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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은 고급스러운 검은 망토를 입고 들어왔어.

채 녹지 않은 어깨 위의 눈이 소복한 걸 보면 저택에 막 돌아온 모양이었음.

그를 보는 순간 너붕은 숨이 잠깐 멎는 듯 했어.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어쩐지 그리웠던 것 같아서.

사실 티모시나 그나 한달쯤 보지않았던 건 마찬가지였는데도.

그리고 너붕은 이내 난처해졌어.

왜...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고개를 미세하게 가로 튼 윌리엄은 굉장히 불쾌해보였어.

심지어 그는 그 기색을 감추려 들지도 않았음.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던 강한 욕구를 담은 눈빛과 함께.

너붕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어.

보이지 않는 날선 것이 티모시와 윌리엄 사이의 허공에 팽팽한 신경전을 일으키고 있었어.
그 중간엔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동물적인 견제가 존재했지. 너붕은 그걸 깨달은 순간 숨을 거칠게 들이켰어.

-실례하겠습니다.

-허니!

너붕은 티모시가 당황한 사이 손을 놓고 자리를 피했어.

티모시가 조금 전 너붕을 당황하게 한 것만으로도 오늘치의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느껴야했는데, 거기다 윌리엄까지 들이닥치니 어찌할 수가 없을 듯 했음.

그래, 마치 영영 돌이킬 수 없을 무언가를 입 밖으로 말해버릴 것 같은 느낌에 본능적으로 도망친 거지.

아무도 없을 법한 곳을 향해 너붕은 그냥 무작정 뛰었어.

그리고 비로소 제정신을 차렸을땐 저택의 가장 구석진 창고에 발이 머물러 있었지.

창고 주변엔 아무도 없었어.

그러자 긴장이 조금 풀리며 너붕은 탄식했어.

아......

주르륵, 녹아내리듯 너붕은 바닥에 주저앉았어. 너붕은 얼굴을 푹 가리고 생각했음.

뛰어오느라 숨찼던 심장은 이제 쉬었으니 원래의 속도를 되찾아야 했어.

하지만 여전히 쿵쾅거리는 고동은 뜀박질로 인한 거라는 변명도 할 수 없이 세차기만 했고 너붕은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여야만 했지. 티모시가 함께 나가자고 했을땐 그에겐 미안하지만, 이렇게까지 가슴이 터질 것 같진 않았음.

하지만 윌리엄.

찬바람에 약간 상기된 마른 뺨과 코. 화가 잔뜩 나 찡그린 진한 눈썹. 쌍꺼풀이 짙은 눈.

그 얼굴을 보자마자 채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너붕의 호흡이 가빠졌어.

그동안 너무, 그리웠어.

그 감정을 인정하자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느낌에 너붕은 도무지 그 자리에서 온전히 윌리엄을 감당할 수가 없었어.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이건 사랑이었어. 너붕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그 무언가를 이미 느낀 적이 있었음.

이렇게까지 감당 불가능하다 느낄 정도로 궁지에 몰려 당황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안 되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너붕은 집사 앨버트에게 가기로 마음 먹었음.

사표를 쓰기로.

그래. 윌리엄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저냥 지낼 만했는데.

방금 전의 일로 너붕은 확실히 깨달았어.

티모시도 안 보고 지내려 했지만 결국엔 마주쳐버린 것처럼 저택 내부를 빙빙 도는 것만으로는 궁극적인 해결은 되지 않을 게 뻔했지.

윌리엄이 돌아왔다는 건 대공도 돌아왔단 뜻이겠고, 그렇다는 건 사표를 일사천리로 진행시켜줄 게 분명했음.

그러니 지금 앨버트에게 말하면 그가 대공에게서 번개같이 허락을 받아다 줄거야.

아직 오늘 분의 해야 할 일은 남아있으니 그것만 끝내고 말하자.

그렇게 침착하게 너붕은 저녁까지 분주히 움직였어.

그리고 조심스럽게 앨버트를 찾아가 말했지.

-앨버트, 저 오늘부로 그만두고 싶어요.

그러자 나이든 집사는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물었음.

-티모시군 때문인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너붕은 집사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음.

-잠깐만. 오늘 일 들으신 거예요? 티모시가 얘기하던가요?

-내게 얘기하진 않았네만 내가 이 저택에서 일한지 30년이 넘었네. 그만두겠다는 걸 보아하니 그가 무슨 말을 꺼낸 것은 분명하겠지.

-그게,

너붕은 앨버트가 사용인들 사이에서의 일을 훤히 꿰고 있으면서 큰 관여는 하지 않는다는 걸 상기했음.

즉 티모시의 감정을 앨버트는 너붕보다 훨씬 전에 먼저 알고 있었던거겠지.

너붕은 한숨쉬며 이어서 말했어.

-티모시가 제게 어떤 얘길 한 건 맞지만 그것때문만은 아니에요.

-어쨌건 간에 허니양은 당장 나가고 싶은 게고?

-네에.

그는 여러모로 할 말이 많은 듯 했어.

하지만 너붕의 일을 자세히 묻기보단 당장 자신의 일이 더 급했는지 금방 답했어.

-안타깝게도 바로 허락해줄 순 없네. 대공께 전달드리려면 시일이 꽤 걸릴거야.

-하지만... 대공께선 오늘 오신 것 아니었나요?

-그렇네. 바로 위층에 계시지만,

앨버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음.

-어째선지 돌아오시자마자 심기가 불편하셔서 이 늙은이 애를 먹이고 계시지. 웬만한 일로는 잘 화를 내지 않는 분이 왜 그러시는지 이유를 도통 모르겠네만... 한 번 화가 나신 이상 며칠은 걸릴걸세.

즉 대공의 업무가 언제 정상화될지 모른다는 소리였음.

너붕은 조급하게 물었음.

-며칠이 언제까지인데요?

-흐음. 어디 보자... 마지막으로 화를 내셨던 게 8년 전이었던 것 같군. 아끼던 화단을 부순 놈에게 불같이 화를 내시고는 석 달만에 웃으셨지.

석 달?

퇴직도 못하고 앞으로 티모시, 윌리엄과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게임을 또 석 달간 계속한다고?

아니, 그건 절대 안돼. 안 될 일이야.

너붕은 기겁하며 앨버트에게 매달리듯 물었음.

-뭘 해야 화가 풀리실까요? 제가 최대한 빨리 나가고 싶어서요.

-허니양. 그건 아무도 모르는 미스테리네. 화가 나신 원인을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선 더더욱.

앨버트는 이미 체념한 얼굴이었음.

허허 웃는 인자한 미소 속에는 피곤함이 담겨있었지.

노련한 앨버트가 안 된다면 말단 하녀인 너붕이 설득할 수 있을 리 없었지만.

답답해하는 너붕의 얼굴을 보며 앨버트는 시도는 해보라는 듯 길을 터줬어.

직접 가서 말하면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뜻인 거겠지, 아마도.

무언의 허락에 너붕은 곧바로 계단을 달려올라갔음.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앨버트는 말리지도 않았어.

이미 대공은 화가 나 있으니 더 화내봤자 악화될 것도 없거니와, 오히려 너붕 덕에 대공의 업무가 정상화된다면 그거야말로 앨버트가 쌍수 들고 반길 일이었기 때문에.

똑똑.

너붕은 대공의 서재 문을 두드렸어.

그러나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

-대공님. 계세요?

너붕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공을 불렀어.

여전히 응답은 없었음.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너붕이 아니었지.

한 번 더 세게, 시끄럽게 울리더라도 두드릴 생각에 너붕이 손을 들어올릴 때였음.

문이 벌컥 열렸어.

그리고 눈 앞엔 윌리엄이 나타났음.

-아......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

평소같았으면 너붕을 보고 빙그레 웃었을 윌리엄인데.

그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어.

그는 너붕에게 화가 나있는 게 분명해보였음.

오후에 티모시와 함께 있던 주방에서보다 더더욱.

물론 그가 화나있는 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했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코앞에서 도망간데다 인사도 제대로 안 했으니까.

게다가 티모시와 함께 있으며 근무태만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아니, 아냐.

너붕은 그런 이유로 그가 화난 게 아니라는 걸 사실 알고 있었음.

주방에서 티모시와 윌리엄이 주고받던 찰나의 눈빛.

그건 명백히 서로간의 견제였어.

하지만...

그걸 알아서 뭐해?

귀족과 엮이면 어떤 결말을 맞을지 뻔히 알면서?

아무리 윌리엄이 너붕을 신경쓴다 해도 어쩔거야. 신분 차이라는 게 있는데.

너붕은 그의 눈을 피하며 말했음.

-...대공을 뵈러왔어요.

-용건은 내게 말 해.

-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윌리엄이 문을 틀어막고 말했음.

-내게 말하라고.

-하지만,

-얘기해.

그는 고압적으로 문을 막고 섰어.

너붕이 도대체 무슨 얘길 하나 들어나보자는 태도였음.

너같은 건 대공은 죽어도 못 만날 거라는 듯 팔짱을 끼고서.

너붕은 그가 보이는 권위적인 행동에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왔지.

내가 지금 누구때문에 그만두려고 하는 건데 날 막아.

화를 낼 줄 아는 건 윌리엄뿐만이 아니었음.

너붕은 피하던 눈을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어.

-제가 왜 주인도 아니신 분한테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뭐?

윌리엄은 너붕이 고분고분 말할 거라 생각했는지 놀란 눈치였음.

모르겠다. 너붕은 어차피 그만둘 거 막 나가버리자는 생각으로 마구 내뱉었어.

-전 대공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온 거예요. 비켜주세요.

-만날 필요없어. 내가 바로 전달하면 되니까 무슨 용건인지나 말해.

-싫어요.

단호함에 그가 놀라는 게 느껴졌어.

문을 잡고 있던 윌리엄의 손가락이 떨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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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절대 말 안 하시겠다?

-...네.

화가 가득한 침묵 사이에서 윌리엄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음.

이윽고 그의 몸이 문에서 떨어졌어.

-그럼 나가.

단호한 태도로 문을 닫을 기세였지.

너붕은 이해할 수 없어 그에게 결국 소리질렀어.

-왜 나한테 화내요?

너붕은 문 사이에 굳은 채 서 있는 윌리엄에게 계속해서 소리질렀음.

-귀족이면 다예요? 그래봤자 여기 주인도 아니면서. 내 주인도 아니면서 막고 서서!

그 말에 윌리엄은 골치아프다는 듯 고개를 저었어.

어쩌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짓는 것 같기도 했지.

-허니.

-비켜요. 난 꼭 대공님한테 오늘 말해야겠으니까.

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너붕을 보고 윌리엄은 아연실색했어.

너붕 생각에도 귀족 앞에서 제정신이 아닌 행동이었지.

윌리엄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관문이 윌리엄이라는 게 아이러니했지.

하지만 너붕은 절박하고 다급했어.

쿵.

너붕은 그의 손에 당겨져 안으로 들어왔어.

일단 너붕을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윌리엄이 너붕을 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았던 거지.

-내가 착각했군.

그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야밤의 소동에 한숨쉬었어.

-야무진 줄로만 알았는데 버릇없는 하녀일 줄이야. 이렇게까지 해서 꼭 오늘 대공에게 얘기를 해야겠어? 그냥 내게 말하면 되는 걸 왜 이렇게 고집인 거지?

-제 주인이 당신이 아니니까요.

-왜, 당장 허락받고 내일 식이라도 올리려고?

그 말에 너붕은 순간 몸이 굳었어.

식? 무슨 식? 갑자기?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뜬금없는 내용인지 종잡을 수 없어 너붕이 미처 말을 잇지 못할 때였음.

윌리엄은 여전히 화난 얼굴로 너붕을 추궁했지.

-둘이 사이 좋아보이던데.

-......

-요즘은 무드도 없이 주방에서 그러는 게 유행인가?

너붕은 천천히 정신을 차렸어.

아, 티모시 얘기였구나.

티모시가 너붕을 붙잡고 나가자고 했으니까.

아무래도 윌리엄은 티모시가 너붕에게 청혼한 줄 알았던가봐.

너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음.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면?

-제 의지로 나가고 싶은 거예요. 티모시와는 관계없어요.

당신이 좋아졌으니까요.

너붕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차마 그 말을 입밖에 낼 순 없었어.

뭐, 티모시에게 청혼 비스무리한 소리를 들은 것도 맞고, 나가고 싶은 이유에 그게 포함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윌리엄을 향한 너붕의 마음이었으니까.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먼저 입을 연 건 윌리엄이었음.

-그럼 증명해 봐.

윌리엄이 성큼 다가왔어. 가까웠지.

담배향이 섞인 그리운 체향에 너붕은 저도 모르게 취할 것만 같았음.

강한 유혹에 질끈 눈을 감았다 뜬 너붕은 그와 눈을 마주하고 물었음.

-뭘요?

-관계없다는 거.

너붕의 어깨가 흠칫 떨렸어.

어느새 윌리엄의 손이 턱 끝에 닿아있었으니까.

그의 손가락은 서서히 입술 위로 자리를 옮겨갔음. 입을 벌리며 아랫입술에 이어 윗입술까지 훑으며 짜릿한 간지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손가락에 너붕은 꼼짝도 할 수 없었어.

가쁜 숨을 내쉬며 너붕은 키스하고픈 욕망을 이겨내야 했음.

그도 정확히 그런 이유로 너붕을 종용하고 있는 게 분명했고.

-...윌리엄.

-증명해 보라고.


















매튜좋은너붕붕
 

2024.06.17 14:3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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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제발 더 주세요..
[Code: 34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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