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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ㅅㅊㅈㅇ, ㅇㅌㅈㅇ, 알오au
스웨덴 숲속에서 나는 포털 속 크툴루와 대화를 나눴다. 대화는 짧았다.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이었다.
“크툴루는 내가 그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생각해.”
크툴루는 내 능력을 원했고, 나는 거부했다. 대화는 제대로 매듭짓지도 못하고 끝났다. 누군가가 쏜 총알이 내 심장을 뚫고 지나가서였다.
카디건 소매 끝을 움켜줬다. 옷 속으로 숨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웅크렸다. 다락방 창문에서 흘러들어오는 찬 공기와 기억 속 스웨덴 숲의 한기가 뒤섞여 느껴졌다. 흉측한 쥐색의 외투만으로는 추위를 피할 수 없었다. 몸이 떨려왔다.
“크툴루가 원하는 게 종말이라면, 우리가 그걸 막을 수 있어?”
파이브는 큰 보폭으로 다락방을 휘저으며 돌아다녔다. 고개를 숙인 탓에 매끈한 뒷덜미가 드러났다. 크툴루와 직접 대화한 사람도, 크툴루를 이곳에 불러와 모든 걸 부수는 사람도 나였다. 내가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했지만,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파이브에게 해결책을 물어보는 것밖에 없었다. 아무런 수고도 없이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불한당처럼 말이다.
“내가 크리스마스에 달로 갈까? 루서가 지내던 달 기지가 아직도 남아있잖아."
“낭만적인 데이트 계획이면 찬성하겠지만, 종말을 막으려는 계획이라면 거부할게. 달은 위험해.”
파이브가 왜 달을 위험하다고 하는지 깨달았다. 파이브가 겪은 첫 번째 종말이 무엇이었는지 루서에게 들은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과거로 가면 어떨까? 텁텁할 만큼 뜨거운 공기가 가득한 해변에서 창백한 피부를 구우면서 함께 겨울을 보내자.”
“내가 사준 수영복을 입고서?”
“아니. 그건 안 입어. 엉덩이를 반도 가리지 못하는 게 어떻게 수영복일 수가 있어. 그렇지만 네가 직접 입고 싶다면 언제든 빌려줄 수 있어.”
“사양할게.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도 종말은 발밑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올 거야.”
버섯구름이 지구를 뒤덮었던 종말을 말하는 것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피해 도망쳐도 종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원인을 없애야만 했다. 과거여행 후 파이브가 얻은 교훈이었다.
머릿속에 새하얀 구멍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뻥 뚫린 구멍에 무언가를 채우고 싶었다.
“술이 간절해.”
“술은 안 돼. 몸살 났잖아.”
아침에 했던 것처럼 파이브가 내 이마와 볼을 문질렀다. 열도 나지 않고, 식은땀도 나지 않는 보송보송한 볼을 꼬집기도 했다. 파이브 손은 커다랬다. 게다가 종말에서 맨손으로 살아남고, 숱한 현장 임무를 소화한 요원이었다. 손가락 힘이 남들보다 좋았다. 잡힌 오른쪽 볼이 얼얼했다.
“아파. 이번에는 꾀병이 아니라 진짜 아파.”
파이브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볼을 조금 더 세게 꼬집었다.
“아야. 아파!”
“거짓말에 대한 복수야.”
“너그럽게 용서해 줄 수도 있었잖아.”
“볼이 지나치게 말랑해서 복수를 멈출 수 없었어.”
파이브는 붉게 변한 내 볼에 입을 맞추고는 푸른 빛을 내며 사라졌다. 내 볼을 꼬집고는 도망간 줄 알았던 파이브가 왼손에는 투명한 유리잔 두 잔을, 오른손에는 브랜디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혹한기에는 백화점에서 훔친 코트와 술로 추위를 버텼었어. 도서관에서 장작 삼을 책을 얻었고. 세상에 있는 술이란 술은 다 마셨었지. 이 녀석은 향이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추운 다락방에서 마시기에 적당한 녀석이야. 시린 공기와 어울리거든."
투명한 유리잔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다락방에 퍼졌다. 파이브와 함께 술을 나눠마셨다. 첫 잔은 술 향을 음미하며 마셨지만, 두 번째부터는 물처럼 마셔대기 시작했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에 열이 올랐다. 병이 반쯤 비워지자, 파이브 말대로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총이여었어. 분명 총소리가 들려었어어.”
혀가 무거웠다.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팔도 내 뜻과는 다르게 움직였다. 잔에 든 술이 떨어져 손등과 다락방 바닥을 적셨다.
“총소리가 가까웠어?”
파이브가 손수건으로 내 손등에 떨어진 술을 닦으며 말했다. 말끝을 힘없이 늘리는 나와 달리 파이브 발음은 정확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파이브 이놈도 지금 취했다. 아까부터 보조개가 쏙 들어갈 만큼 웃고 있었다. 내 손을 손수건으로 박박 문질러 닦으면서 ‘흐흐흐’ 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가까웠나아? 기억이 안 나.”
“그럼 포털 크기는 얼마나 컸어?”
“축구공만 했어. 아니야. 이만큼이었나…”
나는 파이브 머리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부드러운 브루넷 사이에 머리카락을 끼워 넣고 마음껏 헝클었다. 파이브는 머리가 정신없이 흔들려도 기분이 좋은지 계속 ‘히히’거리며 웃어대기만 했다. 크툴루와 살인과 세상의 종말을 진지하게 논하기엔, 우리의 뇌가 술에 잠겨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파이브는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며 책상으로 걸어갔다. 내가 아코디언 씨에게 뺏은 서류 가방을 파이브가 왼발로 찼다. 묵직한 서류 가방은 빙글빙글 돌며 내 옆으로 밀려왔다. ‘오! 테이블이다.’ 나는 소꿉놀이라도 하듯이 술병과 유리잔을 서류 가방 위에 올려놓았다.
파이브가 바닥에 마커펜으로 수식을 쓰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서 실실 웃기는 했어도, 수식을 쓰는 손은 막힘없이 움직였다. 바닥에 적히는 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넋을 놓고 잘난 파이브 얼굴이나 구경했다.
허리를 숙인 채 식을 쓰는 탓에 파이브의 긴 머리카락이 계속 얼굴을 가렸다. 파이브는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프레임을 만들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시늉을 했다. ‘찰칵’이라고 셔터 소리까지 흉내 냈는데, 파이브는 집중하느라 내가 벌이는 바보 같은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파이브가 검은 마커를 손에서 놓았다. 데굴데굴 굴러간 마커는 치킨 수프가 든 보온도시락과 부딪히면서 멈췄다. 파이브가 원하는 수식을 얻은 것이다.
“숲에서 발견한 포털이 17살의 네 허리보다 작았는지를 확인해야겠어.”
“내 허리가 이만했었으니까아… 포털이 조그음 더 컸어… 아냐. 그러엏게 크지는 않아았어어.”
“정확한 반경이 필요해. 그걸 알아내면, 거대한 크툴루가 지구에 오지 못하도록 포털을 막을 방법이 나타날 거야.”
“하… 기억이 안 나는데…”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고 골똘히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빛과 크툴루 목소리는 또렷하게 떠오르지만, 정확한 크기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포털에서 뿜어져 나온 강한 빛이 포털을 원래보다 크게 보이도록 만들어서였다.
“포털 크기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아아…”
“직접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파이브와 내 눈이 마주쳤다. 우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류 가방에 올려놓은 유리잔과 술병을 치웠다. 술상으로 이용되는 서류 가방의 치욕스러운 시간은 끝났다. 이제 서류 가방은 제 역할을 할 때였다.
서류 가방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도구였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뛰어난 발명품은 없다. 그런데도 커미션은 서류 가방에 아무런 안전장치도 달지 않았고, 방탄 소재로 만들지도 않았다. 심지어 가방 보관실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덕분에 취객 두 명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서류 가방 보관실에 진입할 수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서류 가방 수십 개가 보관된 작은 방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감돌았다.
“커미션 공기가 여전히 콧구멍을 텁텁하게 만드는구나.”
나는 몸을 좌우로 흔들거리며 말했다. 파이브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지지대를 줄기로 휘감는 넝쿨처럼 파이브에게 달라붙었다.
파이브는 서류 가방을 반환통에 넣고는 ‘반출/반환 목록‘에 서명했다. 반환 확인란에 적힌 서명을 힐끔 살펴보았다. 종이가 얇은 탓에 종이 뒷면에 쓴 글자가 훤히 보였다. 뒷면에 적어 반대로 보이는 파이브 서명이 하나, 가장 위에 하나, 그리고 방금 작성한 서명까지. 파이브는 최근에만 세 번이나 서류 가방을 사용했다.
우리는 보관실을 지나 무한교환대로 향했다. 보관실과는 다르게 무한교환대에는 당직 직원이 한 명 있었다. 파이브는 직원이 앉은 의자를 발로 밀었다. 짙은 자줏빛 투피스를 입은 직원은 물음표가 가득한 표정으로 무한교환대를 벗어나 복도로 밀려났다. 의자 바퀴가 돌돌돌 굴러가는 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우리 계획은 이랬다. 무한교환대로 가서 내가 포털과 처음으로 소통하던 장면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차라리 서류 가방을 이용해서 직접 과거를 보고 오는 게 낫지 않을까?”
“타임 패러독스가 발생할 수도 있어.”
“나만 그곳에 있었잖아.”
“그럼 네가 죽던 순간에 나 혼자 갔다 오라는 말이었어?”
회선을 포트에 연결하던 파이브가 나를 쳐다보았다. 술이 어느 정도 깬 것인지 실실대던 모습은 사라졌다. 파이브 술기운이 남은 곳은 살짝 감겨 나른해 보이는 눈밖에 없었다.
“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단하지 않아. 혼자서 살아남기 급급해서 내 마음을 돌볼 겨를이 없이 살아왔을 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17살의 형제가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싶지 않아. 게다가 이미 네가 죽지 않을 방법을 두 가지 정도 구상해놨거든. 과거로 가면 그 방법 중 하나를 실행할지도 몰라.”
“벌써? 오오. 똑똑해.”
나는 느리게 손뼉을 쳤다. 내겐 남들에게 말하기엔 부끄러운 재능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박수 소리가 크다는 점이었다. 천둥과 흡사한 박수 소리가 벽을 뚫고 지나가 복도에도 울렸다.
“내가 무른 인간이라는 고백을 듣고 그런 반응을 할 줄은 몰랐는데…”
“이미 아는 사실이라서 놀라운 것도 없거든. 넌 어렸을 때부터 늘 그랬어. 내가 아는 너는 푹 익은 복숭아만큼 달콤하고 말랑한 녀석이었어.”
파이브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러더니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회선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 비유가 창피했던 걸까. 하긴. 흐물거리는 복숭아에 비유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파이브 손이 세 배는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내 과거를 엿볼 수 있는 회선 연결이 금세 완성되었다. 파이브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작은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하얀색과 검은색 점이 뒤섞인 노이즈가 지나고 나자, 눈 덮인 스웨덴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숲에 숨겨진 하얀 건물 안으로 잠입하는 다섯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저게 우리야!’ 나는 신이 나서 손가락으로 모니터 속 엄브렐러 아카데미를 가리켰다.
“너 정말 작았구나.”
“저것보다는 더 컸었어. 하필 루서 뒤에 있어서 더 작아 보이는 것뿐이야. 저때도 루서는 식탁 밑에 숨지 못할 만큼 키가 컸었다고오.”
내가 하찮은 변명을 하는 사이에 화면이 전환되었다. 캄캄한 숲으로 들어가는 내가 나타났다. 나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화면이 전환되었다. 내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허공에서 포털이 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초점은 내가 아닌 낯선 뒷모습에 맞춰져 있었다. 검은 헬멧에 투박한 가죽 재킷을 입은 자가 오른손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흐릿하지만 총을 맞고 쓰러지는 내가 보였다.
파이브가 다급하게 화면을 멈췄다. 헬멧을 쓴 자의 발치에는 서류 가방이 세워져 있었다.
파이브와 나는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흔한 서류 가방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잠금장치 모양새가 독특했다. 저건 커미션 서류 가방이었다.
“저 새낀 누구야!”
우리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커미션의 전설, 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다니는 디에고였다.
디에고가 갑자기 나타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디에고 본부에 놓고 간 식칼을 가지러 잠깐 방문했다가, 내가 내는 커다란 박수 소릴 듣고는 무한교환대에 온 것이다.
“디에고. 이젠 컷코 식칼로 자경단 활동을 하고 있어?”
“라일라 거야.”
“라일라 씨가 왜 식칼을 본부에 들고 왔었는데에?”
“파인애플을 먹어야 하는데 이로 뜯을 순 없잖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방금 그거 네가 죽던 상황이지?”
라일라 씨와 디에고가 어쩌다가 커미션에서 파인애플을 먹어야 했는지 궁금했지만, 디에고 말처럼 중요한 건 파인애플이 아니었다. 디에고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모니터 속에는 여전히 저격범의 뒷모습과 커미션 서류 가방이 있었다. 날 죽인 자가 커미션 현장 요원이었다. 커미션이 나를 제거 대상으로 지정했으며, 요원을 보내 나를 죽였다.
파이브가 모니터 전원을 내렸다. 까만 화면에 심각한 표정의 파이브와 디에고, 그리고 술 때문에 울렁거리는 속을 참는 내 얼굴이 비쳤다.
“너희는 커미션 소속이잖아. 알고 있었어?”
“당연히 몰랐지. 알았으면 내가 파이브를 가만 안 뒀어.”
“나는 왜?”
“나보다 훨씬 오래 현장 요원으로 일했잖아.”
“나라고 커미션에서 벌어졌던 일을 모두 알진 못해.”
파이브는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술 냄새 뒤섞인 한숨이었다. 디에고는 코를 킁킁대다가 파이브를 한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디에고가 파이브를 저런 눈으로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디에고는 배우인 앨리슨보다도 까다롭게 식단을 관리했는데, 그게 디에고에게는 꽤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벤이 제거 대상으로 지정한 이유를 알아내면, 종말을 막을 힌트를 얻을 수도 있어.”
“개소리하지 마. 그게 아니더라도 벤을 죽이라고 지시한 놈이 누군지 알아내야지.”
디에고가 씩씩대며 말했다. 파이브는 디에고 어깨를 두드렸다.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커미션 자료실은 하그리브스 복도보다도 길고 응접실보다도 넓었다. 이 넓은 자료실이 누군가를 죽인 후 작성된 보고서로 채워져 있었다.
파이브와 디에고는 뻑뻑해서 제대로 열리지 않는 서랍과 싸우면서 ‘벤 하그리브스 제거 임무 보고서’를 찾아다녔다. 그동안 나는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했다. 나라고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는 게 좋았을 리 없었다. 추운 다락방에서 마셔댄 술이 문제였다.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고, 속은 여전히 울렁거렸다. 사다리에 올라가고 허리를 숙이며 서랍장을 여는 일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보고서가 임무코드에 따라 분류되었다. 임무코드를 알아야 ‘벤 하그리브스 제거 임무 보고서’을 찾을 수 있다. 자료실로 오기 전, 우리가 허브를 찾아간 이유였다. 허브가 순순히 임무코드를 알려주지 않자, 우리는 허브 씨 발목에 밧줄을 묶은 다음에 창틀에 매달아 놓았다.
“생각해봤는데에, 허브 씨를 창문에 거꾸로 매달아 놓은 건 너무했어어.”
디에고가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허브를 창문에 매달자고 했잖아.”
“협박을 하려면 확실히 해야지이. 그런데 디에고가 칼을 들고 협박만 해도 허브 씨가 입을 열었을 거 같아아. 겁이 많으시잖아. 헤헤헤.”
디에고는 입을 굳게 다물고는 자기 옆에서 사물함을 뒤지는 파이브를 노려보았다.
“야. 벤한테 술은 왜 먹였어?”
“애가 먹고 싶다잖아.”
“주려면 적당히 줘야지. 술이 몸에 얼마나 안 좋은지 알기나 해.”
“어. 아니까 보고서나 찾아.”
파이브와 디에고가 사다리에 매달린 채 다퉜다. 어렸을 때라면 서로를 발로 차면서 싸웠겠지만, 지금은 서로의 머리 스타일을 조롱하며 싸웠다. 싸움이 더 유치해진 것이다. 우리는 성인이었다. 심지어 파이브는 우리보다 배는 더 살았다. 형제 간의 깃털 같은 싸움은 나이를 먹어도 계속되었다.
디에고가 들고 있던 파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한교환대에서 가져온 바퀴 달린 의자를 질질 끌고 가서 파일을 주웠다. 임무 계획서, 진행 상황 보고서, 결과 보고서, 영수증과 실비 청구서가 순서대로 정리되었다. 영수증에는 X가 그려지고는 옆에 ‘예산 초과’라는 새빨간 글자가 적혀 있었다. 보고서를 작성한 현장 요원은 파이브였다. 약국에서 산 붕대 영수증과 밤샘 근무를 버틸 커피 영수증에 X가 그려졌다. 다행스럽게도 파이브가 제거한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파이브가 작성한 것은 호텔 수영장 청소부였던 ’에릭 콴'의 제거 임무 보고서였다.
“...미쳤어.”
파일을 덮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파이브가 나를 죽인 요원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취기 탓이었다.
서랍 끝에서 디에고가 환호성을 질렀다.
“커미션의 전설 디에고 하그리브스 님이 뭘 찾았는지 말해볼 사람?”
“굳이 말해야 할까.”
“하하. 파이브. 지금 네 표정 진짜 웃겼어.”
디에고가 파이브 얼굴을 가리키며 웃어댔다. 파이브는 떨떠름해하며 디에고 손에 쥔 파일을 뺏었다. 당장 보고서를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내 몸을 앞섰다. 파이브 쪽으로 손을 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기가 가실 때까지는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파이브의 말을 들어야 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단단한 서랍과 더 단단한 내 머리가 부딪히면서 어마어마한 소리 발생했다. 파이브와 디에고가 입을 반쯤 벌린 얼굴이 보였다. 둘 다 바보같이 보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의식이 빠르게 멀어져가서 입을 열 수 없었다.
+)
벤 술이 약한 게 아니라 속도를 조절하지 못해서 빨리 취했을 뿐임.
파이브가 한 잔 마실 때 벤은 2.4잔 마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