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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3 21:41
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 10편 11편 12편 13편 14편 15편 16편
“사부, 다들 기다려요.”
위무선은 아침도 굶고 멍하니 울타리에 기대어 있다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평소 저를 잘 챙기는 머리 굵은 제자 하나가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벌써?”
무선은 처음 보는 것처럼 해를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몰랐네. 가자.”
평소에는 위무선이 아이들을 몰아서 앞마당으로 나가든지 밖으로 나가던지 했는데 오늘은 학생들 편에서 무선을 기다리다 보니 여느 수업처럼 내실에 앉아 있었다.
무선은 제일 뒤에 숨듯이 앉은 말썽꾸러기 하나를 번쩍 들어다 앞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입술을 삐죽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누르듯이 쓰다듬었다.
그 사이 무척 정이 들어버린 크고 작은 아이들.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띠우며 그들을 바라보던 무선은 다시 마음이 어두워졌다.
강징은 처음에 무척 강제적으로 아이들의 교육을 맡겼다.
부모도 친척도 없어, 운몽 강씨의 비호가 없으면 어찌될 지 모르는 아이들을.
이 또한 강징이 계획적으로 채워둔 족쇄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 연이 닿았든, 사람의 마음 속에 정이 싹트고 나면 더 이상 족쇄라고 부를 순 없었다.
올망똘망, 신뢰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제법 반항도 하는 아이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무선은 제법 즐겁게 수업을 이끌어나갔다.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은 와와 떠들며 깨끗하게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렸다. 그와 함께 무선의 입가에 남았던 미소도 흐릿하게 사라졌다.
나흘이 지났지만 강징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도망을 친 건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아도 아직 저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달아나버릴 때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운몽 강씨, 갈 데 없는 아이들, 온가 식구들. 그렇게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족쇄들을 보아 제가 도망치지 못할 것도 아는 것이다.
무선은 생전 처음 답답한 무력감에 빠져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눌렀다.
수십년의 세월을 저보다 앞서 달려가버린 강징은 너무도 대단한 존재였다. 원하는 모든 일이 한 치도 어긋나지 않도록 치밀하게 계획했고, 너무 강하고, 냉정했다. 저 강징이라면 금단을 저에게 주어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거리감이야말로 위무선을 안타깝게 만들고, 겁에 질리게 했다.
-강징. 왜 내 말을 듣지 않아. 내 감정, 내 의견은 아무래도 좋은 거야? 네가 아는 위무선만 중요하고. 나... 여기에 있는 나는 너에게 아무 것도 아니냐고?...
너는 네가 놓쳐버린 위무선만 계속 쫓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무선은 고개를 떨구다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혼자가 되어버린 것처럼 쓸쓸하고 무섭고.
난장강에 떨어졌을 때보다도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강징은 떠나기 전에 말했던 대로 십여일이 지났을 즈음에 돌아왔다.
“위무선은?”
“연무장에 계시는 것 같던데요. 모셔올까요?”
단지 무선이 제대로 연화오에 있는가. 그것만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 강징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도 다 밝혀진 마당에, 더 이상 살가운 척을 할 수는 없으니 만난다 해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랐다.
그러나 그 편에서도 저를 만나러 오지 않는 것은 역시 상처가 되었다.
강징은 의연하게 오가며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 무선은 영 보이지 않았다. 분명 연화오 내에 있으며, 수업도 빠짐 없이 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며칠이나 지나도록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없다는 건 일부러 피하는 것이 확실했다.
그래도 한 집안에 있으니 돌발적인 사고처럼 맞닥뜨리는 건 불가피했다.
“!!”
먼 발치에서 강징이 식사를 하러 들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무선은 얼른 앞마당을 질러 즐겨 머무르는 큰 연못가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뭔가 잊은 것이 있는지 돌발적으로 달려나오는 강징과 건물 한모퉁이에서 부딪히고 말았다.
놀라서 휘청거리는 무선을, 기민한 강징의 손이 꽉 붙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강징은 저도 모르게 평정심을 잃고 애가 타는 시선으로 무선을 찔러버릴 듯했다.
그리고 무선은 크게 당황하다 못해 거의 겁에 질린 듯한 느낌이었다.
“...아파.”
약한 말소리에, 마치 쇠집게처럼 그의 팔을 잡고 있던 것을 깨달은 강징이 흠칫 놓아주자, 무선은 마치 흩어지는 바람처럼 달아나 버렸다.
강징은 망연한 느낌에 집무실에 가려던 일도 잊고 말았다.
일평생, 어떤 일이 있어도 그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위무선이 어떻게 나오든 의지를 꺾지 않겠다고 철벽같은 각오를 한 바였지만, 저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났더니 근심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징이 선택한 방법은, 또다시 남망기를 그를 부르는 것이었다.
위무선이 상태가 좋지 않다는 애매모호한 서신에도 남망기는 곧장 달려왔다. 한나절만에 그가 도착했다는 기별에 강징은 가슴이 지끈거리면서도 안도했다. 그가 왔으니 어떻게든 마음을 풀어주겠지 하고.
그렇게 믿고 맡겨버린 강징은 남망기를 마중하는 일도 부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일더미에 파묻혔다.
그렇지만 남망기를 안내했다고 한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아 그가 집무실로 찾아왔다.
“...강종주. 위영이 왜 저러지? 어디 아픈가?”
남망기는 거두절미하고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그냥 나랑 좀 싸웠기에, 기분이 좋지 않은 것 뿐이다.”
그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가 그런 일로 저리 기운이 없다고?...”
출구도 없는 동굴에 갇혀서, 다 죽게 되었을 때에도 명랑했던 인간인데.
“어쨌든 나는 오지 않는 게 나았던 것 같군. 이만 돌아가겠어.”
그 말에 강징이 당황하여 일어섰다.
“뭐라고? 그냥 가겠다고?”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어쩌라니...”
강징은 서안을 밀치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위무선이 저렇게 속상하면 응당 너는 그의 마음을 풀어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왜 걱정을 하지 않지? 어찌 그리 차가워?”
남망기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얼핏 미간에 주름을 떠올렸다.
“강만음. 전부터 너는 뭐가 못마땅해서 자꾸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군.”
“시비가 아니야!”
남망기는 연한 눈빛에 명백한 불쾌감을 띄우며 피진을 움켜쥐었다.
“위영이 어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지기다. 함께 전쟁을 치렀고, 목숨을 걸고 적에 맞선 적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거다. 타인의 싸움에 제삼자가 끼어드는 건 좋지 않아. 특히 집안 싸움이라면 더욱 그렇지. 내 우의를 의심하는 것 같아 심히 불쾌하군.“
강징은 기분이 나빠서 평소보다 훨씬 많은 말을 하는 남망기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길게 풀어놓는 말 중에, 강징이 예상했던 감정은 한 마디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몸이 아픈 건 아닌 것 같아 안심했다. 그럼 이만.”
“잠깐, 함광군...!”
손을 내밀며 붙잡으려 해도 남망기는 하얀 옷자락을 칼날처럼 휘날리며 나가 버렸다.
뒤에 남겨진 강징은 썰렁해진 문간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꽃잎이 드문드문 떨어지는 따스한 봄날이건만.
어쩐지 스산하게 느껴지는 밤이 찾아왔다.
양친 생전의 활발함을 되찾은 연화오는 꽤 늦은 시간이 되도록 연못가에 소년소녀들이 모여 있거나, 방에 불이 켜져 두런거리는 이야기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그렇지만 달이 중천을 넘어 기울어가는 시간에는 그런 사람들까지 잠이 들어 이따금씩 정해진 길을 오가는 순찰사의 발소리 외에는 무덤처럼 고요했다.
강징은 자그만 정자에 기대어 푸른 잎이 불쑥불쑥 올라온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침한 반달 아래 잠든 연화오. 새로 재건된 연화오의 모습은 그의 손 아래에서 수십년을 보내며 세월에 낡아가던 지난 세계의 연화오와는 조금 달랐다.
똑같이 만들겠다고 노력을 했어도, 다른 모양이 되고 다른 분위기가 되어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강징은 마치 소싯적의 위무선처럼 독주를 병째로 쥐고 들이키며 사색에 잠겼다.
낮에 보았던, 겁에 질린 위무선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아 몇 시진이나 침상 위에서 뒤척거리다가 그만 뛰쳐나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 이상 완벽하게 처신할 수도 없었는데. 어쩌다 그에게 들켰고, 수습도 제대로 못하고.
가장 중요한 일이 틀어져버리고 말았다.
강징은 기별을 보내기 무섭게 찾아왔다가도 매정하게 돌아가버린 남망기를 상기했다.
분명 그의 감정이 확실히 깊어 보였던 건, 위무선이 피바람을 일으키던 그 날, 억지로 그를 데리고 도망치던 남망기를 보았던 때였다.
혹시 그런 처참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깊은 감정을 일깨우지 못했던 건가?
아니면...
시간을 뒤틀어버리면 사건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감정까지 뒤틀어질 수 있는 건가.
회귀는 아무나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경험도 가르침도 있을 수 없는 사건이라 강징은 아무리 혼자서 머리를 짜내어 보아도 답을 알 수 없었다.
무섭도록 밤에 잠긴 주변은 한참 동안 멍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언뜻 느린 발소리가 들려와 강징은 고개를 들었다.
위무선이었다.
이런 깊은 밤에는 실신한 듯이 잠이 들어 절대로 깨어 있을 리가 없는 무선이, 얇은 침의만 걸친 차림으로 걷고 있었다.
어딘지 붕 뜬 것 같은 걸음걸이, 평소와 다른 하얀 옷으로 덮힌 모습이 마치 유령 같았다.
“...위무선.”
강징이 속삭이듯 불러도, 걸음을 멈춘 무선은 낮처럼 놀라지 않았다.
혹여 도망쳐 버릴까 우려한 강징이 빠른 속도로 다가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강징은 덥석 무선의 손을 잡아 우선 달아나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위무선... 나는 나이가 많아.”
무선은 홀리기라도 한 듯 물끄러미 강징을 쳐다보았다. 강징은 더욱 불안하여 간절한 기분이 들었다.
“살만큼 살았고, 누릴 만큼 누렸어. 이렇게 어린 너에게 금단을 준다고 나에게 해가 되진 않아.”
무선은 여전히 강징에게 꼭 잡힌 손을 그대로 맡긴 채 쳐다보기만 했다. 평소의 재기도 경쾌함도 없이,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네가 정 싫다면 연화오를 떠나진 않을게. 그러니 금단만 받아줘. 부탁이야.”
무선은 아직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강징은 너무도 답답하여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생기를 잃고 대화조차 거부하는 이런 그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만 더. 정말로 한 번만 더, 밝게 웃어주고 농담을 하고, 이 얄미운 손으로 내 몸을 두드리는 걸, 느끼고 싶었는데.
그리고 똑같이 마음이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위무선도 간절하게 강징을 쳐다보았다.
무겁게 치켜올라간 짙은 눈썹 아래의 눈빛은 굳건한 의지로 깊이가 보이지 않았다.
기어이 금단을 넘길 셈이었다.
도대체 강징이 이다지도 강한 인간이었던가? 무선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그 어린 나이에 홀로 사람을 다 잃은 운몽강씨를 일으켜세웠던 걸 보았지.
그런 의지도 고집도 모르고, 언제나 한 발 나의 뒤에서 전전긍긍하는 모습만 보았더니. 사실은 정말로 대단한 인간이었어.
...그럼 어떻게 이기지? 내가 너를 어떻게 막지?
뜨거운 느낌이 눈 속으로 모여들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아직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건만, 이제는 겪지도 않은 과거가 장벽이 되어 그에게 말을 거는 방법조차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강징이 아니라 할지라도. 역시 강징은 강징이었다.
금단이 아니라 목숨도 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제 뒤만 쫓아다니며 어쩔 줄을 몰라하는 어린 강징이 저 속 어딘가에 있을 텐데. 그렇지만 나는 그 곳에 영영 닿을 수가 없는 걸까.
......닿았던 적이나 있는 걸까?...
“강징... 하나만 말해줘.”
겨우 열린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나왔다.
“너 나를 진짜 네 친구로, 형제로... 생각한 적이 있기나 해?”
강징은 그만 손에서 힘이 빠지고 말았다.
투정도, 욕설도, 외침도. 전부 각오했다.
하지만.........
무선은 저를 잡은 힘이 풀리자 비척비척 물러나더니 마치 녹아버리듯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강징도 스스로의 걸음을 의식하지 못하며 천천히 정자로 돌아와 앉았다.
가슴이 굳어버린 듯,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흐트러져서는 일을 망치고 만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흔들리면 안된다.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하면 어때. 그딴 건 상관 없다.
남망기가 위무선에게 집착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의 입으로 지기라 말했다. 그러니 남종주도 남처럼 대하진 않을 터다. 금가에는 누님이 계시니 역시 위무선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금단만... 금단만 있으면 위무선은 완벽해질 것이었다.
나만 빠지고 나면, 흐드러진 꽃밭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감싸고 보호해 주겠지.
어떻게든 금단을 그의 몸 속에 되돌려놓기만 하면. 그리고 내가 사라져 버리면 그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속은 그냥 답답하기만 했다.
강징은 해묵은 감정이 더 이상 빈틈도 없을 정도로 꽉 차는 바람에 오히려 무감하게 느끼게 된 줄을 몰랐다.
그는 다시 술병을 기울여 희끄무레한 달빛이 하얀 도자기의 끄트머리부터 타고 흘러내리게 했다.
그와 함께 한 줄기 흘러넘친 술방울이 날카로운 턱으로 목으로 가슴으로 흘러내려, 멋대로 박동조차 하지 못하게 눌러둔 심장 근처를 서늘하게 적셨다.
생각치 말자. 아프지 말자...
죽고 나면 더 이상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을 테니.
이윽고 술도 동이 나자 강징은 병을 던져버렸다.
눈을 감고, 팔짱을 끼고는 스르르 뒤로 기대었다.
일부러 저를 피하고 낯선 눈길로 보던 무선을 외면하고, 소년 시절 마냥 웃기만 하던 그를 떠올리며.
홀로 된 숱한 밤에 그랬듯이 달콤한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부, 다들 기다려요.”
위무선은 아침도 굶고 멍하니 울타리에 기대어 있다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평소 저를 잘 챙기는 머리 굵은 제자 하나가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벌써?”
무선은 처음 보는 것처럼 해를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몰랐네. 가자.”
평소에는 위무선이 아이들을 몰아서 앞마당으로 나가든지 밖으로 나가던지 했는데 오늘은 학생들 편에서 무선을 기다리다 보니 여느 수업처럼 내실에 앉아 있었다.
무선은 제일 뒤에 숨듯이 앉은 말썽꾸러기 하나를 번쩍 들어다 앞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입술을 삐죽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누르듯이 쓰다듬었다.
그 사이 무척 정이 들어버린 크고 작은 아이들.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띠우며 그들을 바라보던 무선은 다시 마음이 어두워졌다.
강징은 처음에 무척 강제적으로 아이들의 교육을 맡겼다.
부모도 친척도 없어, 운몽 강씨의 비호가 없으면 어찌될 지 모르는 아이들을.
이 또한 강징이 계획적으로 채워둔 족쇄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 연이 닿았든, 사람의 마음 속에 정이 싹트고 나면 더 이상 족쇄라고 부를 순 없었다.
올망똘망, 신뢰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제법 반항도 하는 아이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무선은 제법 즐겁게 수업을 이끌어나갔다.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은 와와 떠들며 깨끗하게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렸다. 그와 함께 무선의 입가에 남았던 미소도 흐릿하게 사라졌다.
나흘이 지났지만 강징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도망을 친 건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아도 아직 저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달아나버릴 때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운몽 강씨, 갈 데 없는 아이들, 온가 식구들. 그렇게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족쇄들을 보아 제가 도망치지 못할 것도 아는 것이다.
무선은 생전 처음 답답한 무력감에 빠져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눌렀다.
수십년의 세월을 저보다 앞서 달려가버린 강징은 너무도 대단한 존재였다. 원하는 모든 일이 한 치도 어긋나지 않도록 치밀하게 계획했고, 너무 강하고, 냉정했다. 저 강징이라면 금단을 저에게 주어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거리감이야말로 위무선을 안타깝게 만들고, 겁에 질리게 했다.
-강징. 왜 내 말을 듣지 않아. 내 감정, 내 의견은 아무래도 좋은 거야? 네가 아는 위무선만 중요하고. 나... 여기에 있는 나는 너에게 아무 것도 아니냐고?...
너는 네가 놓쳐버린 위무선만 계속 쫓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무선은 고개를 떨구다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혼자가 되어버린 것처럼 쓸쓸하고 무섭고.
난장강에 떨어졌을 때보다도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강징은 떠나기 전에 말했던 대로 십여일이 지났을 즈음에 돌아왔다.
“위무선은?”
“연무장에 계시는 것 같던데요. 모셔올까요?”
단지 무선이 제대로 연화오에 있는가. 그것만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 강징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도 다 밝혀진 마당에, 더 이상 살가운 척을 할 수는 없으니 만난다 해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랐다.
그러나 그 편에서도 저를 만나러 오지 않는 것은 역시 상처가 되었다.
강징은 의연하게 오가며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 무선은 영 보이지 않았다. 분명 연화오 내에 있으며, 수업도 빠짐 없이 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며칠이나 지나도록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없다는 건 일부러 피하는 것이 확실했다.
그래도 한 집안에 있으니 돌발적인 사고처럼 맞닥뜨리는 건 불가피했다.
“!!”
먼 발치에서 강징이 식사를 하러 들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무선은 얼른 앞마당을 질러 즐겨 머무르는 큰 연못가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뭔가 잊은 것이 있는지 돌발적으로 달려나오는 강징과 건물 한모퉁이에서 부딪히고 말았다.
놀라서 휘청거리는 무선을, 기민한 강징의 손이 꽉 붙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강징은 저도 모르게 평정심을 잃고 애가 타는 시선으로 무선을 찔러버릴 듯했다.
그리고 무선은 크게 당황하다 못해 거의 겁에 질린 듯한 느낌이었다.
“...아파.”
약한 말소리에, 마치 쇠집게처럼 그의 팔을 잡고 있던 것을 깨달은 강징이 흠칫 놓아주자, 무선은 마치 흩어지는 바람처럼 달아나 버렸다.
강징은 망연한 느낌에 집무실에 가려던 일도 잊고 말았다.
일평생, 어떤 일이 있어도 그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위무선이 어떻게 나오든 의지를 꺾지 않겠다고 철벽같은 각오를 한 바였지만, 저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났더니 근심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징이 선택한 방법은, 또다시 남망기를 그를 부르는 것이었다.
위무선이 상태가 좋지 않다는 애매모호한 서신에도 남망기는 곧장 달려왔다. 한나절만에 그가 도착했다는 기별에 강징은 가슴이 지끈거리면서도 안도했다. 그가 왔으니 어떻게든 마음을 풀어주겠지 하고.
그렇게 믿고 맡겨버린 강징은 남망기를 마중하는 일도 부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일더미에 파묻혔다.
그렇지만 남망기를 안내했다고 한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아 그가 집무실로 찾아왔다.
“...강종주. 위영이 왜 저러지? 어디 아픈가?”
남망기는 거두절미하고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그냥 나랑 좀 싸웠기에, 기분이 좋지 않은 것 뿐이다.”
그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가 그런 일로 저리 기운이 없다고?...”
출구도 없는 동굴에 갇혀서, 다 죽게 되었을 때에도 명랑했던 인간인데.
“어쨌든 나는 오지 않는 게 나았던 것 같군. 이만 돌아가겠어.”
그 말에 강징이 당황하여 일어섰다.
“뭐라고? 그냥 가겠다고?”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어쩌라니...”
강징은 서안을 밀치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위무선이 저렇게 속상하면 응당 너는 그의 마음을 풀어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왜 걱정을 하지 않지? 어찌 그리 차가워?”
남망기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얼핏 미간에 주름을 떠올렸다.
“강만음. 전부터 너는 뭐가 못마땅해서 자꾸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군.”
“시비가 아니야!”
남망기는 연한 눈빛에 명백한 불쾌감을 띄우며 피진을 움켜쥐었다.
“위영이 어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지기다. 함께 전쟁을 치렀고, 목숨을 걸고 적에 맞선 적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거다. 타인의 싸움에 제삼자가 끼어드는 건 좋지 않아. 특히 집안 싸움이라면 더욱 그렇지. 내 우의를 의심하는 것 같아 심히 불쾌하군.“
강징은 기분이 나빠서 평소보다 훨씬 많은 말을 하는 남망기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길게 풀어놓는 말 중에, 강징이 예상했던 감정은 한 마디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몸이 아픈 건 아닌 것 같아 안심했다. 그럼 이만.”
“잠깐, 함광군...!”
손을 내밀며 붙잡으려 해도 남망기는 하얀 옷자락을 칼날처럼 휘날리며 나가 버렸다.
뒤에 남겨진 강징은 썰렁해진 문간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꽃잎이 드문드문 떨어지는 따스한 봄날이건만.
어쩐지 스산하게 느껴지는 밤이 찾아왔다.
양친 생전의 활발함을 되찾은 연화오는 꽤 늦은 시간이 되도록 연못가에 소년소녀들이 모여 있거나, 방에 불이 켜져 두런거리는 이야기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그렇지만 달이 중천을 넘어 기울어가는 시간에는 그런 사람들까지 잠이 들어 이따금씩 정해진 길을 오가는 순찰사의 발소리 외에는 무덤처럼 고요했다.
강징은 자그만 정자에 기대어 푸른 잎이 불쑥불쑥 올라온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침한 반달 아래 잠든 연화오. 새로 재건된 연화오의 모습은 그의 손 아래에서 수십년을 보내며 세월에 낡아가던 지난 세계의 연화오와는 조금 달랐다.
똑같이 만들겠다고 노력을 했어도, 다른 모양이 되고 다른 분위기가 되어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강징은 마치 소싯적의 위무선처럼 독주를 병째로 쥐고 들이키며 사색에 잠겼다.
낮에 보았던, 겁에 질린 위무선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아 몇 시진이나 침상 위에서 뒤척거리다가 그만 뛰쳐나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 이상 완벽하게 처신할 수도 없었는데. 어쩌다 그에게 들켰고, 수습도 제대로 못하고.
가장 중요한 일이 틀어져버리고 말았다.
강징은 기별을 보내기 무섭게 찾아왔다가도 매정하게 돌아가버린 남망기를 상기했다.
분명 그의 감정이 확실히 깊어 보였던 건, 위무선이 피바람을 일으키던 그 날, 억지로 그를 데리고 도망치던 남망기를 보았던 때였다.
혹시 그런 처참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깊은 감정을 일깨우지 못했던 건가?
아니면...
시간을 뒤틀어버리면 사건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감정까지 뒤틀어질 수 있는 건가.
회귀는 아무나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경험도 가르침도 있을 수 없는 사건이라 강징은 아무리 혼자서 머리를 짜내어 보아도 답을 알 수 없었다.
무섭도록 밤에 잠긴 주변은 한참 동안 멍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언뜻 느린 발소리가 들려와 강징은 고개를 들었다.
위무선이었다.
이런 깊은 밤에는 실신한 듯이 잠이 들어 절대로 깨어 있을 리가 없는 무선이, 얇은 침의만 걸친 차림으로 걷고 있었다.
어딘지 붕 뜬 것 같은 걸음걸이, 평소와 다른 하얀 옷으로 덮힌 모습이 마치 유령 같았다.
“...위무선.”
강징이 속삭이듯 불러도, 걸음을 멈춘 무선은 낮처럼 놀라지 않았다.
혹여 도망쳐 버릴까 우려한 강징이 빠른 속도로 다가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강징은 덥석 무선의 손을 잡아 우선 달아나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위무선... 나는 나이가 많아.”
무선은 홀리기라도 한 듯 물끄러미 강징을 쳐다보았다. 강징은 더욱 불안하여 간절한 기분이 들었다.
“살만큼 살았고, 누릴 만큼 누렸어. 이렇게 어린 너에게 금단을 준다고 나에게 해가 되진 않아.”
무선은 여전히 강징에게 꼭 잡힌 손을 그대로 맡긴 채 쳐다보기만 했다. 평소의 재기도 경쾌함도 없이,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네가 정 싫다면 연화오를 떠나진 않을게. 그러니 금단만 받아줘. 부탁이야.”
무선은 아직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강징은 너무도 답답하여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생기를 잃고 대화조차 거부하는 이런 그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만 더. 정말로 한 번만 더, 밝게 웃어주고 농담을 하고, 이 얄미운 손으로 내 몸을 두드리는 걸, 느끼고 싶었는데.
그리고 똑같이 마음이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위무선도 간절하게 강징을 쳐다보았다.
무겁게 치켜올라간 짙은 눈썹 아래의 눈빛은 굳건한 의지로 깊이가 보이지 않았다.
기어이 금단을 넘길 셈이었다.
도대체 강징이 이다지도 강한 인간이었던가? 무선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그 어린 나이에 홀로 사람을 다 잃은 운몽강씨를 일으켜세웠던 걸 보았지.
그런 의지도 고집도 모르고, 언제나 한 발 나의 뒤에서 전전긍긍하는 모습만 보았더니. 사실은 정말로 대단한 인간이었어.
...그럼 어떻게 이기지? 내가 너를 어떻게 막지?
뜨거운 느낌이 눈 속으로 모여들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아직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건만, 이제는 겪지도 않은 과거가 장벽이 되어 그에게 말을 거는 방법조차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강징이 아니라 할지라도. 역시 강징은 강징이었다.
금단이 아니라 목숨도 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제 뒤만 쫓아다니며 어쩔 줄을 몰라하는 어린 강징이 저 속 어딘가에 있을 텐데. 그렇지만 나는 그 곳에 영영 닿을 수가 없는 걸까.
......닿았던 적이나 있는 걸까?...
“강징... 하나만 말해줘.”
겨우 열린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나왔다.
“너 나를 진짜 네 친구로, 형제로... 생각한 적이 있기나 해?”
강징은 그만 손에서 힘이 빠지고 말았다.
투정도, 욕설도, 외침도. 전부 각오했다.
하지만.........
무선은 저를 잡은 힘이 풀리자 비척비척 물러나더니 마치 녹아버리듯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강징도 스스로의 걸음을 의식하지 못하며 천천히 정자로 돌아와 앉았다.
가슴이 굳어버린 듯,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흐트러져서는 일을 망치고 만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흔들리면 안된다.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하면 어때. 그딴 건 상관 없다.
남망기가 위무선에게 집착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의 입으로 지기라 말했다. 그러니 남종주도 남처럼 대하진 않을 터다. 금가에는 누님이 계시니 역시 위무선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금단만... 금단만 있으면 위무선은 완벽해질 것이었다.
나만 빠지고 나면, 흐드러진 꽃밭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감싸고 보호해 주겠지.
어떻게든 금단을 그의 몸 속에 되돌려놓기만 하면. 그리고 내가 사라져 버리면 그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속은 그냥 답답하기만 했다.
강징은 해묵은 감정이 더 이상 빈틈도 없을 정도로 꽉 차는 바람에 오히려 무감하게 느끼게 된 줄을 몰랐다.
그는 다시 술병을 기울여 희끄무레한 달빛이 하얀 도자기의 끄트머리부터 타고 흘러내리게 했다.
그와 함께 한 줄기 흘러넘친 술방울이 날카로운 턱으로 목으로 가슴으로 흘러내려, 멋대로 박동조차 하지 못하게 눌러둔 심장 근처를 서늘하게 적셨다.
생각치 말자. 아프지 말자...
죽고 나면 더 이상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을 테니.
이윽고 술도 동이 나자 강징은 병을 던져버렸다.
눈을 감고, 팔짱을 끼고는 스르르 뒤로 기대었다.
일부러 저를 피하고 낯선 눈길로 보던 무선을 외면하고, 소년 시절 마냥 웃기만 하던 그를 떠올리며.
홀로 된 숱한 밤에 그랬듯이 달콤한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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