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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ㅅㅊㅈㅇ, ㅇㅌㅈㅇ, 알오au
마지막 임무가 꿈속에 나타나곤 한다. 해리 사진을 발견한 밤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한 꿈을 꿨다. 꿈에서 깨고 나서도 내가 17살인지, 30살인지 헷갈릴 만큼이었다.
꿈에서는 감촉이 둔해진다고 한다. 내 꿈은 아니었다. 악몽은 불쾌한 감촉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칼날만큼 예리한 추위가 옷 속을 파고들었다. 따뜻한 숨결을 따라 하얀 입김이 나타났다. 귀가 뜯어져 나갈까 겁이 날 만큼 무서운 추위였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반짝이는 빛이 새까만 숲속으로 들어가도록 나를 유혹했다. 고작 17살이었다. 이성보다는 호기심이, 호기심보다는 반항심이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시기였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혼이 날 게 분명했다. 임무에 집중하지 않고 딴짓했으니 말이다. ‘너흰 다 컸다고 생각하겠지. 그런 오만함의 결과가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지.’ 아버지는 파이브 초상화를 손끝으로 가리킬 것이다. 파이브 초상화는 우리가 파이브를 기억하라고 집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인 게 아니었다. 아버지 말을 거역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잊지 말라고 걸어놓은 것이었다.
어릴 때는 화를 내는 아버지가 무서웠었다. 17살에는 아버지가 두렵지 않았다. 밉지도 않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보호자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짓에 질렸다. 아버지를 향한 감정은 그게 전부였다.
나를 이끄는 빛에게 소리가 흘러나왔다. ‘딩- 딩-‘ 하는 거대한 종소리처럼 들렸다. 다시 들으니 ‘도망가.’라는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벤.‘이라고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저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숲에서 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기이한 현상의 원인이 궁금했다. 빛과 소리의 정체를 밝히려면, 저곳으로 직접 갈 수밖에 없다.
줄기가 두꺼운 나무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신기한 빛이었다. 빛 주변 공기는 따뜻했지만, 가까이 다가가도 피부가 탈 것처럼 뜨겁지는 않았다.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밝았지만, 정면에서 마주 보아도 눈이 아프지 않았다.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손을 천천히 뻗었다. 손끝이 빛에 닿는 순간, 빛이 소리쳤다.
‘벤. 눈을 떠.’
빛이 외친 대로 눈을 떴다. 어두운 침실이 눈에 들어왔다. 찬바람 대신 포근한 공기가 피부를 따뜻하게 감쌌다. 온기가 나를 악몽 속에서 서서히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침대 옆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시트는 구겨지지 않았고, 베개에는 머리카락이 한 가닥도 보이지 않았다. 파이브가 누워있던 자리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한 번도 내 옆자리에서 잠이 들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 밤도 파이브는 다락방으로 갔다.
차 키를 챙겼다. 잠옷 위에 두꺼운 외투만 걸쳐 입은 채 침실을 나섰다. 목적지는 차고다. 글러브박스에 보관된 해라 사진을 다시 보고 싶었다.
글러브박스를 열었다. 서류 사이에 끼워졌던 해리 사진이 사라졌다.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사진이 없었다. 조수석에 파묻혀 한숨을 내쉬었다. 파이브는 일을 미뤄두는 법이 없었다. 저녁 내내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가 잠들자마자 차고로 돌아와 사진을 가져갔을 테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벤?”
파이브가 파란빛을 내며 차고에 나타났다. 차고에 불이 켜진 것을 발견하자마자 다락방에서 이곳으로 온 것이다. 다락방에서 차고로 오는 데 1분도 걸리지 않는데. 파이브는 아무렇지 않게 능력을 사용했다.
“가끔은 네 능력이 부러워.”
“차에 놓고 내린 게 있었어? 그냥 나를 부르지.”
“모르는 척하지 마. 사진은 왜 숨겼어?”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서야."
“그건 사진일 뿐이었어. 필름과 빛, 인화지 등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불과해."
"그것만으로도 타임 패러독스가 발생해."
"동시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끼리 만났다는 의미야?"
"그런 의미도 있고, 동일한 시간에 자기 자신이 둘 이상 존재하면 발생하는 정신증을 뜻하는 말이기도 해.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특정한 물건도 타임 패러독스을 일으켜.”
파이브는 다른 시간에서 온 물건과 접촉하면, 그 물건에 집착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자기 자신과 밀접하게 관련된 물건일수록 집착은 점점 심해진다. 커미션에서는 패러독스를 방지하려고 여러 지침을 만들었는데, 임무에서 얻은 물건을 소유하면 안 된다는 지침이 그중 하나였다. 내 사진에 신경 쓰는 건 패러독스 때문이며, 패러독스가 사라지면 사진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지 않을 것이라 설명해 줬다.
파이브 설명이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 줬냐면, 당연히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사진에 더 집착하도록 부추겼다. 파이브는 커미션 지침을 무시하고 해리 사진을 보관하고 있어서였다.
이마부터 툭 튀어나온 눈썹뼈와 보기 좋게 입체감 있는 광대, 단단한 턱까지.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을 소중히 쓰다듬었다.
“파이브. 우리 이렇게 하자. 내가 마당에 장작을 쌓아둘게. 그 사진을 불태우자. 아니면 지난번에 썼던 바베큐 그릴을 가져올까? 아니다.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까, 주방에서 마시멜로를 가져올게. 하얀 마시멜로를 구워 먹으면서 그 사진도 함께 불태우자. 만약에 해리와 관련된 물건이 더 있다면 그것도 모두 불붙인 장작 속에 집어넣자.”
“벤…”
“우린 그래야만 해.”
너는 그래야만 해. 파이브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애원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지만, 누가 봐도 나는 명령하고 있었다. 파이브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사진을 없애기 싫어서였다.
“파이브. 내가 ‘해리’라는 사람 대체품이야?”
“벤.”
파이브는 화를 억누르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내 말이 파이브에게 상처를 줄 걸 알면서도, 나는 굳이 ’대체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인격을 가진 사람도 아닌, 무언가를 대체하는 물품으로 말이다.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상처를 줘야 할 때도 있었다.
“넌 어려서 이해 못 해.”
“난 어리지 않아.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30년은 살았어. 네가 사라진 동안, 내가 뭘 했을 것 같아? 네가 남긴 흔적을 끌어안았어. 널 잊지 않으려 애썼다고."
바냐는 잠도 자지 않고 파이브를 기다렸었다. 바냐는 파이브가 반드시 돌아온다고 생각해서였다. 나는 바냐처럼 희망에 기대 사는 아이가 아니었다. 파이브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얼 했냐면, 몰래 파이브 방으로 들어가 책상 서랍을 훔쳐봤다.
서랍에서 엄브렐러 아카데미 기사를 모아둔 노트를 발견했다. 우리가 세운 작전이 현장에서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모아둔 것이었다. 노트를 통째로 훔치고 싶었지만, 나는 파이브가 손을 흔드는 사진만 찢어서 방으로 돌아갔었다. 그 사진을 체호프 단편선 사이에 끼워뒀다.
“나한테도 그 사진이 아주 소중했다. 네가 일찍 돌아왔다면, 나는 그 사진을 소중하게 보관하지 않았을 거야. 그 사진이 진짜 너를 대신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 사이에 침묵만 감돌았다.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에야 파이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패러독스 때문에 그 사진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아. 사진은 커미션에 반납할게.”
절충안이었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파이브가 최대한 양보할 수 있는 선이라는 걸 알았기에 수긍했다.
파이브는 집으로 들어가자며 조수석에 앉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파이브 손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내 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잠옷 위에 두꺼운 카디건만 걸치고 있었고, 파이브는 실내복 차림이었다. 차고에 계속 있다가는 둘 다 감기에 걸릴 것이다.
파이브는 곧장 주방으로 가서 커다란 머그잔에 뜨거운 물이 따랐다. 혹독한 겨울 추위 탓에 양손이 꽁꽁 얼었다. 따뜻한 머그잔을 양손으로 쥐었다. 파이브는 커피를 가득 따른 머그잔을 들고 다락방으로 돌아갔다. 파란 불빛을 내며 가는 대신에 천천히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주방에 앉아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파이브를 쳐다보았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내게 등 돌린 파이브를 바라보았다.
커미션에서 또 파이브를 호출했다. 파이브는 나와 함께 커미션으로 가고 싶어 했다. 나는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며 거절했다. ‘머리가 어지러워.’ 침대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끙끙 앓았다. 커다란 손이 이마를 덮었다. 보송보송한 내 이마는 파이브 손보다 차가웠다. ‘다행히 열은 없네.’ 파이브는 두꺼운 이불을 턱 끝까지 덮으며 말했다.
당연히 열이 없을 것이다. 꾀병이었으니까. 파이브가 집을 비운 사이에 다락방에 잠입할 생각이었다. 파이브가 나를 다락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을수록, 작은 다락방 안에 커다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의심이 커졌다.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된 심정이었다. 파이브가 푸른 수염처럼 죽은 아내들을 방에 숨겨뒀을 리는 없지만, 죽은 내 흔적들을 수집했을지도 몰랐다. 해리 사진처럼 말이다.
해리 사진을 찾으려고 다락방에 들어가고 싶은 건 아니다. 파이브는 종말에 관해 알아낸 정보를 나와 공유하기는 했다. 모든 걸 공유하지는 않았다. 파이브가 하는 말은 조각에 불과했다. 그 조각을 촘촘하게 맞추면, 큼지막한 공간이 생겼다. 파이브가 숨기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게 다락방에 있을 것 같았다. 내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콜록, 콜록’ 상체를 흔들며 기침하는 척 연기했다. 파이브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기침 연기가 과해서였다. 감기가 아니라 폐렴에 걸린 기침을 해버렸다.
“병원에 가자. 주사 맞고 약 처방받으면 금방 나을 거야.”
파이브가 옷장에서 내 옷을 꺼냈다. 꼼짝없이 옷을 갈아입고 병원에 끌려갈 상황이었다. 내 몸은 아주 건강했다. 염증도 없고, 근육통도 없었다. 체온은 36.5도였다.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분이 꾀병을 부르시면 안 됩니다.’라는 의사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가 엄마를 닮았다. 그레이스는 평상시엔 다정한 엄마였다. 기계처럼 차가운 구석이 있었다. 늘 애정이 부족했던 우리는 엄마에게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고는 했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넌 아픈 곳이 없어.’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잔인한 진단을 내려줬었다.
병원에 가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 내라, 벤 하그리브스.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굴렸다. 우리가 아팠을 때 엄마는 뭘 해줬더라? 치료실에서 커다란 주사를 엉덩이에 ‘폭’하고 찔렀다. 아냐. 그것 말고 다른 것도 해줬잖아. 나는 열심히 기억을 뒤적거렸다.
“병원보다는 우리가 아플 때마다 엄마가 만들어주던 치킨 수프가 간절하게 필요해.”
엄마는 치료실에서 주사를 놓은 뒤에는 정성껏 치킨 수프를 만들어줬다. 맛있었지만, 엄마는 동그란 공처럼 생긴 버섯을 큼지막하게 꼭 썰어서 넣었다. 그 버섯은 식감이 끔찍했다. 흐물거리는 눈알을 씹는 것만 같았다. 남매들은 그 버섯을 눈알 버섯이라고 칭했다. 가족 중에 눈알 버섯을 좋아한 사람은 디에고밖에 없었다. 디에고는 엄마가 만들어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버섯을 좋아했으니, 사실 눈알 버섯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던 셈이었다.
‘엄마. 그 버섯은 독버섯이에요. 먹으면 환각과 복통 증세가 나타나요.’ 나는 서재에서 찾은 식물도감을 가리키며 엄마에게 말했었다. 내 몸보다 더 두꺼운 책이라서 루서가 책을 대신 들어줬다. 루서는 심각한 얼굴로 엄마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로봇인 엄마가 독버섯과 식용버섯을 구분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엄마가 그 버섯을 치킨 수프에 넣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눈알 버섯을 싫어하는 남매들에겐 내가 펼친 주장이 그럴싸하게 들렸을 것이다. 어느새 우리는 치킨 수프에 담긴 눈알 버섯을 먹지 않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유치하게 군다고 말했던 파이브마저 동그란 버섯을 그릇 밑바닥에 남겼었다.
“독버섯이 들어있다면서 싫어했었던 그 수프를 말하는 거야?”
파이브도 독버섯 치킨 수프를 기억해 냈다. ‘그 버섯도 나름 맛있었어.’ 파이브가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내가 진심이냐는 듯이 쳐다보자, 파이브는 썩은 비스킷보다는 훨씬 맛있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뭐든 더 좋게 추억하게 되잖아.”
“맞아. 끔찍한 맛이 나던 버섯이 들어갔지만, 엄마가 해주던 그 치킨 수프 맛이 계속 혀끝에서 맴돌아.”
“최대한 비슷한 치킨 수프를 구해올게.”
허브한테 구해오라고 말해야겠네. 파이브가 작게 혼잣말했다. 허브 씨가 커미션 구내식당에서 울면서 치킨 수프를 끓이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파이브가 나갔다. 순진한 파이브. 내 꾀병 연기에 속아 의심도 하지 않고 커미션으로 갔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회색 토끼 모양의 실내화를 신었다. 파이브와 함께 구입한 방한 아이템 중 하나였다. 두툼한 밑창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둔탁한 소리를 만들었다. 실내화 덕분에 파이브와 나는 발소리로 서로의 동선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뭘까.”
눈앞에 나타난 상황을 보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양쪽 문기둥에 붙은 수많은 쇠사슬이 문을 가로질렀다. 손가락보다도 두꺼운 쇠사슬이 다락방 문을 보호하고 있었다. 촘촘하게도 쇠사슬을 붙여놓았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고 싶어도, 쇠사슬 때문에 손잡이를 잡을 수도 없었다. 파이브가 순진하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파이브는 자기가 집을 비우면 내가 다락방부터 냉큼 확인할 걸 예상했고, 이렇게 조치까지 취해놨다.
차가운 쇠사슬을 잡아당겨 봤다. 무거운 금속끼리 부딪쳐 내는 소리가 맑으면서도 둔탁했다. 이런 쇠사슬을 문에 고정하면서 큰 소음이 들렸을 텐데, 어떻게 나 몰래 이렇게 짓을 벌인 걸까. 쇠사슬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파이브가 벌인 깜짝 이벤트를 충분히 즐겼다.
파이브는 다락방 문을 막아놔도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해서 다락방에 들어갔을 것이다. 나도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내 능력을 이용해 다락방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비록 파이브처럼 평화롭게 안전한 방법은 아니지만 말이다.
꿈틀대는 네 개의 촉수를 꺼냈다. 쇠사슬보다 두껍지만, 팔뚝보다는 얇은 녀석들이었다. 그것보다 더 두꺼운 촉수를 꺼내서 휘둘렀다가는 집이 무너질지도 몰랐다. 흐느적거리는 촉수 네 개로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쇠사슬만 깔끔하게 떼어내려 한 계획은 실패했다. 다락방 문기둥이 쇠사슬과 함께 딸려 나왔다. 문기둥만 딸려 나왔으면 다행었을 텐데. 문기둥과 함께 벽도 딸려 나왔다. 1, 2층과 다르게 다락방 부분은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잠옷 차림인 내 위로 벽돌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을 것이다. 나무는 그나마 괜찮았다. 이마와 볼이 긁혀서 피가 나가는 했지만,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다.
“켁! 콜록콜록. 잠깐만요! 여기 사람 있어요!”
다락방 안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주인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뿌연 먼지구름과 소음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했다. 내 시각과 청각은 평범했지만, 내 피부에서 나오는 촉수는 인간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감각을 가진 녀석들이었다. 촉수 하나가 다락방 깊숙한 곳으로 뻗어갔다. 촉수는 나는 발견하지 못한 목소리 주인을 찾아냈다. 촉수한테 감긴 불쌍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밀밭처럼 반짝이는 금발에, 햇볕에 그을린 올리브빛 피부, 탄탄한 가슴 때문에 셔츠가 터질 것만 같은 알파였다.
“누구세요?”
“아코디언이라고 불러주세요.”
저런 이름을 가진 자들이 일하는 곳을 알았다. 바로 커미션이다. AJ 씨가 파이브와 나를 감시하려고 보낸 현장 요원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는 커미션 직원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 허락도 없이 몰래 집안에 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다. 마음이 상했다. 내 기분을 눈치챈 촉수가 아코디언 씨를 세게 휘감았다. ‘끄아아’라는 이상한 신음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당신 이름은 안 물어봤어요. 다락방에 왜 있는지를 물어본 거예요.”
“의장님이 다락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으라고 하셨거든요. 문밖이 아니라 이 안에서 감시하라고 지시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그게 좋은 방법인가 보죠.”
AJ 씨가 아니라 파이브라고? 어쩐지. 다락방에 숨어든 알파게 지나치게 내 취향에 걸맞더라. 파이브는 다락방을 지키는 최후의 수단으로 외형이 훌륭한 커미션 직원을 골랐다. 시각적인 것에 약한 내 특징을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아코디언 씨가 미소를 지으면서 다락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면, 내가 ‘에헿. 그럴게요.’라고 반응할 거라 기대한 것일까. 파이브가 간과한 게 있었다. 내가 미남에게 약한 것은 맞았다. 그러나 내 이성을 위협할 만큼 위협적인 미모는 오직 파이브만 가지고 있었다.
“하그리브스 님. 저를 인제 그만 공중에서 내려놓아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우유보다도 하얀 이를 반짝이며 아코디언 씨가 말했다.
“손에 든 총을 포기하면요.”
“그럴 순 없어요. 이건 제 호신용 물품이거든요.”
“당신 손에 든 게 샷건 모양의 후추 스프레이인 줄은 몰랐네요.”
나머지 촉수 세 개로 샷건을 뺏었다. 그걸로는 모자랐다. 촉수로 아코디언 씨 몸을 수색했다.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수색을 빼먹을 수는 없었다. 권총과 단검, 전기충격기, 수류탄까지 회수하고 나서야 아코디언 씨를 놓아줬다. 서류 가방이 왜 없지? 다락방을 둘러보았다. 서류 가방은 다락방 책상 옆에 있었다. 현장 요원은 서류 가방을 몸에서 한시도 떼어놓지 말아야 했다. 그걸 어길 만큼 아코디언 씨는 멍청했다. 아코디언 씨가 도망가지 못하게 서류 가방을 책상 밑으로 밀었다.
파이브는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아니었다. 여유가 생기면 한꺼번에 정리하곤 했다. 다락방은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어질러졌다. 반쯤 펼쳐진 책이 구겨진 빨랫감처럼 바닥에 쌓였다. 그 주위에는 수십 장의 낱장이 나뒹굴었다. 구겨져서 버려진 종이도 쓰레기통에 가득했다. 파이브의 복잡한 머릿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쌓여있는 책 중에서 익숙한 표지가 보였다. 바냐 자서전이었다. 자서전을 꺼내자 책더미가 무너졌다. 무너진 책더미 위에 앉아 자서전을 펼쳤다. 책에는 파이브에 적은 낙서로 가득했다. 아주 오래전에 쓴 낙서부터, 며칠 전에 쓴 낙서까지 있었다. 내 장례식이 묘사된 단락을 펼쳤다. 그곳에는 파이브가 얼마 전에 남긴 게 분명한 글귀가 적혀졌다.
‘이번에는 어디로? A: 장난감 가게에서 일하기 전.’
문장을 몇 번이나 곱씹은 뒤에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이번에도 종말을 막지 못한다면, 시간을 얼마나 돌릴지를 생각한 글이었다. 이미 파이브는 다른 시간선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생일 축하한다. 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