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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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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ㅅㅊㅈㅇ, ㅇㅌㅈㅇ, 알오au

(실수로 한 번 날리고 또 쓰는 거라 내용 두서없음ㅈㅇ)
















 

아파트 앞에는 커미션 직원인 도트 씨와 허브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눈 내리는 늦은 밤에 파이브를 만나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나는 셋과 떨어진 곳에서 발장난을 치며 파이브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했다. 커미션에 중요한 일이 생겼는지 셋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슬쩍 저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저 셋과 한 발짝 떨어져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기도 했다. 



 

대화를 끝낸 파이브가 내게 다가왔다. 나와 눈을 맞을 때만 하더라도 미소가 걸려있던 얼굴이 지금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파이브가 양손으로 내 볼을 어루만졌다. 찬 바람이 부는 바깥에서 기다린 탓에 내 볼이 빨갛게 얼어서였다.



 

“안에서 기다리지.”
 

“나 몰래 이상한 짓을 꾸밀까 봐 감시하고 있었지.”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농담을 했다. 사실은 도트 씨와 허브 씨가 파이브를 데리고 떠날 것 같아서 파이브가 보이는 곳에 일부러 서 있던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재미없는 내 농담에도 환하게 웃어주었을 파이브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집에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돌아올게.”



 

파이브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내 손을 맞잡고 자상하게 말해주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파이브는 종말이 다가온다고 했다. 지금도 종말을 막기 위해 다시 출근하는 것이다. 여전히 히어로로 활동하는 파이브를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내가 붙잡을 수는 없었다. 












 

나는 어두운 아파트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밤새도록 내릴 것 같았던 눈이 어느새 그쳤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눈이 또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일찍 귀가한 이들은 오늘 눈이 온 줄도 모를 것이다. 



 

익숙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벽마다 다른 스포츠 경기를 틀어주는 펍으로 들어갔다. 경기를 보며 욕을 하는 사람들과 스포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뒤엉켜 있었다. 나처럼 혼자 이곳에 온 사람은 없었다. 



 

“눈을 피해서 들어왔어요?”


“이제 눈은 안 내려요.”

 



바텐더의 물음에 나는 종말이 올까 무서워서 이곳에 왔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순간 답도 없는 종말론자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바텐더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내가 더 이상의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는 주문만 받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파이브가 내게 종말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종말을 막기 위해 몇 번이나 시간을 돌렸다고 말해주었다. 커미션이 종말과 관련된 일도 한다고 넌지시 알려주기도 했다. 종말은 분명 나와 관련된 사건으로 일어나는데, 정작 내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술이 한 잔, 두 잔, 석 잔에 접어들자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따지자면 커미션 직원들이 아니라 나랑 머리를 맞대고 종말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회의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서운함은 풍선처럼 커다랗게 부풀었지만, 이내 바람 빠져 허공에서 쪼그라드는 풍선처럼 시들어버렸다. 나 역시 파이브에게 굳이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어서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에게 하고 싶지 않은 일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파이브도 이유가 있어서 나와 종말에 관해 상의하지 않는 것이라 여기기로 했다. 

 



이를테면 내 마지막 기억, 17살 겨울 때 기억을 파이브에게 말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해 겨울, 스웨덴 숲에 있는 폐공장에서 비밀실험이 이뤄지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었다. 내가 입고 있던 검은색 후드와 두꺼운 라이더 재킷은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의 옷을 흉내 낸 것이었다. 몰래 폐공장 안으로 잠입하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작전은 이러했다. 앨리슨의 루머 능력으로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디에고와 루서가 경비대를 처리하면서 시선을 끌고, 미리 공장 안으로 들어가 있던 나와 클라우스는 정보를 빼내고 나오는 것이었다. 만약 파이브가 있었다면 잠입하여 정보를 빼내는 일쯤이야 한 시간도 안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파이브는 5년 전에 실종되었고,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파이브 없이 싸우는 법을 새로 익혀야 했다.



 

클라우스는 길이 아닌 곳에서 길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유령과의 소통으로 지름길을 알아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클라우스가 가진 직감으로 얻어내는 정보였다. 클라우스가 손가락으로 서랍장 사이를 가리켰다. 손으로 더듬대니 그림자에 가려진 문고리가 잡혔다.



 

“그 문을 열고 왼쪽으로 꺾고 삼십 걸음 걸어서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 거기 문이 있으면 나가고 없으면 다시 돌아와. 조금 이따 만나. 베네리노.”



 

클라우스는 손키스를 날리며 또 다른 비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 역시 클라우스가 알려준 문을 열고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섰다. 



 

스웨덴 사람들은 추위를 안 타는 걸까? 코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보다 한기가 더 무서웠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클라우스가 말한 대로 몸을 움직였다. 정말로 문 하나가 나타났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문을 열자 눈발이 날리는 숲이 나타났다. 내가 연 문은 공장 내부가 아닌, 외부로 나가는 비상문이었다.



 

왔던 길을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돌아가서 클라우스와 합류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저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 때문이었다. 두려운 어둠과는 대조되는 따뜻한 불빛이었다. 별도 아니었고 인공위성도 아니었다. 숲 한가운데 자리 잡은 집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빛이 내게 다가오라 말했다. 목소리도 없었고 언어도 없었지만, 나는 빛이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빛이 가진 간절함이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빛은 나를 원했다. 빛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빌고 있었다.



 

빛의 기도 소리에 이끌려 나는 눈발이 날리는 숲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클라우스가 위험하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간곡한 외침에 홀려 나는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임무 중에 한눈을 팔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차마 파이브에게 말하지 못했다. 다시 한 잔 더 마셨다. 이제는 머리가 빙빙 돌았다.



 

푸른 파장이 느껴졌다. 내게 신경 쓰는 자가 없어서 파이브가 갑자기 펍 안에 나타났다는 걸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파이브는 잠깐 숨을 고른 후, 내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파이브는 떠난 지 57분 만에 돌아왔다. 아주 긴급한 사항을 한 시간 안에 끝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 도트 씨와 허브 씨는 한 시간도 안 걸리는 일을 처리하기 위해 파이브를 데려갔다는 것일까? 반대로 생각해서 파이브가 직장에 되돌아간 덕분에 업무 시간이 한 시간으로 줄어든 것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고작 파이브가 떠난 한 시간을 참지 못하여 펍에서 처량하게 술이나 마신 사람이 되었다. 괜히 민망해져서 귓불만 만지작거렸다.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네가 이렇게 빨리 되돌아올 줄은 몰랐지.”


“그래서 나 몰래 이곳에서 술을 마셨겠다?”

 



파이브가 펍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저놈은 그나마 잘생겼네.’라고 하면서 야구 중계를 보는 한 알파를 가리켰다. 내가 ‘어디에?’라고 하면서 고개를 돌린 이유는 파이브가 인정한 미남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였다. 파이브를 앞에 두고 한눈을 팔려고 그랬던 게 절대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 알파 얼굴을 확인하려고 하자, 파이브가 내 턱을 손으로 잡고 고개가 돌아가지 못하게 막았다. 

 



“내가 옆에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을 보려고 해?”


“그런 게 아니라…”



 

파이브가 내 볼을 꾸욱 누르고 있던 탓에 발음이 뭉개졌다. 나는 변명도 하지 못하고 파이브 손에 얼굴이 잡힌 채 뽀뽀 세례라는 벌을 받았다. 그게 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파이브가 벌이라고 했으니 벌이겠거니 생각했다. 














 

파이브는 누군가의 집 문을 두들겼다. 집주인이 누구인지 미리 들었기에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까? 설렘과 함께 불안이 일렁였다. 



 

바냐는 우리가 이곳에 온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파이브가 노크하자마자 문을 열고 우리를 반겼다. 남매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졌다는 파이브의 말과는 달리 바냐는 여전히 작고 연약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순하고 큰 눈이 파이브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바냐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파이브는 집안의 창문을 꼼꼼히 점검했다. 



 

“이 창문은 안 잠겨 있잖아.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그래.”


“그 작은 창문으로는 고양이나 겨우 들어올 수 있어.”


“고양이도 위험해.”



 

바냐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파이브를 보았다. 파이브는 어릴 때도 바냐는 과보호했었지만, 왠지 예전보다 더 극성이 된 것 같았다. 주방에 있는 바냐를 향해 파이브는 들고양이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설명해댔다.

 

 

바냐는 내가 마실 녹차와 파이브와 자신이 마실 싱글몰트 위스키를 가져왔다. 위스키 사이에서 앙증맞은 녹차가 은은한 향을 뽐냈다. 위스키를 든 바냐는 자기 팬이 선물로 줬다면서 자랑하며 파이브와 건배했다. 그 사이에서 녹차가 담긴 빨간 머그잔으로 건배하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네 팬이 선물로 줬다고? 정말 대단하다! 얼마나 좋은 술을 선물했는지 나도 맛봐야겠어!”



 

내가 과장된 연기를 하며 술에 손을 뻗자, 바냐가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파이브가 아니고 바냐가 말이다. 



 

“벤, 이 술을 파이브와 나만 마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 파이브와 나는 지금부터 아주 잔혹한 다툼을 시작할 거야.”



 

‘잔혹한 다툼’이라는 단어와 바냐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했다. 심지어 바냐는 다툼을 벌이는 상대방이 파이브라고 했다. 나는 머그잔만 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바냐와 파이브가 싸운다고? 둘이 싸우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언제나 차분했던 바냐와, 바냐에게 무척 약했던 파이브는 절대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일 수 없어 보였다. 



 

내 예상은 틀렸다. 1분 만에 둘이 어떻게 다툴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벤한테 바로 약을 주자는 게 아니야.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여 여러 방편을 마련하자는 것뿐이야.”


“아버지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바냐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바냐가 정당한 반응을 한 것인지 파이브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분명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둘의 대화를 조합했을 때 나오는 정보는 하나였다. 아버지가 바냐에게 약을 주었는데, 그걸 파이브가 나한테 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아버지는 두려움 때문에 내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도록 했어. 약을 먹여서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머릿속에 안개가 낀 채 살았다고.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너도 잘 알잖아.”



 

바냐가 주머니에서 익숙한 약통을 꺼냈다. 약통을 보자마자 바냐가 항상 챙겨 먹던 약이 기억났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억 속에서 바냐는 언제나 약을 꺼내 먹는 아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바냐가 아프다고 했었다. 바냐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도 틈만 나면 약을 삼켰었다.



 

정말로 바냐의 힘이 무서워서 아버지가 바냐에게 약을 먹인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바냐를 고립시켰던 것일까? 우리에게 바냐는 능력이 없고 몸이 아픈 가족이었다. 어쩌면 마음이 편하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바냐는 생각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렇게 바냐가 외로이 지내는 걸 합리화하였고, 한편으로는 바냐를 부러워했었다. 살의를 가진 어른들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 바냐를 시샘했었다. 



 

바냐와 눈이 마주쳤다. 바냐는 내게 웃어줬다. 나를 미워해도 이해해줬을 텐데, 오히려 나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바냐를 따라 웃어보았다. 



 

바냐와 내가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는 사이, 파이브는 바냐가 꺼낸 약통에 눈을 고정했다.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 또 종말이 일어나.”



 

파이브에 말에 바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또 나 때문이야?”


“아니야. 종말은…”

 



파이브가 마른 세수를 했다. 그제야 도트 씨와 허브 씨가 왜 파이브를 밤중에 불러냈는지 깨달았다. 종말의 원인을 알아낸 것이다. 그리고 종말 원인을 알자마자 파이브는 만약을 대비하여 바냐에게 약을 요구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바냐 역시 뭔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벤의 능력을 억제해야 한다고 말했던 게…”



 

종말 때문이었어? 바냐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이었다. 파이브가 부정하지 않자 바냐는 다급하게 나를 항변했다.



 

“크리스마스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잖아. 그 사이에 벤이 능력을 조절하는 법을 터득하면 돼. 벤은 어렸을 때도 자기 능력을 잘 다뤘잖아. 이번에도 그럴 수 있어.”


“얼마나 능숙하게 힘을 사용할 수 있는지는 상관없어. 벤이 가진 힘 자체가 종말을 불러와.”

 



파이브는 한 시간 전에 커미션으로 돌아가 전해 들은 보고를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크툴루를 불러오는 포탈이 문제였다. 내가 원하는 순간에 포털을 열 수 있다는 건, 내가 크툴루가 있는 세상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그 연결이 강해지는 순간이 올해 크리스마스였다. 어떤 조건이 확립되는 순간, 포털은 나뿐만 아니라 지구 여러 곳에 나타난다.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파이브가 하는 설명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이래서 파이브가 내게 종말에 관해서 말을 안 했나 싶었다. 어렴풋이 내가 종말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내 능력 때문에 종말이 온다는 말을 듣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우습게도 후자가 더 마음이 놓였다. 종말을 막을 방법이 생겼다. 그것도 아주 간단한 방법이 말이다. 허탈함에 웃음만 나왔다.



 

동상처럼 굳어있는 파이브와 바냐 사이에 앉아, 온기가 조금 남은 머그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바냐와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위로 올라간 입꼬리를 밑으로 내렸지만 이미 늦었다. 바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방금 네가 죽으면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생각했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면 사람의 생각을 꿰뚫는 능력이라도 생기는 것일까? 바냐는 방금까지 내가 하던 생각을 정확하게 맞췄다. 바냐는 내게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맑고 큰 눈과 마주하니 내가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 둘이 천천히 이야기하고 있어.”

 



파이브는 바냐와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푸른 빛을 내며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 둘 다 파이브가 낙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낡은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시계를 보았다. 짧은 침이 숫자 ‘4’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냐와 참 오래도록 대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냐는 내게 자신이 일으킨 종말을 말해주었다. 뚫린 공연장 천장으로 보이던 달 파편, 60년대로 떨어진 후 만난 씨씨와 할런, FBI에 스파이로 몰려 받은 취조, 그리고 바냐를 구하러 나타난 나에 대해서 말이다.



 

속이 메슥거려 소파에 주저앉았다. 파이브와 함께하는 공간 이동은 몇 번을 해도 적응할 수 없었다. 파이브가 물을 떠서 가져다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발 죽지 말라고 빌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참 비극적이지?”



 

파이브가 씁쓸하게 웃었다. 네가 언제 내게 죽지 말라 빌었냐고 말할 수 없었다. 파이브가 수십 번 돌린 시간 자체가 파이브가 내게 보내는 신호였다. 제발 죽지 말라는, 내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신호.



 

만약 반대의 상황이라면, 그러니까 파이브가 종말을 막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려 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우리는 어릴 적부터 히어로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피 튀는 싸움터에 뛰어드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는 히어로였고, 내게는 폭력을 막을 힘이 있어서였다. 파이브와 전 세계 사람들의 목숨을 저울질할 수 없었다. 




 

파이브는 나와 많은 부분이 달랐지만, 한편으로는 비슷한 부분도 많았다. 파이브 마음속에서는 불길한 생각이 자라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내 희생이 종말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라면, 결국은 내가 죽어아만 한다는 생각 말이다. 

 

 

바냐는 우리와 달랐다. 남매 중 누구보다도 동정심이 많았다. 그래서 때로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할 때도 있었다. 60년대에 씨씨와 할런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파이브와 싸운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다른 남매들에게는 바냐가 이상한 고집을 부린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도, 바냐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다. 게다가 바냐는 자신이 종말을 일으켰다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이브는 바냐를 선택한 것이다. 바냐는 내가 죽어야 종말이 끝난다는 내 생각을 되돌릴 수 있는 설득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파이브는 항상 옳은 선택을 한다. 바냐는 나를 설득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남매들이 널 구하려고 애쓰고 있어.’ 내가 바냐에게 한 말이라고 했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바냐는 가슴속에 소중하게 품은 말이기도 했다. 그 말을 듣자 나를 살리면서 동시에 종말을 막으려 애썼을 파이브가 떠올렸다. 내가 했던 말이 나를 설득한 셈이었다. 




 

몸은 무겁고 미칠 듯이 피곤했다. 내일 가게로 출근도 해야 했다. 당장 침대로 들어가 잠을 자야 했지만, 그러기 싫었다. 아침이 밝기 전에 파이브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서였다.




 

“파이브,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들어주기 싫은 부탁이 나올 것 같지만, 일단 들어는 볼게.”


“나도 커미션에서 일하고 싶어.” 

 



파이브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동시에 커다랗고 아름다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느리게 눈을 깜빡거린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파이브의 얼굴을 집요하게 관찰하느라 모든 순간이 느리게 보였을 수도 있었다. 파이브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 부탁을 거절하겠다는 의미였다.



 

“사실 네가 종말을 막기 위해 커미션에서 일한 적이 있어. 내가 아홉 번째로 시간을 돌렸을 때였지.”


“그때는 종말 원인을 몰랐지만 지금은 알잖아. 내가 커미션에 들어가서 크툴루를 소환하는 능력을 없애는 거야.”


“그 방법은 열여덟 번째 시간을 돌렸을 때 썼어. 능력을 없앤 몸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내가 제시하는 방법마다 파이브는 이미 실행했으며,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알려주었다. 파이브는 종말을 막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 이제 파이브에게 남은 선택지는 몇 개 없었다. 그중에 내가 바냐의 약을 먹어 능력을 억누르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내가 포털을 열기 전에 죽는다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막다른 길이었다. 파이브와 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머리가 아팠다. 침대에 누워 눈이라도 붙이고 싶었다. 그러면 머리가 지끈거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눈가를 문지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소파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창 너머에서 반짝이는 붉은 무언가를 보았다. ‘저게 뭘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다급하게 몸을 납작 엎드렸다. 파이브 역시 무언가를 눈치챈 것 같았다. 몸을 낮게 숙여 내 몸을 감쌌다. 



 

정신없는 총성이 들리고 유리 파편이 우리 위로 쏟아졌다. 테러는 아니었다. 이곳으로 총을 난사한 이들의 목표는 오로지 파이브와 나였다. 다른 이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파이브와 복도로 이동했다. 벽 너머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다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 사람들 누구야?”


“커미션이야.”



 

그리고 세 명이 왔어. 파이브가 반대편 건물을 보며 말했다. 앞에서 둘이 총을 쏘았고, 한 명은 투시경을 든 채 우리의 동선을 파악했다. 총을 든 괴한 셋을 처리하는 건 쉬웠다. 파이브가 그들 뒤로 나를 이동시키면 내가 촉수 하나에 한 사람씩 감고 죽이면 그만이었다. 갈비뼈를 으깰 수도 있었고 목을 감아 질식시킬 수도 있었다. 가급적 피가 안 튀는 방법을 선택하고 싶었다. 



 

파이브는 자신의 능력으로 남들보다 빨리 움직였다. 내가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는 사이, 파이브 잠깐 사라졌다가 얼굴에 피를 묻히고 나타났다. 내가 눈만 깜빡이며 자신을 올려다보자, 파이브는 어색한 손동작으로 느슨하게 풀어진 넥타이만 만지작거렸다. 



 

“안 죽였어. 무장해제만 시켰지.”



 

파이브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변명을 했다. 내가 나서서 커미션 직원들을 죽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을 죽이는 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파이브가 끈적한 피가 묻은 손을 내게 내밀었다. 



 

“갈 곳이 있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파이브 손을 잡았다. 푸른 빛이 반짝였다.













 

이번 공간 이동은 멀미가 날 정도로 힘들었다. 땅에 발이 닿자마자 나는 대리석 바닥을 네발로 기었다. 잠도 못 자서 피곤한데 머리까지 어지러웠다. 심지어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정신없이 들려왔다. 속을 게워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개를 들자 낯선 이들이 파이브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1960년대가 오지 않은 것처럼 옷을 입은 자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허브는 어딨어?” 



 

먼저 입을 연 건 파이브였다. 목소리에 노기가 느껴졌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커다란 모자를 쓴 사람이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그 자의 손가락을 따라 길이 열렸다. 사람들 속에 숨어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던 허브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어서 오세요. 커미션입니다!”

 

 

허브 씨가 양팔을 벌리며 나를 환영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가가 나를 전혀 환영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파이브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