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https://hygall.com/511520841
18 https://hygall.com/512968601
19 https://hygall.com/514787312
20 https://hygall.com/605193113
21 
https://hygall.com/605814023
22 https://hygall.com/606677383
23 https://hygall.com/607379491
24 https://hygall.com/609296600
25 https://hygall.com/611591225


ㅅㅅㅊㅈㅇ, ㅇㅌㅈㅇ, 알오au, 급전개ㅈㅇ

(시즌2 이후 이야기라서 빅터는 바냐로 표기함)
















 

다락방 책상 가장 아래쪽 서랍은 이중 바닥으로 구성되었다. 파이브는 서랍 바닥을 들어 올려 벤 몰래 숨겨둔 장치를 꺼냈다. 위치추적기였다.




파이브는 벤이 자는 사이에 왼쪽 허벅지에 조그마한 칩을 하나 심었다. 만약을 위한 조치였다. ‘침대에 빈대가 있어.’ 아침에 일어난 벤은 왼쪽 허벅지에 붉은 반점은 보여주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었다. 빈대가 없다고 차마 말하지 못한 파이브는 하루 종일 침실에 소독약을 뿌리며 존재하지도 않는 빈대를 박멸하려 애썼었다. 그게 일주일 전 일이었다.




 

투박한 두깨를 자랑하는 위치추적기 화면 위에 초록색 불빛이 반짝였다. 다행스럽게도 위치추적기 신호가 끊길 만큼 벤이 멀리 가지 않았다. 지금 벤은 얼음 같은 공기를 뚫고 숲을 거닐었다.




 

현관에 걸어둔 벤의 외투를 챙겨서 나가려는 순간, 파이브 목덜미에 까슬한 소름이 돋아났다. 지금 벤을 찾으러 나가면 좋지 않을 일이 생긴다는 예감이 발가락에서부터 정수리까지 빠르게 번져나갔다. 만약을 위해 호신용 무기를 챙긴 것은 그래서였다.

 

 

 


 

 

 

겨울 숲에서 마주한 나무는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처럼 보였다. 저마다 분노에 차서 파이브를 향해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입이 없는 나무조차도 파이브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외로웠다. 벤을 찾으러 가는 길이 시리도록 외로웠다.



 

숲 가운데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나무를 응시하는 자가 있었다. 양말도 신지 않은 발이 얼어버린 흙을 밟고 섰다. 오랫동안 추위 속을 맨발로 다닌 탓에, 혈색이 도는 말랑한 분홍색이 아니라 탁한 푸른 빛을 띄었다. 파이브는 외투만 챙기고 신발을 챙기지 않은 걸 자책했다. 


 

“벤.”


 

파이브는 조심스럽게 벤에게 다가갔다. 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


 

파이브는 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언어와 목소리였다. 성대를 울리지 않고 폐에서 나오는 공기를 그대로 내뱉는 것 같은 소리였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나무에 옹이처럼 생긴 포털이 보였다. 빛이 나지 않았다면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새가 작은 부리를 쪼아댄 구멍처럼 보일 만큼 아주 작은 포털이었다. 저 정도 포털이면 크툴루의 흉측한 촉수가 튀어나올 수 없었다. 


 

 

파이브는 신발을 벗어 벤 옆에 뒀다.파이브가 움직일 때마다, 물기를 잃은 낙엽이 파이브 구두에 밟혀 바스락거리며 부서졌다. 파이브는 인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이곳에 자기가 있다는 사실을 벤이 알아주길 원해서였다.

 

“돌아가자.”


 

벤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코앞에서 보지 않았다면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말라버린 입술 사이로 시린 밤공기보다도 작은 목소리가 비집어나왔다.


 

“...예전에는 종말을 막을 수만 있으면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벤은 여전히 작은 포털에 눈을 고정한 채 말한 탓에, 파이브가 아니라 청자가 없는 혼잣말처럼 들렸다. 


 

“죽고 싶지 않아. 억울해. 이제야 겨우 평범해졌어. 아버지의 불쾌한 독재에서 벗어났고, 총을 든 강도와 목숨 걸고 싸울 일도 없고, 이제는 애들도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어. 너무 평범해서 행복한 삶이야. 내 삶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벤의 눈가가 떨렸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파이브는 벤의 몸에서 뻗어나가는 날카로운 분노를 볼 수 있었다. 




 

벤도 사람이었기에 화를 내고는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벤은 화를 내다가도 곧바로 차분해져서 생각에 잠기곤 했다. 분노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안전장치를 매다는 행동이었다. 남을 해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만큼 신중해진 탓이었다. 유달리 검게 보이는 눈동자에서 쏟아져나오는 분노를 벤은 갈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종말에서 홀로 살아남는 동안, 파이브는 야생동물만큼이나 생존에 필요한 예민한 감각을 얻었었다. 자신을 위협할 존재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감각이었다. 파이브 몸이 당장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위험한 존재가 눈앞에 있다는 뜻이었다.



 

불안정한 벤을 설득해야 했다. 


 

“우리 삶은 계속될 거야. 종말을 막을 방법을 함께 찾았잖아.”


 

비록 종말을 막을 방법이 완전하지 않았지만, 파이브는 그 점을 상기시키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파이브는 모든 걸 해결해 줄 절대자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


 

벤은 입술을 달싹거릴 뿐,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파이브를 부르고 싶은데, 파이브가 누군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지는 입술에서는, 파이브의 독특한 이름뿐만이 아니라 눈앞에 선 남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했다. 




 

파이브는 장난감 가게에서 벤과 재회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기억을 잃었던 벤은 파이브를 낯선 사람으로 인식했을지언정, 항상 다정한 눈으로 대해줬다. 원래의 벤은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당신은 아시나요?”


 

팽팽한 침묵을 깨고 벤이 입을 열었다. 깍듯이 예의를 차린 말투에는 친밀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다시 파이브의 본능이 달아나야 할 상황이라고 소리쳤다. 벤은 평소와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상대방의 연약한 목을 물어뜯으려 몸을 웅크린 맹수와 흡사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는 없어. 그게 내가 찾은 답이야.”


 

파이브는 첫 번째 종말에서 마주했던 가족의 죽음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4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머릿속에 각인된 참담한 광경이 사라지지 않았다. 독처럼 온몸에 퍼질 뿐이었다. 모순되게도 그 독이 파이브를 종말 속에서 살아남도록 했다. ‘내가 애들을 살릴 수 있어.’ 곰팡이가 피지 않은 스카프를 돌로레스 목에 두르며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되뇌었었다.




 

벤은 습자지처럼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동시에 아주 작은 포털이 몸집을 키웠다. 고목보다 더 커진 포털에서 크툴루 쏟아져 나왔다. 날카로운 갈고리가 촘촘히 박힌 촉수가 파이브를 향해 뻗어갔다. 벤의 관심을 빼앗은 파이브에게 벌을 주기 위함이었다. 파이브는 벤을 감싸고, 포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곳으로 이동했다. 


 

“으윽.”


 

차갑게 굳은 흙바닥에 뜨겁고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파이브는 옆구리를 움켜잡았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옷과 손을 축축하게 적셨다. 파이브는 자길 공격한 흉측한 촉수를 쳐다보았다. 갈고리가 촘촘하게 박힌 촉수는 나무가 아니라 벤의 등 뒤에서 꿈틀거렸다. 크툴루는 그들에게서 멀어져가는 벤을 붙잡으려고 벤의 몸에 억지로 포털을 연 것이다.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입은 파이브는 몸을 지탱하려고 나무에 몸을 기댔다. 여기서 중심을 잃고 휘청인다면, 크툴루가 단숨에 파이브의 숨통을 끊을 것이다. 



 

벤은 어떻게든 자신이 불러내지 않은 크툴루를 조종하기 위해 노력했다. 몸에 불이 옮겨붙은 듯이 온몸을 비틀거리다 바닥으로 쓰러져 사지를 허우적댔다. 

 


“...아악, 저리 가. 꺼지라고!”


 

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등에 튀어나온 촉수가 몸속으로 들어가려다, 다시 파이브를 향해 뻗어 나왔다. 벤은 검지 손톱이 빠질 만큼 땅을 긁어대며 크툴루를 조종하려 애썼다. 




 

파이브는 비상시 사용할 총에 손을 댔다가 거두었다. 크툴루의 빠른 움직임이 벤과 지나치게 겹쳤다. 실수한다면 벤이 위험해진다. 파이브는 외출할 때마다 몸에 지니고 다니는 손바닥만 한 단도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벤에게 다가가, 크툴루가 포털 속으로 사라지도록 상처만 입힐 계획이었다. 파이브는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조차 쉬지 못할 만큼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푸른 빛이 한 번 반짝이고, 날카로운 칼이 빠르게 움직였다. 칼은 빠르게 두꺼운 촉수의 피부를 베어내면서, 얇은 인간의 피부도 함께 베어냈다. 



 

얇은 목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칼끝에 베였으니 자상이 깊진 않았지만, 피가 벤의 얇은 티를 적시기 시작했다. 상처를 입은 크툴루는 포털을 닫으며 사라졌다. 새까만 겨울 숲에서 피를 흘리는 두 사람만이 고요히 남았다.


 

“파이브, 아.. 파이브…”


 

벤이 목에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벤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목에서 흐르는 핏물이 빗물이라도 된 것처럼 손등으로 훔치며 파이브 이름만 불렀다.



 

파이브는 벤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지 마.’ 벤이 두려움에 떨며 뒤로 물러섰다. 벤의 눈이 파이브 손에 들린 단도와,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를 지혈하느라 새빨갛게 변한 양손을 차례로 보았다. 항상 반짝거리던 눈에서 짙은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지금 벤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지혈해야 해. 목에서 계속 피가 흐르잖아.”


“가까이 오지 마. 네가 이런 거잖아.”


 

목에 난 상처를 신경 쓰느라 크게 소리치지 못했지만, 파이브는 지금 벤이 강하게 경고한 것임을 느꼈다. 벤의 등과 배에서 다시 크툴루가 꿈틀거리며 나타났다. 굵고 거대한 촉수들이 벤의 몸을 휘감았다. 



 

벤은 그대로 사라졌다. 크툴루가 벤을 끌고 가버렸다. 파이브는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물기가 없어 힘없이 부서지는 낙엽이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바냐는 소파에 널브러진 거대한 남자를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피가 묻은 셔츠를 벗고 옆구리에 어설픈 응급처치를 받은 파이브가 느리게 숨을 쉬고 있었다. 바냐는 파이브가 선호하는 커피가 무엇인지 알았지만, 일부러 아주 진하고 탄 맛밖에 나지 않는 디카페인 커피를 줬다. 그래도 파이브는 감사히 맛없는 커피를 마셨다. 바냐가 준 커피에 군소리할 수는 없어서였다.
 

 

“내 집에 있는 거라고는 비상용 연고랑 소독약, 반창고가 전부야. 아참. 아버지가 주신 약도 좀 남아있어.”


“다 버린 게 아니야?”


“소파 밑으로 약통이 굴러 들어갔어. 꺼내기 귀찮은데, 네가 원한다고 하면 기꺼이 꺼내서 줄게.”


 

바냐는 셔츠 소매를 걷었다. 약을 먹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자신만만한 자세였다. 첫 번째 종말을 막은 뒤, 바냐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옆구리가 뚫렸으면 내가 아니라 병원에 가야지.”


“시간이 없어서 그래. 병원에 가면 진통제를 내 팔에 꽂고 하루 종일 침대에서 잠들게 만들 테니까.”


 

왜 시간이 없는지 바냐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종말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서였다.



바냐는 옆구리에 난 상처는 어쩌다가 생긴 것인지를 물어보지 않았다. 자신이 능력이 없다고 믿던 시절에, 바냐는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활약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했었다. 시민들은 벤이 불러낸 촉수가 만들어내는 잔인한 흔적을 알지 못했지만, 바냐는 수십 번이나 그 흔적을 목격했었다. 




 

바냐가 일인용 소파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담배도 피워?’ 파이브 물음에 코웃음치고는 익숙한 손짓으로 불을 붙였다. 


 

“벤은 어디에 있어?”


“어디에 있는지 알아.”


“알지만 말해주지는 않네. 내가 벤을 헤칠까 걱정돼?”


“그 반대야.”


 

파이브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으윽, 우리는 벤을 헤치지 못했어. 단 한 번도. 심지어 너도 말이야.”


 

바냐는 파이브가 과거형으로 말했다는 걸 눈치챘다. 바냐는 오른손을 들어 창틀에 올려놓은 작은 인형을 움직여보았다. 7살짜리 과외생이 준 선물인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작은 토끼 인형이었다. 인형은 공중에 떠올랐다가 창틀이 아닌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냐는 자기 자신도 어찌하지 못할 만큼 큰 힘을 가졌다. 그런 바냐마저도 벤에게 당했다면, 종말에 당도한 벤의 모습이 어떨지 걱정되었다. 

 


“벤은 외로울 거야. 우리라도 옆에 있어 줘야 해.”


“벤을 죽일 수 있겠어?”


 

바냐는 다시 인형을 공중으로 떠올렸다. 원래 있던 창틀에 올려두려고 했는데, 토끼 인형은 유리창에 ’삑’ 소리가 나도록 부딪히고 다시 바닥에 추락했다. 집 한 채쯤은 손쉽게 부술 수 있지만, 세심하게 능력을 쓰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파이브, 너는?”


“그래서 애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어. 벤이 우리를 죽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벤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올 수 있으니까.”


“숭고하게 십자가를 짊어지겠다는 말이구나.”


 

연약한 연기가 허공에 퍼졌다. 파이브 커피잔에 바닥이 보였다. 파이브는 커피 원두와 뒤섞인 하얀 가루를 확인했다. 커피를 내릴 때 주방에서 지나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바냐가 뭔가를 커피에 탄 게 분명했다. 집에 연고나 소독약만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파이브는 눈꺼풀 무게가 점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8시간만 자자. 너에겐 휴식이 필요해.”


 

바냐가 파이브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길이 신호가 되었는지, 파이브는 지금까지 미뤄뒀던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자마자 파이브는 위치추적기부터 확인했다. 주머니에 있어야 하는 위치추적기가 없었다. 그걸 훔친 범인이 누군지는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본 적이 없는데…”


 

훔쳐본 미래에서 파이브는 혼자서 벤과 마주쳤다. 바냐가 먼저 벤을 찾아갔던 적은 없었다.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미래가 뻗어나갔거나, 위치추적기가 소용없어진 것이다. 잠에 취해 비틀거리던 파이브는 주방으로 가서 커피를 내렸다. 그 과정에서 커피 원두를 주방에 쏟아서 주방을 어지럽혔다.


 

“몰래 약을 먹인 짓에 대한 복수야.”


 

파이브는 굴러다니는 원두를 보며 혼잣말했다.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바냐가 치우기 좋도록 발로 쓱쓱 밀어서 원두를 한곳에 모았다.

 




자신이 얼마나 오래 잠들었는지를 확인했다. 22일 아침에 잠들어 23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깨어났다. 하루를 날린 셈이다. 잠을 억지로 미뤄둔 벌을 받은 셈이다. 아무것도 먹지 못 한 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바냐 주방에서 얻을 수 있는 달콤한 간식이라고는 하얀 설탕 봉지밖에 없었다. 하얀 봉지를 뜯어 달콤한 설탕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파이브는 밤에도 환하게 불을 밝히는 가게로 들어가 계산도 하기 전에 끈적한 초코바를 입안에 쑤셔 넣었다. 짧게 자른 은발에 빨간 뿔테 안경을 쓴 할머니가 파이브를 노려보았지만,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턱을 괴고 가게 밖 풍경을 구경할 뿐이었다. 




 

파이브가 가게에 들어온 이유가 당분 충전만은 아니었다. 바냐가 사는 아파트에서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목에 이 가게가 있어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서는 어떤 버스를 탔는지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CCTV를 몰래 빼돌릴 계획이었지만, 밖을 유심히 관찰하는 가게 사장의 습관 덕에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파이브는 지폐 몇 장과 함께 바냐 사진을 꺼냈다. 얼마 전에 끝난 정기 공연 포스터였다. 가게 사장은 안경을 고쳐 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혹시 이 사람이 오늘 가게 앞을 지나간 적이 있습니까?”


“매일 바이올린을 들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던 그 사람이네. 그런 걸 왜 물어보시나?”


 

가게 사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파이브 발을 노려보았다. 하늘색 털 실내화를 맨발로 신고 있는 탓이었다. 이런 꼴로 돌아다니는 경찰이 없다는 건 가게 사장도 충분히 알수 있었다. 그러니 경찰도 아닌 자가 취조하듯이 물어보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다.
 

 

“저는 이 사진 속 사람의 가족입니다. 연락도 없고,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아서 걱정되거든요.”


 

바냐는 고작 한나절 정도만 집을 비웠지만, 파이브는 가게 사장이 오해하게끔 사실을 부풀려 말했다. 고개를 숙이며 눈이 선량해 보이도록 노력했다. 벤은 항상 속아 넘어가는 표정이었지만, 가게 사장을 속이기에는 어설픈 연기였다. 벤은 파이브 연기가 아니라 얼굴에 속아 넘어갔던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까지는 멀쩡히 잘 살아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쇼.”


 

더 이상 자세한 답을 해주지 않겠다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장이 해준 대답으로 충분했다. 파이브는 가게 밖으로 나갔다가 몰래 CCTV를 확인할 수 있는 가게 창고로 들어갔다. 오늘 아침까지 멀쩡히 살아있다고 했으니, 그 시간대만 확인하면 되었다.




 

바이올린 대신에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바냐가 정류장에 나타났다. 바냐는 파이브가 미래에서 목격한 폐건물이 아닌, 이 지역을 벗어나는 버스를 탔다. 종말을 막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벤은 파이브가 생각한 곳과 정반대에 있었다.

 

















 

 

 


파이브벤


 
[Code: 9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