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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5 09:19
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 10편 11편 12편 13편 14편 15편 16편 17편 18편 19편 20편 21편 22편
운심부지처에서 돌아온 후에는 수확기라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사람의 식량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괴들이 기승이라 수사들도 야렵을 나가느라 바쁘고, 덩달아 가복들도 바빴다. 위무선과, 위무선의 어린 제자들만이 바다 가운데 뜬 섬처럼 한가로웠다.
요즘 위무선은 강징이랑 마주치는 걸 피하려고 제법 착실하게 수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또 무슨 불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불편하거나 두려운 것도 아니다.
다만 위무선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묘한 느낌이 들었고,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두근거림으로 혼란스러웠다.
다행히 강징은 눈코뜰새 없이 바빠 어지간하면 저를 찾지 않았다.
무선은 그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건 피했지만 이따금씩 한가할 때 그의 목소리가 들리면 슬그머니 뒤를 따라가서 훔쳐보았다. 그러면서 이상한 위화감의 원인을 찾아 보았다.
어느 날 강징이 무슨 일로 매섭게 호령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그를 바라보던 위무선은 마치 자기가 야단을 맞는 것처럼 뜨끔뜨끔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제까지의 강징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근엄하다가, 위무선을 만나면 갑자기 툭툭거리기도 하고 심통이 난 말투를 쓰기도 했다. 그 차이를 무선은 뜬금없이 강징의 뒤를 밟다가 깨달았다.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이 다 어설픈 연기였다는 사실을.
그의 외모가 변하지 않았기에 이미 정신은 저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보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렇게 꾸며대던 걸 그만두어버린 것이다.
가문을 빈틈없이 통솔하는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위무선을 대할 때의 태도만 달랐다. 아니, 이제는 무선을 대할 때에도 태도를 바꾸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까.
그는 위무선의 장난에 말려들지 않았고, 특별히 거리껴하지도 않았다. 이따금씩은 무선의 생각 없는 행동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쉬면서 가만히 바라보는데, 그럴 때면 참을 수가 없이 가슴이 뛰었다.
사실 강징은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에 불과했지만, 그간 망설이던 소심함이나 죄책감까지 다 벗어던져버린 그가 무선이 본디 알던 강징과는 너무도 다르니 낯이 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는 좀체 다가가지 못하는 위무선은 내심 강징이 저를 찾아주길 바랬다.
그러나 강징은 바쁜 중에 일부러 짬을 내어 주진 않았다.
그렇게 싱숭생숭 두근거리는 상태로 한 철이 흘러갔다. 무선은 마치 짝사랑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처럼 변해가는데다 가까이 오지도 않는 강징이 불만스러우면서도 어딘지 새콤달콤한 기분이 싫지만은 않았다.
이 거대한 집안에서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여기에 보였다, 저기에 보였다 하는 강징에게 이중적인 마음을 지니고 갈팡질팡하는데.
당장 손에 잡히지는 않더라도 언제까지나 연화오에서 함께 살아갈 거란 사실이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여 아침에 방을 나설 때면 옷깃을 꼭꼭 여며야 할 때.
이맘때쯤이면 단단히 봉해둔 하풍주의 마개를 열어 술을 뜬다. 매년 위무선이 술맛을 알게 되고부터 무의식적으로 안절부절 못하며 밖으로 나돌고 싶어 참지 못하는 시기였다.
하늘을 보니 아주 맑았다.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멈춘 듯 묘한 분위기가 위무선의 마음을 더욱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은근히 강징을 피하느라 근래 마을에 나가지 못한 지도 제법 되었다. 기분이 이렇고 보니 무선은 아침부터 향긋한 술 한 잔이 더욱 간절했다.
몇 발짝 걷다가 대문과 연무장으로 가는 갈림길에 선 위무선은 무척 갈등했다. 수업을 빼먹고 싶은 마음과 강징이 무서운 마음이 반반. 하지만 오늘은 영 견딜 수가 없어 발이 주춤주춤 대문 쪽으로 움직여 갔다.
“어딜 가는 거지?”
“으악, 깜짝이야!”
“위무선, 설마 연화오를 나가려던 건 아니겠지?”
어느새 왔는지 강징이 우뚝 서서 매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추궁을 하고 있었다.
“헤헤...”
“너 자꾸 그러면...”
문득 강징의 엄한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스치며 말했다.
“엉덩이를 때려 줄 거야.”
위무선은 자신이 잘못 들었는가 싶어 얼굴을 찡그렸다.
“왜 대답을 안 해? 정말로 맞고 싶어?”
무선은 순간 강징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보고 섬뜩해져서 외쳤다.
“악, 아냐, 아냐! 나 나가려던 거 아니라니까?!”
강징은 손을 내저으면서 펄쩍 뛰는 위무선을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다. 오늘도 할 일이 산더미같을 텐데. 그는 왠지 가버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위무선도 수업을 하러 가지 않고 힐끔힐끔 강징을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오늘 강징은 번쩍거리는 자수가 들어간 진한 자색의 장포를 흠 하나 없이 차려 입고 있었다.
옛날부터 그는 옷차림에 무척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손님맞이를 할 게 아니라도, 멸문 직전의 어려운 시절에도. 체면 때문에라도 필요한 일이긴 했지만, 절대로 허름한 행색으로 나다니는 법이 없었고 취향도 화려한 편이었다.
그런 건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구나, 하고 무선은 생각했다.
한쪽 소매를 거만하게 뒤로 말아쥔 강징은 제가 아는 소년 시절의 그와 다르지 않게 미끈하고 아름다웠다. 말끔하게 틀어올린 머리장식과, 기름을 바른 듯 깨끗하게 아래로 드리워진 머리카락.
하지만 무선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짓는 그 얼굴은.
걸핏하면 아이처럼 심통을 내던 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고, 또...
위무선은 입술을 쭉 내밀며 툭 내뱉았다.
“강징, 요즘 왜 그렇게 무섭게 굴어?”
하지만 강징의 입가는 무선의 불평이 무색할 정도로 부드럽게 휘어지며 웃었다.
“내가 왜 무서워? 뭘 어쨌다고?”
위무선은 가만히 서 있지를 못하고 왔다갔다하면서 힐끔거리다가 툭 말해버리고 말았다.
“...사랑해 주지도 않고.”
느닷없이 벌이 쏘는 것 같은 한 마디 말에 침착하던 강징의 태도가 흐트러지며 당황했다. 반대로 위무선은 덕분에 뻔뻔한 성향이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낮엔... 안돼.”
“그럼 밤엔?”
강징이 얼버무리는 것처럼 중얼거리자마자 무선이 씩씩하게 들이대었다.
강징은 잠시 갈등하는 듯 체념한 얼굴로 바뀌어가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나중에 같이 저녁 먹을까?”
무선은 기다렸다는 듯 기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그는 한 술 더 떠 반짝 눈을 빛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우리 나중에 같이 술 마시자! 내가 가서 사올게!”
하지만 강징은 날쌔게 손을 뻗어 밖으로 내빼려는 위무선의 뒷덜미를 잡아채었다.
“어림없는 소리. 얌전히 수업이나 하러 가. 나중에 도망쳤다고 하면 혼쭐을 내줄 거야.”
“쳇...”
모처럼 같이 식사를 할 텐데 미주가 빠지면 섭섭하잖아! 위무선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못내 아쉬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강징은 굳건하게 지키고 서서 무선이 터덜터덜 연무장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돌아설 때, 한껏 엄하던 얼굴이 풀어지며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이 붕 떠서 안절부절 못하는 위무선과 다르게 강징은 신기할 정도로 평온했다.
위무선을 전심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을 때에는 짐작도 못 할 어지러운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오히려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편안했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위무선을 바라보아도 그저 행복하기만 할 뿐, 전 생애를 통틀어 자신을 괴롭히던 출처모를 불안감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했던 건지.
이제는 일부러 찾으려 해도 느낄 수가 없었다.
위무선은 하루종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점심밥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뭔가 때가 아니라 겉돌기만 했는데, 갑자기 그 뭔가가 움이 트고 싹이 자라 활짝 피어날 것만 같아서 두근거렸다.
저녁이 가까워오자 무선은 손님이라도 된 것처럼 제 방에 틀어박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가복이 와서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전했다. 무선은 무척 들떠서 밖으로 나갔다.
식사와 주안상은 예의 외진 곳의 정자에 마련되어 있었다. 위무선은 높다란 정자에 올라앉아 있는 강징의 그림자를 보는 것만으로 벌써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정자 위에 올라가, 먼저 와 있던 강징과 눈이 마주치자 복잡한 감정은 다 밀어 두고 오랜만에 그와 단 둘이 된 것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강징이 싱긋 웃더니 무언가를 꺼내었다.
아아... 술병?
무선이 얼핏 미소를 짓는데, 강징이 뚜껑을 열자 코가 아닌 눈이 녹아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렬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뭐... 뭐야, 그거?!”
깜짝 놀란 위무선이 와락 상 앞으로 달려들며 외쳤다.
“30년산 하풍주다. 이게 먹고 싶어서 나가려고 했지?”
“강징...”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몇 십 년 전의 일이었지만, 이맘 때만 되면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던 위무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만 하루가 지나면 씩씩거리며 무선이 있는 주점을 찾으려고 온 성내를 휘젓고 다녔던 기억.
그 때 술병을 빼앗으면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무선은 두 팔을 뻗으며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내 말 잘 들을 거야?”
강징이 얄밉게도 술병을 멀찍이 뒤로 돌리며 웃었다.
“잘 들을게, 잘 듣고말고! 종주, 뭐든 시키시는 대로 다 할게요! 아, 제발 그거 이리 줘!”
심술궂게 실랑이를 하다가 드디어 강징이 술병을 넘겨주자 위무선은 소중하게 손 안에 끌어안고 소름돋도록 좋은 향기를 음미했다. 음악을 듣는 것처럼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황홀한 얼굴. 지금도 강징은 술 한 병에 이 무슨 야단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술병을 안고 기뻐하는 위무선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느끼는 강징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코로 올라오는 향기가 잔을 거치는 것도 참을 수가 없는 듯, 병째로 입술에 콸콸 부어대며 천상의 맛이라도 되는 양 한숨을 짓는 모습을 바라보며 강징은 못 말리겠다고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이내 독한 술에 취기가 오른 위무선은 말이 많아졌다. 뒤늦게 위무선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고, 실없는 소리로 지껄이는 것도 다 받아주며 저녁 식사를 했다.
한참 후 그가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아서 말리려던 강징은 조금 망설이다가 오늘만은 놔두자고 마음을 돌렸다.
아무래도 무선이 쉽게 취하는 건 기분이 좋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본래의 그였다면, 지금의 초고수가 된 강징보다도 술을 잘 마셨을 텐데. 그렇게 짐작하는 강징의 눈빛에 은은한 고통이 깃들었다.
“강징, 강징... 권주가 불러줄까?”
술에 잔뜩 취해서인지 금일 위무선의 어리광은 한도가 없었다. 저녁상을 저 멀리 치워버리고 마음대로 강징의 몸에 기대어서 비벼대더니 그렇게 주절거렸다.
강징은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는 무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래, 들어볼까.”
오랜만에.
두 사람은 잠시 고요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옛날, 무선이 취해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난리를 치면 강징은 곱게 처마시라며 욕을 퍼붓거나 언제 돌아갈 거냐고 성화를 부렸다.
강징과 위무선은 그렇게 바라보면서 서로 같은 일을 추억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강징이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입술이 이마를 누르는 것을 느끼며 무선은 눈을 감았다. 그에게 안겨, 세상에 둘도 없이 사랑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술을 마시는 것조차 잊고 강징의 팔을 더듬어 꼬옥 끌어안았다. 어디에도 가지 않고 이 순간 저의 온 우주가 되어주는 그의 존재에 취해버릴 것 같았다.
강징도 생각했다. 술을 마시는 것처럼, 이 팔에 안은 사람을 마셔버리고 싶다고.
“사랑해...”
나직한 목소리가 금방 입맞춤을 내린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음악, 술, 별빛과 달빛.
무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 한꺼번에 머리 위로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운심부지처에서 돌아온 후에는 수확기라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사람의 식량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괴들이 기승이라 수사들도 야렵을 나가느라 바쁘고, 덩달아 가복들도 바빴다. 위무선과, 위무선의 어린 제자들만이 바다 가운데 뜬 섬처럼 한가로웠다.
요즘 위무선은 강징이랑 마주치는 걸 피하려고 제법 착실하게 수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또 무슨 불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불편하거나 두려운 것도 아니다.
다만 위무선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묘한 느낌이 들었고,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두근거림으로 혼란스러웠다.
다행히 강징은 눈코뜰새 없이 바빠 어지간하면 저를 찾지 않았다.
무선은 그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건 피했지만 이따금씩 한가할 때 그의 목소리가 들리면 슬그머니 뒤를 따라가서 훔쳐보았다. 그러면서 이상한 위화감의 원인을 찾아 보았다.
어느 날 강징이 무슨 일로 매섭게 호령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그를 바라보던 위무선은 마치 자기가 야단을 맞는 것처럼 뜨끔뜨끔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제까지의 강징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근엄하다가, 위무선을 만나면 갑자기 툭툭거리기도 하고 심통이 난 말투를 쓰기도 했다. 그 차이를 무선은 뜬금없이 강징의 뒤를 밟다가 깨달았다.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이 다 어설픈 연기였다는 사실을.
그의 외모가 변하지 않았기에 이미 정신은 저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보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렇게 꾸며대던 걸 그만두어버린 것이다.
가문을 빈틈없이 통솔하는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위무선을 대할 때의 태도만 달랐다. 아니, 이제는 무선을 대할 때에도 태도를 바꾸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까.
그는 위무선의 장난에 말려들지 않았고, 특별히 거리껴하지도 않았다. 이따금씩은 무선의 생각 없는 행동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쉬면서 가만히 바라보는데, 그럴 때면 참을 수가 없이 가슴이 뛰었다.
사실 강징은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에 불과했지만, 그간 망설이던 소심함이나 죄책감까지 다 벗어던져버린 그가 무선이 본디 알던 강징과는 너무도 다르니 낯이 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는 좀체 다가가지 못하는 위무선은 내심 강징이 저를 찾아주길 바랬다.
그러나 강징은 바쁜 중에 일부러 짬을 내어 주진 않았다.
그렇게 싱숭생숭 두근거리는 상태로 한 철이 흘러갔다. 무선은 마치 짝사랑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처럼 변해가는데다 가까이 오지도 않는 강징이 불만스러우면서도 어딘지 새콤달콤한 기분이 싫지만은 않았다.
이 거대한 집안에서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여기에 보였다, 저기에 보였다 하는 강징에게 이중적인 마음을 지니고 갈팡질팡하는데.
당장 손에 잡히지는 않더라도 언제까지나 연화오에서 함께 살아갈 거란 사실이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여 아침에 방을 나설 때면 옷깃을 꼭꼭 여며야 할 때.
이맘때쯤이면 단단히 봉해둔 하풍주의 마개를 열어 술을 뜬다. 매년 위무선이 술맛을 알게 되고부터 무의식적으로 안절부절 못하며 밖으로 나돌고 싶어 참지 못하는 시기였다.
하늘을 보니 아주 맑았다.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멈춘 듯 묘한 분위기가 위무선의 마음을 더욱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은근히 강징을 피하느라 근래 마을에 나가지 못한 지도 제법 되었다. 기분이 이렇고 보니 무선은 아침부터 향긋한 술 한 잔이 더욱 간절했다.
몇 발짝 걷다가 대문과 연무장으로 가는 갈림길에 선 위무선은 무척 갈등했다. 수업을 빼먹고 싶은 마음과 강징이 무서운 마음이 반반. 하지만 오늘은 영 견딜 수가 없어 발이 주춤주춤 대문 쪽으로 움직여 갔다.
“어딜 가는 거지?”
“으악, 깜짝이야!”
“위무선, 설마 연화오를 나가려던 건 아니겠지?”
어느새 왔는지 강징이 우뚝 서서 매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추궁을 하고 있었다.
“헤헤...”
“너 자꾸 그러면...”
문득 강징의 엄한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스치며 말했다.
“엉덩이를 때려 줄 거야.”
위무선은 자신이 잘못 들었는가 싶어 얼굴을 찡그렸다.
“왜 대답을 안 해? 정말로 맞고 싶어?”
무선은 순간 강징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보고 섬뜩해져서 외쳤다.
“악, 아냐, 아냐! 나 나가려던 거 아니라니까?!”
강징은 손을 내저으면서 펄쩍 뛰는 위무선을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다. 오늘도 할 일이 산더미같을 텐데. 그는 왠지 가버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위무선도 수업을 하러 가지 않고 힐끔힐끔 강징을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오늘 강징은 번쩍거리는 자수가 들어간 진한 자색의 장포를 흠 하나 없이 차려 입고 있었다.
옛날부터 그는 옷차림에 무척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손님맞이를 할 게 아니라도, 멸문 직전의 어려운 시절에도. 체면 때문에라도 필요한 일이긴 했지만, 절대로 허름한 행색으로 나다니는 법이 없었고 취향도 화려한 편이었다.
그런 건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구나, 하고 무선은 생각했다.
한쪽 소매를 거만하게 뒤로 말아쥔 강징은 제가 아는 소년 시절의 그와 다르지 않게 미끈하고 아름다웠다. 말끔하게 틀어올린 머리장식과, 기름을 바른 듯 깨끗하게 아래로 드리워진 머리카락.
하지만 무선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짓는 그 얼굴은.
걸핏하면 아이처럼 심통을 내던 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고, 또...
위무선은 입술을 쭉 내밀며 툭 내뱉았다.
“강징, 요즘 왜 그렇게 무섭게 굴어?”
하지만 강징의 입가는 무선의 불평이 무색할 정도로 부드럽게 휘어지며 웃었다.
“내가 왜 무서워? 뭘 어쨌다고?”
위무선은 가만히 서 있지를 못하고 왔다갔다하면서 힐끔거리다가 툭 말해버리고 말았다.
“...사랑해 주지도 않고.”
느닷없이 벌이 쏘는 것 같은 한 마디 말에 침착하던 강징의 태도가 흐트러지며 당황했다. 반대로 위무선은 덕분에 뻔뻔한 성향이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낮엔... 안돼.”
“그럼 밤엔?”
강징이 얼버무리는 것처럼 중얼거리자마자 무선이 씩씩하게 들이대었다.
강징은 잠시 갈등하는 듯 체념한 얼굴로 바뀌어가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나중에 같이 저녁 먹을까?”
무선은 기다렸다는 듯 기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그는 한 술 더 떠 반짝 눈을 빛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우리 나중에 같이 술 마시자! 내가 가서 사올게!”
하지만 강징은 날쌔게 손을 뻗어 밖으로 내빼려는 위무선의 뒷덜미를 잡아채었다.
“어림없는 소리. 얌전히 수업이나 하러 가. 나중에 도망쳤다고 하면 혼쭐을 내줄 거야.”
“쳇...”
모처럼 같이 식사를 할 텐데 미주가 빠지면 섭섭하잖아! 위무선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못내 아쉬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강징은 굳건하게 지키고 서서 무선이 터덜터덜 연무장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돌아설 때, 한껏 엄하던 얼굴이 풀어지며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이 붕 떠서 안절부절 못하는 위무선과 다르게 강징은 신기할 정도로 평온했다.
위무선을 전심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을 때에는 짐작도 못 할 어지러운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오히려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편안했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위무선을 바라보아도 그저 행복하기만 할 뿐, 전 생애를 통틀어 자신을 괴롭히던 출처모를 불안감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했던 건지.
이제는 일부러 찾으려 해도 느낄 수가 없었다.
위무선은 하루종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점심밥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뭔가 때가 아니라 겉돌기만 했는데, 갑자기 그 뭔가가 움이 트고 싹이 자라 활짝 피어날 것만 같아서 두근거렸다.
저녁이 가까워오자 무선은 손님이라도 된 것처럼 제 방에 틀어박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가복이 와서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전했다. 무선은 무척 들떠서 밖으로 나갔다.
식사와 주안상은 예의 외진 곳의 정자에 마련되어 있었다. 위무선은 높다란 정자에 올라앉아 있는 강징의 그림자를 보는 것만으로 벌써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정자 위에 올라가, 먼저 와 있던 강징과 눈이 마주치자 복잡한 감정은 다 밀어 두고 오랜만에 그와 단 둘이 된 것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강징이 싱긋 웃더니 무언가를 꺼내었다.
아아... 술병?
무선이 얼핏 미소를 짓는데, 강징이 뚜껑을 열자 코가 아닌 눈이 녹아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렬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뭐... 뭐야, 그거?!”
깜짝 놀란 위무선이 와락 상 앞으로 달려들며 외쳤다.
“30년산 하풍주다. 이게 먹고 싶어서 나가려고 했지?”
“강징...”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몇 십 년 전의 일이었지만, 이맘 때만 되면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던 위무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만 하루가 지나면 씩씩거리며 무선이 있는 주점을 찾으려고 온 성내를 휘젓고 다녔던 기억.
그 때 술병을 빼앗으면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무선은 두 팔을 뻗으며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내 말 잘 들을 거야?”
강징이 얄밉게도 술병을 멀찍이 뒤로 돌리며 웃었다.
“잘 들을게, 잘 듣고말고! 종주, 뭐든 시키시는 대로 다 할게요! 아, 제발 그거 이리 줘!”
심술궂게 실랑이를 하다가 드디어 강징이 술병을 넘겨주자 위무선은 소중하게 손 안에 끌어안고 소름돋도록 좋은 향기를 음미했다. 음악을 듣는 것처럼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황홀한 얼굴. 지금도 강징은 술 한 병에 이 무슨 야단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술병을 안고 기뻐하는 위무선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느끼는 강징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코로 올라오는 향기가 잔을 거치는 것도 참을 수가 없는 듯, 병째로 입술에 콸콸 부어대며 천상의 맛이라도 되는 양 한숨을 짓는 모습을 바라보며 강징은 못 말리겠다고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이내 독한 술에 취기가 오른 위무선은 말이 많아졌다. 뒤늦게 위무선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고, 실없는 소리로 지껄이는 것도 다 받아주며 저녁 식사를 했다.
한참 후 그가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아서 말리려던 강징은 조금 망설이다가 오늘만은 놔두자고 마음을 돌렸다.
아무래도 무선이 쉽게 취하는 건 기분이 좋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본래의 그였다면, 지금의 초고수가 된 강징보다도 술을 잘 마셨을 텐데. 그렇게 짐작하는 강징의 눈빛에 은은한 고통이 깃들었다.
“강징, 강징... 권주가 불러줄까?”
술에 잔뜩 취해서인지 금일 위무선의 어리광은 한도가 없었다. 저녁상을 저 멀리 치워버리고 마음대로 강징의 몸에 기대어서 비벼대더니 그렇게 주절거렸다.
강징은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는 무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래, 들어볼까.”
오랜만에.
두 사람은 잠시 고요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옛날, 무선이 취해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난리를 치면 강징은 곱게 처마시라며 욕을 퍼붓거나 언제 돌아갈 거냐고 성화를 부렸다.
강징과 위무선은 그렇게 바라보면서 서로 같은 일을 추억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강징이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입술이 이마를 누르는 것을 느끼며 무선은 눈을 감았다. 그에게 안겨, 세상에 둘도 없이 사랑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술을 마시는 것조차 잊고 강징의 팔을 더듬어 꼬옥 끌어안았다. 어디에도 가지 않고 이 순간 저의 온 우주가 되어주는 그의 존재에 취해버릴 것 같았다.
강징도 생각했다. 술을 마시는 것처럼, 이 팔에 안은 사람을 마셔버리고 싶다고.
“사랑해...”
나직한 목소리가 금방 입맞춤을 내린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음악, 술, 별빛과 달빛.
무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 한꺼번에 머리 위로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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