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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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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어, 늦었어. 오늘은 공방에 들러서 흠집이 많아서 판매할 수 없는 하품 보석들을 챙겨 오느라고 늦어 버렸다. 연습용으로 주려고 챙겼는데, 어제 미리 챙길걸!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러나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이 집을 둘러싼 작은 숲의 입구에는 무섭고 딱딱한 얼굴의 경비가 지키고 있었다. 가끔 그 경비가 졸고 있을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아주 심통맞은 얼굴로 눈을 희번덕 뜨고 있기 때문에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였다. 빨리 가야 돼, 빨리. 이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결코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 나무들을 빽빽하게 심어서 아주 두꺼운 울타리를 쳐놨기 때문에 바닥을 기어서 나무들 사이사이를 기어들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애가 기다리니까!

너무 서둘러 기어가다가 바닥에 있는 작은 돌멩이에 무릎이 찍혔는지 갑자기 무릎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져서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꾹 참았다. 소리를 질러서 들키면 오늘 쫓겨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시는 그 애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건 안 돼. 눈물이 찔끔 났지만 다시 열심히 앞으로 기어갔다. 무릎은 아팠지만 울타리의 끝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콩콩 뛰었다. 그 애를 만날 수 있다. 

오늘도 기다리고 있을 그 아이를. 

그리고 울타리를 열심히 기어서 막 벗어나자 울타리 앞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가 후다닥 일어서서 달려오며 맞아주는 그 아이가 보이고...





눈을 번쩍 뜨자 마치다가 자다가 무슨 소리를 냈는지 아니면 심하게 움직였는지 스즈키 대공이 눈을 뜨고 마치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무릎을 스치던 흙바닥의 촉감과 돌맹이에 찍혀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던 통증과 코 끝을 스치던 풀내음이 생생하지만 마치다는 분명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마치다가 아무런 말도 없이 눈만 깜박거리고 있자 스즈키 대공이 걱정되는지 마치다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왜 그러시오? 꿈자리가 험했소?"

마치다는 고개를 저었다. 

마치다는 한 번도 기억이 사라진 그 시기를 꿈꾼 적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꿈을 꿨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랬다해도 기억에 남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그때 꿈을 꾼 걸까.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건 사실인데도 그 꿈이 사라진 그 시절에 있었던 일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꿈 속에서는 마치다가 울타리를 기어나오자마자 허겁지겁 마치다에게 달려오는 아이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당신이었겠지. 

마치다가 스즈키 대공을 폭 껴안자 스즈키 대공은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가 조심스럽게 마치다의 등으로 손을 감았고 곧 얇은 잠옷 너머로 커다란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스즈키 대공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당황하면서도 어색하게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마치다는 한동안 말없이 그 손길을 느끼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 더 늦게 깨서 꿈에서도 이렇게 안아주고 난 다음에 깼으면 좋았을 텐데"
"꿈 이야기?"
"응."
"..."
"꿈에서 내가 울타리를 기어나가자마자 꼬마 노부유키가 막 후다닥 뛰어왔는데 인사도 못하고 일어났어요."
"... 꿈에서 날 봤소?"
"얼굴은 잘 못 봤지만 꼬마 노부유키 같았어요. 꿈에선 나도 엄청 작았는데 되게 빽빽한 울타리를 한참 기어들어가니까 조그만 집이랑 조그만 정원이 있었고 울타리 바로 앞에서 꼬마아이가 기다리고 있다가 날 보고 막 뛰어왔는데 거기서 눈을 떠 버려서."

스즈키 대공은 한동안 말없이 마치다를 바라보며 자느라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주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소. 그때 현실에서의 그대는 항상 내게 와서 날 안아줬으니까."
"정말요?"
"음."

키는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지만 키도 덩치도 확실히 대공이 크기 때문에 품에 폭 안겨 있으니까 든든하고 포근해서 갑자기 깬 잠이 다시 솔솔 몰려오기 시작했다. 

"일어나야 되는데."

대공은 마치다의 목소리에 다시 잠기운이 묻어나는 걸 느꼈는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소."
"응."
"해가 뜨면 바로 햇살이 쏟아지는 침대니까..."

결혼 후 알고 보니 스즈키 대공은 잠이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밤에 늦게 자는 편이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편은 아니었는지 처음엔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마치다에게 맞춰주느라 좀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결혼할 때도 햇살이 쏟아지는 침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준비해주길래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타입인 줄 알았더니. 결혼하고 한동안은 아침에 눈이 빨간 채로 돌아다녀서 그제야 생활리듬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 이젠 아침마다 햇빛이 가득한 침대 때문에 강제로 마치다의 생활 리듬에 맞춰진 모양이지만. 

"그럼 조금만 더 잘게요. 아직 새벽인 거 같은데 안 잔 건 아니죠?"
"나도 잤소."
"좀 더 자요. 같이 일어나요."
"그래. 좀 더 자고 같이 일어납시다."





그 후로 마치다는 가끔 그 꿈을 꿨다. 기다리고 있는 소년을 만나기 위해서 부지런히 울타리 아래를 기어가는 꿈. 늘 곧 만날 아이를 생각하며 두근두근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기어가지만 어째서인지 항상 꼬마 노부유키를 만나기 전에 깨 버려서 침울해하면 그럴 때마다 대공이 마치다를 안아주며 달랬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달콤하게 아침을 맞이한 어느 날, 마치다는 드디어 대공의 귀걸이에 들어갈 블랙 다이아몬드의 가공을 마쳤다. 대공은 원래 블랙 사파이어로 귀걸이와 이어커프 세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블랙 다이아몬드를 세 개 써서 양쪽 귀의 귀걸이와 왼쪽 귀에 걸 이어커프까지 세트로 만들었다. 이어커프는 전체를 다 블랙 다이아몬드로 만든 거라 마치다가 직접 만들었고 이어커프 디자인과 귀걸이에 들어갈 블랙 다이아몬드의 세공을 본 야오토메가 블랙 다이아몬드를 넣을 귀걸이를 직접 세공해 주었다. 

마치다가 가공한 보석에 힘을 넣어 본 스즈키 대공은 바로 마치다를 데리고 수련실로 갔다. 그리고 스즈키 대공이 보여준 건 방어술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규모 공간 방어술로 수련실 안에 있었는데도 결계가 별관은 물론이고 대공저 전체를 감싸며 퍼져가는 게 느껴졌다. 그 거대하고 든든한 방어술을 입을 벌린 채 바라보고 있던 마치다가 채 입을 다물지도 못했을 때, 스즈키 대공은 두 번째 방어술을 걸었다. 

방어술이 걸린 대상은 마치다 본인이었다. 

방어술이 마치다를 감싸는 순간 외부의 모든 위협을 막아줄 것 같은 든든함과 동시에 몸 내부로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이 퍼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 이거 방어술 아니에요?"
"방어술과 치유술이 섞여 있소."
"두 개를 섞었다고요?"

마치다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바라보자 스즈키 대공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게 가능해요?"

마치다는 보석술사는 아니지만 보석술사들을 위한 보석을 가공하는 만큼 여러 가지 술법에 대해서 잘 알았다. 최대한 보석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술법을 쓸 거라고 설명하고 그에 맞춰 가공해 달라고 요구하는 이들도 있고 친구들 중에 보석술사들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술법 두 개를 섞는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무래도 보석술이 보석을 매개로 하는 것이라서 술사의 역량과 상관없이 보석의 내구도나 강도에 따라 보석술에도 제한이 걸리는 법이오."
"네. 아무래도."
"그래서 이 술법을 견딜 수 있는 보석 도구가 없었는데."

그래서 보석의 강도와 내구도를 최대로 활용하게 해 주는 보석가공사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기도 해서 마치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즈키 대공은 마치다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대가 선택한 블랙 다이아몬드들이 워낙 자체 강도나 내구도도 뛰어나고 그대가 보석가공을 하며 내구도와 강도를 더 높여준 덕분에 시도해 봤소. 예상대로 잘 견디고도 남을 정도로 강하군."
"내구도가 많이 깎이지는 않아요? 두 개를 같이 쓰면?"
"다른 술법들보다는 빨리 깎이긴 하겠지만 그렇게 많이 깎이지는 않소. 게다가 어차피 이건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술법이라 많이 쓸 일이 없을 테고."
"단 한 사람을 위한?"
"쓸 일이 아예 없기를 바라지만..."

그러면서 스즈키 대공이 다시 마치다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기 때문에 마치다는 그 '한 사람'이 마치다를 말한다는 걸 알았다. 

"3황자 때문에 걱정돼요?"
"라소르제국에서 3황자의 스파이가 다시 적발됐다고 하오."
"진짜 끈질기네."

마치다가 한숨을 푹 내쉬자 스즈키 대공이 마치다를 품에 끌어안고 마치다의 등을 단단한 팔로 감쌌다. 요즘은 마치다가 잃어 버린 그 시절을 꿈속에서 보는 날마다 스즈키의 품으로 파고 들어서 스즈키 대공이 종종 안아주며 달래주곤 했지만 스즈키 대공이 먼저 안아준 것도, 침대가 아닌 곳에서 안아준 것도 처음이라 마치다가 조금 어색한 기분으로 그 품 속으로 더 파고들자 스즈키 대공은 마치다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꽉 끌어안았다. 

"내가 강해진 건 그대를 지키고 싶어서였으니 내가 그대를 지킬 수 있게 해 주겠소?"
"내가 지켜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라센느제국에서 가장 강한 보석술사가 될 수 있었던 건 다시는 그대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오."
"..."
"그대를 지킬 수 있게 해 주겠소?"

마치다는 열심히 울타리 아래를 기어가며 꼬마 노부유키를 만나러 가던 꿈 속에서의 설렘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켜주세요. 다시는 내가 당신을 잊지 않게."

스즈키 대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치다의 이마에 천천히 길게 입을 맞췄다. 이마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


3황자는 라소르제국에 심었던 스파이가 또 연락두절됐다는 말에 쯧 혀를 차고는 비릿하게 웃었다. 

"자꾸 이렇게 손을 쓰면 더 의심을 산다는 걸 모르나. 강하기만 하고 머리는 안 돌아간단 말이야, 스즈키 자식도."

그리고는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에게 루비를 하나 던졌다. 

"내가 말한 지역에 가서 이 루비를 깨라."
"네."
"네가 입을 열면 네 가족들이 다친다는 걸 명심해."
"물론입니다. 전하."
"가라."

3황자는 남자가 나가고 난 뒤 다시 피식 웃으며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남자에게 건넨 루비는 몬스터들이 봉인돼 있는 루비였다. 꽤나 강한 녀석들을 잔뜩 봉인해 놨으니 루비를 깨서 몬스터들이 터져 나오면 난리가 나겠지. 단시간에 몬스터들이 대량 출몰하면 즉각 대처를 위해 보통 3황자나 암흑의 대공이 불려갔다. 3황자는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혼자서 토벌전에 나가는 일은 절대로 없었지만 스즈키는 다르지. 그 자식은 상황이 여유롭다고 해도 혼자 갔다 오는 걸 선호하니... 게다가 이번에 3황자는 토벌전에 나가라는 명을 거절할 수 있게 바쁜 일을 만들어준 상태였다.

그러니 스즈키 자식이 불려갈 테고... 그놈은 이번에도 혼자 가겠지... 

마치다 케이타를 남겨두고...

3황자 홀로 있는 방 안에서 음흉한 웃음소리가 한참이나 흘러나왔다. 




#놉맟    #암흑의대공혼돈의가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