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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4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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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다의 몸 상태를 꼼꼼히 확인한 아몬은 노부를 돌아봤다.
"마치다 케이타가 10살 때 폭주했을 때 진정시킨 게 대공이었소?"
노부는 잠시 말없이 아몬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정시키진 못했지만... 네."
아몬은 착잡한 표정의 노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 이 말썽쟁이는 너무 어려서 몸이 자기 능력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일찌감치 봉인해 놓은 건데 억지로 그 봉인을 풀고 힘을 끌어낸 거라 기억을 잃는 정도로 대가를 치를 수 있었던 건 대공의 힘이 아주 강했단 말이오. 물론 그만큼 힘이 강했으니까 이 말썽쟁이가 그 어린 눈으로도 당시 대공에게 잠재돼 있던 힘이 강하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겠지만."
아몬은 엄한 눈으로 마치다를 바라봤지만 마치다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아몬은 마치 그때 마치다가 노부를 아몬에게 데리고 왔으면 아몬이 어떻게든 해 줄 수 있었을 것처럼 말하지만, 아몬은 보석술사의 능력을 묶어 버리거나 빼앗아 버릴 수는 있어도 각성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대신관이긴 해도 혼돈의 보석술사는 아니니까. 노부를 그때 그집에서 몰래 데리고 나오는 것 자체도 큰일이었겠지만 설령 데리고 나온다고 해도 아몬이 그때 노부에게 뭔가를 해 줄 수는 없었다.
마치다가 대답은 안 하고 노부의 팔짱만 끼고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자, 아몬은 한숨을 쉬고 손을 내밀었다.
"마치다를 진정시킬 때 매개로 쓴 보석을 보고 싶소."
노부가 마치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서 마치다는 목에 걸고 있던 블랙 에메랄드 목걸이를 벗어서 아몬의 손 위에 올려줬다.
"블랙 에메랄드라... 20년 전에 썼던 보석도 이것이었소."
"네."
"그때 각성하면서 암흑의 힘이 담긴 건가?"
"네."
"원래는 녹색이었고?"
"네. 그때 색이 변했습니다."
아몬은 블랙 에메랄드를 꼼꼼히 살피다가 다시 마치다에게 돌려줬다.
"블랙 에메랄드에 담긴 힘은 크지 않지만 보석에 남은 술법의 흔적은 강하군."
마치다가 아몬을 바라보다가 노부를 돌아보자 노부는 마치다를 보며 싱긋 부드럽게 웃어줬다. 그러자 잠시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아몬이 덤덤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치다, 봉인이 풀렸다."
"네, 봉인이 풀려서 폭주한 거잖아요."
"아니, 20년 전처럼 혼돈의 힘이 억눌려진 채로 폭주가 진정된 게 아니라 혼돈의 힘이 그대로 남은 채로 폭주만 진정된 거라 넌 지금도 봉인이 풀린 상태다."
"... 응?"
"힘을 끌어올려 봐라."
마치다는 폭주가 진정될 때 2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당연히 혼돈의 힘이 억눌려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노부가 당시에 마치다 안에 있는 혼돈의 힘을 봉인했던 건 아니고 혼돈의 힘을 억눌러서 진정시킨 거라 마치다를 찾은 가족들이 급히 불러온 아몬이 다시 봉인을 걸었다고 했는데. 이번엔 20년 전과 달리 폭주가 진정되고도 안정적인 상태라서 노부가 20년 동안 수련을 열심히 해서 치유술이 강해졌기 때문에 봉인까지 시켜버렸나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몬의 말대로 혼돈의 힘을 끌어내자 블랙 에메랄드 목걸이와 블랙 다이아몬드 반지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나오며 마치다를 휘감았다. 마치다가 화들짝 놀라서 다시 힘을 가라앉히자 노부가 눈이 왕방울만해져서 마치다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나 아몬은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 다시 봉인해야 해요?"
아몬은 고개를 저었다.
"힘이 봉인된 채로 억지로 힘을 끌어내서 쓰는 게 더 위험하니까."
"제가 힘을 쓸 일이 뭐 있어요."
아몬은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마치다를 바라보더니 픽 웃었다.
"네가 라소르제국에서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어? 뭐... 무슨.... 그냥 광산만..."
아몬이 집게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가려서 마치다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비밀로 해 주셔야 되는 거 아시죠? 그거 들키면 그쪽 신관들이 그 사람을 죽이려 들 수도 있대요."
마치다가 예쁘장하게 생겼던 라소르제국의 황태자비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하자 아몬은 또 한숨을 내쉬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 새어나갈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고 다만... 공식적으로는 네 힘을 내가 다시 봉인한 걸로 발표할 거다. 아예 감추고 싶지만 그날 네가 폭주하는 걸 본 사람이 너무 많아. 황실 쪽에서도 조사단이 나와서 우리 조사팀에 합류할 거라서 완전히 감출 수 없고."
"음. 네."
"내가 영구 봉인한 걸로 알릴 생각이다. 그러니까 너도 되도록 힘을 쓰지 말고 앞으로 라소르제국 같은 일이 있을 때는 미리 내게 알리도록 해라. 아무리 그쪽에서 비밀을 요구한다고 해도 이건 네 목숨과 네 앞날이 걸린 일이야."
마치다는 고민했지만 노부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알려지지 않게 하겠습니다."
노부의 얼굴에 서린 불안을 읽은 마치다도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가 다시는 마치다를 잃지 않기 위해서 20년 동안 수련에만 힘을 쏟았기 때문에 이번에 마치다가 기억도 잃지 않고 폭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노부는 무서웠을 것이다. 폭주한 마치다를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20년 전 그때가 떠올라서 공포스러웠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치다도 노부를 꼭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다는 황제가 이 기회에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3황자를 홀가분하게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핏줄의 정 때문은 아니었고 황실의 명예가 실추되었기 때문이었다. 3황자가 마치다가 지닌 혼돈의 힘을 노리고 마치다가를 불태우고 노부를 처형시키려 했다는 것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들어보니 3황자가 마치다가 라소르제국에서 사온 (세간에는 마치다가 사 온 것으로 돼 있었다.) 4대 보석 광산을 노리고 마치다를 노부에게서 뺏기 위해 노부를 죽이려 하고 마치다가를 몰살시키려 한 것으로 소문이 난 듯했다. 당연히 여론은 들끓고 있었다. 지금까지 3황자가 연극을 잘해 와서 3황자의 평판도 좋았지만 아무리 곤란하고 힘든 상황이라도 불평 한 마디 없이 바로 출동해서 몬스터를 토벌해주고 별달리 공을 내세우지도 않는 '암흑의 대공'의 평판도 만만찮게 좋았던 것도 컸고. 마치다를 목숨처럼 사랑해서도 아니고 재산을 노리고 여러 사람을 죽이고 유부남을 뺏으려 한 것 자체가 너무나 비열하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3황자의 평판이 땅에 떨어지자 3황자가 남을 배려하지 않고 마구 술법을 써댄 탓에 3황자와 함께 토벌전에 나갔다가 다친 사람이 많았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퍼지고 있는 모양이라 3황자가 그간 잘 유지해 온 가면도 부서진 모양이고. 그래서 황실에서는 이 일을 최대한 감추고 싶어했지만 보석술사들이 능력을 믿고 위험한 짓을 벌일 때 저지하기 위해 신전이 존재하는 만큼 아몬이 강경하게 맞서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몬이 그와 관련된 일은 알아서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마치다는 노부와 함께 마차를 타고 다시 대공저로 돌아갔다.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에게 라소르제국에서 보낸 보석들을 보여주자 마치다가 그랬던 것처럼 가족들도 불순물이 없는 보석을 보고 경탄했다. 지금까지도 라센느제국은 라소르제국과 거래를 해 왔기 때문에 라소르제국산 보석을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황태자가 가지고 있던 광산이 상등품 보석이 많이 나는 곳인지 황태자가 신경써서 보내줬는지 지금까지 보던 것보다 좋긴 했으니까. 마치다는 가족들에게 보석을 원하는 만큼 주겠다고 했지만 부모님과 형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대신 라소르제국산 상등품 보석을 원하는 보석술사들이 있으면 거래 중개를 해 주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다시 침실로 돌아온 마치다는 디저트를 먹을 때부터 계속 궁금했던 걸 물었다.
"노부, 그러고보니까 대공저에서 나오는 디저트 말이야."
"네."
"그거... 맞아?"
노부는 빙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릴 때 마치다가 노부를 만나러 가면 노부가 꼭 쥐고 있다가 건네주던 달콤한 빵이나 케이크의 맛과 똑같더라니까.
"어떻게? 할머니 여기 계셔?"
"아뇨, 내가 외삼촌한테서 독립할 때 모시고 나왔는데 몇 년 동안은 계속 절 돌봐주시다가 제가 대공이 될 때 더는 버겁다고 하셔서 집 한 채 마련해 드리고 돌봐줄 사람도 함께 보내드렸어요."
"수도에 계셔?"
"그건 아니고, 고향이 수도가 아니라서요. 고향에서 지내요. 요즘도 가끔 돌봐주는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편지를 보고를 해 와요."
"그럼 레시피를 배운 거야?"
"네. 할머니 떠나실 때 디저트 레시피는 다 배웠어요."
"네가?"
그렇게 묻자 노부는 쑥스럽게 웃었다.
"나도 같이 배웠는데 내가 요리는 잘 못하더라고요. 요즘 디저트 만드는 건 같이 배운 다른 친구예요. 지금 여기 셰프."
어린 마치다는 잘 몰랐지만 노부의 외숙부는 노부의 어머니가 남긴 유산 때문에 노부를 버리지 않았을 뿐 돌볼 의지는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 아무도 오가지 않는 숲에 작은 집 하나 대충 짓고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할머니 하나 붙여서 어린애를 넣어놨겠지. 그러니 할머니도 딱히 요리 솜씨가 좋거나 한 사람도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훌륭한 간식들도 아니었다. 함께 식사할 때 코스로 나온 여러 요리에 감탄하던 마치다의 가족들도 디저트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런데도 노부가 할머니가 그 시절에 만들어주던 간식을 계속 디저트로 올리게 하고 매일 그 디저트를 먹었던 이유는 알 것 같았다.
혼자서만 간직해야 하는 추억을 지켜가던 노부에게 그때 함께 나눠 먹었던 디저트는 맛을 떠나서 그 자체가 소중한 추억이었을 테니까.
"그 집은 어떻게 됐어?"
"외삼촌한테 독립할 때 그 집이랑 숲을 사서 계속 관리하고 있어요."
마치다에게 그 작은 집은 꼬마 노부와의 귀여운 추억이 많은 장소였다. 하지만 마치다가 노부를 방문했던 기간은 몇 달밖에 안 됐고 그것도 하루에 몇 시간 정도씩 머물다 돌아갔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 집에서 외로운 시간을 아주 오래 보내야 했을 노부에겐 힘들고 슬픈 기억이 더 많은 곳일 텐데 마치다와의 작은 추억이 있다는 이유로 그 집을 지켜왔을 것 같아서 코 끝이 시큰해지고 가슴이 지끈거렸다.
혼자만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도 외로웠을 텐데 그 추억을 떠올리게 할 매개들조차 그렇게 찬란하게 아름답기만 한 것들이 아니라서.
마치다는 크게 숨을 들이키고 노부에게 입을 촉 맞췄다.
"앞으로는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겠어."
노부는 마치다의 속이 상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마침 잘됐다. 곧 수확제 있잖아."
"네."
노부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수확제가 있다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그냥 마치다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는 것 같았다. 수도에서 수확제를 얼마나 크게 하는데 축제도 한 번 안 가 본 건가. 속상하게.
"그날 같이 나가서 등도 띄우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하자."
"그래요."
"번잡한 거 싫어해서 축제는 어릴 때나 자주 가고 요새는 잘 안가 봤는데. 너랑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
노부는 아무 말 없이 마치다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꼬치구이랑 과일사탕도 사 먹고, 불꽃놀이도 보고, 등도 띄우고 그러자."
난 다시 너를 잊거나, 널 떠나지 않을 거지만 네게 즐거운 추억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
노부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마치다를 바라보다가 꼭 끌어안았다. 마치다도 노부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가 함께하는 날들은 앞으로 언제나 행복할 테지만 나와 함께하는 너의 매일매일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
축제가 빨리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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