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446235990
view 4097
2022.02.05 00:25
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   10편   11편   12편   13편



“종주.”
강징이 땀을 흘리며 연무장을 빠져나오자 대기를 타고 있던 가복이 얼른 수건을 받쳐 올렸다. 
한겨울이라 땀이 금세 얼어버리며 피부가 따끔따끔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근래 여유가 생기며 가끔 손이 비게 된 강징은 이따금씩 홀로 검을 휘두르며 싱숭생숭한 속을 달래곤 했다.
그러고 보니 연무장이 텅 비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강징이 지나가던 소년 수사를 불러세웠다.
“왜 연무장에 사람이 없지? 오후 수업을 할 시간이 아니더냐?”
“네, 그런데... 대사숙께서 아침나절부터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옳다꾸나 하고 땡땡이를 치던 소년은 혼이 나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숙이며 무서운 강징의 눈을 피했다.
“집 안에 없느냐?”
“네.”
강징은 어린 수사가 슬그머니 도망을 가버릴 때까지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그는 이제껏 무선이 모르는 척 뒤로 자신을 감시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 겉으로는 명랑함을 잃지 않는 그에게 맞춰주는 듯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이었는데.
꽤나 성실하게 아이들을 가르치던 위무선이 수업을 빼먹은 건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몇 시진 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무선을 발견한 강징은 얼른 따라가서 어깨를 잡아채었다.
“위무선! 너 어딜 갔다 온 거야? 수업도 빼먹고?”
“...!”
무선은 한달음에 제 방까지 가려다 강징에게 붙잡히고는 깜짝 놀라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간밤에 보았던 끔찍한 환영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라 아직까지 혼란스러웠다. 온종일 혼자가 되어 고민해 봤지만, 아무리 사술과 저주에 능한 머리로 생각해 봐도 막막한 의문만 생겨날 뿐이었다.
게다가 끔찍한 장면들이 그저 헛것이었다고 치부하려 해도 강징의 눈으로 보던 처참한 장면들과 그가 느끼던 감정들이 너무도 충격적이라 무선은 제 어깨를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는 이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너... 어디 아파?”
무선에게 금단이 없는 것을 아는 강징은 갑자기 삭풍을 차갑게 느끼며 걱정스러운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아니기는... 약탕을 끓이라고 할 테니 마시고 푹 쉬어. 술은 마시지 말고, 응?”
무선은 양미간을 더욱 깊게 찌푸리고도 자상하게 구는 강징에게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돌아온 무선은 한참 후 하인이 약탕을 갖다주어도 그것이 다 식어갈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도대체 어제 봤던 건 뭐였단 말인가?
암만 머리가 터지게 생각을 해 봐도 알 수가 없었던 무선은 다시금 강징의 방에 숨어들 결심을 했다. 
그래서 금일도. 다음날도, 무선은 밤마다 종이 인형을 만들고 강징의 침상으로 올라가 잇달아 펼쳐지는 기억을 모조리 삼켜버릴 듯이 지켜보았다.





한 번 죽었다가 헌사된 후, 아마도 남망기 그와 찰싹 붙어다니는 듯한 여정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무선은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들의 정체, 스쳐가는 죽음, 비열한 과거와 엇갈리는 마음들. 
그래도 천인공노할 비밀이 드러나고 죄인이 죄값을 치른 다음에는 평화로운 나날들이 펼쳐지는가 싶었는데. 
겉으로는 부드러운 장면들이 펼쳐지는 것을 바라보는 강징의 마음은 오히려 과거 어느 때보다도 공허하고 고통스러웠다. 
위무선-자신-은 연화오가 아닌 운심부지처에서 머물렀다. 이따금씩 강징의 눈 앞에 백의의 소년들이나 남망기와 섞여 있는 위무선이 스쳐지나가곤 했다. 
그를 향해, 위무선은 강징이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하여 소리쳐 불렀다.
---위무선! 너 거기서 뭐하는 거야! 연화오로 돌아오지 않고 뭐하는 거냐고!
하얀 수사들에게 둘러싸인 위무선은 언제든지 상당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들과, 남망기를 향한 강징의 감정이 무선의 안으로 쏟아져들어왔다. 맹렬한 질투심. 그러나 애써 누르는 듯, 미움은 없었다. 그 뿐 아니라 위무선을 바라보는 마음 속도 애가 타는 듯한 그리움으로만 가득했다.
위무선은 유령처럼 의식만 떠다니는 상태라 눈물도 흘리지 못하면서 속으로 속삭였다.
그렇지만 강징, 너 나를 미워해도 되잖아.
내가 네 가족들을 다 죽여버리고... 그리고... 그리고는 너까지, 사지로 밀어넣어버렸잖아!!!
강징이 애틋한 마음으로 밀떡을 사는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온가에게 잡혀가는 모습이 흉터처럼 영혼에 새겨지는 것 같았다.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감고 외면하고 싶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제 귀로 들을 수 있게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마침내 무선이 캐려고 했던 비밀... 강징이 왜 이상하게 굴었던가, 그리고 이 환영이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설명해 줄 마지막 비밀에 다다랐을 때 무선은 듣도 보도 못한 귀보에도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그 전의 삶, 강징과 저의 행보와 세월이 흐를수록 가물가물 멀어져만 가는 두 사람의 간격보다 절망적이고 놀라운 사실은 없었기에.






사흘째, 강징은 잠결에 수상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자다가 흠칫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 강징은 이불 아래 숨기고 있던 삼독을 매섭게 휘둘렀다. 벌떡 일어나 이불을 제치고 빈틈없는 눈빛으로 방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러나 보이는 건 단지 반으로 갈라져 팔랑팔랑 떨어져내리는 종잇조각 뿐이었다.
강징은 벼락처럼 문을 열어제치고 위무선의 방으로 내달렸다.
예고도 없이 험악한 기세로 무선의 방문을 젖혀버리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그가 보였다.
강징은 자신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보고는 숨이 막혀버렸다.
“강징... 강징아. 내가 뭘 해준 게 있다고, 이렇게까지 해?”
“위무선...”
삼독을 쥔 손이 파들파들 떨리면서 그것을 제대로 쥐고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힘이 빠졌다.
무선은 무릎 걸음으로 툭툭 다가와 안으로 들이치는 겨울 바람에 휘날리는 강징의 옷자락을 잡았다.
“나 때문에 인생을 다 내던지고... 그리고는 그 모든 걸 다시 한 번 더 버리겠다고? 너는... 너는 정말 지독해, 강만음!”
무선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얼음 가시로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아 강징은 기어이 삼독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침착한 태도로 겉옷을 벗어 파랗게 되어 떨고 있는 무선에게 둘러주었다.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우는 무선의 얼굴을 감싸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 다 알아버렸구나. 그렇다면. 그러면, 너에게 전부 돌려주게 해줘, 위무선.”
강징이 그렇게 말하자 그만 바삭하게 부서져버릴 것 같은 눈에 힘이 돌아오더니 외쳤다.
“돌려주긴 뭘 돌려줘! 그러려고 한 일이 아니야!”
“그렇지만 너에게는 금단이 있어야 해!”
강징은 발악을 하는 무선을 붙잡고 그 못지 않게 사나워지고 집착하는 눈을 빛내며 마주 소리를 내질렀다.
“근심도 없고, 구김없이 찬란하던 너... 그따위 흉한 사술을 쓰지 않아도 수편을 뽑기만 해도 온갖 요마귀괴를 다 조각내던, 그게 진짜 너란 말이야, 위무선!”
“너는 미쳤어!”
무선이 강징을 떠다밀며 처절하게 부르짖자 강징은 제게서 벗어나려는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무선이 몸부림을 쳤지만 난폭하게 몸을 죄는 팔이 더욱 강했다. 강징은 숨막히게 옥죄이는 무선의 뺨에 제 뺨을 꼭 대고는 정신이 나간 듯이 달래었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응? 위무선.”
무선은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울음이 터지는 바람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강징은 가슴을 들먹거리며 우는 무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온 몸으로 집어삼켜버릴 듯 강하게 안아주며 계속해서 속삭였다.
“괜찮다니까. 내가 지켜줄 거야. 모든 일이 다 잘 되도록... 그러니까 울지 마. 마음 다치지 마... 다치면 안돼...”
무선은 엉엉 울면서 꽉 잡힌 팔 아래로 겨우 겨우 손을 들어 강징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저에게는 꿈 속으로만 스쳐지나갔던 일일 뿐임에도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게다가 그 지옥을 현실로 뚫고 나온 강징이 미쳐버린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에 집착하는 것이 불쌍해서, 단단하고 넓은 가슴이 이리도 뜨겁게 고동치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이 슬퍼서 도대체 어찌해야 할 지를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