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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5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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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다는 무의식적으로 목에 걸려 있는 블랙 에메랄드 팬던트를 손에 꼭 쥐고 무뚝뚝한 인상의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폭탄 선언을 해 놓고도 여전히 표정변화 하나 없이 마치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기억을 잃은 그 순간부터 알았다고요?"
"그렇소."
"설마 그 자리에 있었습니까?"
"음."

당신이 내가 그때 새로 사귀었다는 그 친구였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어? 내가 왜 기억을 잃었는지도 알고 있어? 날 경비 초소 안에 안전하게 눕혀주고 간 게 너야? 왜 지금까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 갑자기 그때 그 자리에 당신도 있었다는 걸 밝힌 이유는 뭐야? 

그러나 마치다는 차오르는 의문들을 모두 내리눌렀다. 사실 마치다와 가족들은 당시 마치다가 왜 기억을 잃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때 마치다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마치다가 했거나 다른 누군가가 마치다에게 뭔가 손을 써 준 것일 텐데 그때 마치다에게 손을 써 준 게 스즈키 대공이라면, 그것도 말이 안 됐다. 

왜냐하면...

"대공 전하는 저보다 두 살 어리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이오."

마치다가 당시 10살이었으니 이 암흑의 대공은 8살이었단 말이다. 스즈키 대공은 5살에 각성했다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능력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당시 마치다의 능력은 마치다의 아버지가 강제로 억눌러놨었고 그 능력을 강제로 각성하고 폭주한 마치다를 안정시키려면 보통 보석술사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텐데. 고작 8살의 아이가 그걸 했다고? 설마.

"그 자리에 대공 전하와 저 외에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소."
"그럼 누가..."

암흑의 대공은 잠시 말없이 마치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뭔가 긍정하려는 게 아니라 깨달았다는 듯한 제스쳐였다. 

"그대는 그때 왜 그대가 기억을 잃었는지 알고 있군."
"..."
"하긴 알고 있으니까 라소르제국의 황태자비를 구할 수 있었겠지."
"라소르제국의 황실과 어떤 거래를 했는지는 비밀입니다만."

스즈키대공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나도 알고 있고 우리 제국의 황제도 아마 알고 을 것이오. 3황자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오."
"그야 황제가 알고 있다면 당연히 3황자도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순진하군."

암흑의 대공은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표정을 지었지만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것 같지는 않았다. 

"황제나 왕이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경계하고 핍박하는 건 흔한 일이오. 게다가 라센느제국처럼 오직 힘의 우위로만 차기 황제가 정해지는 체제라면 자신보다 강한 힘을 가진 아들이 달가울 리 없지."
"..."
"현재 우리 제국에서 3황자를 가장 경계하는 건 그의 형제들이나 사촌들이 아니라 현 황제요. 그가 3황자에게 정보를 공유했을 리 없소."
"..."
"물론, 3황자는 황제만큼 뛰어난 정보력을 지녔고 정보망도 촘촘하게 가지고 있으니 그 자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긴 하오. 하지만 아무래도 타 제국 일이라 3황자라도 정보를 손에 넣기가 힘들었겠지."

마치다는 3황자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면서도 묘하게 그럴 리 없다고 말하는 듯한 스즈키 대공을 바라보다가 문득 뭔가 떠올라서 입을 열었다. 

"혹시 3황자의 스파이에게 손을 썼습니까?"

스즈키 대공은 잠시 말없이 마치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가 라소르제국에서 알아낸 것들을 모두 잊게 하는 술법을 쓰긴 했소. 하지만 스파이가 하나였다고 확신할 수는 없소."
"살아는 있습니까?"
"그가 라소르제국의 황가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어렵도록 그 자가 위장을 위해 일하고 있던 직장에서 쫓겨나게 했고, 수도에 못 들어가게 해 놨으나 멀쩡히 살아 있소. 기억과 직장을 잃었을 뿐이지."

마치다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새카만 남자를 바라봤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저나 가족 모두 확실히는 모르지만 짐작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그때..."

암흑의 대공 말처럼 이 대공이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게 확실하다면 당연히 이미 알고 있는 일이겠지만, 만약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마치다의 비밀이 뭔지 절대로 알려서는 안 됐다. 그래서 갈등하던 마치다는 아주 성숙하고 어른스러운데도 동시에 순수하고 깨끗한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이 사람을 의심하는 자신이 너무 파렴치하게 느껴졌다.

"제 목걸이... 이거."
"음."
"대공이 제게 주신 겁니까?"
"그렇소. 원래 내가 하고 있던 목걸이였소."
"원래 블랙 에메랄드였습니까?"
"그날, 그대가 라소르제국의 태자비에게 해 준 것과 반대되는 일을 내게 해 준 뒤에 색이 변했소."
"내가 당신의 각성을 끌어냈습니까?"
"그렇소."
"내가 왜요?"

3황자의 스파이에게 손을 썼다는 것까지 숨기는 거 없이 담담하게 대답을 하고 있던 스즈키 대공의 입술이 갑자기 다물려졌다. 말없이 마치다를 바라보는 대공과 눈이 한순간에 쓸쓸해지고 슬퍼지는 걸 보면서 이 대공이 마치다가 10살 때 사귀었던 새 친구였을 거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기억을 잃어서 당신은 그때 친구를 잃게 된 거야?

그 생각을 하니 마치다도 쓸쓸하고 슬퍼져서 블랙 에메랄드를 만지작거렸다. 

"이 목걸이가 대공 전하에게 소중한 것이었습니까?"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신 유품 두 가지 중에 하나였소."
"..."
"하나는 그 에메랄드 목걸이, 그리고 하나는 이 다이아몬드 목걸이."

대공은 자기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가볍게 툭 쳤다. 저 다이아몬드도 원래는 무색이었다가 대공이 마치다의 조력으로 2차 각성을 하면서 블랙 다이아몬드가 된 모양이었다. 

"이걸 왜 나한테 줬어요?"
"어머니가 이 다이아몬드가 날 강하게 만들고, 그 에메랄드가 날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하셨소."

역시 네가 날 안정시켜 줬던 거구나. 네 친구를 위해서. 

마치다가 뭔가 울컥하는 기분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스즈키 대공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 

"광휘의 황자가 확실히 진실을 파악하게 되기 전에 나와 결혼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 말이 사실이란 걸 알고 있었다. 3황자가 마치다의 능력과 비밀을 알게 되면 절대로 놔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능력이 까발려진 채로 3황자의 손아귀에 잡히면 마치다는 평생 고통과 혼란 속에서 살아야겠지. 그걸 알고 있는데도. 그리고 스즈키 대공이 그때 마치다의 친구였던 그 아이라면 정말 소중한 사람인데도. 기억도 잃은 상태에서 이렇게 떠밀리듯 결혼하고 싶지는 않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결혼에 대해 딱히 환상이 있거나 로망이 있거나 한 건 아니지만 부모님은 가끔 싸우긴 해도 평생 화목하게 사고 계셨고 형과 마치다도 잘 키워주셨다. 마치다도 사랑하고 소중하게 아끼는 이를 만나서 알콩달콩 살고 싶었다. 이렇게 떠밀리듯 계약처럼 결혼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뚱한 얼굴로 서 있자 스즈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말했듯이 계약처럼 돼 버린 결혼이니, 여러 가지 조건을 달아도 수용할 수 있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시오."

조건? 결혼에 조건이라니 더 싫어졌다. 뭐, 물론 황족이나 귀족들 같은 경우에는 결혼을 앞두고 여러 계약서를 쓰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마치다 집안은 귀족 집안이 아니었고 부모님이나 형 부부도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조건이라는 말에 마음이 상해서 표정이 더 굳어졌다. 그러나...

"3황자나 황실에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예 남처럼 살 수는 없으나 그대가 원치 않는다면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 거이오."
"무리한 요구라뇨?"
"아예 침실을 따로 쓸 수는 없겠으나 그대가 원치 않는다면 그대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거나 하진 않겠소."

그럼 정말로 서류상으로만 부부로 살자는 얘기인데 광산 4개의 값어치가 그 정도나 된다고? 좀 의아하긴 했다. 물론 보석은 아주 비싸고 전투시에 계속 사용하기 때문에 소모품이라서 보석값을 대는 게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스즈키 대공은 라센느제국 최대의 부자였다. 심지어 스즈키 노부유키는 황제나 3황자보다도 부자다. 그런데 왜? 

"혹시 보석에 암흑의 힘을 입히면 보석의 내구성이 더 빨리 떨어집니까?"

암흑의 힘이든 빛의 힘이든, 치유의 힘이든 아니면 어떤 공격성의 힘이라도 일단 보석에 힘을 입히면 당연히 보석의 힘은 강해진다. 그러나 보석의 내구성은 급격히 떨어진다. 마치다 케이타도 라센느제국에서 손꼽히는 보석가공사인 만큼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마치다가 알기로는 보석에 치유의 힘을 입히고 사용할 때는 다른 공격성 힘보다 훨씬 더 내구도가 빨리 닳기 때문에 치유술사들의 몸값이 비싸다 정도였는데. 암흑도 그런 건가. 라센느제국에서 암흑의 술사는 스즈키 노부유키 하나라 알 수가 없네. 

마치다가 대답을 바라며 빤히 바라보자 스즈키대공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마치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치유술사인 츠지무라와도 친분이 있지만 츠지무라는 제가 광산 4개를 소유하게 됐어도 제게 결혼하자고 달려들지 않던데, 암흑의 힘은 치유의 힘보다 내구성을 더 심하게 까먹나 보네요."

스즈키 대공은 답이 없었다. 사실 마치다도 알고 있었다. 스즈키 대공이 마치다가 20년 전에 사귀었던 그 친구라면, 아니 그 친구니까 스즈키 대공에게 마치다는 소중하고 안타깝고 애틋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단 둘 뿐인 어머니의 유품 중 하나를 마치다에게 걸어줬겠지. 그 목걸이가 마치다를 지켜주기를 바라면서. 스즈키 대공이 그 어린 나이에 마치다의 능력을 자력으로 알아낼 수는 없었을 테니 마치다 본인이 말했을 테고, 절대로 능력을 공개하면 안 된다는 경고를 어렸을 때부터 뼈에 새겨지도록 듣고 자랐다는 마치다가 그걸 아무한테나 밝혔을 리 없었다. 마치다가 스스로 이 대공의 2차 각성을 끌어내줬겠지. 당시 스즈키 대공은 마치다에게도 매우 소중한 친구였을 터였다.

그치만... 

지금까지 기억을 잃었다는 게 가끔 아쉽고 궁금하긴 해도 이렇게 서럽지는 않았는데 누군가와 공유했을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나만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너무 서러워져서 눈물까지 찔끔 나올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라면 더더욱 마음이 닿았을 때 결혼하고 싶은데. 

마치다가 말이 없자 스즈키 대공은 한층 더 다정하게 마을 이었다. 

"나는 잘 때 몸부림도 치지 않고 이도 갈지 않고 코를 골지도 않소. 잠꼬대도 없고."
"..."
"술도 잘 마시지 않고 잘 취하지도 않으니 술버릇이 나쁠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오. 물론 폭력적인 손버릇도 없소."
"... 나도 그래요. 이번에 보니까 술은 잘 취하는 것 같긴 한데 원래는 그렇게 안 마셔요. 그렇게 많이 마신 건 처음이에요. 취한 것도 처음."

스즈키 대공은 희미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다에게 다가오더니 이미 어제 스즈키가 직접 블랙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뒀던 마치다의 왼손을 잡았다. 그러고보니 이것도 물어봐야 했는데. 분명히 스즈키의 손가락이 마치다의 손가락보다 마디가 굵어보이는데 반지가 맞춘 듯 쏙 끼워져 있어서 신기했었다. 당신이 끼고 있던 반지가 어떻게 내 손에 이렇게 꼭 맞냐고 물어보려고 고개를 들자 스즈키는 마치다가 눈을 마주쳐오길 기다렸다는 듯 마치다와 눈을 맞추고 마치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블랙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진 왼손의 손가락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다 케이타 경."
"아니, 전 귀족이 아닌..."

마치다 가는 보석술사들한테 무엇보다 중요한 보석가공사 집안이고 보석가공사들 중에서도 실력으로 손꼽히는 가문이라 좋은 대우를 받고 있지만 엄연히 장인 집안이라 귀족 가문은 아니었다. 기사도 아니고. 그러니 경이라는 호칭을 붙일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나와 결혼해 주시겠소?"

스즈키가 온몸에 착용하고 있는 검은 보석들보다 더 맑고 새카만 눈동자와 눈을 마주친 채 프로포즈를 듣자, 다시 한 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대답을 해야 하는 걸 아는데 새카만 눈동자가 너무 절실하고 다정하게 보여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입을 떼려 해도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사로잡혀 버려서 간신히 고개만 끄덕이자 스즈키는 여전히 마치다의 손을 잡은 채로 입술을 끌어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마치다가 세상에 태어나서 본 미소 중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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