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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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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기가 지나면 잠시 주춤했던 모임 대신 가을 사냥회가 줄을 이었다.
크고 강한 가문일수록 자리를 가리는 법이지만, 강징은 대부분의 초청에 응했다.
고소 남씨도 마찬가지였다. 
거친 성질머리에 걸맞게 삼독성수가 유독 사냥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야 널리 알려져 있지만, 쓸데없는 살생을 삼가고 심지어 육식도 즐기지 않는 고소 남씨가 변방의 사냥회에 참가하는 것은 조금 이상해 보였다.
초청받은 가문의 사냥 지역에 도착했을 때 하얗고 기품있는 모습들이 눈에 비치면 강징은 오히려 제 쪽이 부끄러워지곤 했다.
눈만 마주치면 닳고 닳은 한량처럼 눈웃음을 치는 것도 대체 주위를 살피고 하는 짓인지, 사뭇 긴장되어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러나 어딘가의 벽 뒤에서, 나무 그늘에서, 으슥한 모퉁이에서 잡아당겨진 다음에는 무언으로 비난하는 것도 잠시뿐.
처음에는 당황했던 강징도 어느새 짓궂은 눈빛을 던지며 못된 장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얼싸안고 숨어버리는 그에게 익숙해졌다.



일단은, 어김없이 남희신이 쫓아올 것을 알기에 사냥이 시작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능한 멀리멀리 달아났다.
이쯤이면 될까 가늠해볼 필요도 없었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뒤를 따라잡은 남희신이 덥석 잡아당기고, 그러면 만사가 끝이 났다.
이미 그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부터 열이 올라버린 강징은 순순히 몸을 맡기며 입술을 열었다.
차마 눈을 뜨고 마주할 용기는 없지만, 거칠게 죄는 힘이나 물씬 하는 향기만으로도 어지러웠다. 뜨거운 숨을 흘리는 감촉이 이부터 세우고 말랑한 살을 뜯으면 놀라 히끅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매달리고, 마주 그의 입술을 물고는 대담하게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남희신은 하얀 의복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조심하던 습관도 내버리고 강징이 거친 나무껍질에 부딪히지 않도록 팔을 던져 감싸안으며 한편으론 숨이 막히도록 탐했다. 뭔지모를 부드러운 향기가 강종주의 옷에서 나는건지 몸에서 나는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순간 참을 수가 없어져 목덜미로 파고들어 크게 숨을 들이쉬며 씹었다. 제법 아픈 자극에 놀란 강징이 손바닥을 세우고 밀어낼듯 하다가 멈추었다. 흐읍, 하고 입 속으로 참는 듯한 작은 소리도 불을 지르는 것만 같아 남희신은 마음껏 목 아래를 깨물고 심지어는 혀를 내어 핥으며 파들거리는 반응을 남김없이 음미했다.
지난번 호숫가에서 덮쳐버린 뒤로 강징은 퍽 순종적이었다. 하지만 지나다 보면 아무래도 남희신의 미친듯한 열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잠시 입술을 떼고, 숨이 차는데 소리는 내지 않으려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고 웃으며 다독이려는 찰나, 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강징은 역시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얼어붙어버리고 말았기에 남희신이 그의 허리를 당겨 민첩하게 숨었다.
무언가 작은 짐승 따위였나 보다. 
한동안 사방에는 적막감만 깔렸다. 사람들로부터 어지간히 멀어졌는지 들리는 건 째째 하는 작은 새소리 뿐이었다.
비상하게 감각이 예민한 남희신은 제 귀에 들리는 것이 없는 걸 확인하자 금세 안심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강징은 아직 경계심을 풀지 못한 채 잔뜩 날을 세우고 있었다.
무심코 남희신의 가슴에 대고 있는 손,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이 어린애처럼 순진해 보였다.
“...이거 불편하네요.”
잠시 후, 겨우 마음을 놓은 강징이 후유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당신이 종주만 아니었더라면 당장 납치해서 도려로 삼았을 텐데.”
그 말에 피식 웃은 강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남희신의 입가에도 소리없는 웃음이 번졌다.
전에는 같이 놀자고만 해도 뺨을 때리더니.
돌이켜 보면 위공자와 어울려 다니던 소년 시절에도 무척 가시를 세우는  모습밖엔 못 보았다.
아마 나에게만 특별한 거려니, 싶자 기분이 좋았다.
“그만 사냥하러 갑시다.”
아무래도 금방의 충격이 가라앉지 않는지 강징이 불안하게 말했다.
남희신은 동의하는 대신 도망치는 걸 막으려는 듯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럼, 이따 밤에 만나서 산책해요.”
강징은 너무 가깝다고 느껴 애써 피하려고 했던 얼굴을 곁눈으로 흘겨보며 꿍얼거렸다.
“...산책만 할 거 아니잖습니까.”
남희신은 못 미더운 듯 찌르는 강징을 보면서 가만히 웃다가 그의 이마에 뺨을 대었다.
“그래서, 싫어요?”
어울리지도 않게 고양이처럼 비벼대다가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자 강징은 그만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남종주는 갈수록 괴상해진다. 
차라리 놀리는 거라면 허술한 방어라도 하겠지만, 달콤하게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비벼대면 도무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남이 쩔쩔매는 꼴을 보는게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라고 강징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좋아요. 산책만 한다고 약속할 테니까, 대신 당신이 나한테 입맞춰 줘요.”
그 말에 욱한 강징은 그럼 그렇지 싶었다.
남희신은 빙글빙글 웃으며 볼통한 얼굴 위로 알기 쉬운 감정들이 차례로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주 낱낱이, 강징이 눈을 꼭 감고 어거지인듯 참으며 가까워지는 모습까지.
정말 너무 사랑스러워서, 땅 위든 물 속이든 그대로 잡아먹어버리고 싶었다.





사냥이 끝난 후 가까운 사람들끼리 고기를 구워 먹은 강징은 잠시 막사로 돌아와 쉬었다.
바깥에서는 아직 흥이 다하지 않은 사람들이 술을 퍼부으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슬슬 빠져나올 각을 재고 있으려나.
남희신만 떠올리면 뺨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맑은 차가 담긴 잔을 쥔 스스로의 손조차 괜시리 부끄러운 느낌이었다.
딱 한 번, 낯선 선부에서 덮쳐지다가 남들의 눈이 무서워서 거절해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결국은 그가 원하는 바를 거스를 수 없었다.
사실은 강징도 일각을 같이 못하는 것이 아쉬운 형편이었으니까.
그가 다시 관심을 주고, 입맞춰주고, 심술궂은 소리를 내뱉을 때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이 시간이 오래 이어졌으면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성질을 죽이고-이제는 뭐라고 놀림받든 화도 나지 않지만- 고분고분하게 굴기로 마음먹었다.
강징은 찻잔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그으며 사냥터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니, 둘 다 조심할 수밖에 없는 입지에 서 있는 것이 다행스러운 거지.
괜히 선을 넘었다가 위험해질 우려가 없고...
어쩌면, 그도 그런 입장을 알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느껴서 상대해 주는 건지도 모른다.
다만 여전히 가시돋힌 소리를 내뱉았고, 일부러 성질을 긁는 짓도 여전했지만, 강징은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별다르게 여기지 않았다.
강징이 아는 어떤 사람도, 별다른 관심 없이 악의 없이 사람을 놀리길 좋아했으니까.
강징은 남희신에게 고백했던 것도, 그 고백을 망각 속으로 묻어버리지 않기로 결정한 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깊은 마음이 아니라도 어떠랴.
아니, 이 편이 깊은 마음보다 낫다.
깊고 단단한 마음일수록 금이 가고 크게 쪼개지면, 그 단면은 얼마나 날카로운지.
그래서 그가 놀이상대처럼 대하는 것에 불만은 없었다.
가볍고 즐겁게 어울리다가 천천히 열정이 식으면, 그 다음에는 보통의 친우처럼 되어서. 죽을때까지 원만한 사이를 유지할 수 있겠지.
가끔씩 마주치면 웃어주고, 따뜻한 말도 해 줄 거다. 
강징은 마음 속에서 안전한 미래를 상상하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심해야 한다.
가능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화를 내지도 말고. 
그리고 아마 길지는 않을 시간들을 잘 음미하고 기억 속에 갈무리해야지.
그러한 생각이나 계획에 다소 시린 구석이 있더라도, 그의 품에 안겨 똑바로 들여다보는 시선을 떠올리고, 입맞춤의 달콤한 감촉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다 덮어지는 것 같았다.
이것이 얻을 수 있는 전부라도, 철저하게 고독뿐이던 과거와 감히 비교할 수는 없으니까.
남희신이 아무리 짓궂게 굴어도, 마지막에는 상냥한 택무군으로 돌아가 줄 거라고 강징은 믿고 있었다.
아무튼 이미 일어나 버린 추억들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거니까.
충분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