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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ㅅㅊㅈㅇ, ㅇㅌㅈㅇ, 알오au
커미션 무한 교환대에서는 미래를 엿보는 게 가능하다. 그렇지만 파이브는 직접 미래로 가길 선택했다. 무한 교환대에서 확인하는 미래는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조그마한 모니터는 미래에 일어날 중요한 일을 5초 분량의 영상으로 편집해서 보여줬다. 무엇이 ‘중요한 일’일인지는 무한 교환대 시스템이 자체적으로 결정했다.
파이브는 사소하지만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되는 단서를 찾아야만 했다. 타임 패러독스를 감수하면서도 미래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서류 가방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시간을 뛰어넘으면 가장 먼저 확인할 사항은 하나였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서류 가방은 시간 단위로 조절할 수 있었다. 1시로 맞추면, 1시 1분에 도착할 때도 있었고, 1시 59분에 도착하기도 한다. 커미션 요원은 자신이 정확히 어떤 상황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일찍 도착했군.”
지금쯤이면 크툴루가 포털을 타고 넘어왔을 시간이었다. 파이브는 멀쩡한 건물과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도로를 확인했다. 크툴루가 이곳까지는 오지 못했다. 처음 미래에 왔을 때보다 3분은 이른 때에 도착한 것이다.
8번가에는 버려진 건물이 하나 있었다. 일주일 뒤에 발파하여 철거될 예정이니 건물에 출입하지 말라는 경고장이 입구에 달려있었다. 경고장은 반으로 찢어졌다. 누군가가 건물로 들어가면서 찢은 것이다. 미래의 벤이 그랬을 것이다. 파이브는 문에서 경고장을 뜯어냈다. 어차피 8분 뒤에 폐건물은 거대한 촉수로 휘감길 것이다.
공실만 가득한 버려진 건물에서는 회색 적막만 가득했다. 1층 입구에서 작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이 건물에 들어온 사람은 파이브와 벤 뿐이었다. 파이브는 식은땀도 흘리지도, 몸이 간지럽지도 않았다. 미래의 파이브가 이미 죽었다는 걸 의미했다. 그렇다면 이 피의 주인이 미래의 파이브일 확률이 높았다.
2층에서 울먹이는 소리가 흘려 1층 로비로 내려왔다. 벤 목소리였다. 울음 사이에 뒤섞인 단어가 들려왔다.
“미안해… 나는…”
파이브는 서류 가방을 몸에 붙이고 2층으로 올라갔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벤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과거에서 온 파이브를 보자마자 공격할 확률이 30%였다. 서류 가방이 고장 난다면, 파이브는 다시 미래에 갇힌다.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벤이 고개를 들었다. 파이브는 벤의 얼굴을 확인했다. 붉게 충혈된 벤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이 흘러내린 볼에는 긁힌 상처가 있었고, 오른손은 말라버린 피로 붉었다. 죽은 파이브 머리카락은 피에 흠뻑 젖어 엉겨 붙었다. 미래의 파이브가 흘린 피가 벤의 손을 붉게 물들인 것이다.
벤은 자기가 끌어안은 파이브와 문 앞에 선 파이브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혼란스러워하던 것도 잠시였다. 벤은 조심스럽게 미래의 파이브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살아있는 파이브에게 다가왔다. 항상 반짝이던 벤의 눈이 안개가 낀 것처럼 탁했다. 짙은 고동색 눈은 파이브를 향하고 있었지만, 벤은 파이브를 보지 않았다. 자기 생각 속에 파묻힌 것뿐이었다.
“파이브. 돌아왔구나.”
평소의 벤이었다면 어째서 같은 공간에 파이브가 두 명이 존재하는지를 의심했을 것이다. 파이브를 눈앞에서 잃은 벤은 판단력이 흐트러졌다.
”내가 크툴루를 또 불러들였어. 어쩔 수 없다는 표현 나도 정말 싫어해. 무책임하게 들리잖아. 그런데… 그래도…”
벤이 숨을 헐떡였다. 과호흡이었다. 벤은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손은 촛불처럼 떨렸고, 벤의 페로몬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파이브는 큰 손으로 벤의 코와 입을 막았다. 파이브가 느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벤은 거울이라도 보는 것처럼 파이브의 행동을 따라 했다.
멀리서 거대한 짐승의 절규가 들려왔다. 벌써 크툴루들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벤. 우리가 왜 이곳에 왔어?”
질문을 들은 벤의 숨이 점차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질문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서였다. 벤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파이브 손에 들린 커미션 서류 가방을 확인했다.
“또 나를 죽이러 왔어?”
텅 비었던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벤의 얼굴이었다. 임무에 나갔을 때마다 벤은 도미노로 눈을 가렸지만, 파이브는 벤이 분노 속에서 악당들과 싸우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총을 든 악당과 싸울 때도 벤은 우울한 얼굴을 했었다.
크툴루의 절규 같은 울음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벤의 몸에서 벤의 몸통만 한 촉수가 튀어나왔다. 파이브를 공격하려는 게 아니었다. 크툴루의 부름에 답을 한 것이다. 돌아가야 한다. 파이브가 든 서류 가방에서 불꽃이 반짝였다.
“이것 좀 풀어주세요. 으아앙. 징그러.”
여전히 촉수에 휘감긴 아코디언 씨가 흐느꼈다. 높게 들어 올리지도, 몸이 아플 만큼 세게 움켜쥐지도 않았다. 단순히 촉수가 징그러워서 다 큰 알파가 울었다. 뭐, 눈물이 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기분 나쁘게 따뜻하고 미끈거리는 녀석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조용히 해줄래요? 시체 치우기 귀찮아서 참고 있는데, 계속 시끄럽게 굴면 내가 강제로 조용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왜 빌런처럼 말하세요. 히어로셨잖아요.”
“오래전 일이죠.”
벤은 책더미 위에 앉았다. 심호흡하고 바냐 자서전을 다시 펼쳤다. ‘이번에는 어디로? A: 장난감 가게에서 일하기 전.’ 빠르게 휘갈긴 글자는 그대로였다. 파이브가 과거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종말 막기에 실패했다.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서 내가 다락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것일지도 몰랐다.
파이브가 과거로 가버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파이브와 함께였던 시간이 모두 사라진다. 다른 시간선의 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파이브 기억 속에만 우리의 시간이 남는다. 운이 좋다면 파이브가 내 사진 한 장쯤은 기념품으로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해리 사진처럼.
기운이 빠졌다. 촉수가 스멀스멀 뱃속으로 들어갔다. 아코디언 씨가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냥 내려놓을 수는 없었어요?’ 뒤에서 투덜대는 말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하그리브스 씨...”
“얌전히 있어요.”
“얼굴에 상처가 생겼어요.”
“상처 하나 생겼다고 잘생긴 얼굴이 사라지지 않아요.“
“제가 아니라 하그리브스 씨 얼굴에 상처가 생겼다고요.”
아코디언 씨는 내 얼굴에 난 상처가 무려 다섯 개나 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큰일 났네. 의장님이 하그리브스 씨 털끝이라도 다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고요.”
“파이브가 무서워요?”
“당연하죠.”
“당신을 촉수로 감싸고 공중에 매달아 놓은 내가 더 무섭진 않고요?”
아코디언 씨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물었을 뿐, 내 옆에서 알짱거리며 여전히 성가시게 굴었다. 죄지은 표정으로 가만히 있지 못하는 모습이 어릴 때 우리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가 아버지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볼 때, 꼭 저렇게 행동하고는 했었다.
아코디언 씨가 주머니에서 하얀 연고를 꺼냈다. 현장 요원에게는 15%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커미션 특수 연고였다. 연고 하나가 현장 요원이 임무에 세 번은 뛰어야 받는 수당보다 비쌌다. 수당이 형편 없는 것도, 연고가 지나치게 비싼 점에도 당황했었다. ‘평범한 연고는 아니거든.’ 파이브는 그렇게 말해줬었다.
“이 연고를 발라 드릴게요. 의장님이 돌아오기 전에 상처가 나을 거예요.”
아코디언 씨가 연고를 내 얼굴에 바르려고 한 순간, 다락방에 눈 부신 빛과 파장이 생기면서 파이브가 나타났다. 왼손에는 서류 가방을, 오른손에는 치킨 스튜가 담긴 보온병을 든 채로 말이다.
파이브는 인상을 찌푸리고 다락방에서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쳐다보았다. 다락방 문은 뜯겨 나가고, 내 얼굴 곳곳에 상처가 났다. 아코디언 씨는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파이브가 서류 가방을 아코디언 씨에게 던졌다. 기계로 가득 찬 가방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아코디언 씨 가슴에 부딪혔다.
“벤한테 손대라고 한 적은 없는데.”
“억울해요. 손댄 적 없어요. 오히려 벤 하그리브스 씨가 제게 손을 댔죠.”
“손이 아니라 촉수겠죠!”
당황해서 크게 소리쳤다. 아코디언 씨는 가슴에 양손을 곱게 올리고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촉수에 당한 조금전 일을 떠올린 게 분명했다. 촉수가 피부에 닿는 감촉은 기분 나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촉수에 잡힌 대부분의 범인은 정신적 충격을 받곤 했었다.
“그렇다고 추행당한 것처럼 굴 필요는 없잖아요. 내가 한 일이라고는 손에 샷건을 쥔 당신을 촉수로 당신 팔과 허리를 감은 게 전부예요.”
“으흐흑. 살면서 그렇게 수치스러웠던 적은 없다고요.”
아코디언 씨는 더러운 다락방 한가운데서 눈물을 흘렸다. 촉수가 몸에 닿은 게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니. 한심한 녀석. 파이브와 나는 비슷한 생각을 한 채 아코디언 씨의 볼품없는 눈물쇼를 감상했다. 파이브와 나는 첫 번째 임무로 유명세를 탄 뒤에, 카메라 앞에서 엉성한 코미디쇼에 출연한 적도 있었다. ‘쏟아져 내리는 범죄를 우리가 다 막겠어요!’ 우리는 음악에 맞춰 춤추면서 외워둔 대사를 외쳤다. 앨리슨과 클라우스는 신나게 춤췄지만, 나는 부끄러워서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바빴다. 파이브는 카메라 뒤에 선 바냐를 보며 어깨만 가볍게 흔들기만 했었다.
“꺼져.”
울음이 잦아들길 기다린 친절과는 대조되는 사나운 말투였다. 파이브 눈이 맹수처럼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뿜었다. 아코디언 씨는 내 촉수에 몸이 돌돌 감겼을 때보다 더 겁에 질렸다.
“그그, 그러려고 했어요. 의장님한테서 지독한 페로몬이 진동해서 숨도 못 쉬겠다고요. 당장 여기서 나갈게요.”
아코디언 씨는 서류 가방을 조절하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그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내가 깨닫기도 전이었다.
페로몬이라니. 알파 두 명과 오메가 한 명이 있던 다락방에서는 어떠한 페로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코디언 씨가 헛소리를 한 것은 아니었다. 파이브가 당황하며 내 눈치를 봤기 때문이었다.
지독하다고 느낄 만큼 진한 페로몬을 내가 맡지 못한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형질인은 자기 페로몬은 평생 알 수 없다. 파이브에게서 내 페로몬 향이 덕지덕지 묻은 게 틀림없었다. 아침에 꾀병 연기에 심취해서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했던 걸까. 그럴 리 없었다. 형질인으로 방금 발현한 청소년도 아니었다. 모순된 상황이 가능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커미션에 간다고 해놓고는 내가 아닌 다른 ‘벤 하그리브스’를 만나고 왔어. 그렇지?”
상상이란 고약한 녀석이었다. 목격하지도 않은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파이브가 과거로 돌아가 나를 만났을까. 파이브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또 만난 걸까. 만나서 무엇을 했을까. 생각을 멈추려 할수록, 내 상상은 외설스러운 방향으로 자꾸만 뻗어갔다.
파이브는 내 눈을 뒤덮는 불신을 발견했다. 파이브가 내게 다가왔다. 다가오는 만큼, 나는 뒤로 물러섰다. 내 발에 책더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커미션에서는 서류 가방을 챙기려고 갔었어. 따지자면 커미션에 간다는 말은 거짓말은 아니지.”
“이 와중에 그런 걸 따지고 있어?”
“날 의심하고 있잖아. 내 결백을 증명해야지. 나는 네게 거짓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는 것뿐이야.”
“장난감 가게에 처음 왔을 때,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인 척했었잖아.”
“그때 일을 끄집어내려고? 정말로?”
파이브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원래 싸움은 그냥 넘어간 상대방의 과오를 끄집어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브는 지쳐 보였다. 눈 밑에 어둡게 자리 잡은 다크서클이 아침보다 더 짙어졌다. 머릿속이 뜨거워질 만큼 화가 났는데, 내가 파이브에게 화를 내도 괜찮은 건가 싶었다.
“네가 다른 오메가를 만나고 왔어. 심지어 페로몬까지 묻히고 돌아왔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
“나였다면 더 심했겠지. 이곳에 돌아오자마자 네가 아코디언이 네게 관심 있어 하는 모습을 보고 질투가 났었거든.”
“아코디언 씨는 나한테 조금도 관심 없었어.”
“네 얼굴에 연고를 발라주려고 했잖아. 알파가 마음도 없이 그러진 않아.”
그래서 아코디언 씨에게 꺼지라고 말했던 것이군. 다락방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아코디언 씨에게 실망해서 평소와 다름없이 까칠하게 군 줄만 말았다.
파이브는 다정한 구석이 많았지만, 커미션에서는 아니었다. 커미션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었기에 피곤한 일이 자주 생기곤 했었다. 파이브 팬이라고 주장하는 스토커가 우리의 사진을 찍다가 걸린 적도 있었다. 그냥 사진이 아니어서 문제였다. 내가 머물던 방에 몰래 침입해서 찍은 사진이었다. 파이브는 사진을 발견하자마자, 형이상학부의 수상한 발명품을 양손에 들고 그 직원을 쫓아갔었다. 파이브가 사용한 수상한 발명품 이름은 ‘핵전쟁에서도 살아남기’였다. 그 총을 맞으면 핵이 터져도 살아남는 몸을 얻게 된다. 문제는 몸이 바퀴벌레가 된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커미션에는 파이브 스토커가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미래의 너를 만나고 왔어. 이번에는 내가 종말을 막았는지 확인하고 싶었거든."
“목소리에 힘이 없는 걸 보니, 종말은 예정대로 발생한 모양이네.”
“맞아.”
“미래로 간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수없이 갔다 왔지. 그때마다 세계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목격했고.”
파이브는 무너진 책더미를 왼쪽으로 치웠다. 책더미 아래에 있는 동그란 카펫마저 걷어냈다. 그곳에도 방정식이 적혔다. 파이브가 미래에 간 숫자를 표시한 식이었다. 이번에는 나도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식이었다. 파이브는 여섯 번이나 미래에 갔었다.
“처음 미래에 갔을 때는 종말이 이미 진행된 상황이었어. 크툴루 공격 때문에 멀쩡한 건물은 없었고, 거리마다 반쯤 뜯겨 먹은 사람과 동물이 가득했어.”
두 번째, 세 번째로 간 미래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다른 점이 발견되기는 했어도, 크툴루의 무차별적인 공격은 항상 발생했다. 네 번째 미래에 갔을 때부터는 크툴루들 몸집이 두 배는 커졌다. 미래가 더 악화된 걸 의미했다.
속이 답답해 창문을 열었다. 피부가 깨질 것 같은 차가운 공기가 다락방으로 밀려 들어왔다. 파이브가 의자에 걸쳐둔 못생긴 가디건을 내 어깨에 덮었다. 쥐 털을 모두 뽑아서 엮은 것처럼 생긴 회색 가디건이었는데, 종말 때가 생각난다며 파이브가 구입했던 옷이었다.
“크툴루가 이곳으로 넘어오지 않도록 포털이 열리지 않도록 막을 수 있을까? 그것만 알면 종말을 막을 수 있는데…”
“종말은 포털이 열리면서 시작되는 게 아니야. 네 감정이 요동치면 시작되지.”
파이브가 경험한 종말에는 패턴이 존재했다. 내가 만난 알파가 나를 배신했을 때 종말이 시작되었다.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은 파이브였다. 그 말은 내가 파이브를 의심할수록 종말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진다는 뜻이었다.
창문 아래에 쪼그려 앉았다. 벽에 등을 기댔다. 내가 부순 다락방 문이 보였다. 파이브가 나를 따라 다락방 바닥에 앉았다. 구두와 바지가 더러웠다. 구두와 무릎 부분에 시커먼 먼지와 가루가 묻어있었다. 다락방이 정돈되지 않았지만, 저런 먼지가 쌓여있지는 않았다. 파이브 바지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줬다. 먼지를 터는 척 하면서 슬쩍 탄탄한 허벅지를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파이브는 아프다면서 엄살을 떨었다.
“철거를 앞둔 건물에 들어갔어. 세상이 끝나는 날에 우리는 그곳에 있었어.”
“버려진 건물에 우리가 뭘 하고 있었어?”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지. 듣지 않는 편이 나아.”
“파이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는 유약하지 않아.”
“내가 죽었어.”
“와…”
방금 한 말은 취소해야겠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충격적인 말이었다. 시간을 돌릴 수 사람은 파이브밖에 없었다. 그런 파이브가 죽었다고? 그렇다면 종말이 일어나는 순간, 이름 그대로 세상이 끝난다.
“내가… 널 죽였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낼 만큼 단서가 많지 않았어. 알아낸 것이라고는 그 건물에서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뿐이야. 피를 많이 흘린 게 분명한데, 주변에 핏자국이 얼마 없었거든.”
내가 파이브를 해쳤을 리 없었다. 적을 공격하는 만큼 아군을 보호하는 훈련을 수없이 받아왔었다. 내 편이라고 판단되는 사람에겐 촉수가 공격하지 않는다.
정말 그럴까? 가끔은 내 몸에서 튀어나오는 거대한 촉수가 나를 조종한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촉수는 사람을 죽일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어릴 때는 그들이 비명을 지른다고 여겼었다. 총알이 촉수를 관통하고 나서야, 그들은 내는 소리가 비명이 아니라 함성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 몸에서 나오는 녀석들은 죽음과 폭력을 원했다. 함성은 그들이 공격성을 더 높이려고 내는 소리에 불과했다.
내 몸에서 나오는 크툴루가 말을 안 들었던 적이 있었잖아. 그때가 언제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지금 다락방만큼 추운 겨울이었다. 도시의 요란한 조명을 피한 덕에 별이 마음껏 반짝일 수 있는 고요한 밤이었다. 아주 조용한 숲속에서 크툴루는 내 명령을 거부했었다.
몸이 심하게 떨렸다. 너무 추웠다. 스웨덴의 새까만 숲속에 아직도 있는 것만 같았다. 파이브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파이브의 긴 속눈썹이 볼을 간지럽힐 만큼 파이브는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런데도 목소리는 계속 내게 멀어졌다.
숲속에서 나를 부르던 거대한 빛 앞에 섰다. 발목이 눈 속에 파묻혔다. 빛이 있는 곳은 유달리 눈이 두껍게 쌓여있었다. 빛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커다란 포털이었다. 포털이 어디와 연결이 되었는지를 확인하려고 빛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을 필요는 없었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안에는 내가 함부로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크툴루가 가득했다.
‘내게 은혜 입은 자여. 이제는 그대가 그 빚을 갚을 때다.’
포털 속에 몸을 웅크린 존재가 말했다. 시민이 내게 그런 말을 했다면, 기꺼이 도와줬을 것이다. 17살의 나는 시민을 돕는 히어로였으니 말이다. 크툴루가 빚을 갚으라는 말은 껄끄럽게 느껴졌다. 도망가자. 애들한테 돌아가서 내가 목격한 걸 말하자.
빛에게 등을 돌린 순간, 뱃속에서 촉수가 튀어나와 내 다리를 붙잡았다. 내 몸을 강제로 빛 앞으로 끌고 갔다. '싫어.' 단호하게 말했지만, 내 몸에서 나오는 촉수는 이제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멀리서 날카로운 총성이 들려왔다. 17살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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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브
커미션 직원 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