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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ㅅㅊㅈㅇ, ㅇㅌㅈㅇ



















 

파이브의 화를 풀어주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답은 ‘없다’이다. 파이브의 화는 아주 짧게 지나간다. 누군가가 잘못했거나 바보 같은 짓을 하면, 파이브는 그 행동에 대하여 화를 낸다. 그리고는 끝이다. 화를 길게 가져가는 법이 없었다. 




 

파이브가 한 시간 동안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다. 아예 말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나에게만 말을 안 했다. AJ가 의장실을 나간 뒤, 파이브와 나는 고문실이라는 단어 위에 빨간 빗금을 칠하고 ‘검사실’이라고 쓴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이상한 등대 모양의 조명으로 내 눈을 관찰하는 신기한 방식부터, 주사기로 피를 뽑는 다분히 익숙한 검사 등 다양한 검사를 진행했다. 검사만 하는데도 진이 다 빠졌다. 동그란 의자에 앉아 계속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 노력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올릴 때마다 파이브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파이브. 검사가 다음 일정은 뭐야?”

 

 

파이브는 내가 누운 검사대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파이브는 일부러 나를 쳐다보지 않고 내 옆에서 있는 검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큐민. 검사가 끝나면 숙직실에서 눈 좀 붙여야 한다고 벤 하그리브스 씨에게 말해줘.”


“네. 검사 끝나면 숙직실에서 눈 좀 붙여야 된다고 합니다.”



 

혈압을 측정하던 큐민 씨는 파이브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달해줬다. 파이브는 큐민 씨를 이용해 나와 대화하고 있었다. 아예 내 질문을 무시하던가, 아니면 나한테 직접을 말을 해주지. 애꿎은 큐민 씨만 우리 사이에 껴서 고생이었다. 



 

“파이브, 정말 미안해. 그런데 다 널 위해서 한 말이었어.”



 

세 번째 사과였지만, 내가 생각해도 무심한 사과였다. ‘널 위해서’라는 말을 붙이면서 하는 사과가 얼마나 이상한지 잘 알았다. 그렇지만 AJ에게 제안한 말은 내 진심이었다. 없던 일로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하는 사과는, 파이브가 내 미안하다는 말에 약하다는 걸 알고 하는 말뿐인 사과였다. 나도 참 약삭빠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이브가 진짜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나는 이 불편한 상황을 모면한 생각으로 사과를 임시방편으로 쓰고 있었다.



 

“큐민 씨. 벤 하그리브스 씨에게 한 시간 전에 한 말을 철회할 거냐고 물어봐 줘요.”
 

“네. 한 시간 전에…”


“그 말은 철회하지 않을 거야. 그냥 한 말이 아니야.”


“큐민 씨. 그러면 벤 하그리브스 씨에게…”


“큐민 씨. 말 전달하지 말아요. 그냥 내가 파이브랑 대화를 안 할게요.”



 

큐민 씨는 내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며 파이브 쪽을 쳐다보았다. 파이브는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았다. 손끝에 전기가 올 정도로 무서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파이브에게 지기 싫어 나도 한껏 눈에 힘을 주고 파이브를 노려보았다. 파이브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미술관에 전시된 조각처럼 미동도 없이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떻게 디에고는 저런 얼굴을 마주 보면서 파이브와 다툴 수 있었던 것일까? 새삼 디에고가 경이로웠다. 



 

검사가 끝나자 파이브는 무언의 눈짓을 내게 보냈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검사대에서 내려와 일부러 파이브와 팔이 부딪힐 정도로 딱 붙어서 파이브를 따라갔다. 이러면 파이브는 내 어깨를 잡거나 허리를 잡고 걸어가곤 했다. 아니면 손이라도 잡아주었다. 지금은 내가 자신에게 치대는 걸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문에 붙은 팻말에는 누군가가 마커로 급하게 휘갈겨 쓴 ‘숙직실’이라는 단어가 적혔다. 그것만으로 이 숙직실이 파이브가 급하게 만든 장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자 허브 씨가 급하게 계단을 내려왔다.



 

“여기는 검사가 끝날 때까지 벤 하그리브스 씨가 지낼 장소입니다.”


“검사가 끝날 때까지요?”


“네. 원래는 크리스마스 때까지 벤 하그리브스 씨를 여기서 지내게 할까 하다가, 그러다가 커미션마저 크툴루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와서, 크헉.”


허브 씨가 열심히 설명하다가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자기 입을 가렸다. 내게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는 사항까지 말해서였다. 허브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검사가 끝나면 모두의 안전을 위해 커미션에서 나를 쫓아내겠다는 의미였다. 



 

“어차피 코딱지만 한 숙직실에서 오래 있게 할 생각도 없었어.”


“그렇죠. 그렇지만 의장님 형제분이 지내실 곳이니 저희가 열심히 꾸몄습니다.”



 

허브는 기대해도 좋다고 말하며 내게 빨리 문을 열어보라고 보챘다. 열심히 꾸몄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쨋든 당장 피곤한 몸을 던질 침대가 그리웠기에 문손잡이를 돌렸다. 



 

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내가 누워서 데굴데굴 굴러도 될 정도로 커다랗고 새빨간 침대였다. 도대체 저렇게 빨간 침구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정도로 아주 빨갰다. 그러나 정열적인 침대보다 더 시선을 끄는 건 침대 위에 걸린 그림이었다. 아주 크고 화려한 액자 속에는 파이브 초상화가 있었다. 파이브가 실종되고 벽에 걸렸던 13살 당시 얼굴이 아니라, 다 자란 파이브 얼굴이 담긴 초상화였다. 



 

“숙직실에 커미션 의장 초상화가 있네요. 세상에…”



 

만약 장난감 가게에 숙직실이 있고, 거기에 사장님 초상화가 있다면 어떨지 상상해보았다. 징그러웠다. 이게 무슨 디스토피아적 상황인가 싶었다. 심지어 초상화 속 파이브는 상당히 심기 불편해 보였다. 파이브 역시 자신의 초상화가 벽에 걸린 걸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부탁한 사항들을 모두 반영했습니다.”
 

“벤이 자기 집처럼 착각이 들 정도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꾸며달라는 말이 어떻게 받아들였길래 이런 결과물이 나오지?”
 

“집에 의장님 초상화가 있었다는 말을 들어서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허브 씨는 파이브 초상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야 숙직실에 모든 게 이해되었다. 침대가 방의 반을 차지한다는 말은 내 방이 그만큼 좁다는 걸 의미했다. 커미션은 그 말을 다르게 해석한 것 같았다. 내가 아주 넓은 침대를 사용한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빨간 침구는 도대체 무엇을 잘못 전달받았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허브가 숙직실 소개를 하고 서둘러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사라졌다. 파이브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허브가 사라지자 숙직실에는 나와 파이브만 남았다. 큐민 씨처럼 말을 대신 전해줄 사람마저 없었다. 지금이 길고 길었던 86분간의 냉전을 끝낼 기회였다.



 

“AJ 씨와 그런 약속을 한 이유가 있어. 우리가 종말을 막을 수 있을 거야. 이번에는 정말 막을 수 있다는 기분이 들어.”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있어?”



 

파이브 목소리에서 작은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자신은 찾지 못한,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단서를 내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짧은 물음 속에 드러났다.

 

 

“단순한 추측이야.”



 

안타깝게도 나는 내 지나친 자신감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말 ‘그냥’ 이번에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파이브가 저렇게 노력하는데, 어쩌면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겠다는 바람이었다. 민망함이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왔다.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애가 된 것 같았다. 

 

 

내 답을 들은 파이브가 미소를 지었다. 어이가 없어 짓는 웃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AJ가 너와 어떤 계약을 했든지 상관없어. 네가 위험해지는 순간, 내가 시간을 돌릴 거니까.”



 

파이브가 소파에 앉았다. 소파만큼은 내 아파트에 있던 모습과 똑같았다. 다른 부분이라면 아파트 소파는 텔레비전 앞에 있었지만, 이 소파는 침대와 서재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 파이브를 마주 보았다. 



 

“커미션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까?”


“그들은 날 막지 못해.”



 

잘생긴 얼굴 위로 오만한 자신감이 드러났다. 다른 이가 그렇게 말했다면 허풍이라 여겼겠지만, 파이브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파이브와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잠을 자지 않은 지 꼬박 26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제발 쉬라고 뇌가 나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어깨와 등이 점점 무거워졌다. 걸터앉은 침대에 그대로 몸을 기울여 누웠다. 내가 침대에 쓰러지듯이 눕자 파이브가 침대로 다가왔다. 내 신발을 벗기고 자세를 바로잡고 눕도록 도와주었다.



 

“파이브, 옛날이야기 해줘.”



 

언젠가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파이브에게 투정을 부렸다. 엄마는, 그러니까 그레이스는 아버지가 어떻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얻었는지를 내게 말해주었다. 7살인 내가 바랐던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는 엄마가 동화 속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랐었다. 소설 속 엄마들은 아이가 잠들 때까지 항상 동화책을 읽어주었기 때문이었다.

 

 

파이브 역시 동화같이 낭만적인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았다. 대신 크리스마스에 종말이 일어난 첫 번째 시간선을 설명해줬다. 애들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할 때까지, 나는 죽기 전에 해보지 못한 일들과 살아있을 때 한번 해봐야 할 일들을 하며 보냈다고 했다. 지구본에 다트를 던져 여행하고, 온종일 책만 읽다가 서재 바닥에서 잠을 자고, 술을 잔뜩 마시고 앨리슨과 노래방 듀엣을 부르기도 했었다.

 

 

크리스마스 파티가 시작되고 화려한 케이크 위 초에 불이 붙이는 순간, 흉측한 괴수들이 우리 가족을 공격했다. 포털에서 나온 크툴루에게 가장 먼저 희생당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초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이었다. 내가 있는 반경 10km 내에서 가장 먼저 포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파이브가 나와 가족을 떼어놓은 데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엄브렐러 아카데미가 가장 먼저 공격당하는 불상사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넌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일 년을 보냈었어. 내가 종말을 막겠다고 시간을 돌린 바람에 모두 없던 일이 되었지만 말이야. 지금 시간선은 너에게… 다섯 번째로 괜찮은 시간선이야.”
 

“그때도 너와 내가 지금과 같은 관계였어?”

 

 

파이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 관계가 발전한 건 지금이 처음이야.”


“그러면 내겐 지금이 최고의 시간선이야."


“내가 더 좋은 시간선을 만들어 줄 수 있어.”



 

결국 파이브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었다. 종말을 막지 못하게 되어 시간을 다시 되돌리게 된다면, 파이브는 나를 또 찾아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허브가 상상력을 발휘에 꾸민 방은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것처럼 보였다. 꼬마 파이브가 아닌 청년 파이브가 그려진 초상화도 그랬고, 내 아파트 벽에 남은 섬뜩한 얼룩은 기하학적 무늬를 가진 벽지로 바뀌었다. 내가 어릴 때 읽던 책들은 표지가 바뀐 채 책장에 진열되었다. 그리고 내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방에 파이브가 있었다.



 

눈이 감겨왔다. 잠들기 직전에 파이브에게 손을 내밀었다. 파이브는 내 손을 양손으로 잡아주었다. 그 손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커미션에서 지내는 건 미친 짓이었다. 시공간의 불확실성을 얕보아서는 안 되었다. 커미션은 어딘가에 있으면서 어딘지 모를 곳에 위치했다. 하루가 24시간으로 구성되는지조차 의심되었다. 어떤 날은 낮이 아주 길었고, 또 어떤 날은 점심을 먹은 후 파이브와 산책하는 중에 해가 지평선을 넘어갔다. 시간이 규칙적이지 않은 탓에 커미션 직원들은 사내 방송에서 틀어주는 종소리에 맞춰 움직였다. 사내 방송에 따라 일을 시작하고 밥을 먹고 퇴근했다. 어느새 나도 시계가 아닌 방송 스피커에 의지하여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집에 가고 싶어.”
 

“입에 넣은 도넛이나 다 삼키고 그런 소릴 해.”



 

습관처럼 한 말에 파이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식당에서 제공하는 도넛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맛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도넛을 제외하고 식당에서 파는 달콤한 음식이라고는 특정 시대를 응축했다는 알사탕 같은 수상쩍은 것들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비싼 값에 팔았다. 

 

 

파이브가 커피잔을 들고 왼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형이상학부 직원들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파이브와 내가 식당에 들어서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직원들은 파이브를 힐끔거리며 구경했다. 첫날은 파이브가 잘생겨서 그런 줄 알았다. 파이브가 의장인 걸 알아챈 뒤에는 간부가 식당에 있으니 신기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지금은 그들이 우리를 왜 보는지 알았다. 



 

“형제랑 연애하는 게 신기한 거지.”


“벤, 뭐라고?”

 



혼잣말이 컸다. 나는 손사래를 치고 도넛을 다시 한 입 크게 베어먹었다.



커미션에서 파이브와 내가 형제인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걸 간과했다. 그것도 모르고 계단에서 몰래 키스하다가 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직원들에게 그 장면을 들켰다. 그때 파이브가 그들에게 뭐라고 했냐면, 일 안 하냐고 했다. 형제간에 벌어진 일을 목격하고는 놀라서 굳은 직원들에게 일하라는 말만 했다. 



 

“여기 직원들이 나를 종말 원인이나 크툴루 포털이라고 불렸으면 좋겠다.”


“둘 다 별로인데.”


“형제랑 키스하는 놈이라고 불리는 것보단 낫잖아.”


“레지스탕스 싸이코라고 불리는 사람도 있는데.”



 

파이브가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간부가 레지스탕스가 될 수 있나 싶다가 파이브가 수류탄으로 서류 가방 보관실을 박살 냈다는 게 떠올랐다. 그때는 의장이 아닌 평범한 직원이었다고 했다. 파이브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나는 허브가 말해주었던 파이브의 현장요원 시설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 파이브가 싸이코라고 불린다고?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목소리를 잔뜩 낮춰 속삭였다. 

 

 

“어떤 놈이 널 싸이코라고 하는지 나한테 몰래 말해봐. 내가 손봐줄게.”



 

누가 내 사랑스러운 파이브한테 그런 흉측한 단어를 갖다 붙인 거야. 나는 디에고에게 어설프게 배운 복싱 잽 동작을 했다. 파이브는 내가 아주 매서운 주먹을 가졌다는, 되지도 않는 소리나 하며 내 장단에 맞춰주었다. 

 



 

커미션 생활은 시작처럼 끝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커다란 침대에서 파이브를 껴안고 잠들었던 게 커미션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요란한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나는 커미션 숙직실이 아니라, 오래된 아파트에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거실로 달려가 뉴스를 틀었다. 뉴스에 표시된 날짜는 장난감 가게를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미던 바로 다음 날이었다. 커미션에서 지냈던 시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커미션에서 보낸 요원일지도 몰랐다. 방어 태세를 갖추고 주방으로 살금살금 움직였다. 그곳에는 익숙한 사람이 커피를 내리는 중이었다.

 

 

“굿모닝.”



 

파이브가 머그잔에 가득 따른 커피를 건네주며 아침 인사를 했다. 커피를 마실 기분은 아니었지만 파이브가 줬으니 한 모금 삼켰다. 멍한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카페인의 효과라고 칭하기엔 평소와 다른 극적인 경험이었다. 



 

“원래라면 커미션에 있던 시간만큼 계산해서 돌아와야 했지만, 우리한테 시간이 얼마 없어서 바로 다음 날로 돌아왔어.”


“원하는 시간을 정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그렇지. 하지만 어긋난 시간만큼 몸에 무리가 와. 커피를 마시면 몸이 받는 타임쇼크를 중화시킬 수 있어. 그러니까 그거 다 마셔.”



 

내 손에 들린 커피를 가리키며 파이브가 말했다. 파이브가 커피를 많이 마시는 데에 그런 이유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출근까지 58분이 남았다. 



 

“서둘러 준비하면 제시간에 장난감 가게에 도착할 수 있겠다.”


“뭐?”



 

내 말에 파이브가 진심이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종말이 코앞에 다가왔고, 그 종말을 막을 사람이 나라는 걸 알면서도 출근하고 싶냐는, 그런 눈빛이었다. 나는 파이브만큼 완벽한 커피를 호로록 마시고 난 뒤, 내가 가게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를 나열했다.


“첫째, 크리스마스는 장난감 가게 대목이야. 갑자기 그만둘 수 없어.”
 

“음…”


“둘째,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사장님이 상여금을 주신다고 했어.”


“흐음…”


“셋째, 종말이 코앞이지만 어쨌든 나는 장난감 가게 직원이야.”



 

내가 생각해도 빈약한 이유들이었다. 종말이라는 거대한 개념 앞에서 일상생활은 너무나 나약해 보였다. 



 

파이브는 식빵을 꺼내 굽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에 산 식빵이지만 사실은 어제 산 식빵이었다. 반대로 말했나? 어제 산 식빵이지만 사실은 일주일 전에 산 식빵인 걸까? 머리가 아파져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커피 덕분인지 복잡한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한테 두 가지 대안이 있어.”



 

토스트를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파이브가 말했다. 



 

“널 대신해서 크리스마스 때까지 일할 사람을 구하거나, 가게에 있는 장난감을 모두 구입해서 너와 사장님 둘 다 크리스마스 때까지 쉴 수 있도록 할 거야.”


“그게 가능해?’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자 파이브가 못 할 건 뭐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물어보았다.


“커미션에서 모든 비용을 지불하는 거지?”


“물론. 예전에도 한 번 썼던 작전이야. 그때 사장님이 수표를 받고 눈물까지 글썽거리셨지.”



 

파이브가 묘사하는 사장님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사장님은 크리스마스 때 사모님과 여행을 간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만약 파이브가 가게에 있는 장난감을 모조리 사들인다면, 사장님은 한 번도 가지 못했던 가족들과의 여행을 가질 것이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커미션이 무슨 방법으로 돈을 버는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장난감 창고를 털 정도의 돈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파이브의 제안에 수긍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노동자로서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혹하기도 했었다. 



 

내가 접시 위에 있는 토스트를 다 먹자마자 파이브는 빠르게 식탁을 치웠다. 지나치게 분주해 보였다.
 


“어디 급하게 갈 곳이 있어?”

 

 

내 물음에 손이 안 보일 정도로 열심히 접시를 닦던 파이브가 나를 쳐다보았다.
 


“5분 안에 외출 준비할 수 있겠어?”


“양치질만 3분이 걸리는데.”


“그럼… 10분 안에 준비해줘.”



 

파이브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10분이란 시간을 내게 줬다. 10분도 외출 준비를 마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움직이는 파이브에게 차마 시간을 더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파이브가 빨리 준비하라고 했으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잰걸음으로 욕실로 들어가 빠르게 칫솔에 치약을 짰다.

 

 

차에 타고 나서야 왼쪽에는 초록개구리 양말을, 오른쪽에는 초록잎사귀 양말을 신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계단을 올라 양말을 갈아 신기에는 늦었다. 파이브가 집중해서 운전하고 있어서였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포털이 열릴 거라고 예상되는 곳.”

 



크툴루 세계와 통하는 포털이 열리는 장소. 파이브의 답을 듣자 갑자기 뱃속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내 뱃속에 크툴루가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커미션 직원들 커피타임이 생기면 파이브벤 구경하려고 일부러 구내식당까지 갔음. 그걸 파이브는 알고 벤은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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