각하면 너무 이상했다. 원래 남의 걸 탐내는 사람이 아닌데 어제는 왜 그렇게 주인도 모르는 음식을 먹어치웠을까? 아무리 배가 고팠다고 해도. 

게다가 그 음식의 주인이 하필이면... 

마치다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새카맣던 남자를 떠올렸다. 웃음기 하나 없던 냉랭하고 차가운 얼굴과 블랙사파이어, 블랙오팔, 블랙스피넬, 블랙펄, 블랙에메랄드, 블랙루비, 블랙다이아몬드 등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는데도 온통 블랙스톤뿐어서인지 반짝반짝 빛나기보다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위압적이던 남자를.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다정하게 느껴졌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애틋함과 그리움까지 느끼게 하던 남자를.

"이 반지..."

형은 보석가공 일을 정말 좋아하고 보석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마치다가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블랙다이아몬드 반지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즈키 대공은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냐?"
"어제부터요?"

정말로 마치다는 전날 밤 그 테라스에서 스즈키대공을 처음 봤는데 아버지는 마치다가 반항한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엇다. 

"어쨌든 네가 옷은 풀어해치고 스즈키대공의 옷을 걸친 채로 스즈키대공 품에 안겨서 나왔으니..."
"...!"

그제야 어제 취해서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어렴풋이 떠올린 마치다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제 할말만 하고 계셨다. 

"어제 연회장..."

아버지가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쉬자, 천생 보석가공사라 블랙 다이아몬드에 정신이 팔려 있던 형이 정신을 차리고 설명을 해 주었다. 

"어제 네가 스즈키 대공과 함께 나온 걸 보고 3황자 전하가 굉장히 불쾌해하셨다."
"... 그래서요?"

형의 설명은 이랬다. 3황자가 평소에 늘 젠틀하고 온화하며 부드러운 모습과 달리 굉장히 불쾌한 얼굴로 살벌한 분위기를 풍겼었다고 한다. 평소에 워낙 광휘의 황자라고 치켜세워지며 찬사를 듣고 있는 사람이라 늘 그에 맞는 모습만 보여주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잔인하고 살벌한 분위기에 연회장에 있던 이들은 마치다 케이타가 암흑의 대공 품에 안겨나온 걸 봤을 때만큼이나 3황자의 모습에도 놀랐다고 했다. 살벌하고 오만하고 냉정한 인간인 줄 알았던 암흑의 대공이 젠틀하고 상냥하게 누군가를 품에 안고 나오는 것도 놀랐고 젠틀하고 온화하며 우아한 사람인 줄 알았던 광휘의 황자가 얼굴이 추하게 일그러지는 것도 모르고 날것의 분노를 그대로 내보이는 것에도 놀랐다고. 

"그런데 상대가 상대인지라, 3황자 전하도 우리에게 뭔가 해꼬지를 할 생각은 없는 것 같더라. 암흑의 대공이 좀 곤란해질지도 모르겠는데."

스즈키 대공은 마치다에게 3황자와 결혼하지 않게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스즈키 대공을 도와달라고 했었다. 그 도와달란 일이 뭔지도 모르는데 우리집도 곤란해지려나. 마치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주스잔을 들려고 하자, 아버지가 하인들을 불렀다.

"잘됐다. 안 그래도 널 깨우려 했는데."
"... 왜요?"

결국 마치다는 주스도 제대로 못 마시고 다시 식탁에서 일어나야 했다. 아버지가 스즈키대공이 방문하기로 한 시간이 곧이니 얼른 가서 준비를 하라며 몰아냈기 때문에 마치다는 빈속으로 욕실로 다시 밀려들어가야했다. 그리고 전날처럼 또 가족들과 하인들에게 단장받는 시간이 돌아왔다. 어제는 광휘의 황자에게 선을 보이기 위해서, 오늘은 암흑의 대공에게 선을 보이기 위해서...

어제는 광휘의 황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마치다도 온통 보석으로 치장했었다. 마치다가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 사파이어, 루비 광산의 소유주가 되기도 했으니까 아버지와 형은 4대 보석 중 큼지막하고 깨끗하고 맑은 것들로 골라서 큰맘먹고 직접 예쁘게 가공까지 해서 귀걸이와 반지 팔찌, 목걸이, 브로치와 부토니에까지 풀세트로 맞춰줬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지금 암흑의 대공에게 잘 보여야 된다고 생각한 형과 아버지는 어제 어둠의 술사가 마치다의 어깨에 직접 달아줬던 블랙다이아몬드와 마찬가지로 마치다의 손가락에 직접 끼워준 블랙다이아몬드 반지만 빼고 모든 보석을 다 치웠다. 아버지와 형은 경력이 무척 길고 업계에서 솜씨도 높이 인정받고 있는 보석가공사들이라 검은 보석이 없지는 않았다. 에메랄드나 루비는 자연상에 검은색이 존재하지 않기에 블랙에메랄드나 블랙루비는 없지만 블랙사파이어나 오팔, 스피넬, 크리스탈, 비치 같은 건 마치다 가문의 공방에도 있었다. 

그러나 마치다는 아버지와 형이 준비한 검은보석들을 다 밀어내고 (돌려줘야 할) 검은 다이아몬드들만 착용했다. 착용했다고 해도 반지는 어째서인지 마치다의 손가락 굵기에 딱 맞아서 계속 끼고 있었고 어깨에 블랙다이아 브로치만 착용한 거지만.

"그래도 목걸이라도 하지 그래?"

형이 블랙 사파이어 목걸이를 걸어주려 했지만 마치다는 고개를 저었다. 

"목걸이 있잖아."

마치다가 어린 시절 이후로 늘 하고 다니는 블랙 에메랄드 목걸이를 들어보이자 형도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늘 하고 다니지만 평소엔 옷속에 넣어 다니니까 까먹은 모양이었다. 마치다는 잘 때도, 씼을 때도 늘 하고 다니는 목걸이라 잊을 수 없지만. 

누가, 언제, 왜, 어디서 준 목걸이인지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도. 

마치다는 10살때 이후로 이 블랙 에메랄드 목걸이를 푼 적이 없었다. 





암흑의 대공은 마치다의 어깨에 꽂혀 있는 블랙 다이아 브로치와 마치다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블랙 다이아 반지, 그리고 마치다의 가슴께에서 반짝거리며 시선을 잡아끄는 블랙 에메랄드 목걸이를 찬찬히 훑어 본 다음 마치다와 눈을 마주쳤다. 

"스즈키 대공 전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명해 주시죠."
"설명?"
"왜 내가 스즈키 대공 전하와 결혼할 거란 소문이 퍼졌는지 말입니다."
"그건 그대가 옷을 반쯤 풀어해친 채 내 옷을 걸치고 내 품에 안긴 채로 테라스를 나와서."
"그러니까!"

마치다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물었다. 

"왜 그러셨느냔 겁니다."
"그대가 3황자와 결혼하기 싫다고 하지 않았소. 그래서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지."

어... 그러고보니?

[어떻소. 내가 그대를 돕고, 그대는 나를 돕고 ...만 하면 되니까 걱정할 것 없소.]

설마 그...가 결혼이었어? 내가 자기랑 결혼하면 광휘의 황자랑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당연히 그렇겠지. 이 나라는 중혼이 불법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이 사람이랑 결혼하기 싫다고 저 사람이랑 결혼하면 되다니, 애냐, 애야? 난 모르는 사람이랑 결혼하기 싫은 거라고!

"제가 어제 그 말도 하지 않았습니까? 난 모르는 사람과 이익 때문에 결혼하는 건 싫다고요. 난 3황자가 싫은 게 아니라, 아니 그 사람이 싫은 것도 맞지만 아무튼 이런 식으로 거래처럼 결혼하는 게 싫은 겁니다. 3황자가 '황자'라서 싫은 것도 맞고, 총체적으로, 여러 모로 꺼림칙한 느낌의 인간이어서 실은 것도 맞지만 이건 그냥 내 편견이니까 뭐. 아무튼. 난 3황자가 싫은 게 아니라 이런 결혼이 싫은 겁니다."
"그럼 그대가 모르는 사람이 아니면 괜찮나?"

그건 또 아니지만... 

"그렇든 아니든, 전 스즈키 대공을 모르고, 스즈키 대공 역시 제가 누군지 모르시잖습니까. 그 다음을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난 그대를 알고 있었소. 이전부터. 그대와 만난 적도 있고."

마치다 케이타는 팔짱을 끼며 스즈키 대공을 노려봤다. 평소와 달리 블라우스 위로 빼 놓은 블랙 에메랄드 팬던트가 팔을 스치는 감각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언제 만났는지 묻지도 않소?"
"내가 10살이 되기 이전에 만났다고 주장할 셈이시겠죠. 어차피 내게 10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는 건 나한테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들어봤을 이야기인데 대공 전하는 못 들어보셨습니까?"
"딱히 들어본 적은 없소."
"누구나 아는 소문인데 그런 소문조차 못 들어보셨다면 제게 그 정도의 관심도 없다는 말 같은데요. 제가 왜 제게 그 정도의 관심조차 없는 분과 결혼을 해야 할까요?"
"난 그대가 어린 시절 기억을 잃었다는 정보를 굳이 들을 필요가 없었소."
"그러니까 그 정도의 관심도 없으면서 왜 저와 결-"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 네?"
"난 그대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마치다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새카만 남자, 암흑의 술사를 빤히 바라봤다. 내가 정말 저 얼굴을 봤었나?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인지 어딘가 그리운 느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운 느낌과 애틋한 느낌은 어제부터 느꼈다. 그러나 그리운 것 같은 느낌일 뿐이었다. 마치다는 정말로 10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 

부모님과 형의 말에 따르면 마치다 케이타는 10살 때 새 친구를 사귀었다며 종종 혼자 놀러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또 친구와 놀고 오겠다며 나간 마치다가 집에 안 돌아와서 온 가족이 다 나와서 샅샅이 뒤졌는데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고.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는데 수도를 둘러싼 성벽을 수비하는 수도경비병들이 교대를 하기 위해 경비병 초소에 들어가자 초소 내 소파에 마치다가 얌전히 눕혀져 있었다고 했다. 기절해 있어서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의사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만 해서 모두의 속이 타들어가길 열흘. 열흘 후에 깨어난 마치다는 10살 때까지의 모든 기억을 다 잊은 상태였다고. 

그때 마치다 케이타의 목에는 가족들도 생전 처음보는 블랙 에메랄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 언제부터?"

암흑의 대공의 새카만 옷과 단단한 팔뚝, 탄탄한 허리와 마디가 굵은 손가락, 각지고 다부진 턱 위로 이어지는 귀까지. 스즈키 대공은 자신의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보석들처럼 모든 빛을 다 흡수하는 것 같은 새카만 눈으로 마치다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기억을 잃었던 바로 그 순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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