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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1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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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 근처에서 길을 안내해 준 XX의 관리는 이 지역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몬스터였다면서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다. 스즈키는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차갑게 식는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몬스터들은 백여 년전부터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했고 어디서 어떻게 왜 나타나는 건지도 아직 밝히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 원래 존재하던 동식물들처럼 지역의 특성에 맞게 몬스터들의 특징도 달라졌다. 따뜻한 지역에서는 온몸에 털이 가득 뒤덮인 몬스터들이 나타나지 않고 냉기를 뿜어내는 공격을 일삼는 몬스터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수도에서 꽤 아래로 내려온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XX 지역은 연중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는 곳이었고 그 온화한 날씨 덕분에 라센느 제2의 도시가 될 수 있는 이곳에서 숲을 꽁꽁 얼리고 있는 몬스터가 나타났다. 스즈키는 이동 중에 화염 공격을 위주로 술법을 머릿속에서 배치하면서 한층 더 긴장했다. 정말로 관리의 말처럼 이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던, 나타나서는 안 되는, 나타날 수 없는 몬스터들이 출몰한 것이라면... 

당장 수도로 돌아가야 했다. 

아니길 바랐지만 몬스터들이 출몰한 지역에 들어서자 관리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시사철 풀과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는 숲은 이미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고 냉기를 뿜어내는 몬스터들이 XX로 돌진하고 있었다. 

평소 스즈키의 공격 스타일은 주변의 안전을 최대한 확보하고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마을과 자연이 최대한 손상되지 않도록 시간을 들여서 집중적으로 몬스터들만 공격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몬스터들이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거의 확실한 지금, 스즈키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 케이가 있는 수도였다. 

그래서 스즈키는 몬스터 출몰 지역이 숲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로 관리를 쫓아내고 몬스터들을 전부 감싸는 방벽을 크게 두르고 바로 몬스터들이 얼려놓은 숲과 몬스터들을 향해서 대규모 화염 공격을 펼쳤다. 꽁꽁 얼어 있던 숲이 채 녹지도 못하고 바로 불길에 사로잡혔고 몬스터들도 괴성을 지르며 불길 속에 허우적거렸지만 스즈키는 멈추지 않고 계속 불길을 쏟아냈다. 그리고 모든 몬스터가 다 숨이 끊어졌을 때는 쉬지 않고 화염 공격을 쏟아냈던 탓에 암흑의 화염 술법의 매개채가 됐던 블랙 루비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스즈키가 여전히 불길에 사로잡혀 있는 숲을 덮는 거대한 암흑의 장막을 숲 위에 덮어 버리자 산소를 잃은 불길은 금세 꺼졌다. 새카맣게 타 버린 숲과 벌판에 살아 있는 몬스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스즈키는 깨진 블랙 루비 조각을 주으려고 고개를 숙였다가 스즈키의 루비가 아닌 새빨간 루비 조각이 깨져 있는 걸 발견했다. 루비 조각을 주워 보자 몬스터의 기운과 함께 몬스터들을 봉인했던 술법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역시 3황자의 수작이었다. 

그 순간 스즈키는 말에 올라타서 바로 숲을 빠져 나왔다. 숲 경계에서 지키고 있다가 숲에서 치솟는 불길에 놀라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관리가 스즈키를 맞이했다. 

"몬스터는 전부 처리했소. 곧 수도에서 조사대가 나올 것이니 숲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오."
"... 조사대 말입니까?"
"그렇소. 바로 조사대가 파견될 것이오. 현장을 훼손하면 훼손한 자에게도 책임을 물을 것이니 절대로 아무도 들어가선 안 되오."
"알겠습니다."

침을 꿀꺽 삼킨 관리는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아래의 부하들을 동원해 숲을 둘러싸는 간이 목책을 만들고 경비들을 세우라 지시했다. 그리고 스즈키는 바로 말에 이속 증가 술법을 걸면서 수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제발, 케이, 제발...


*****


"스즈키 대공이 왜... 스즈키 대공이 왜 마치다 가에 불을 지르겠느냐?"

3황자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핑 돌고 집을 불태우고 있는 화염을 보는 순간부터 가슴 속에서 치솟던 분노와 좌절이 마치다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가족과 사용인들 중 아무도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말이 귓가를 윙윙 울리고 꺼지지 않는 불길이 마음을 태웠다. 그리고 스즈키 대공이 그럴 리가 있느냐면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스즈키 대공이 방화범이라고 지못하는 3황자의 뱀 같은 목소리가 피부를 타고 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 앞이 캄캄해지고 완전히 잊었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 절대로 이 힘을 꺼내서는 안 된다. 혼돈의 힘은 너에게도 보석술사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위험한 힘이야. 
- 네 힘은 너무 크구나. 역대 어떤 혼돈의 보석술사도 너만큼 강한 혼돈의 힘을 타고난 이가 없었다.
- 널 밖에 두기에는 너무 위험하구나. 날 따라가서 신관이 되지 않겠느냐. 
- 아빠, 내가 보기에는 잠재력이 정말로 강한데 자기가 쓸 수 있는 힘이 너무 적다는 보석술사가 있어요.
- 신경쓰지 말거라. 네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 난 어떻게 하면 그 힘을 꺼내줄 수 있는지 보이는 것 같은데.
- 안 된다!

잊혔던 기억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나는 동안 욕지기가 올라오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데 또 몸 깊은 곳에서 한기가 마구 솟구치는 것 같아서 몸이 덜덜 떨렸다. 

그리고 공방에 보석 가공 의뢰가 쏟아져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모두 바쁜 틈에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가서 몰래 책을 훔쳐봤던 기억이... 어린 마치다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글들이었는데도 이상하게 그 어려운 문장들을 보는 순간 꼬마 노부에게 뭘 해 줘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마치다가 보기엔 분명히 잠재력이 엄청난데 이상하게 자기가 끌어낼 수 있는 힘이 없다고 했던 꼬마 노부. 그 얼마 전에 노부가 외삼촌에게 회초리를 맞아서 뽀얀 종아리에 붉은 줄이 죽죽 새겨져 있는 걸 보고 얼마나 속이 상했던가. 내가 힘을 끌어내 주면 꼬마 노부가 이제 맞지 않을 거야. 그 조그만 집에만 갇혀 살지 않아도 될 거야. 밥해 주시는 할머니가 있지만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할머니라 노부는 하루 종일 말할 사람도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착한 꼬마 노부는 꼬물꼬물 간식 그림을 그리고 손발짓으로 할머니에게 간식을 만들어달라고 해서 마치다가 그 울타리 아래를 기어 들어가 노부를 만나러 가면 손에 마치다를 위한 간식을 꼭 쥐고 있다가 마치다에게 달려와 안아주곤 했다. 

- 보고 싶었어. 

매일매일 만나러 갔기 때문에 고작 하루 만에 보는 건데도 노부는 마치다가 울타리 아래를 기어들어갈 때마다 안아주며 그랬다. 

- 보고 싶었어. 

그리고 마치다가 아버지 몰래 보석술사들의 2차 각성을 끌어내는 방법을 익혀서 드디어 노부 안에 억눌러져 있던 암흑의 힘을 끌어내 줬다.

- 노부, 형아가 노부 진짜 강한 보석술사로 만들어줄게. 형아만 믿어.

그러나 어린 몸이 감당할 수 없는 너무 큰 혼돈의 힘을 무리하게 끌어낸 탓에 마치다가 폭주하고 말았을 때. 

그래, 그때도 지금처럼 화염과 냉기가 몸속에서 충돌하면서 밖으로 빠져 나오려고 했었다. 온몸이 뜨거운데도 추위로 온몸이 덜덜 떨렸고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고 속에서 피가 울컥울컥 치솟는 것 같았다. 귀에서는 이명이 끊이지 않았고 눈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던 그때. 

이제 막 2차 각성을 해서 암흑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했던 꼬마 노부는 제게도 익숙하지 않은 치유술을 마치다에게 마구 퍼부었다. 

- 안 돼, 케이,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케이, 안 돼. 정신차려.
- 노부...
- 케이, 안 돼. 제발, 제발. 제발. 케이.

그때 암흑의 힘을 담은 미숙한 치유술이 마치다의 몸 안에서 끓어오르던 혼돈의 힘을 안정시키려 하는 게 느껴졌다. 이제 막 암흑의 힘을 익혔는데 벌써 이렇게 치유술을 잘 다루게 된 거야?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네 안에 있는 잠재력이 강할 거라고 예상했다고. 믿고 있었어. 노부. 그때 마치다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들은 건 절망과 슬픔이 진하게 녹아 있던 비명과 같은 '케이!'였다. 

그러나 이제 막 2차 각성을 해서 본인의 진짜 힘을 처음으로 제대로 깨달은 노부의 치유술은 너무 미숙했고 마치다의 폭주를 막아줬지만 마치다는 그 폭주 이후로 평생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 

마치다가 만나러 갈 때마다 언제나 달려와서 안아주던 친구를. 
울타리 아래를 기어들어가느라 흙과 풀이 잔뜩 붙어 있던 마치다의 얼굴과 무릎, 손바닥을 매일 톡톡 열심히 털어주던 친구를.
마치다를 위해 할머니에게 부탁해 얻어낸 간식을 꼭 쥐고 기다리다가 마치다가 정성스럽게 반으로 나눠 가져간 간식을 뇸뇸 먹을 때마다 자기는 간식을 먹는 것도 잊고 마치다를 보며 헤헤 기분좋게 웃던 친구를.
폭주하는 마치다에게 소중한 목걸이를 걸어주고 '이 목걸이가 케이를 지켜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울던 어린 친구를.
이제 막 익힌 치유술을 마치다에게 쏟아부으며 제발 정신차리라고 빌던 그 어린 친구를. 
마치다의 노부를... 

잊었다. 





그런데... 그런데 네가 감히... 네가 감히 나의 노부를...!

마치다가 3황자를 휙 돌아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실룩이고 있는 3황자의 눈빛 속에 비열한 만족감이 떠올라 있는 게 보였다. 

네가 감히!

마치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허공에서 뭔가를 움켜쥐듯이 손을 오무리자 여전히 말 위에 앉아 있던 3황자가 제 목을 움켜쥐며 컥컥거리기 시작했다. 만족감을 채 감추지 못하던 비열한 얼굴이 금세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고 숨을 못 쉬어서 부들거리던 3황자가 말에서 굴러떨어지는 것도 보였지만 마치다는 손아귀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죽어! 죽어 버려!

그리고 그때 얼마 전 마치다가 노부에게 블랙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만들어준 날, 노부가 마치다에게 치유술을 걸어줬을 때의 감각이 다시 느껴졌다. 온몸을 들끓게 하던 혼돈의 기운이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고 온몸을 덜덜 떨리게 하던 한기도, 몸 안쪽부터 자글자글 끓어오르던 열기도, 귓가를 울리던 끔찍한 이명도, 눈을 불태우는 것 같던 열기도 전부 사라졌다. 그리고 맑아진 귓가로 20년 전보다 훨씬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그때의 애타고 절절한 마음은 그대로 담긴 외침이 들려왔다. 

"케이!"

어린 시절 암흑의 힘을 얻자마자 마치다의 폭주를 가라앉혔으나 치유술이 미약했던 탓에 마치다와의 소중한 추억을 대가로 바쳐야 했어서...
다시는 그의 케이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그의 케이를 지키기 위해 20년간 치유술을 치열하게 단련해 왔다는 노부가 갈고닦은 치유술이 마치다를 감싸고 있었다. 





#놉맟    #암흑의대공혼돈의가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