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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3 01:08
일나더 이나더 삼나더 사나더 오나더 육나더 칠나더 팔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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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했던 셔츠가 버석 해지고 있다고 느껴질 때 즈음, 휴가 라이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얼결에 함께 일어서 가족들을 마주 보게 된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왜인지 모르게 죄책감이 일고 있었다. 휴는 한 손으로 뭐라 손짓을 만들어 내더니 곧이어 제게 달라붙는 시선들을 이제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재빠르게 걸었다. “휴!” 그의 어머니가 외쳤으나 라이언만이 뒤돌아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휴는 그를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앞서 걷는 휴가 먼저 계단을 오르면 그가 그의 발자국을 밟는 식이었다. 라이언은 계단을 오르는 그 짧은 시간 내내, 휴의 뒷모습을 빠짐없이 바라보며 그가 잡고 있는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미지근한 온기가 계속해서 손에 닿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속 어딘가를 자꾸만 간질이고 있었다. 둘은 다소 좁은 복도를 걷다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문 중간에 멈춰 섰다. 휴는 그들의 오른편 문을 열고는 손을 끌어 그를 들였다. 손님방인 듯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는 침대와 깨끗한 가구들이 보였고 라이언은 제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휙 하니 떠나는 손짓에 입맛을 다셨다.
휴는 곧바로 맞은편 방으로 향했는데, 계속해서 그의 뒷모습만 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라이언은 크게 걸어 다시 휴의 손을 잡아챈 뒤 저를 향해 돌려세웠다. “휴,” 그런데 휴는 순간 팩 돌려진 몸을 흠칫 떨더니 그의 손을 뿌리쳤다. “잠깐, 왜,” 왜 이래요? 그는 눈을 부릅 뜨고 당황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지금의 그의 행동은 방금 전까지의 일과는 전혀 같은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라이언은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건너편 방 문을 가로막은 채 섰다. 이제서야 봐주는군.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어쩔 수 없이 마주쳐오는 두 눈에, 누그러지는 기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라이언이 말했다. “휴, 할 얘기가,” 하지만 그가 목소리를 내자마자 휴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금세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그는 턱을 잘게 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건 마치 ‘지금은 싫어요.’ 라고 말하는 듯해, 그는 또다시 작은 숨을 내쉬곤 입술을 물었다. 둘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숨과 숨이 그들 사이에서 맞닿았으나 어떤 말로도 대체될 수 없는 감정들에 결국 모든 언어는 사그라들었다. 그때 똑똑, 벽을 두드리는 소리에 라이언은 고개를 돌렸다. “손님방은 내가 써야 할 것 같은데.” 그의 누나가 말했고, 휴는 불안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휴, 나랑 잠깐 얘기 좀 해.” 레이철이 말했다. 그녀가 왼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물론, 네 방에서. 라이언, 저쪽에서 잠깐 기다려 줄래요?”
그녀는 그를 향해 손님방을 눈짓해 보였다. 라이언은 여전히 발끝에 시선을 내린 휴를 쳐다보다가, 몸을 틀어 방에 들어섰다. 그러자 휴가 기다렸다는 듯 저쪽 방 안으로 사라졌고, 닫힌 문을 보던 레이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좀 기다려줘요.” 그녀가 말했다. 라이언은 조급한 심정이었지만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의 침대 위에 앉았다. 잠깐 그를 바라보며 문가에 서 있던 레이철은 그가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어깨를 으쓱이자 억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곧이어 문 뒤로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낯선 공간에서의 기묘한 침묵이 다가왔다.
라이언은 그제야 짙게 젖은 제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체온에 이미 말라가고 있었지만 얼룩진 모양은 그대로 남아있었고, 오늘 하루가 무척이나 길게 느껴져 그는 팔꿈치를 무릎 위에 기댄 채 두 손 위로 얼굴을 묻었다. 휴를 다시 보았는데도 이상하게 계속해서 갈증이 나는 상태가 머리를 아프게 했다. 도무지 쉬워지지 않는 상황들은 그를 지치게 했고 어쩌면 휴에게도 그럴지 몰랐다. 휴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그가 이미 실패했기 때문에? 라이언은 눈을 감고 저쪽 방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슨 말이 오갈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절대로, 두 번 다시 휴를 놓치지 않겠다고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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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라이언은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어느새 드리워진 어둠 사이로 빛과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님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남은 가족들 중 누구도 2층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언의 합의를 한 듯했고 라이언은 그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귀를 기울이며 허리를 숙인 채 다시금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마른 세수를 했다. 여태껏 진정하고자 했지만 다시 휴를 마주하게 될 순간이 바로 앞으로 다가오자 심장이 떨려왔다. 휴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라이언은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답을 진심으로 믿고 싶었다. 그건 진짜 나를 사랑해서지. 갑자기 더러워진 셔츠가 찝찝하게 느껴졌고 샤워 생각이 절실했다. 이런 꼴로 휴를 보게 되다니. 그때, “라이언.” 부드러운 발소리와 함께 레이철이 들어섰다.
그녀는 손님방으로 완전히 들어오면서 문을 활짝 열었다. 그건 이제 그가 이곳을 벗어나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제 들어가 봐요.” 그는 머뭇거렸으나 그녀는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게다가 손님방은 본래 제 방이었으므로 그녀가 쓰는 것이 타당하며, 돌아가기엔 이미 늦은 시간인데다 피곤하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니, 라이언. 들어가 봐요.”
“하지만…”
순간 라이언은 아까의 울먹이던 휴의 얼굴을 상기시켰다. 갑작스레 마음이 흔들렸다. “정말, 괜찮을까요?” 밀어붙이고 놓아주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에 비해 그는 휴에게 있어서만큼은 변덕스러운 남자였다. 그러자 그런 그의 표정을 이해한 레이철이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오, 라이언.” 그녀는 가까이 다가와 그의 곁에 앉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는데, 평소와 다른 사근한 말투에 왜인지 안심이 되었다.
“이제 결혼할 사이잖아요. 같이 있어야죠.”
결혼. 결혼할 사이. 라이언은 입술을 축이면서 자신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좀 전까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거든요.” 울 것만 같았으니까.
“부끄러워서 그랬다고 생각해 줘요.”
“그게요?”
두 번 부끄러웠다간 제가 죽겠는데요. 레이철은 쓰게 웃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아주 잠깐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싶다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 내 동생은 그저 겁이 나는 거예요. 미안해요, 당신이 보기에는 내가 휴를 너무 어리게 보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음… 휴는 제게 좀 특별하거든요. 남동생일 뿐만 아니라 그냥, 글쎄요, 휴는 몇 번씩이나 반복된 일들을 혼자 견뎌야만 했으니까요. 그 애는 지금도, 이 일의 끝이 어쩌면 똑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겁이 나는 거예요.”
“……”
“당신도 이미 눈치챘을 거라 생각해요. 휴는 정말이지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으니까요.” 그녀는 픽 웃으며 눈을 깜박였다. “다행인 건 어른들은 꽤 잘 속는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만큼, 절실한 마음으로 당신을 붙잡았다는 걸 알아주세요. 그 애는 여전히 스스로의 생각들로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있으니까요. 라이언,” 레이철이 손을 풀어 그의 손등 위로 손바닥을 겹쳐 올렸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라이언은 이제부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그 애가 더이상 상처받지 않고,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는 그녀의 손 위로 제 다른 손을 겹쳐 보이며 말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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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은 두 번 노크했다. 굳게 닫힌 문 뒤로 불같이 화를 내고 뒤를 돈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어제의 현관과 달리 이까짓 문쯤은 지금의 그만으로도 충분히 부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잠시 후 빼꼼 열린 문틈 사이로,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두 눈을, 휴의 얼굴을 마주했으므로. 라이언은 언젠가처럼 시간이 멈춘 듯 느껴졌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어쩌면 또 다른 ‘기억될 순간들’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었고 그렇기에 한순간도 빠짐없이 지금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는 벌어진 문틈 사이로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면 휴가 한 발 물러섰고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하자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처럼 그들은 문을 등진 채, 한가운데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라이언은 마치 휴의 허락을 받은 듯한 기분이, 또 그의 마음이 드디어 휴에게 가닿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솟아오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쁨과 환희의 감정이 폭발하듯 그를 감싸 안았고 언젠가 제가 지어낸 마음속 안전지대에, 휴를 가둬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날 이용해. 그런 말로는 이제 부족했다. 무엇이든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라이언은 두 눈을 깊게 감았다 뜨며 저절로 피어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휴는 달아오른 뺨을 숨기지 못한 채였고 당황한 듯, 하지만 더이상 어쩌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 모습은 어쩐지 어떤 식으로든 그를 밀어내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는 진정으로 웃을 수 있었다. “휴.” 라이언의 손이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간질이며 타고 올랐다. 사랑하는, 나의, 휴. 휴는 순간 견딜 수 없는 것을 참아내겠다는 듯이 눈을 꾹 감은 채 몸을 굳혔다.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숨에 그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했고 라이언은 그의 속눈썹이 발작적으로 떨리는 것과 입술이 달싹이는 모양과 흔들리는 목울대를 순차적으로 아주 느리게, 또 빠짐없이 눈에 담으며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갔다.
“휴.”
마침내 그는 팔을 벌렸다. 곧이어 그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살짝 가벼워진 몸뚱이가 그의 품으로 쏟아졌다. 맞닿은 가슴으로 뜨끈한 체온이 전해졌고 그와 동시에 익숙하게 제 어깨에 고개를 묻는 휴를, 라이언은 가득히 끌어안았다. “라이언…” 아아. 미치도록 황홀한 감각에 그는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다음 순간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한 휴의 등을 쓸어내리며 그는 주문을 외는 것처럼 휴의 귓가에 키스했다.
“괜찮아요.” 라이언이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라이언은 그가 진정할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작정이었지만 코까지 훌쩍이며 울기 시작한 휴에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레이철의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는 듯 휴는 그에게 완전히 무너진 채 안겨 있었고 그는 조금씩 습해지는 어깻죽지에 고개를 모로 꼬아가며 말했다. “진정해요, 휴. 괜찮아요, 여기 있잖아요. 응?” 이어 헐떡이는 뜨거운 숨이 귓가에 닿았다. 서러운 울음소리가 정적을 가르며 그의 가슴팍을 웅웅 울리고 있었고 라이언은 슬프게 우는소리에 그를 살피려 휴의 어깨를 잡았다.
“휴,”
하지만, “싫, 싫어요,” 휴의 두 손이 다급하게 그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무척이나 슬픈 얼굴로 우는 휴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눈물만 뚝뚝 떨궈내고 있었다. “휴?” 뺨을 닦아내자 고개를 털어대며 자꾸만 품을 찾아드는 모습은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으나 곧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말들에 이번엔 그가 몸을 굳혔다. “제발, 싫어요. 떨어지기 싫어요… 밀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미안, 미안해요. 미안해요, 라이언. 잘못했어요. 거짓말이에요. 나도 이제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좋아요. 당신이 좋아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요… 참으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라이언은 화끈거리는 눈가에 입술을 물었다.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그는 상대를 진정시키고자 얼굴을 마주 보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휴, 나를 봐. 나를 봐줘요. 사랑을 나누던 밤처럼 그를 바라보며 가만히 손을 잡자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쓰던 휴가 천천히 눈을 맞춰 왔다. 벌써부터 붓기 시작한 눈두덩에 속이 상해 그가 안심할 만한 말을 고르려는데, 정신을 차린 듯 휴가 침을 여러 번 삼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연습이나 한 것처럼 너무나도 또렷하게, 똑똑히 꽂혀 들었기에, 라이언은 소리 없이 무너지는 심장을 추스를 새도 없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휴가 말했다. “후회하지 않아요? 거짓말한 내가 역겹지 않아요? 저는 이게 끝이에요. 더이상 당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모습 따위 없을지도 몰라요. 지겨울 거예요.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거고, 그게 어느 순간 무척이나 싫어질지도 몰라요.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몰라요. 난, 나는, 당신의 기대에 부응할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을 쉽게 홀릴 수도 없는, 웃기지만 그런 매력도 없는 주제에, 당신의, 당신의… 그런, 사람이 된다는 건…… 당신이 내가 자조적으로 구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지만, 미안해요, 사실, 사실, 음… 당신은 나에게 너무나 과분한 사람이어서… 믿기지 않아요. 언젠가 누군가가 찾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감히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만약, 정말, 당신이, 당신이 진짜로 나를…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이게 정말, 정말 마지막이라면……”
당신을 믿고 싶어요.
휴는 그가 잡고 있는 손을 꼭 마주 잡으며 숨을 골랐다. 이렇게 직접 닿는 온기에 소소히 기뻐하면서도, 라이언은 지금까지의 휴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이제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휴는 얼마나 많이, 또 자주, 이런 시간들을, 관계들을, 상처들을 혼자 감당해야만 했을까? 지금까지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이들은 그뿐만이 아니었음을, 라이언은 다시금 상기시키며 눈을 감았다.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낼 것처럼 구는 남자들을, 또 알파들을 휴는 지난 약혼자들을 제외하고도 수차례 겪었을 것이었다. 그는 제가 휴에게 무엇을 강요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면 보여달라는 식의 행동으로 그는 휴에게 억지로 선택을 강요했고, 또다시 홀로 겁에 질려있게 만들었으며, 그런 그를 몇 번씩이나 고통이 반복되었던 바로 그 자리로 불러들인 것이다. 라이언은 어리석은 제 행동을 뉘우치면서도 지금은 결코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휴에게 전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다르다는 것을. 이번은 다를 것이라는 것을. 당신을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때 휴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정말로, 나로도 괜찮은 거 맞아요?” 아무렇지 않은 말투를 흉내 내면서도 간절함이 깃든 그 물음은 결국 그를 무너지게 했다. “휴…” 라이언은 목이 메는 듯한 느낌에, 대답 대신 온 마음을 다해 휴를 품에 안았다. 그를 위로할 때면 했던 것처럼 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그는 언제든지 확인시켜 줄 수 있다는 듯 말했다. “네, 당신으로 충분해요.” 저는 당신이면 돼요, 휴.
그러자 휴가 다시 물었다. “진심으로요?”
“네. 진심으로요.”
방 안에서는 잠시 동안 서로의 숨소리만 들렸다. 라이언은 그가 불안에 떠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이렇게까지 많은 이들에게 버려지고 상처받아야 했던 그의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아깝게 느껴졌다. 사랑받아 마땅할 사람이 이다지도 많은 상처들을 견뎌야 한다는 건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만큼 잔인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휴가 조용히 뺨을 떼어내며 웅얼거렸다. “당신이 지금 거짓말을 한다 해도 믿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요.” 그는 젖은 눈가를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듣고 싶어요. 자꾸 욕심부려서 미안해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를 향한 두 눈동자가, 마치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처럼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있어요? 이런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 라이언은 저도 모르게 맺힌 눈물을 숨기지 않은 채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요, 휴. 보고 싶었어요. 나는,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그는 코끝이 찡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그의 볼에 입 맞췄다. 정말로요. 진심으로요. 어쩌면 평생토록.
휴는 살짝 그의 품을 벗어나 그의 얼굴을, 표정을, 혹은 모든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듯 쳐다보았다. 라이언이 말했다. “사랑해요.” 당신을 너무 사랑해요, 휴. 다음 순간 휴는 무척이나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톡, 하고 턱을 간질이더니 그림을 그리듯 천천히 볼을 타고 올라와 라이언의 눈가에 닿았다. 보이지 않는 마음 같은 건 믿을 수 없지. 언젠가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라이언은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제가 마치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처럼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존재가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고 그는 곧이어 그것이 제가 결심한 바와 같은 실제가 되었다는 것에 감격하며 다시 그를 품에 안았다. 인간은 거짓된 믿음으로 가득 찬 존재라는 뿌리칠 수 없는 상념들 속에서, 오로지 진실한 단 한 사람, 그는 휴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할 것이다.
틈 없이 맞닿은 사이에, 라이언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해요.” 그러자 휴가 그를 마주 안았고 언젠가 그가 그를 쓰다듬었던 것처럼 제 목덜미에 똑같이 고개를 파묻은 라이언의 등을 쓸어내렸다. 휴가 말했다. “라이언,” 이건 어느 밤처럼 또다시 그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순간이었기에, 라이언은 이날을 평생토록 잊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사랑을 하렴, 라이언. 사랑을 해. 어머니, 그는 되뇌었다. 저는 사랑하고 있어요.
그는 미치도록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고,
“나도요, 라이언. 나도 사랑해요.”
믿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52
함께하는 밤은 지난 시간들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라이언은 엉망인 셔츠를 휴의 옷가지로 갈아입으며, 반전된 상황을 즐기기까지 했다. “당신 냄새나요.” “음… 나쁜 냄새는 아니죠?” 샤워를 마친 휴는 젖은 머리를 털며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이제는 익숙하게 제 옆에 붙어 앉는 남자를 보며 라이언은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흐음, 샤워한 직후의 휴 마이클 잭맨이라니.” “그건 또 무슨 뜻이에요?” “무슨 뜻일 것 같은데요?” 그는 이미 몇 번이나 입술을 붙였던 뺨에 다시금 입술을 부볐다. “그만, 라이언. 그만해요!” 징그럽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키득거리는 얼굴이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라이언은 침대 위로 슬쩍 기대 누우며 그의 옆자리를 팡팡 두들겼다. “이리 오시죠, 여보.” 휴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그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그는 아직 촉촉이 젖어있는 휴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모로 누운 채 그를 바라보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그런 우스갯소리가, 왜인지 아주 이해하기 쉬운 말처럼 여겨졌다. 휴는 그의 손길을 받으며 나른하게 눈을 깜박이더니 더 가까이 다가와 마주 보며 누웠다.
휴가 말했다. “라이언,”
“네?”
“사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조금 뜸을 들이며 눈치까지 보는 그에 라이언은 눈썹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싶었다. 당신의 이야기라면 뭐든지. 휴는 잠시 동안 그를 빤히 보다가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말이에요…” 그는 진지한 얼굴로 휴를 바라보았다. 라이언은 얇은 입술 사이가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과 그가 가끔씩 뺨을 베개에 비비는 것, 눈썹이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을 모두 눈에 담으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야기는 꽤 길게 이어졌다. 라이언은 그동안 그가 불안해했던 이유들이, 지금까지의 그의 인생 가운데 차곡차곡 쌓였던 상처들의 흔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다를 사랑했던 소년이 왜 물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 다른 이들에게 허락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많은 순간 버려졌었는지, 또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도 왜 끝까지 믿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들을 수 있었고,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지만 마지막으로 그가 덧붙인 말에 모든 것이 녹아내렸다. 휴는 금세 물기가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고,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초조해 하고 있었다.
잠시 후 휴가 푹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에게만은, 모든 걸 다 말하고 싶었어요.” 그는 그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라이언을 올곧게 쳐다보았다. 휴의 손이 조심스럽게 제 볼을 향해 뻗어지는 걸 지켜보던 라이언은 조용히 눈을 감았고, 그의 손바닥이 마치 엄청난 보물을 쓰다듬듯 그를 어루만지는 손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렇게 모든 걸 털어놓는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건 마치 ‘당신에게 내 모든 걸 주겠어요’ 라는 말처럼 들렸기에 라이언은 이제 제 차례라 생각했다. 스르르 눈을 뜨며 그는 휴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입술 앞에 대고 그의 손 위로 깊게 입 맞추자 휴는 또다시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였고, 그는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주 옛날 옛적에, 라이언 로드니 레이놀즈라는 알파가 태어났어요…” 휴는 눈을 반짝이며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어쩐지 레이철의 집에서 보았던 어린 휴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기에, 라이언은 제 이야기 속 ‘라이언’이 동화 속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러 우스꽝스럽게 꾸며대며 이야기했다. 휴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주의 깊게 들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너무나도 빠져든 나머지 눈물까지 흘려보냈다.
“당신을 기쁘게 하려고 한 건데.” 라이언이 말했다. “휴, 울지 마요.”
“안 울어요. 이건 그냥 나도 모르게…”
“지금 엄청 빨간 거 알아요? 귀도 빨갛고 코도 빨갛고 입술도…”
그때 라이언의 엄지가 휴의 입술을 훑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는데, 당연하게도 묻지 않았다. 휴는 그와 결혼할 사이이지 않은가! 곧이어 둘은 아주 느리게 혀를 섞으며 흐트러지는 호흡을 마주 삼켰다. 입맞춤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한 몸짓에 라이언은 그의 아랫입술을 물고는 훌쩍 몸을 돌렸고 그 틈에 휴가 살짝 그의 위로 올라탔다. 맞닿은 아랫도리에 뜨거운 열기가 뭉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라이언은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휴,” 쪽 “정말 미안하지만,” 쪽 “여기서 일을 치뤘다간,” 쪽 “나는,” 쪽 “쫓겨날 거예요.”
다음 순간 휴가 이해한다는 얼굴로 침대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마지막까지 제 입술로 덮어내던 라이언이 뒤늦은 탈력감에 한숨 같은 숨을 내쉬며 다시 누웠다. 가슴팍의 압박감이 사라지자 호흡이 훨씬 수월해졌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라이언은 은근슬쩍 휴의 얇은 실크 잠옷—상아색 실크 천은 그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흣, 라이언,” 그의 허리선을 타고 재빠르게 가슴을 찾아 올라간 손가락이 뭉툭한 돌기를 문지르자 휴가 쓰러지듯 기대 안기며 중얼거렸다. “이건, 아, 으, 반칙이에요.” “이런, 명백한 실수예요. 으음… 그런데, 휴. 지금 잠깐 만져준 걸로 이렇게 느끼는 거예요?” 당신 너무 야하잖아. 그는 부러 얄미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고 당신보다는 다소 여유 있다는 행동을 취했다. 하지만,
“그건,” 휴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가 아닌 그의 어깨선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건, 당신이 만지니까…”
다, 당신이 만지니까 좋아서 그런 거예요. 이런, 맙소사. 라이언은 훅 들어온 순종적인 말투에 일순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결혼할 사이가 되면 그는 이렇게 변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지금까지 이런 휴를 휘둘렀던 이들이 (심지어 얼굴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무척이나 저주스러웠고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한 영악한 질투심을 느꼈다. “휴, 당신, 정말…” 라이언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휴에게 달려들어 둘의 위치를 반전시켰다. 휴는 또다시 순종적으로 다리를 벌리며 그를 위한 틈을 만들었는데, 그건 정말이지 너무나도 황홀한 움직임이었기에 라이언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저 정말 진짜 참고 있는데요, 휴…”
“……”
휴는 얌전히 그를 올려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아아. 정말이지. 너무 사랑스럽다. 라이언은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었다. “미안해요. 저는 당신 가족들에게 미움받고 싶진 않거든요…” 그 순간 휴의 얼굴 위로 아쉬움이 스쳐지났고 그는 놓치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해요.” 그의 품으로 파고들자 휴의 손이 꼼질거리며 허리를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어깨에 닿은 턱이 잘게 움직이는 것에 라이언은 그의 목 위로 짧게 키스했지만 이어진 휴의 말은 또다시 그의 마음을 흔들었기에, 결국 그는 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손으로도… 안 될까요?” 소, 소리를 안 내면………
라이언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렸다. 제게 닿은 휴의 두 눈동자는 마치 선물 가게에서 제가 받을 선물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런 아이 같은 제 남자를, 그는 사랑하고 있었다. 상아색 실크 잠옷 속으로 다시금 미끄러져 들어간 손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은밀한 곳을 찾기 시작했고, 그는 더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스스로 입을 덮은 상대의 손등 위로 입을 맞췄다.
라이언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소리 내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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