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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2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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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다는 3황자가 연회장에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숨어 들어갔다. 광휘의 황자로 불리는 3황자는 현재 라센느제국 황실에서는 가장 강한 힘을 지닌 보석술사고 라센느제국 전체로 볼 땐 두 번째로 강한 술사였다. 황실의 피를 잇지 않은 자는 황제가 될 수 없는 법령이 있기에 라센느제국의 최강자가 반역이라도 일으키지 않는 한 차기 황제는 3황자일 것이다. 그런 자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어 연회 초대를 거절하진 못했지만 어차피 마치다 케이타를 콕 찍어 부를 핑계도 없는 상황이라 3황자는 보석술사 가문들과 보석가공사 가문들을 파티에 전부 초대했다. 마치다 가는 보석술사들이 쓰는 보석가공업계에서 이름 높은 집안이지만 귀족도 아니었고, 마치다 가의 가주는 엄연히 아버지다. 소가주는 당연히 형이고. 그러니 마치다 케이타를 콕 찍어서 얼굴 좀 보자 행패를 부리지는 못하리라. 

대체 누가 소문을 냈는지 마치다 케이타가 신성 라소르제국의 황실에서 4대보석-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광산을 받았고, 검은 다이아몬드 광산도 하나 받았다는 소문이 마치다가 미처 고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이미 라센느제국 전체에 퍼져 있었다. 덕분에 언제나 보석 수급 때문에 허덕이는 보석술사들 가문이 전부 마치다 케이타에게 청혼서를 넣은 걸 알고는 까무러칠 뻔했다. 게다가 그 '전부'에는 광휘의 황자까지 포함돼 있었으니. 그래서 연회장 내에 마치다 케이타를 노리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기에 마치다 케이타는 도망치지 않는 척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재빨리 구석에 있는 테라스로 숨어들어서 테라스 밖으로 나간 뒤 밖에서 문을 잠가 버렸다. 이런 식으로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머리를 울리게 하던 음악소리와 코를 마비시키는 것 같던 향수 냄새 그리고 눈을 어지럽게 하던 화려한 옷들이 사라지자, 그리고 무엇보다 마치다 케이타를 알아보고 어떻게든 다가오려 하던 이들의 마수에서 벗어나자 그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 계속 피할 수 없지만... 

마치다 케이타의 고국인 라센느제국은 보석술사들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황실에서 차기 황제를 정할 때도 태어난 순서나 타고난 핏줄이 아니라 보석을 다루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정해질 정도였으며, 검과 활, 창과 방패를 든 일반 군대도 있지만 보석술사들로만 구성된 보석술사단이 훨씬 더 높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보석술사들은 자신에게 맞는 보석을 통해서 마법을 쓸 수 있었고, 그 위력은 일반 군대의 병사들이나 장군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했다. 

그래서 문제였다. 

보석광산을 받더라도 가넷이나 뭐 석영광산, 옥광산같은 거였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하필이면 모든 보석들 가운데 가장 핵심이고 라센느제국에서도 4대보석으로 꼽는 보석들의 광산이었다. 주로 쓰는 스킬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서 메인으로 사용하는 보석이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보석술사들이 저 네 가지 중 하나는 반드시 사용하게 돼 있는 터라 더더욱. 뛰어난 보석술사들은 수입이 엄청난데도 버는 돈을 모두 보석 구매와 연마에 쏟아부어야 하는 보석술사들은 모두 마치다 가문을 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사람과 이렇게 상대의 이익을 위해 팔려가듯 하는 혼인을 원치 않는 마치다 케이타의 심정을 이해했지만 라센느제국에서 살아가는, 그것도 보석술사들과 척을 질 수는 없는 보석가공사 집안의 가주로서 무조건 혼담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마치다 케이타를 위해 고르고골라 선택한 상대는 황자였다. 

3황자. 

광휘의 술사로 불리는 3황자는 현재 황가의 인물들 중에서 보석술사로서의 힘이 가장 강했다. 다이아몬드를 주요 보석으로 쓰는 3황자가 쓰는 스킬명은 온통 '광휘'으로 도배돼 있다고 했다. 광휘의 치유술, 광휘의 정화술, 광휘의 검, 광휘의 불길, 광휘의 창, 광휘의 번개, 광휘의 파도 등등. 광휘의 그림자(?) 광휘의 어둠(??) 광휘의 저주 (???) 등 광휘와는 어울리지 않는 스킬들에도 광휘를 갖다 붙일 정도로 자신의 스킬 속성에 자부심이 있는 이 3황자는 성격도 빛과 같아서 아주 유쾌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인망도 높다고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3황자를 선택했다. 유능하고 쾌활하고 다정하고 미남이라 마음놓고 케이타를 보낼 수 있다나. 정작 보내지는 마치다 케이타는 전혀 생각이 없는데 말이다. 마치다 케이타가 얼굴도 못 본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고 그랬더니 아버지는 기왕 연회에 초대를 받았으니 이 연회에서 얼굴을 보라고 마치다를 데리고 왔다. 얼굴도 못 본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이 얼굴을 보면 오케이라는 말이 아니잖아! 게다가 아버지는 얼굴 보고 아니다 싶으면 청혼을 거절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마치다의 생각은 달랐다.

마치다 가문의 보석 공방에서 영업을 하는 건 주로 마치다의 형이었다. 아버지는 사람을 보는 눈이 별로 좋지 않아서 보석가공을 주로 하고 형은 사람을 잘 파악하는 데다 사람 대하는 기술이 좋아서 영업 실력이 좋았다. 그럼 마치다는 뭘 하느냐면 보석 가공 전문이었다. 실력이 아버지를 능가할 정도로 좋아서 아버지와 형 모두 나중에 형과 마치다가 같이 공방을 이어나가면 걱정없겠다 했었는데...  아무튼 마치다도 아버지처럼 사람 보는 눈이 그다지 밝은 건 아니지만, 보석가공에 뛰어난 만큼 보석을 무기나 도구로 사용하는 보석술사들의 스킬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자신있었다. 그런데 광휘의 술사, 광휘의 황자가 쓰는 기술들은 모든 기술이 전부 공격적이고 파괴적이었다. 게다가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치유술이나 정화술까지도 아주 공격적인 방식이라서 광휘의 술사에게 치유를 받으면 환자가 치유가 진행되는 동안은 아주 고통스러워한다는 말도 들었다. 물론 빠르고 완전히 치유를 하지만 치유 과정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공격적이라고. 정화술 역시 마찬가지라서 무작위로 대규모 정화술을 펼치다가 같이 전장에 나갔던 동료들이 정화술에 피해를 입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다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스킬들을 남발하는 사람이 다정하고 온화하며 배려심이 깊다니. 남들 말은 믿는 게 아니라지만 정말로 광휘의 황자는 자신의 본성을 가리고자 일부러 광휘의 기술을 고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그런 사람이 마치다 케이타가 당신이랑 결혼하기 싫은데요~ 했다고 순순히 납득하고 물러날까. 그럴 리 없었다. 

그래서 도망치는 게 능사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마치다는 일단 구석진 곳의 테라스로 숨어 들었다. 그리고 한숨을 돌린 마치다는 이곳에 들어온 게 들킬까 봐 얼른 테라스를 밝히고 있는 불을 껐다. 테라스라고 해도 황궁의 테라스는 보통 테라스는 아닌지 아담한 방처럼 생긴 테라스에는 소파와 테이블도 있었고 테라스의 좌우는 벽으로 막혀 있었다. 뒤는 당연히 연회장과 연결돼 있었고 (현재는 마치다가 문을 잠가둔 상태) 앞은 유리문이 달려 있어서 비가 오거나 해도 이 예쁜 소파가 젖을 일은 없겠고. 푹신푹신한데도 몸을 잘 받쳐주는 고급 소파에 털써 앉은 마치다는 눈 앞의 테이블을 채우고 있는 음식들을 봤다. 

누가 와서 먹다 간 건가 했는데 상 위에 놓인 냉채 요리와 케이크, 샐러드, 과일, 샌드위치, 와인 등은 누가 손을 댄 흔적도 없었다. 

누가 일부러 차려놓은 것 같기는 한데 어차피 연회장의 음식이니 (연회장에 딸린 테라스에 차려진 거지만) 먹어도 되려나. 

마치다는 상식이 있는 사람이고 남의 물건을 탐내거나 손대는 성품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테이블로 발길이 향했다. 먹어도 괜찮다고,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서 놀라고 지친 맘을 달래라고 하는 것 같아서. 정말로 이상하게. 

광휘의 황자에게 마치다 케이타를 선보이는 날이라 가족들이 아침부터 머리를 한다, 옷을 입힌다, 얼굴을 단장한다 하며 하루종일 마치다를 괴롭혔던 탓에 종일 뭐 좀 제대로 먹은 게 없어서 너무 배가 고팠는데. 허기엔 정신이 나가 버린 건지 마치다는 한 입 크기의 미니샌드위치를 슬쩍 하나 집어먹었다.

그런데 이게 생각외로 너무 맛있어서 그만
게다가 텅 비어 있던 배에 뭔가 들어오니 배에서 계속 더 넣으라고 요동치는 바람에 그만. 

미니샌드위치와 닭고기냉채, 연어샐러드, 블루베리치즈케이크와 문어세비체, 포도와 딸기 그리고 화이트와인 한 병까지 홀라당 다 먹어치우는 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어쩜 하나같이 이렇게 맛있는지. 괜히 황궁 연회가 아닌가보다 하며 만족스럽게 차가운 화이트와인을 마시고 있을 때. 

눈 앞에 검은 장막이 드리워지는 것 같더니 곧 테라스 전체가 어두워졌다. 마치다가 테라스로 나오며 이미 불을 꺼 버렸기 때문에 원래도 어둡긴 햇지만 그래도 테라스 창으로 달빛도 들어오고 해서 완전히 새카맣지는 않았는데 순간적으로 정말 검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온통 캄캄해졌다. 보석술사들의 나라에서 보석가공을 하는 마치다 케이타는 이게 아주 강한 보석술사의 힘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눈 앞에 드리워진 검은 장막이 사라지고 소파의 맞은편 창가, 조금 전까지도 아무것도 없던 그곳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고 있는 남자의 귓볼에는 블랙사파이어 귀걸이가 박혀 있었고, 귓바퀴에는 역시 블랙사파이어를 써서 가공한 이어커프가 감겨 있었다. 검은색 실크 크라바트에 꽂혀 있는 브로치의 보석은 블랙루비고. 팔찌는 블랙에메랄드, 지팡이 위에 박혀 있는 저 커다란 건 블랙펄인가. 허리를 묶은 띠에는 블랙크리스탈이 줄줄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반지. 오른손에 낀 반지와 왼쪽 가슴 그러니까 심장에 제일 가까운 곳에 달린 부토니에에 장식된 보석과 어깨에 망토를 고정한 브롯치는 블랙다이아몬드였다. 

광휘의 술사라고 불리는 3황자의 대척점에 있는 술사가 하나 있다. 

암흑의 술사 혹은 암흑의 대공이라고 불리는 스즈키 대공. 라센느제국의 유일한 대공. 자연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블랙에메랄드나 블랙루비. 그러니까 검은색이 나올 수 없는 보석들도 제 힘으로 검은색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술사. 라센느제국 최고, 최강의 술사, 스즈키 대공이었다. 

"음? 여기가 스즈키 대공의 방... 아니 테라스였습니까?"

스즈키 대공은 마치다를 말없이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 테라스는 아니오."

마치다는 여전히 화이트와인잔을 든 채로 배시시 웃으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원래라면 있어선 안 되는 일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즈키 노부유키는 귀족, 그것도 제국 유일의 대공이고 마치다 케이타는 보석가공사로 이름을 높인 가문이라 해도 귀족이 아닌 장인 가문이었다. 이렇게 앉아서 헤실거리며 쳐다볼 입장이 아닌데, 라소르제국에서 먼 길을 온 뒤에 제대로 여독을 풀지도 못하고 쏟아지는 청혼서들에 시달린 데다 3황자가 연회를 열겠다고 한 뒤부터는 가족들에게 시달리며 연회 준비를 하느라 또 스트레스를 받았다. 게다가 오늘은 아침부터 옷을 입고 꾸미고 하느라 밥도 못 먹어서 빈 속에 급히 안주와 함께 채워넣은 술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곳이 내 테라스는 아니지만,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던 음식은 내가 주문한 것이었소만..."
"아... 죄송합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마치다는 민망함에 뺨을 긁다가 배시시 웃었다. 

"제가 다시 갖다드릴까요? 샌드위치랑 연어샐러드랑 또 뭐였죠. 포도, 어 그리고... 치즈케이크! 또..."

마치다가 여전히 와인이 좀 남아 있는 잔을 꼭 쥐고 마치다가 먹어 치워 버린, 원래는 스즈키 대공의 저녁이었다는 메뉴를 떠올리고 있자 스즈키대공은 무표정하게 소파로 다가와서 마치다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스즈키대공이 뭘 한 건지 마치다가 분명히 잠가뒀던 연회장 쪽 테라스 문이 열리고 차가운 인상의 남자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대공 전하."

스즈키대공은 말없이 마치다가 다 먹어치워서 빈 접시들만 남아 있는 테이블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스즈키대공의 보좌관인지 비서인지 호위기사인지 알 수 없는 차가운 인상의 남자는 테이블을 한 번, 그리고 와인을 마셔대서 볼이 발그레해졌을 마치다를 한 번 보더니 고개를 까딱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트롤리를 밀고 돌아온 차가운 인상의 남자는 테이블을 깨끗이 치우고 마치다가 먹어치웠던 요리들을 다시 올려놓았다. 그러니까 미니샌드위치와 닭냉채, 문어세비체, 연어샐러드, 블루베리치즈케이크, 포도와 딸기 그리고 차갑게 식힌 화이트와인까지. 

그러고보니까 다 차가운 요리였다. 샌드위치와 샐러드, 치즈와 과일은 그렇다쳐도 아까 아버지에게 도망다니는 동안 흘긋 본 연회장의 테이블에는 따뜻한 요리도 많았다. 닭요리인 코코뱅이나 소고기 스테이크, 흰살생선찜이나 돼지고기 바비큐도 있었고. 그런데 차가운 요리들뿐인 테이블. 그리고 마치다가 다 먹어치울 때까지 사람 한 명 없이 텅 비어 있던 테라스... 

마치다는 냉랭한 얼굴로 차가운 닭냉채를 콕 찍어서 입에 넣고 씹고 있는 스즈키대공에게 몸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바로 스즈키 대공의 검은색 망토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자 무겁고 서늘한 느낌인데 묘하게 그리운 느낌의 향만 느껴졌다. 

"... 뭐하시오?"

스즈키 대공이 흠칫하더니 몸을 움직이지는 않고 고개만 돌려서 마치다를 바라봤다. 항간에는 굉장히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의외로 성격이 좋은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주정뱅이가 냄새를 맡아도 피하지도 않네. 마치다는 괜히 웃음이 나서 생글거리며 암흑의 대공을 바라봤다.

"어째 전부 차가운 요리뿐인 데다 한참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거 보면 황궁에 들어온 김에 어디서 사람을 슥삭했거나, 금고라도 털어왔나 해서요."
"..."
"피냄새가 나나 해서 맡아 봤는데 좋은 냄새만 나네."
"..."
"무슨 향수 쓰세요?"
"... 향수는 쓰지 않소."

오, 체향? 아닌가? 비누 향 같은 건가? 무슨 비누지? 냄새 좋네. 

마치다가 또 와인을 홀짝거리면서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자, 스즈키 대공은 입가에 묻히지도 않고 먹드만 닦을 거라도 있는지 냅킨으로 입을 닦고는 치즈케이크를 콕 찍어 입에 넣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황궁은 위험한 곳이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런 행동을 하거나 그런 말을 했다면 그대의 피가 상대의 옷 위로 흩뿌려졌을 것이오."
"뭐, 황제 폐하가 아닌 다음에야 절 죽이면 일이 아주 귀찮아질 텐데 제가 좀 깔짝거렸다고 죽이기야 할까요?"
"귀찮아진다고?"
"광휘의 황자가 제게 혼담을 넣었거든요. 물론 거절할 거지만. 거절하고 싶지만. 너무너무 거절하고 싶지만! 너무너무너무 거절하고 싶어서 미쳐 버릴 것 같지만!"

미쳐 버릴 것 같다는 거지 정말로 미쳐 버렸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화이트 와인을 한 병 넘게 마시고 (스즈키 대공의 보좌관인지 비서인지 모를 그 사람이 가져다 준 새 화이트 와인을 마치다가 스리슬쩍 또 따서 마시는데도 스즈키 대공이 아무 말도 안 하길래 계속 마시고 있었다) 있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좀 커졌다. 그게 민망해진 마치다는 흠흠 헛기침을 하고 와인을 조금 마셔서 속을 진정시킨 다음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나름 광휘의 황자가 결혼하려고 하는 사람인데 슥삭해 버리면 좀 귀찮아지지 않을까요?"

그러자 스즈키 대공은 고개를 슥 돌려 마치다를 빤히 바라봤다. 원래 술이 약한 마치다 케이타가 와인을 혼자 한 병 이상 비운 탓에 배시시 웃자, 스즈키 대공은 어쩐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마치다를 바라보며 물었다. 

"광휘의 황자가 넣은 혼담을 거절하고 싶다고?"
"네."
"이 나라는 황태자가 없지만 그 자가 사실상 황태자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데 왜지? 그 자와 혼인을 하면 그대가 황후가 될 수 있소."
"황후 같은 거 관심없거든요.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아직 각성하지 않은 황족 중에서 광휘의 황자보다 더 강한 사람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잖아요."
"..."
"사실 황족만 황위를 이을 수 있다는 규칙이 없으면 대공 전하가 다음 황제감 아닌가? 힘만으로 따지면 대공 전하가 더 강하다면서요."

마치다가 취해서 멋대로 떠들어대고 있는 동안 스즈키대공은 오른손을 들어서 오른손에 끼고 있는 검은 다이아 반지의 알을 왼손으로 슥 만졌다. 그러자 바로 테라스의 기운이 확 변하는 게 술김에도 느껴졌다. 아까처럼 장막을 친 것 같지는 않은데 뭐지? 마치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즈키대공을 바라봤다. 

"뭐했어요?"
"그대가 말조심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아 방음막을 쳤소."
"아하."

뭐야,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라더니 너무 상냥하잖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해 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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