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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6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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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잼ㅁㅇ... 보고 싶은건 언제 나오는지
그 후로도 남희신은 공석에서 만날 때마다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전의 신경쓰이는 사건 이후로 강징은 그를 무시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장단을 맞춰줄 수도 없었다.
“그렇군요.”
그들 외에도 몇 명의 사람들이 있어서 더욱이 저와는 관련이 없는 화제를 피할 도리가 없어, 간신히 영혼 없는 대답을 한 강징은 어떤 일로 남희신이 자리를 뜨자 겨우 숨을 돌렸다.
남희신이 가버리자 자력에 끌린 것처럼 모여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흩어졌다.
마침내 혼자가 된 강징은 저도 모르게 생긴 습관으로 소매 안에 든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만한 크기의 인형은 제법 솜씨좋게 만들어졌으나 짚으로 된 것이었고 요란한 칠을 한 조잡한 물건이었다.
그런 것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싶으면서도 좀체 버릴 수가 없었다.
남희신은 언뜻 불려 나갔던 일을 해결하고 재빨리 되돌아갔다.
아직 회의를 시작하기 전이라 시간 여유가 있었다.
그 잠시 동안 다른 사람들은 다 흩어져 버렸지만, 남희신의 마음을 끄는 한 사람은 남아 있었다.
남희신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조용해지며 그의 옆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위치까지 다가갔다.
강징은 전연 모르는 채 목석처럼 앉아서 차도 마시지 않았다.
약 보름 전의 일이었다. 그 때도 남희신은 멍하게 멈춰 서 있는 강징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몽 강씨의 종주회의.
남희신은 그 때 수하들도 거느리지 않은 단신으로 하루 일찍 연화오를 방문했다.
여느 선부에서는 모임이 있으면 친분이 있는 가문 사람들이 하루나 이틀씩 일찍 도착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었으나, 운몽 강씨의 주인에게는 그런 손님이 드물었다. 더구나 고소 남씨의 수장이 홀로 찾아온 것이 대체 무슨 이유인지 가늠해 볼 수 없었던 부사가 당황한 티를 내며 맞이했다.
“집무실이 어딘지는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혼자 가겠습니다.”
남희신의 말에, 부사는 석연찮아 하면서도 허리를 숙이고 물러갔다.
아닌게아니라 상당한 세월 동안 연화오를 드나들었으니, 안쪽 깊은 곳에 위치한 창고나 내채 따위는 차치하더라도 집무실 정도는 눈을 감고라도 찾아갈 수 있었다.
기별도 없이 이 곳으로 날아오며 남희신은 왠지 모르게 들뜬 기분이었다.
강종주는 연모라기보다는 차라리 원한을 가졌다면 어울릴 듯한 태도였지만, 남희신은 오히려 마음이 부드러워지며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불쑥 침입을 당하면 그 순간에 그는 또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기대로 남희신은 또 소리없는 웃음을 지었다.
짧은 대숲 길을 지날 때에는 더운 날씨임에도 청량한 기분이 들었고, 커다란 연못 위에 풍성하게 꽃봉오리를 터뜨린 연꽃들이 그야말로 선경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그리고 중앙을 높게 띄운 구름다리 옆에 강징이 서 있었다.
그를 발견한 남희신은 반가운 표정을 띄우다가 걸음이 느려지더니 멈추었다.
마치 옆모습을 보이고 선 강징의 어떤 부분이 발목을 잡아 세우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강징은 연못 위에 뜬 꽃을 바라보는건지 물고기를 바라보는건지, 어딘가에 시선을 못박아둔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와 똑같이 굳어진 채로 그를 바라보던 남희신은 뜬금없이 머릿속에 그의 모친 자지주가 떠올랐다.
남희신에게 그녀는 몇 십년도 전에 두세번 정도밖에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강종주와 정말로 닮아서, 지금 저 편에 서 있는 모습을 보자 낡았던 기억이 생화처럼 살아나며 그에게 겹쳐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름답다.
물결처럼 잔잔하게 가슴 중심부터 퍼져가는 감동을 느끼게 한 사람은 우부인이 아닌 삼독성수 본인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모습이 더욱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 같다.
그린 듯 날렵하게 끝이 올라가는 눈썹, 그보다는 각이 낮지만 마찬가지로 날카롭게 좁혀지는 눈매 안에 담긴 눈동자를 계속 보고 있으려니 가슴 속에서 정체 모를 응어리가 불어나며 옥죄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때, 뭐라고 중얼거리는 듯 슬몃 벌어지는 입술을 본 남희신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흠칫 발을 물리며 빠져나왔다.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려는 건지도 모르게 내처 걷다보니 대나무숲의 끝자락을 통과하고 있었고, 쏴 하는 바람이 풀숲을 쓰다듬으며 현실감이 돌아오자 설핏 꿈이라도 꾼 것 같았다.
뒤늦게 남희신이 찾아온 사실을 안 강징이 그를 객실로 모시라고 하면서 불안해했다. 하지만 그 날의 남희신은 조용하게 객실에 머물렀다가 종주회에 참석했다.
강징도 운몽 강씨의 다른 사람들도, 대체 택무군이 왜 하루 일찍 찾아왔던 건지 알지 못했다.
이번에도 남희신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조용히 회장으로 되돌아갔다.
갈수록 싱숭생숭해지는 기분 때문에 무척 곤란했다.
최근 그는 운심부지처 안에서 위무선을 보아도 강징이 떠올랐고, 심지어 남망기를 보아도 강징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한실의 서탁 아래칸에는 가장 최근에 운몽 강씨로부터 왔던 초청장 하나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잠시 이상한 기분이 들어 강징에게 접촉하는 걸 삼가하면서, 남희신은 외려 그의 모습을 보고 말을 거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희신은 명상을 하듯 천천히 사색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일까?
겉으로 강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속은 그만치 외로운 법인데. 강만음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잃었을 때에도 떨치고 일어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 속은 얼마나 시커멓고 깊을 것인가.
오랜 세월 그를 알아왔어도 남희신이 아는 것은 표면적인 일뿐이었다. 아는 게 없으니, 다만 그의 과거나 소문을 기억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느날, 남희신은 선부를 거닐다가 물에 빠졌다 나온 생쥐 꼴이 된 위무선을 발견하고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호수 곁에서 살다 온 사람이라 그런지 한여름에는 수시로 젖은 옷을 탈탈 털며 쏘다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지난 사건 후 남희신은 이 한 쌍으로부터 적지 않은 위안을 얻었다.
십 년도 넘게 불행해하던 동생이 행복해진 것이 좋았으며, 활기차게 주변에 빛을 뿌리고 다니는 위무선이 좋았다. 그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담뿍 오가는 정이 빛처럼 반짝반짝 주위로 퍼져나가는 것이 선연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택무군.”
위무선은 옷깃을 잡고 펄럭펄럭 젖은 물기를 즐기다가, 남희신을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래도 누구의 앞에서와는 다르게 부리나케 도망가지 않고 눈웃음을 치는 것이, 인심좋은 그라면 봐 줄 거라고 믿는 것 같아 훈훈한 웃음이 나왔다.
실제로 남희신은 위무선을 많이 봐 주고 있었다.
그가 위무선을 감싸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남계인이 피를 두 배는 토했을 것이다.
남희신은 위무선이 뒤에서 몰래 부르는 소리에 의하면 ‘하얀 시체들’사이에서도 말이 통하는 형님으로 여겨지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꽤나 즐거운 재담이 오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와 마주친 남희신은 그렇게 재미있는 대화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위공자. 묻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만.”
“말씀하세요, 택무군.”
“당신은 언제까지 강종주를 피할 생각입니까?”
위무선은 멈칫하며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다년간 남희신은 위무선에게 사적인 질문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런 대화를 피해 왔다고 할 수 있었다. 무서운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사건과 은원을 중심에 두면, 그 두 사람도 어느 정도는 실타래에 얽힌 것처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남희신이 금기를 깨고 무척 위험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일순 위무선의 눈에는 완연히 피하고 싶은 빛이 스쳤다.
사실 그대로 도망친다면 쫓아오기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남희신의 담담한 눈빛이 그런 온건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위무선은 천천히 바위 옆으로 기대며 입을 열었다.
“택무군. 그 분들은 저 때문에 죽은 겁니다.”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털어놓자, 이어지는 잠시간의 침묵을 쨍쨍 내리쬐는 햇살과 매미 소리가 사정없이 저미는 것 같았다.
위무선은 어느덧 돌멩이나 벽옥처럼 무신경한 눈빛으로 돌변하여 툭툭 바위를 두들겼다.
강징에게는 다 털어버렸다고 말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기만 하면 뼛속까지 저리는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와 차마 강징에게 다가갈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염리 사저만 떠올리면 이만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심지어 한 번 죽었다 다시 돌아온 후에도 위무선은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남이 그런 소리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남희신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의 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과는 다르게.
태양열에 지글지글 끓는 바위를 잡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 곁에서, 남희신은 곧장 태양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그 열을 받으며 또 하나 잃어버리고 만 사람을 떠올렸다.
청하의 섭종주는 이제 놀라울 정도로 의젓해졌다.
그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는 일 없이 기민하게 지역과 가문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도 했다. 꽤나 명랑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남희신에게는 예의를 차리는 이상으로는 결코 다가오지 않았다.
남희신은 몇 번이나 반복해 온 쓰린 생각을 곱씹었다.
위공자의 경우는 방법을 잘못 택했을 뿐 마음만은 순수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어쩌면 나는 무의식중에 광요의 부자연스러움을 알아채고도 그것을 묻어버린 게 아닐까.
마지막 하나 남은 지기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회상이 나를 믿었다면, 진실을 알았을 때 나에게 말해 주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분명 제 쪽에 신뢰를 주지 못할 실책이 있었던 것이다.
“택무군.”
깊게 생각에 잠겼던 남희신이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위무선이 툭툭 털면서 다가왔다.
그러면서 그만 가자고 웃는 것이, 마치 과거를 너무 깊이 돌아보지 말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자갈을 밟고 나와서 산길을 나란히 걸어올라갔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태양의 열기가 밟히는 것 같았고, 매미 소리가 함께 이동하는 것처럼 계속 따라왔다.
산문 앞에 이르자 문을 지키던 수행자들이 옆으로 비키며 허리를 숙였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머리 위로 짙은 녹음이 드리워지며 불볕같은 더위가 한결 사라졌다.
그 때 문득 남희신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위공자. 강종주는 무얼 좋아합니까?”
뜬금없는 질문에도 위무선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머리끈을 빙빙 꼬면서 턱을 삐죽거렸다.
“강징? ...글쎄요. 워낙 까다로운 녀석이라서. 뭘 좋아하긴 하는지 원.”
“그래요...”
실망스러워하는 남희신의 말 끝이 사라지기도 전에 위무선이 명랑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싫어하는 건 분명하죠.”
“싫어하는 것...?”
“지는 걸 아주 싫어해요.”
그렇게 말하고 위무선이 살풋 웃자, 무덤처럼 가라앉았던 남희신의 얼굴에도 실낱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나에게 거절당한 일도, 어쩌면 패배로 간주하고 있을 것인가?
분명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무심한 척 무시를 하거나 화를 내거나 하는 것인지?
그렇게 생각하니 귀엽게 느껴지며 몹시도 보고 싶어졌다.
근래에 몇 번인가,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피했던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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