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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ㅅㅊㅈㅇ, 급전개ㅈㅇ





























 

“파이브는 언제 산타가 없다는 걸 알았어?”


 

파이브는 빨간색과 초록색 포장끈으로 리본을 만들다가 잠시 손을 멈췄다. 


 

“뭐라고? 산타가 없어?”


 

파이브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어른같이 행동하길래 당연히 산타 같은 건 안 믿을 줄 알았다. 식은땀이 났다. 파이브는 아직도 산타를 믿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파이브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산타는 실존 인물이라고, 내가 잠깐 농담을 했던 것이라고 구구절절 변명했다. 심각한 얼굴로 내 말을 듣던 파이브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이 꼬맹이가 날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적어도 장난감 가게에서는 산타가 없다는 식의 말을 하지 마.”


 

내 귓가에 파이브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나도 목소리를 깔고 명심하겠다고 말했다. 파이브는 다시 꽃 모양 리본 만들기에 집중했다. 파이브 앞에는 포장끈으로 만든 리본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던 파이브는 손재주도 좋았다. 내가 파이브 아버지라면 이런 아들을 품 안에 두고 다닐 텐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도 파이브 아버지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내가 파이브 집으로 전화해도 집사가 대신 전화를 받기만 할 뿐이었다.



 

파이브는 자기의 형제와 자매들을 무척 아꼈다. ‘뇌 없는 남매들’이라고 말했지만, 그 안에 감춰둔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반대로 아버지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파이브는 아버지를 어쩔 수 없는 존재로 보았다. 인정받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 파이브가 해주는 가족 이야기 속에 아버지는 그러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파이브는 아버지에게 인정이 아니라 사랑이 받고 싶어 가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지레짐작이지만 말이다.



 

나는 진심으로 파이브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크리스마스를 보내길 바랐다. 한편으로는 크리스마스를 파이브와 함께 보내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심도 가지고 있었다. 파이브가 어디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든지, 나는 파이브를 위한 작은 선물을 준비할까 했다. 

 

 

 

 

 

 

 

 

 


 

파이브는 주기적으로 외출을 하는 날이 있었다. 며칠에 한 번씩 수식이 빼곡하게 적힌 노트를 들고 일이 있다면서 나가곤 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전에 한 번 만났던 운전기사가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파이브를 데리러 온 것이다. 


 

“진짜 가기 싫다.. 그래도 가야겠지… 내가……인데”


 

파이브가 무어라 혼잣말을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출근하기 싫어하는 내 모습과 비슷했다. 파이브는 투정이 그 무엇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걸 잘 알았다. 내게 조심히 있으라 말하고는 운전기사를 따라 나갔다. 나는 창문을 열고 파이브가 차를 타 사라지는 걸 확인하자마자 허겁지겁 나갈 준비를 했다. 지금이 파이브의 깜짝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할 유일한 기회였다.



 

파이브는 교복만 입고 다녔다. 가출할 때 가져온 짐가방에는 교복 세 벌과 귀여운 하늘색 잠옷 한 벌이 들어 있었다. ‘깔끔하고 단정하잖아.’ 파이브가 교복만 입는 이유였다. 나는 교복만큼 깔끔하고 단정한 옷을 파이브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여러 옷 가게를 기웃거렸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화려한 얼굴을 가진 파이브에게는 모든 옷이 어울려 보였다. 괴상한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과한 옷도 파이브가 걸치면 그럴싸해 보일 것 같았다. 세상에 있는 다양한 색과 디자인이 모두 어울리는 파이브의 선물을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차라리 안 어울리는 게 있었다면 고르기 편했을 텐데, 나는 아주 새빨간 니트를 집어들었다가 도로 제자리에 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수십 번의 선택과 번복을 반복한 끝에 파이브가 좋아할 만한 코트를 발견했다. 가볍고 따뜻하며 교복과 어울리는 코트였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너무 비싸다는 생각과 동시에, 파이브 아버지에게 받은 돈에 딱 절반만큼 지불하면 가질 수 있는 코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보류했다. 조금만 더 고민하기로 했다. 파이브가 정말로 좋아할 선물을 주고 싶어서였다. 



 

장난감 가게에 오는 아이들은 원하는 게 확실했다. 솜이 빵빵하게 담긴 인형에서부터 굴착기 모형까지. 원하는 종류는 달라도 아이들은 장난감을 보면 눈을 반짝거렸다. 파이브는 예외였다. 처음 가게에 들어섰던 순간부터 장난감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문 적이 없었다. 재고 수량 파악할 때나 장난감을 볼 뿐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게 있다. 파이브도 가지고 싶은 게 있을 것이다. 다만, 욕심은 없어 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게 많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나처럼 원하는 걸 포기하면서 살았던 것일까? 어느새 나는 파이브에게 줄 선물이 아니라 파이브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멀리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금발과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테드였다. 테드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민망한 상황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테드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를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테드는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살이 오른 볼에 뽀뽀를 하기도 했다. 나는 몰래 테드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테드 옆에 있던 남자가 아이가 흘리는 침을 손수건을 닦아주었다. 그 남자는 오메가처럼 보였다. 좋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 저 세 사람의 뒤를 밝고 있는 걸까? 저 세 명이 가족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아니면 가족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일지도 몰랐다. 어색한 미행은 내가 거리를 좁히자마자 들키고 말았다. 아이 손에 들린 딸랑이가 길거리에 떨어졌다. ‘톡, 톡, 토로로록.’ 딸랑이는 정확히 내 발밑으로 굴러왔다. 세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테드는 날 보자마자 놀라 무어라 말하려다가 아이와 옆에 있는 남자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내 곁으로 굴러온 딸랑이를 집어 들었다. 빨갛고 노란 원색으로 구성된 장난감이었다. 흔드니 이름처럼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 테드 옆에 있던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검은 머리에 고동색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얼굴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육아에 지친 부모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애가 엄마를 닮아서 예쁘네요.”


“정말요? 다른 사람들은 다 아빠를 닮았다고 해서 내심 서운했어거든요. 절 닮았다는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네요.”


 

내 칭찬에 남자는 정말 기뻤는지 환하게 웃었다. 사실은 나도 아이가 테드와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테드 품에 안긴 아이를 보았다. 테드는 내 시선을 느끼자마자 등을 돌렸다. 모든 게 분명해졌다. 



 

가족들이 옆에 없었다면 나는 당장 테드에게 달려들어 주먹이라도 날렸을 것이다. 결혼도 한 놈이 나한테 왜 그랬냐고 물어봤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건 내 앞에 있는 남자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였다. 내 죄책감 덜자고 이 남자에게 테드와 나 사이에 있던 일을 밝히고 사과할 수가 없었다. 멀어져 가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배신감과 수치심이 밀려왔다. 

 



 

파이브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술을 끊었다. 내가 술이라도 꺼내려고 하면 파이브가 은근슬쩍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나도 한 잔.’ 파이브는 뻔뻔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 나는 도로 술을 깊숙한 곳에 밀어 넣어야 했다. 



 

딱 한 잔으로 테드, 그 새끼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기로 했다. 미련이라고 할 수도 있었고, 분노라고 할 수도 있는 복잡한 감정을 말이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열이 났다. 속이 새까맣게 탔다. 어쩌면 아주 독한 술을 마셔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 설마.'라고 생각하며 나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파이브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벌써 취한 걸까? 나는 눈을 깜빡였다. 환영인 줄 알았던 파이브는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난 모르는 게 없거든.”

 


건방지고 자신만만한 말투였다. 정말 파이브가 날 찾아왔다. 신기해라. 파이브는 어떻게 날 찾았을까? 내가 테드를 찾은 것처럼 우연히 이곳에서 술을 마시는 날 발견한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파이브를 만났으니 청승은 그만 떨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파이브에게 테드와 있었던 일을 말했다. 부끄럽고 창피했지만 나는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처럼 파이브에게 내 가 지은 죄를 밝혔다. 누구에게라도 '너는 죄가 없어.'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였다. 사장님은 가정이 있는 분이었다. 날 이해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난 사랑이나 인간관계의 애매모호함을 충분히 경험하지 않은 아이에게 하소연을 했다. 파이브가 날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 자체가 이기적인 마음임을 알았다. 파이브에게도, 테드와 결혼한 그 사람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파이브는 내 말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그건 배심원의 표정도 아니었고, 변호사의 자세도 아니었다. 하다못해 재판 결과를 궁금해하는 방청객의 모습도 아니었다. 파이브는 내 말을 들으면서도 딴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왔다. 라디에이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지금은 그 소음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파이브가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술과 얼음을 꺼내와 마티니를 두 잔 만들었다.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그보다 마티니를 만들만한 재료가 우리 집에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올리브가 우리집에 왜 있는 걸까? 저 칵테일 잔도 내가 산 기억이 없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파이브는 마티니를 건넸다. 한 모금 마셔보았다. 맛있었다. 그리고 진짜 술이었다. 나는 당장 마티니를 마시려는 파이브의 제지했다. 


 

“지금까지 이야기 들어준 대가라고 생각해줘.”

 


파이브는 내 손에 들린 자신의 마티니를 가져갔다. 진짜 마실까 싶었는데, 정말 한 모금을 들이켰다. 


 

“협박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죽였어야 했는데…”

 


실내가 조용한 탓에 파이브가 한 혼잣말이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내가 술에 취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갑자기 그 새끼가 죽으면 네가 심적으로 불안해질 테니 그러지 못했어. 내 판단 착오야.”

 


파이브가 뒤이어 한 말은 결코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나는 파이브의 말을 곱씹다가 남은 마티니를 모두 마셨다. 

 


'취했네.'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파이브는 지금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이었다. 파이브가 테드를 협박했고, 심지어 원래는 죽이려고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파이브는 테드가 날 속였다는 것에 화가 나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 같았다. 나는 파이브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빨리 파이브를 재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미안해.”

 


파이브에게 테드와 있던 일을 말한 게 후회되었다. 나는 내 더러운 연애사를 파이브가 알게 해서 미안했다. 파이브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파이브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자기 머리를 계속 쓰다듬을 수 있도록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조는 술을 좋아했다. 한번은 술을 진탕 마셔 낯선 공간에서 눈을 뜬 적도 있다고 말했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조한테 뭐라고 말했더라? 도대체 얼마나 마시면 그러냐고 물어봤을 것이다. 



 

나중에 조를 만나면 나도 술에 취해 낯선 곳에서 일어난 적이 있다고 말해야겠다. ‘도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조가 물어본다면 나는 잭다니엘과 마티니를 각각 한 잔씩 마시고 그렇게 되었다고 말해야지. 그러면 조를 호탕하게 웃으며 술을 한 잔 사줄 것이다. 조가 사주는 공짜술을 마시는 상상을 하면 킬킬 웃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두려워서였다. 



 

낯선 공간이 주는 위압감이 지나치게 컸다. 이곳은 내 집이 아니었다. 창도 없는 방에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시계도 없어 몇 시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움직이며 내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곳에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였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창도 없는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파이브였다.  


 

“여기가 어디야?”


“피난처.”

 


파이브의 대답은 내 의문을 풀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꼬치꼬치 캐묻는 것 대신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 걸 선택했다. 파이브는 어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다정한 행위였다. 나는 가만히 누워 파이브가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리듬을 만끽했다. 파이브의 등장이 놀랍진 않았다. 이쯤 되니 나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파이브가 갑자기 가면을 벗어 사실 자신은 외계인이라고 밝히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진짜로 파이브가 외계인이라면 조금 놀라기는 할 것 같다.

 

 

 

파이브를 따라 밖으로 나오니 좁고 긴 복도가 나왔다. 복도 양옆으로 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호텔처럼 보였지만 호텔이라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삭막했다. 이곳은 호텔보다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나는 오한이 들어 괜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상등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계단을 올랐다. 파이브는 이곳이 익숙한 것처럼 거침없이 걷고 있었다. 오래 방치된 건물이 주는 분위기가 실내에 가득했다. 파이브는 이곳을 ‘피난처’라고 지칭했다. 창이 없는 방과 건조하고 텁텁한 공기를 가진 피난처. 


 

“혹시 우리 지하대피소에 온 거야?”


“응.”


“내가 자는 사이에 전쟁이라도 났나…”

 


마지막 말은 혼잣말이었다. 황당해서 그런 말이 나왔다. 눈을 뜨니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하대피소에 있다는 말을 들으니 생각이 그런 쪽으로 튀었다. 말도 안 되는 추론이었다. 



파이브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항상 아이답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서 다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설명해줄게.”
 

“……”


“나는 네 기억이 돌아오면 종말이 시작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아니야. 네가 배신감을 느끼면 그때부터 ‘그 새끼’들이 찾아오는 것이었어.”

 


파이브의 말이 맞았다. 나는 파이브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종말과 내 기억과 배신감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파이브는 더 설명하려다가 내 표정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파이브와 내가 도착한 곳은 회의실이었다. 회의실 앞에는 빼곡한 글과 사진으로 가득한 칠판이 있었다. 파이브는 칠판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금 이 새끼들이 여기로 오고 있어.”

 


파이브는 사진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커다란 눈과 다리가 무수히 많은 동물의 사진이었다. 마치 지옥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생명체였다. 파이브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다른 사진을 가리켰다. 그 손끝이 향한 사진 속에는 내가 있었다. 

 



잠깐, 저거 정말 나일까? 나는 사진을 자세히 보았다. 사진 속 인물은 어디서 많이 본 옷을 입고 내 아파트 근처 골목에 서 있었다. 12월 10일에 테드를 만나러 갔을 때 입었던 옷이었다. 파이브가 더러워졌다면서 버렸던 바로 그 옷이다. 그렇다는 건 저게 내가 맞다는 뜻이었다.

 

 


사진 속 나는 나처럼 보이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배에서 네 개의 촉수를 꺼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징그러운 촉수는 내 앞에 있는 남자에게 맹렬히 돌진하고 있었다. 그 남자 또한 익숙한 차림새였다. 그날 만났던 치한이었다. 

 



아파트 근처에서 끔찍한 몰골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곰이라도 만난 것처럼 몸이 처참하게 찢겼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어느 정도 과장되었다고 여겼지만, 내 근처에 잔인한 살인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포에 떨었었다. 문단속을 평소보다 철저히 하고, 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었다. 


 

“네가 촉수로 저 짐승만도 못한 놈을 처리했어.”

 


그런데 파이브는 내가 소문 속 잔인한 살인마라고 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괜히 배가 당기는 느낌이었다. 

 


 

책상에 앉아 칠판에 써진 정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24일 밤에 촉수가 폭주하기 시작하고, 크리스마스에 지구에 종말이 온다는 가설이었다. 커미션과 엄브렐라 아카데미는 종말을 막기 위해 몇 번이고 싸웠으며, 모두 실패했다. 그들이 한 작전과 실패 원인이 칠판 왼쪽에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칠판 오른쪽에는 괴생명체와 촉수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칠판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배에서 징그러운 촉수를 꺼내는 인간 말이다. 모두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투성이었다. 



 

팔목에 흉터를 간직한 채 허허벌판에서 일어났을 때부터, 나는 내 과거에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더라도 받아들이기로 다짐했었다. 진창을 구르던 비루한 과거를 간직했더라도, 동네 신문에 이름 한 번 올리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삶을 살았더라도, 나는 내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었다. 촉수가 나온다는 내 몸뚱어리와 날 자극해서 종말을 일으키려는 괴생명체? 믿기지는 않았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칠판에 적힌 정보보다 내 옆에 있는 파이브의 실체가 더 궁금했다. 아버지와 다퉈 가출했다는 말이 거짓이라면, 파이브가 말해주었던 남매들과의 추억도 전부 거짓말일까? 유난히 어른스럽고 커피를 즐기는 걸 보면 나이도 13살이 아닐 것이다. 진짜 나이라도 물어볼까? 눈은 칠판에 고정했지만 내 모든 신경은 옆에 있는 파이브에게 향했다.



 

내 과거를 받아들일 준비는 항상 해왔지만, 파이브의 실체를 받아들일 준비는 하지 못했다. 나에게 파이브는 동생 같은 존재였다. 파이브의 비밀을 안다고 우리 사이에 있던 추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파이브에게 ‘넌 누구야?’라고 물어보는 게 망설여졌다. 무서웠다. 파이브가 무슨 생각으로 내 집에 들어왔는지 알기 겁이 났다.


 

“내가 지금부터 뭘 하면 돼?”


 

나는 파이브에 하고 싶은 질문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파이브는 불안해 까딱거리던 발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크리스마스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면 돼.”

 


내 옆에서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파이브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아파트에서 파이브와 소소하게 보내려고 했었다. 케이크도 먹고 준비한 선물을 파이브에게 주면서 휴일을 즐기려 했었다. 이런 거대한 지하대피소에서 보낼 줄은 몰랐다. 사장님에게도, 레베카에게도, 조에게도 말 못 할 크리스마스의 추억이 생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출근을 안 했다. 하필이면 정신없이 바쁠 크리스마스 이브에 무단결근을 했다. 괴생명체가 날 찾아오고 있다는 것과 내 몸에서 촉수가 나온다는 사실보다 그게 더 큰일처럼 느껴졌다. 사장님이 눈물을 흘리며 가게에 홀로 일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혹시 장난감 가게에 잠깐 연락해도 될까?”

 


나는 조심스럽게 파이브에게 물어보았다. 파이브는 진심이냐고 물어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종말만 막으면 일 안 하고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생기니까 걱정 마.”

 


파이브의 생각처럼 해고될까봐 연락하려는 게 아니었다. 사장님이 날 걱정할까 봐 전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파이브는 내가 외부로 연락하려는 걸 막으며, 안심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안심하라며!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이상한 가면을 쓴 사람이 총을 들고 파이브와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깜짝 놀라 손을 들어 비무장 상태임을 알리는 나와 달리 파이브는 침착했다. 심지어 파이브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가면을 쓴 사람에게 왜 총을 들고 와서 사람을 놀라게 하냐고 따졌다. 파이브가 이상한 가면을 쓴 사람의 상사인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아주 어려운 상사. 파이브의 말에 이상한 가면을 쓴 사람은 내게 상냥한 목소리도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무슨 일이야?”


“그게, 괴생명체가 지상이 아니라 지하를 통해 오고 있습니다.”

 


파이브는 그 말을 듣자마자 욕을 짓씹었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았다.  

 



푸른 빛이 보이더니 공간이 순식간에 수축했다가 이완했다. 그러자 원래 있던 방이 아니라 낯선 곳에 도착해 있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다리가 떨려 파이브의 손만 붙잡았다. 진정되고 나서야 내가 있는 장소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가장 눈에 띈 건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나신이었다. 그 사람 주변에는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연구원 중 한 명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당황하며 다가왔다.


 

“몸을 옮기기로 결정하셨습니까?”

 


그 말에 연구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파이브를 바라보았다. 파이브는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 성큼성큼 나신이 누워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연구원들의 시선이 우리를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그놈들은 우리를 전멸시키려는 게 아니야. 벤을 자극하는 게 목적이지. 지하를 통해 온다는 건 여길 부수겠다는 의미인데, 그러면 벤이 능력을 쓸 확률이 높아져.”

 


파이브와 연구원이 대화하는 동안, 나는 침대 위에 있는 나신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건, 나였다. 눈을 감은 채 알몸으로 누워있는 나였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도, 배꼽 옆에 난 점도, 체모 하나까지 나와 똑같은 나였다. 모든 걸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다짐했지만, 내 클론이 눈앞에 누워있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특히 클론이 알몸으로 누워있는 점은 참기 힘들었다. 나는 나신을 가릴 천이 없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여분의 가운 하나 없었다.


 

“애초에 능력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능력을 제거한 몸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파이브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연구원과 파이브의 대화는 끝났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바보처럼 파이브의 손을 잡고 연구실 한가운데에 서 있기만 했다. 내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심하게 떠는 파이브의 손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 뿐이었다. 표정이 없는 파이브는 전혀 떨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파이브와 손을 맞잡지 않았다면, 나마저도 파이브가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몰랐을 것이다.


 

“만일에 일이 잘못된다면… 내가 시간을 돌릴게. 걱정하지 마.”

 


떨고 있는 건 자신이면서 파이브는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내가 걱정해야 하는 순간이었구나. 나는 파이브의 말을 듣자 몸을 옮기는 게 나라는 걸 깨달았다. 하긴, 침대 위에 내 클론이 있으니까. 연구원은 클론을 가리키며 ‘능력을 제거한 몸’이라고 했다. 나는 또 내 배를 문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서 굵은 촉수가 나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연구원이 주사기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불법 장기 매매 단체가 내 장기를 빼내기 위해 파이브를 이용한 것일 수도 있었고, 외계인인 파이브가 지구인을 해부하기 위해 나를 이곳을 끌고 온 것일 수도 있었다. 종말은 날 속이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지금이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파이브가 불안해한다는 걸 몰랐다면 나는 악착같이 이곳을 벗어나려고 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보다 파이브를 조금 더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은 내게 가족이 무엇인지 알려준 소중한 존재였다. 나는 입모양으로 고맙다고 파이브에게 말하고, 파이브와 맞잡은 손을 놓았다.

 

 

 

 

 

 

 

 

 

 

 

 

 

 

 

 

 

 

 

 

아카데미 세트 중 스페이스 보이 피규어만 남았다. 나는 스페이스 보이가 만화 속 인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달까지 갔다 온 히어로라고 한다. 그 사실을 옛날 신문 기사를 찾으러 도서관에 가서야 알았다. 우주복을 입고 해맑게 웃고 있는 스페이스 보이의 사진 위에는 ‘달의 뒷면: 스페이스 보이의 새로운 임무’라는 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스페이스 보이 얼굴이 그려진 굿즈를 팔기 위해 신문에 실은 광고였다.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히어로인 만큼 그의 피규어와 굿즈는 물량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자랑스러운 스페이스 보이의 피규어는 장난감 가게에서 반값에 팔리는 처지였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한 남자가 가게로 들어섰다. 잘 정돈된 브루넷 머리와 큼직하고 화려한 이목구비, 맑은 페리도트 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이었다. 미남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나는 손님의 얼굴을 넋을 놓고 보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남자는 장난감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내 이름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지? 나는 가게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손님들의 의미 없는 행동도 내게는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크게 다가온다는 의미였다. 나는 바짝 긴장해 가만히 서 있었다. 내가 자기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봐서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었다. 미남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버릇을 고쳐야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남자는 내 가슴에 붙은 이름표에서 내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최대한 무해한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얼굴을 뚫어져라 본 건 죄송합니다.’라는 의미를 담은 미소였다.


 

“벤자민.”


“네.”


“이름이 벤자민이에요?”

 


나는 내 이름표를 내려다보았다. ‘BENJAMIN’이라고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
드디어 어른 몸으로 나타난 파이브와 자기 이름을 되찾은 벤.

이번 편을 파이브 시점으로 풀어서 썼으면 훨씬 쉽게 쓸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가 쓰고 싶었던 건 기억을 잃은 벤이 파이브라는 사람을 알아가는 이야기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