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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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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ㅅㅊㅈㅇ, ㅇㅌㅈㅇ, 알오au























 

커미션의 기술력으로만 벤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인간의 영혼은 커미션이라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커미션에서 만들어낸 신체에 벤의 영혼을 넣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파이브의 또 다른 형제 말이다.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눈앞에 있는 투명 원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자기 곁에서 잔소리를 퍼붓던 밉상이 누워 있었다. ‘이것보다 키가 더 작았던 것 같은데.’ 클라우스는 원통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커미션이 만든 벤의 신체를 살펴보았다. 



 

“준비는 다 되었어?”




 

파이브가 클라우스에게 물어보았다. 안 그런 척하고 있지만, 파이브에게서 조급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영혼의 존재 여부에 계산식을 세울 수는 없었다. 그건 미지의 영역을 전적으로 클라우스에게 맡겨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천국에 심은 벤을 뽑아서 지상에 도로 심겠다고 신에게 말했어. 신이 나한테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자전거를 타고 내 옆을 지나가기만 하더라고. 뭔가 이상했어. 평소에도 자전거 안장 위의 절대자이셨지만 적어도 내 물음에 답은 해주셨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나를 무시하고 지나가더라고."



 

파이브는 클라우스가 알 수 없는 비유를 하는 것이라 여겼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지 못해서였다. 때문에 클라우스의 말을 들을수록 파이브는 더욱 초조해졌다. 



 

“시간이 얼마 없어. 네 말의 요지가 뭔지 이쯤에서 말해줘야 하지 않겠어?”


“죽은 이를 지상으로 불러낸 적은 많지만 몸 속에 집어넣은 적은 없어. 아, 내 몸에 집어넣은 적은 있었네! 벤이 그때…”



 

클라우스가 신나게 말하다가 자기 말이 다른 길로 빠져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집중하기 위해 클라우스는 팔을 쭉 펴며 스트레칭했고, 이번에는 파이브가 원하는 대로 요점만 말하기 시작했다. 요점만 말하는 건 정말 재미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랑스러운 형제가 하는 부탁이니 어쩔 수 없었다. 



 

“파이브. 신은 우리 선택에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아. 우리가 저지른 일은 우리가 감당해야 해. 벤의 영혼을 이 인형 속에 집어넣은 뒤에 벌어지는 일을 책임질 준비가 되었어?”


“각오한 일이야. 그리고 넌 책임질 필요 없어. 어디까지나 내가 무리하게 저지른 일이니까 모든 건 내가 감당해야지.”


“A/S 정도는 내가 해줄게.”



 

클라우스가 장난스럽게 한 말에 파이브는 그나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클라우스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파이브가 무리해서라도 벤을 되살리려는 이유도, 그 뒤에 일어날 소동이 결코 작지만은 않을 거란 점도 모두 예견했다. 그렇지만 클라우스는 파이브를 말리지 않았다. 자기 능력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말도 없이 훌쩍 떠난 형제가 보고 싶기도 했다. 





























 

커미션. 파이브가 다니는 직장. 종말을 막는 단체. 내가 다시 태어난 곳. 불과 몇 분 전에 나를 죽이려고 암살자를 보낸 집단. 이곳에 내가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복도를 구경했다. 복도에는 알 수 없는 형체를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연도와 날짜가 적혔는데, 아주 오래전 과거에서부터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다양했다. 



 

“이제까지 커미션이 막은 종말을 전시했어. 우리가 막은 덕분에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지.”

 

 

파이브의 설명을 들은 후, 분홍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진을 유심히 관찰했다. 생화학 테러로 인해 지구에 있는 대부분의 생명체가 사라진 사건이라고 했다. 바퀴벌레는 분홍색의 독한 연기 속에서도 살아남아 사진 속에 담겼다.



 

좁은 복도 벽에 위치한 창을 들여다 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끝도 없이 펼쳐진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에는 몇백 개의 테이블과 몇백 명의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업무 중이었다. 



 

조금 더 걸어가 반대쪽 창 너머를 보았다. 이번에는 아주 좁은 방이 보였다. 테이블 네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들은 노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댔다.



 

“회계부서야.”

 

 

파이브가 내 어깨를 감싸며 말해주었다. 조금 전까지 허브에게 화를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원래의 다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허브는 반복적으로 식은땀을 훔쳐댄 탓에 안경이 삐뚤어진 상태로 우리 옆에 서 있었다. 



 

“현장 요원들의 적절한 출장비를 계산 중이야. 임무 성공률을 높이면서 과지출하지 않는 적정 비용을 찾는 게 저들이 해야 할 일이지.”



 

파이브의 설명에 나는 잠시 장난감 가게 사장님이 떠올랐다. 돈을 아주 꼼꼼하게 쓰시던 분이었다. 커미션처럼 비현실적인 단체도 자그마한 장난감 가게와 마찬가지로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저렇게 열심히 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면 커미션은 어떻게 돈을 벌어?”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그러나 허브와 파이브에게는 허를 찌른 질문인 것 같았다. 둘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허브가 입을 달싹거리는 걸 보면 내게 커미션의 수입 경로를 설명해주고 싶은 게 분명했다. 파이브와 허브는 뜻 모를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파이브가 눈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입만 움직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 부분은 회사 기밀이라서 네게 설명해줄 수 없어.”


“마피아처럼 마약이나 불법 무기라도 거래해?”


“그것보다 더 극악무도한 방법이라고 설명할게.”



 

파이브와의 대화 중에 뒤통수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회계부서 사람들이 창문에 붙어 파이브와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고 트로피컬 패턴 넥타이를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한밤중에 곰이라도 마주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브래킷. 요구했던 사항은 다 끝냈습니까?”


“조금만 더 계산하면 마무리됩니다.”



 

트로피컬 넥타이를 한 브래킷 씨는 파이브의 물음에 더듬대며 답했다. 그의 대답이 끝나자 창문에 붙어 우리를 구경하던 회계부 직원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펜을 잡고 계산해댔다. 



 

우리를 구경하던 게 회계부서만은 아니었다. 회계부서 직원들이 자리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거대한 공간에서 일사불란하게 일하던 직원들 또한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구경했다. 그러다 파이브가 뒤를 돌아보자마자 그들 역시 분주하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왜 저렇게 우리를 보지? 내가 그렇게 잘생겼나?”


“그렇지.”



 

내가 한 농담에 파이브가 진지하게 동의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잘생기고 아름다운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몸 둘 바가 몰랐다. 나는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파이브에게 네가 더 잘생겼다고 말했다. 그러자 파이브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화답했다. 참 유치한 대화였다. 허브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우는 것 같았다. 














 

까만 문 위에 ‘파이브 하그리브스’라 적힌 명패가 달려 있었다. 묵직한 문을 열자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테이블과 소파에 닿은 모습이 보였다. 사무실 왼쪽에는 거대한 책상과 책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과 함께, 어디에서 많이 본 그림이 벽에 걸려 있었다.  내가 그린 크리스마스 그림이었다. 파이브가 집에 걸어두겠다며 가게 벽에서 뜯어간 그림을 여기에서 볼 줄은 몰랐다.



 

“이 그림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지?”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이사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나는 제발 누구도 내 그림을 보지 않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파이브에게 물어보았다. 파이브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런 그림을 혼자만 볼 수는 없지. 괜찮은 감상문을 작성한 직원들에게 포상해줬어.”


“저는 우수상을 수상해 구내식당 도넛 무료 이용권을 세 장이나 받았죠.”



 

허브가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자랑스러워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커미션은 내 상상보다 거대하고 이상했다. 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믿음직스럽다는 느낌보다는 과연 이들에게 세계의 시간선을 맡겨도 괜찮은지 의문이 생겼다. 

 

 

파이브는 자신의 책상 서랍을 뒤적거렸다. 나는 소파에 앉아 책상 위에 명판을 힐끔거렸다. 분명 파이브의 이름이 있었다. 재수 없을 정도로 똑똑한 녀석이라는 건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커미션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의장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여기 있군.’ 파이브가 검은색 파일을 꺼내와 허브 앞에 내밀었다. 웃고 있었지만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게 아니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이사회 내용을 읽어볼까? 벤 하그리브스의 암살은 다음 이사회의 전까지 보류하기로 결론을 내렸잖아. 이걸 아무도 기억 못 했을 리가 없는데, 이상한 일이야. 왜 벤과 내가 커미션 요원들에게 공격을 당했을까?”



 

허브 씨를 향해 파이브가 질문했다. 상냥한 말투였지만 허브 씨가 이상한 답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옆에 있던 나까지 덩달아 긴장되어 허리를 꼿꼿하게 고쳐 앉았다. 



 

“어디든 상부 결정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죠.”


“AJ처럼?”



 

AJ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허브의 눈이 흔들렸다. AJ라는 자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는 게 확실해진 순간이었다. 허브는 잠시 숨을 고르고 변명했다.



 

“AJ는 죽었습니다.”


“벤도 죽었었지. 지금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잖아.”


“좋은 지적이네요.”



 

허브의 능청스러운 반응에 파이브는 입을 달싹거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아무래도 내가 들어서는 안 되는 커미션의 중요한 비밀을 말하려 했던 것 같았다.



 

허브는 손님에게 드릴 차도 아직 안 내왔다면서 황급히 의장실을 나갔다. 파이브는 책상 위에 올려진 전화기를 들고 무어라 말한 뒤에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모습에서 파이브가 지금 얼마나 피곤한 상태인지 알려주었다. 암살자를 처리할 때 묻은 피가 아직도 파이브 얼굴에 그대로였다. 



 

손으로 파이브의 얼굴을 문질렀다. 이미 굳은 피는 잘생긴 얼굴에서 떨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임무를 마치고 몸에 묻은 피를 어떻게 없앴었는지 생각해보았다. 기사 사진을 찍을 때는 수건에 따뜻한 물을 묻혀 급하게 얼굴만 닦았었다. 수건을 챙기는 건 대부분 포고 담당이었다. 포고가 임무 현장에 오지 못할 때는 순식간에 수건에 물을 적셔올 수 있었던 파이브가 포고의 일을 대신 해줬었다. 거친 손길로 내 얼굴을 박박 닦던 어린 파이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아플 정도로 내 얼굴을 문질렀던 걸 복수할 기회가 왔다.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었다.



 

“왜 웃어?”



 

자기 얼굴을 붙잡고 웃는 날 보며 파이브가 물어보았다. 나는 파이브에게 어렸을 때 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파이브는 미소를 짓고는 푸른 빛을 내며 사라졌다가 손에 물수건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때의 복수할 기회를 줄게.”



 

파이브가 내게 물수건을 건넸다. 나는 과장되게 심호흡하고 이마에 있는 핏자국을 지우기 시작했다. 피는 생각보다 잘 지워지지 않았다. 어렸던 파이브가 왜 그렇게 아플 정도로 내 얼굴을 문질렀는지 알 것 같았다. 포고는 경험이 풍부한 늙은이였기에 어느 정도로 힘을 줘서 닦아야 하는지를 알았다. 꼬맹이 파이브는 그걸 몰랐기 때문에 내 얼굴에 남은 피를 지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닦아대던 것이었다. 



 

나는 어린 파이브와 달리 얼룩을 말끔하게 제거하려면 손에 어느 정도로 힘을 줘야 하는지 알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거였다. 파이브가 아프지 않도록 피를 닦았다. 가장 피가 많이 튄 턱부터 조심스럽게 물수건으로 문질렀다.



 

“AJ라는 자가 날 죽이려고 했다고 확신하는 이유가 뭐야?”



 

내 질문에 파이브가 고개를 까딱였다.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커미션에서 그 정도의 추진력을 가졌지만, 마음 약해서 어설픈 작전을 짜는 바람에 실패할 자는 AJ뿐이니까.”


“위험한 사람이야?”


“그럴 리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파이브 말을 무시하고 날 공격할 정도로 호전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 파이브는 AJ가 추진력을 가졌다고 은연중에 인정하기도 했다. 파이브에게 인정받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훈련받을 때면 날렵한 파이브와 달리 나는 몸을 둔하게 움직이곤 했었다. 달리기에서도 대련에서도 나는 남매들보다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그때마다 파이브가 얼마나 잔소리했었는지.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눈으로 내 행동 하나하나를 분석한 뒤, 오른발이 늦게 움직였고 왼팔은 어정쩡하게 반응했다며 훈수를 두었다. 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파이브도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커미션에서 날 죽이려 하고 있었다. 파이브가 감당해야 할 게 늘어났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지는 커미션이 파이브의 생각에 따라 움직였지만, 지금부터는 커미션에서 반기를 든 집단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파이브. 커미션에서…”



 

내가 말을 꺼냄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아주 까만 코트를 입은 사람이 허브와 함께 나타났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허브와 같이 온 검은 코트 차림의 남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코트 어깨 위, 머리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커다란 어항이 있었다. 그 안에는 금붕어 한 마리가 정확하게 파이브가 앉은 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주동이를 뻐끔거렸다. 금붕어가 주둥이, 아니, 입을 움직이자 근사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지?”



 

갑자기 나타난 자는 파이브에게 인사했다. 파이브의 얼굴이 긴장이 도사렸다. 파이브의 반응만으로 저 사람이, 아니, 저 어항 속 금붕어가 AJ임을 알 수 있었다. 




 

AJ가 구두 소리를 내며 파이브가 앉아있는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AJ라 불리는 금붕어가 파이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물고기는 눈이 머리 양옆에 위치했지만 시야각이 360도라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AJ라는 자는 인간과 어류 그 사이쯤의 시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 여기기로 했다. 금붕어라는 신체적 한계 때문에 멍한 눈처럼 보였지만, 나름대로 파이브를 노려보려는 것처럼 보였다. 커미션은 정말 이상한 곳이구나. 나는 내 몸에서 크툴루를 불러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고 AJ라는 자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항 관리는 포기했어? 물이 탁해서 네가 잘 보이지도 않잖아.”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한 게 아니거든. 그래서 형이상학부에서 만든 영양제를 넣었지. 위산이 좀 독해야 말이지. 머리에 입은 타박상도 치료해야 했고.”



 

AJ가 이번에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끔찍한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트라우마도 치료하고 있어.”



 

학살이라는 말에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는 걸 보아서는 아무래도 학살 원인이 파이브인 것 같았다. 



 

“아직도 그날 일에 불평을 터뜨리는군.”


“아무렴. 죄 없는 자들을 끔찍하게 살해한 냉혈한은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없겠지.”



 

파이브의 날 선 말에 AJ는 코웃음을 치며 응수했다. 파이브는 무어라 말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허브 씨는 AJ가 앉을 수 있는 특수 의자를 끌고 나타났다. 치과 의자처럼 누워있을 수 있는 의자였다. AJ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우리를 쳐다보았다. 관절이 안 좋은 몸이라서 어쩔 수 없다며 AJ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각도 때문인지 묘하게 파이브와 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파이브. 이제 객기는 그만 부리지 그래. 떼쓸 나이는 지났잖아.”


“객기가 아니야. 커미션의 새로운 방침에 따른 결정이었어.”



 

파이브가 말하는 커미션의 새로운 방침이 무엇인지 알았다. 의장실로 오는 길에 허브 씨가 설명해준 덕분이었다. 그동안 커미션은 시간선에 이상이 생기면 암살이라는 방법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었다. 이에 회의감을 품은 자가 커미션의 이사들을 설득해 방침을 바꾼 것이다. 암살은 최후의 수단으로 삼고, 다른 방법을 이용해 시간선을 수정하도록 말이다. 허브 씨가 말은 안 했지만, 이사들을 설득한 자가 파이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AJ가 내게 눈길을 돌렸다. 착각일 줄 모르겠지만, 그 눈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마치 길에서 귀여운 개라도 발견하고 육포라도 건네줄 것 같은 표정이었다. AJ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금붕어가 미소라니. 점점 현실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연주하기 위해 기타를 조율해야 할 때도 있지만, 기타 줄을 완전히 교체해줘야 할 때도 있는 법이죠. 두 상황의 차이점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 것 같은데요.”



 

파이브에게 말하던 때와는 달리 AJ는 어린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자세로 내게 말했다. 파이브를 설득하기는 어려우니 나를 회유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제가 망가진 기타 줄이란 뜻이군요.”


“망가졌다는 말은 너무 서글프게 들리지만, 하지만 아주 잘 알아들었어요.”



 

망가진 기타 줄을 가지고 연주할 수는 없었고, 내가 살아있는 한 종말을 막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AJ가 날 죽이려고 커미션 요원까지 보낸 이유였다. 내가 종말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렇다고 AJ라는 사람에게 살해되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이기에 당연히 가지는 생존 욕구였다.



AJ가 또다시 암살하려고 움직이기 전에 그를 설득하고 싶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 크툴루 세계와 연결된 포탈이 열리고 종말이 온다고 들었어요. 그 말은 크리스마스가 되어서야 포탈을 열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내 말에 AJ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파이브를 보았다. 파이브가 내게 종말 원인을 설명하지 않았을 거라 여겨서였다.



 

“다 아시는군요. 하지만 조건을 충족하지 않아도 포털을 열 수 있는 사람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AJ는 손가락으로 내 배를 가리켰다. 아무런 조건 없이 포털을 열고 크툴루를 꺼낼 수 있는 내 능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벤을 살려두라고 커미션에서 결정한 거야. 벤이 가진 능력만이 포털을 완전히 닫을 방법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그래서 커미션의 수장이신 파이브 하그리브스 씨가 몇십 번이고 시간을 돌렸다고? 오직 연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파이브의 말에 AJ는 웃음을 터트렸다. 오직 파이브의 신경을 긁기 위한 행동이었다. AJ의 웃음소리에 파이브의 표정이 한없이 사나워졌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려진 파이브의 손을 잡았다. 파이브를 진정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겁이 나 파이브의 온기에 의지하고 싶어서였다. 파이브가 내 손을 힘주어 잡아주었다. 이 사소한 행동이 내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는지 파이브는 모를 것이다. 



 

“크리스마스 전까지 종말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AJ가 원하는 대로 할게요.”



 

크리스마스에 크툴루가 포털을 열고 쏟아져 나오려고 한다면 나를 죽여도 좋다고 AJ에게 통보했다. 12월 24일. 종말 원인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나는 크리스마스이브를 삶의 마지막 날로 맞이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하나였다. 종말을 해결하는 데에도 시간이 없었다. 커미션의 쓸데없는 견제와 방해에 힘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제 신변을 보호해주세요.”



 

입 밖으로 내 계획을 꺼내자 후련함과 함께 미안함이 밀려왔다. 파이브는 내가 죽지 않고도 종말이 일어나지 않을 방법을 찾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 파이브에게는 내가 AJ에게 한 말은 지금까지 이룬 파이브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사실은 반대였다. 파이브가 세상과 나를 살리기 위해 힘겹게 싸워왔다는 걸 알았기에 한 말이었다. 다시 한번 파이브의 손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근거 없는 믿음이었지만, 나는 이번 시간선에서 우리가 종말을 막을 것만 같았다. AJ에게 한 말은, 파이브를 향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에 할 수 있던 말이었다.




 

내 말을 들은 뒤에 AJ가 관절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고 힘겹게 의자에서 내려왔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흰 연기를 내뱉으며 나를 보았다. AJ는 내게 원하는 답을 들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담배 연기 뒤에 보였다. 

 

 

“커미션이 쉬운 길을 놔두고 시간 낭비하는 걸 참고 보기 힘들었죠. 파이브, 네 형제는 참 착하고 셈이 정확한 사람이야. 종말 때문에 희생하기엔 아까운 인물이지.”
 

“입 닥쳐.”



 

파이브가 AJ를 사나운 눈초리 쳐다보았다. 만약 다른 이들이 파이브의 이런 눈빛을 보았다면,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었을 것이다. 그리고 AJ도 마찬가지였다. AJ는 파이브 눈을 피하며 서둘러 의장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AJ를 보던 사나운 눈이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옮겨졌다. 나도 AJ처럼 파이브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고개만 숙이고 내 발끝만 볼 뿐이었다. 



 

파이브가 화가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게 화가 났다. 내 근거 없는 믿음을 파이브에게 어떻게 설득하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배수진을 친 벤.
AJ랑 파이브가 어떤 사이였는지 드라마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아서 내 맘대로 썼음. 



파이브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