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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9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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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ㅅㅊㅈㅇ, ㅇㅌㅈㅇ, 알오au


















 

가게에 재밌는 모래시계가 들어왔다. 유명 판타지 소설에서 나오는 마법의 모래시계란다.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모래시계는 원작 묘사와 비슷하게 만들어져 영롱한 자태를 뽐낸다고 하는데, 우리 가게에 들어온 모래시계는 보급형에 가까워 약간은 조악했다. '타깃층이 다른 거야.' 사장님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왼쪽으로 두 발짝 움직인 뒤 전시된 모래시계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가 은은하게 초록빛을 띄었다. 꼭 파이브의 눈을 연상시키는 맑은 초록색이었다. 그래서일까. 파이브에게 모래시계를 선물해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우리 장난감 가게에서 파는 물건이 아니라 백화점에서 파는 비싼 모래시계로 말이다. 파이브가 판타지 소설을 읽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모래시계가 필요해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선물로 준 모래시계는 파이브에게 하등 쓸모없는 물건이 될 게 뻔했다. 그런데도 가게에 진열된 모래시계를 볼 때마다 파이브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은 출근하자마자 오늘 왜 그렇게 칙칙한 옷을 입었냐고 물어보았다. 이상했다. 사장님은 평소에 내가 무엇을 입든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렇게 '칙칙한' 옷을 입지도 않았었다. 블랙진과 감청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을 뿐이었다. 평소에도 즐겨 입은 옷이었다. 사장님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 파이브 씨 안 만나?"

"만나는데요."


파이브를 만난다고 해서 의상에 특별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파이브도 날 만날 때마다 늘 비슷한 옷을 입고 왔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몸에 딱 맞는 슈트 차림이었다. 내 자유분방한 차림새와 파이브의 슈트를 비교하는 게 양심에 찔리는 짓이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는 서로의 옷에 대해 지적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퇴근을 하려고 천천히 짐을 챙기는 동안, 사장님은 속이 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사장님의 행동에 잘못한 일도 없는데 괜히 긴장되었다. 바닥을 대충 닦은 걸 눈치챈 것일까? 나는 유니폼을 벗으며 괜히 바닥에 얼룩이라도 있나 살펴보았다. 



 

사장님은 무언가 큰 결심을 했는지 계산대를 손으로 '톡톡' 두드린 후 입을 열었다.


"생일선물은 뭘로 준비했어?"

"사장님 오늘 생일이에요?"


내 질문에 사장님이 오히려 당황하며  카운터 위에 올려진 탁상시계를 가리켰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간이 아니라 시간 아래 표시된 '10'과 '1'이라는 숫자를 가리킨 것이었다. 



 

나는 10월 1일이 생일인 사람이 누구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확실히 아니었다. 언젠가 사장님은 자기 생일이 매섭게 추운 겨울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였다. 내 얼굴에 떠오른 물음표를 눈치챘는지 사장님은 한숨을 푹 쉬고는 답을 알려줬다. 


"오늘이 파이브  씨 생일이잖아."


그 말에 내가 가장 먼저 한 반응은 '부정'이었다. '설마요.' 내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사장님은 오늘이 분명 파이브 생일이라고 말했다. 그다음으로 내가 한 반응은'의심'이었다. 왜 사장님은 나도 모르는 파이브의 생일을 알고 있는가? 사실 사장님이 날 골탕 먹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사장님이 파이브의 생일을 오늘로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내가 미심쩍은 눈을 하자 사장님은 황당하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파이브가 사장님께 오늘 생일이라고 말했어요?"

"그건 아니지만...  오늘이 생일인 건 분명해."


'헷갈릴 수 없지.' 사장님은 분명 10월의 첫날이 파이브의 생일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돈을 걸고 내기라도 할 것 같은 사장님의 기세에 나는 오늘이 파이브의 생일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어제 파이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일은 교외로 나가자.' 오랜만에 집에서 파이브와 함께 비디오를 보던 중에 파이브가 한 말이었다. 우리는 낡고 좁은 소파에 앉아 하이스쿨 치어리더 팀의 이야기를 다룬 하이틴 영화를 보고 있었다. 하늘 높이 날아 가볍게 착지하는 치어리더의 모습에 홀려, 처음에는 파이브가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도 듣지 못했다. 보다 못한 파이브가 일시정지를 눌렀다. 초록색 유니폼을 입은 치어리더 팀의 동작이 한순간에 멈췄다. '뭐야!' 내 외마디 외침에 파이브는 웃기만 할 뿐, 재생 버튼을 눌러주지는 않았다.


"내일 교외로 놀러 가자. 퇴근시간에 맞춰서 내가 장난감 가게 앞으로 갈게."

"내일? 회사에 안 가?"

"오전에만 근무할 거야."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러자고 답했다. 얼른 치어리더 대회의 우승팀이 누구인지 보고 싶어서였다. 


평소에는 나보다 늦게 퇴근하는 파이브가 오늘은 나보다 일찍 퇴근하였다. 그리고 지금 장난감 가게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장님은 사은품으로 주는 '생일축하카드'를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급한 대로 카드에 생일을 축하한다며 주절주절 글을 써 내려갔다. 


 "카드 한 장만 주면 파이브가 서운해할까요?"

"그럴 리가.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장님도 카드가 주는 건 찝찝한 모양인지 내 눈을 슬슬 피했다.  


"벤한테 자기 생일 말 안 해 줬다며. 오늘 생일인 줄 몰랐다고 솔직히 말해." 


사장님은 패닉에 빠져 가게 안을 떼굴떼굴 구르던 내게 그렇게 조언해줬다. 결국 사장님은 급한 대로 가게 안에 있던 모래시계를 내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이 모래시계를 생일선물로 주고, 나중에 정성 들인 생일선물은 따로 챙겨주기로 계획했다. 













 

높이 솟은 빌딩과 복잡한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니, 푸른빛으로 가득한 세상이 있었다. 파이브와 나의 목적지는 수확이 한창인 포도밭 사이에 있는 와인 양조장이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포도밭을 한참이나 구경한 뒤에 양조장으로 들어갔다. 양조장 내부는 관광객에게 공개된 장소가 제한적이라서 파이브와 나는 와인만 한 잔씩 들고 다시 포도밭이 있는 밖으로 나왔다. 



 

포도밭 주위를 두른 산책로를 파이브와 도란도란 대화하며 걸었다. 장난감 가게에 들어온 모래시계 이야기를 대화에 불쑥 나타난 건, 내가 의도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파이브는 사장님이 내 가방에 무언가를 황급히 넣는 걸 우연히 보았다고 털어놓았다. 


"그걸 봤어?"

"응. 내가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목격한 건 아니지?"


파이브가 당황하는 내 표정을 보고는 물어보았다. 나는 파이브의 임시 생일선물로 모래시계와 카드를 준비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해, 유명한 판타지 소설 속에 나오는 물건이라서 따로 챙겼다고 둘러댔다.


나는 파이브에게 모래시계가 나오는 판타지 소설 속 세계관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소설 속의 신은 끝없이 주인공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는데, 팬들은 그런 신을 욕하면서도 은근히 좋아했다. '잘생겼으니까.' 나는 신이 과하게 인기가 많은 이유를 그렇게 생각했다. 파이브는 참 나다운 생각이라면서 웃었다. 우리는 내가 시각적인 것에 얼마나 약한지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이며 산책로를 나한히 걸었다.


푸른 들판을 끝에는 파란 바다가 있었다. 잔잔한 파도와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수면이 아름다워 보였다. 카메라만 있다면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싶은 광경이었다. 







 

파이브의 말이 맞았다. 나는 시각적인 것, 구체적으로 예쁘고 잘생긴 얼굴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내 눈은 앞에 있는 푸른 바다에서 점점 내 옆에 있는 파이브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을 맞는 파이브와 와인을 마시는 파이브,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는 파이브, 걷는 파이브, 숨을 쉬는 파이브 등. 파이브를 구경하는 게 그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파이브는 내가 계속 자기만 보고 있다는 걸 진작에 눈치챘다. 쑥스러워하거나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대신 계속 내가 자길 관찰할 수 있도록 모르는 척을 해줬다. 그러다 민망함을 참지 못한 파이브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바다도 봐야지."

"바다는 항상 여기에 있겠지만, 너는 아니잖아."

"나도 항상 네 옆에 있을 거야."


그 말이 뭐라고. 설렜다. 우리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걸었다. 파이브의 따뜻하고 단단한 손은 안정감을 주었다. 수십 번 맞잡은 손인데, 마치 파이브의 손을 처음 잡은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파이브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유도 모르고 시작된 뜀박질이었다. 어찌나 빠르게 달렸는지 들고 있던 와인잔이 떨어져 박살 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왜 뛰는 거냐고 물어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파이브는 내 손을 잡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이유 없는 달리기에 어이가 없어 슬슬 웃음이 나올 즈음에 파이브가 속도를 늦췄다. 우리 앞에 갑자기 낯선 두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이 두 사람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독특한 검은색 단발머리를 가진 여자와 얼굴에 상처가 있는 남자였다. 남자는 하얗게 얼굴이 질린 상태였고, 여자는 파이브를 보면 히죽댔다.


"늙은이가 능력도 안 쓰고 왜 뛰어다녀. 숨은 안 차?"


여자가 하는 말은 걱정하는 내용이 담겼지만 말투와 표정은 아니었다. 여자는 파이브가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거리며 뛰는 게 아주 고소하다는 듯이 빙글거리며 구경했다. 파이브는 처음 보는 사나운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숨이 차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허리를 숙이고 간신히 헥헥 거리며 숨을 고르는 일 뿐이었다. 


"벤, 괜찮아?"


생전 처음 본 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보며 한 말이었다. 소처럼 순하고 큰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애처로워 보였다. 


"허..헉.. 누구..누구세요?"


내 말에 남자는 충격을 받은 듯이 입을 반쯤 벌리고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파이브를 향해 욕을 하기 시작했다.















 

라일라와 디에고라는 사람들은 파이브가 예약한 식당까지 우리를 쫓아왔다. 파이브가 두 사람을 쫓아내려 했지만 그들은 무척이나 집요한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이 떠날 생각을 하지 않자, 파이브는 내게 방해꾼이 생겨서 싫지 않냐고 물어보며 은근히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나는 괜찮은데."

"그래. 벤이 괜찮다잖아."


내 대답에 파이븐 절망했고, 디에고라는 남자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나는 지금의 상황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디에고 씨는 성격이 살갑고 넉살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파이브와 아주 가까운 사이로 보인다는 게 그 증거였다. 디에고 씨와 파이브 사이에 오고 가는 날선 언쟁은 서로를 아주 잘 알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디에고 씨는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나를 몇십 년이나 알고 지낸 친구처럼 거리낌 없이 대했다. 그에 반해 라일라라는 사람은 파이브와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보이기는 해도, 둘 사이에 좋은 일만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라일라 씨는 파이브에게 거친 말을 쏟아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욕을 했냐는 듯이 활짝 웃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파이브가 제 이야기를 라일라 씨에게 많이 했어요?"

"이놈이 아니고 디에고한테.. 악!"


라일라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파이브가 뻔뻔한 표정으로 유리잔을 들어 물을 홀짝였다. 둘의 표정만으로 테이블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짐작 갈 수 있었다. 곧바로 테이블 밑에서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파이브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걸 보아 라일라 씨가 힘껏 파이브의 다리를 차며 복수를 한 게 분명했다.


"여긴 어떻게 찾아왔어?"


파이브는 라일라 씨를 보며 물어보았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라일라 씨가 디에고 씨를 이끌고 자신을 찾아 이곳에 왔다고 확신하는 태도였다. 


"커미션은 영감님만 일하는 곳이 아닙니다."

"맞아. 라일라와 커미션 전설인 내가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야."


디에고 씨가 한 말에 파이브는 너 따위가 무슨 전설이냐며 코웃음을 쳤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언젠가 지금과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또다시 파이브와 디에고 씨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다행스럽게도 둘의 언쟁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자연스럽게 끝났다.


"빨리 먹고 꺼져."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파이브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라일라 씨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이 과장된 표정을 지었고, 디에고 씨는 파이브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다 파이브가 식사 전에 내 소매를 직접 접어주기 시작하자, 디에고 씨가 못 참겠다는 듯이 식기를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에 놓았다. 


"파이브, 잠깐 나랑 대화 좀 하자."


디에고의 말에 파이브는 내게 천천히 먹고 있으라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파이브와 디에고 씨가 대화를 하러 나가면 라일라 씨에게 파이브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파이브가 디에고 씨와 라일라 씨 둘 다 일으켜 세워 밖으로 나갔다. 4인용 테이블에는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투명한 창 너머로 아름다운 바다와 함께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싸우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파이브가 화내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파이브는 얼굴부터 발끝까지 모든 근육을 사용하며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서늘하고 예쁜 얼굴에 일렁이는 분노를 바라보며 가니쉬를 포크로 콕 찍어서 먹었다. 디에고 씨는 파이브에게 무어라 말하다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옆에 있는 라일라 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파이브를 약 올렸다. 



 

파이브의 다채로운 표정을 구경하는 건 재밌는 일이었다. 파이브는 답답하다는 듯이 눈을 감고 한숨을 쉬다가, 디에고 씨의 팔을 잡고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을 하기도 했고, 눈에서 빛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노려보기도 했다. 매사에 담담하고 초월한 듯이 굴던 파이브는 사라져 있었다. 



 

대화가 좋게 끝났는지 파이브가 둘과 사이좋게 악수를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잔뜩 화를 낸 흔적이 파이브의 이마로 흘러내긴 앞머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손으로 파이브의 이마에 흘러내긴 머리카락을 정리해줬다. 디에고 씨가 물을 마시다 사레가 걸렸는지 '크흡' 하는 기침 소리를 냈다.


"'커미션'이라는 곳에서 함께 일하시나 봐요."


내 질문에 라일라 씨와 디에고 씨는 멈칫하더니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는 게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나는 잔뜩 긴장한 둘에게 웃으며 파이브와 어떻게 친해진 건지 궁금했을 뿐이라 설명했다. 

 


"안 친해요."

"어쩌다 보니..."

 


라일라 씨와 다르게 디에고 씨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파이브가 매서운 눈빛으로 디에고 씨를 노려보고 있어서였다. 아무래도 파이브는 밖으로 나가 두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어떠한 말도 하지 말라고 한 것 같았다. 내가 두 사람에게 물어볼 수 있는 거라고는 음식이 입에 맞냐는 것처럼 가볍고 간단한 질문들이 전부였다. 






 

파이브와 함께한 식사 중에서 가장 짧은 식사 자리였다. 파이브는 식당에서 노을을 가장 잘 구경할 수 있는 자리를 예약했지만, 노을을 구경하기도 전에 우리는 식당에서 나와야 했다. 


"파이브가 재수 없게 굴면 당장 나한테 연락해."

 


디에고 씨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게 농담인 줄 알고 알았지만, 디에고 씨는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디에고 씨는 아주 심각하게 구체적인 예시를 들며 말을 이었다. 

 


"널 바보라고 부르거나, 그러니 친구가 없는 것이라고 하거나, 아무튼 심한 말을 하면 나한테 말만 해. 내가 저 높은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게."

"벤이 너냐."


보다 못한 파이브가 결국 한소리를 했다. 독특하고 정신없는 파이브 동료들과의 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운전하는 파이브는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양조장을 떠나며 지었던 억지 미소가 파이브의 마지막 미소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파이브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파이브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오늘 파이브의 계획은 이랬다고 한다. '와인을 마시며 바닷가 산책로를 걷다가 미리 예약해 둔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다시 와인 양조장으로 돌아가 깜짝 이벤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게 파이브가 오늘 세운 일정이었다. 


"그래서 이벤트가 뭔지 말 안 해줄 거야?"

"이벤트..."


내 질문에 파이브는 반복적으로 '이벤트'라는 단어만 곱씹었다. 머릿속으로는 딴생각을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몇 분 전에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양조장에서 포도밭으로 이러지는 들판에 테이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의자와 꽃을 가지고 나오던 직원들은 파이브와 나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허둥거렸다. '케이크가 오려면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직원이 파이브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갑자기 케이크? 나는 파이브가 주문한 케이크가 자신의 생일을 자축하는 생일케이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이 되었다. 파이브는 텅 빈 테이블을 한 번 보고, 나를 한 번 보았다. 녹안에는 고민이 일렁이다 결국에는 체념이 드리워졌다. 



파이브는 직원에게 이벤트를 취소하겠다고 말한 뒤, 지금까지 시무룩한 상태였다. 나는 파이브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오늘 있었던 즐거운 일들을 나열했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을 구경하며 속삭인 말, 와인을 마시며 걸었던 산책로, 잔잔한 바다, 그리고 파이브와 함께 있으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꾸밈없이 말했다. 파이브는 나와 함께 오늘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면서 짧게 답하기도 했고, 결국에서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파이브에게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예기치 못했던 디에고 씨와 라일라 씨와의 만남 역시 내게는 신선한 사건이었음을 파이브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두 사람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어떤 걸 물어보고 싶었어?" 


파이브의 질문에 손가락을 꼽아가며 하나씩 답했다. 셋이 어떻게 친해지게 되었는지, 파이브도 일할 때는 당이 떨어진다고 달달한 간식을 챙겨 먹는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지,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 노트에 낙서나 하면서 시간은 보내는지 등등. 나는 파이브가 내게 말하지 않는 회사에서의 시시콜콜한 행동들을 두 사람을 통해 듣고 싶었다.  


"그런 건 나한테 직접 물어봐도 괜찮아."

"그렇기 한데, 내가 너한테 어디까지 물어봐도 괜찮은지 모르겠어."

"무슨 말이야?"

"나한테 말해주지 않는 게 많잖아."


파이브에게 비밀이 많다는 것이 내가 파이브에게 가진 가장 큰 불만이었다. 파이브는 자기 일상과 생각을 나와 공유하길 꺼려 하는 것 같았다. 다정하게 대해주지만, 파이브의 그러한 행동이 우리 사이를 좁히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파이브는 자신에게 비밀이 많다는 걸 순순히 인정했다. 차내에 침묵이 흘렀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해가 사라져 하늘은 어두웠지만 해를 대신하는 빛이 도시에는 많았다. 그 빛을 하나하나 눈으로 좇았다. 



기억은 불빛처럼 빠르게 반짝이며 나타났다. 일시 정지한 화면을 다시 재생하듯이 기억이 돌아오는 게 아니었다. 스위치를 키면 빛이 번쩍이며 나타나는 것처럼, 기억 한 조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기억 속에 나는 조그맣고 동그란 창을 통해서 밖으로 보고 있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뜨거운 태양과 그 아래 새하얀 구름, 그리고 구름 아래로 보이는 바다였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 중이었다. 아주 먼 곳으로 말이다.



 

여행을 가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을까? 그건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딱딱한 창에 이마를 바짝 붙이고 한없이 바다만 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 옆에서 무엇을 보냐고 물어볼 때까지 말이다. '가까이에서 바다를 보고 싶어.' 나는 내 옆에 있는 아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아이는 어린애가 가지고 다니기에는 위험해 보이는 칼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퉁명스러운 말이 돌아올 줄 알았지만, '파리에 도착하면 바다에 데려다줄게.'라는 제법 다정스럽고 듬직한 대답을 해줬다. 

 



'풉!' 어딘가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내 옆에 앉은 아이와 웃음의 주인공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재수 없는 녀석이라는 말에 칼 던지는 짓만 잘하는 바보 같은 놈이란 말이 돌아왔고, 그러자 3피트 밖으로도 이동 못 하는 너보다는 내 능력이 더 낫다며 되받아 치는 말이 들렸다. 나는 두 아이의 다툼에 질려 다시 창에 이마를 기대로 한없이 바다를 바라보았었다. 

 



짧지만 강렬한 기억이었다. 내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파이브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운전을 하고 있는 파이브의 이름을 몇 번이고 애타게 불렀다. 내 다급한 목소리에 파이브는 걱정스러운지 괜찮냐고 몇 번이고 내게 물어보았다. 

 


"파이브, 나 뭔가가 떠올랐어. 내가..."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기억 속에서 코웃음을 쳤던 아이가 파이브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파이브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내 예상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장님은 파이브가 우산학원의 그 파이브라는걸 알고 있음(10화에 나옴). 이름이 파이브인 미남은 흔치가 않으니까...
반대로 벤이라는 이름은 흔하고 17살에 죽었다는 걸 아니까, 사장님은 벤이 넘버 식스라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