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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8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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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나더 이나더





 
13


“해명해요, 휴.”

아무래도 좋았지만 계속해서 바보같이 가만히 있는 것도 싫었다.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있던 휴는 은근히 투정 부리는 듯한 제 문자—무려 세 번에 걸친 추궁—에 져버린 듯 이렇게 답했다. ‘끝나고 봐요, 라이언.’ 그건 한편으로는 이제 더이상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뜻이었지만 그는 어느 정도 제 목적을 이뤄냈기에 기쁜 마음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3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만 축이던 라이언은 그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까의 벤치를 찾았다. 다시 그곳에 서 있자니 그 공간이, 벤치가 마치 그들만의 비밀 장소라도 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앞을 미리 내다보자면 그것 또한 맞는 말이지만 그 얘기는 조금 미뤄두기로 하자. 어쨌든 라이언은 ‘그’ 벤치에서 휴를 기다렸고 3시간 전 사라졌던 방향에서 잠시 후 나타난 휴는 조금 지친 듯 보였지만 살가운 미소를 띠며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끈질기네요, 라이언.” 못 말리겠다는 얼굴에 라이언은 어깨만 으쓱였다. “이 정도로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걸요.” 둘은 나란히 서서 걸으며 학교를 벗어났다. 휴는 제가 자주 간다는 카페 한곳을 추천했는데, 아무렴 어떨까 싶던 라이언은 아기자기한 내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를 지금, 남자 둘이 가자는 거죠?”

“견뎌봐요, 놀지.”

제게 윙크까지 날리며 문을 여는 휴에 라이언은 고개만 잘게 저었다. 겉으로 봐서도 그 둘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핑크빛 인테리어는 그를 무척이나 삐걱대는 사춘기 소년처럼 만들었다. 라이언은 제가 와서는 안 될 곳을 왔다는 듯이 최대한 구석으로 시선을 틀었다. 제발, 휴. 제 손톱만큼 남은 남성성을 지켜줘요. 휴는 그런 그의 표정이 재밌다는 듯 웃었고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그다지 튀는 자리는 아니었다. 라이언은 부러 몸짓을 부풀리며 숨을 내쉬었다. “식은땀 난 거 보이세요? 이렇게 예쁜 곳이라니. 당황스럽지만 이것도 좋네요.”

“흠?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휴는 자연스럽게 의자에 가방을 걸어놓으며 점원에게 손을 들었다. “사실 이야기를 나누기에 여기만 한 곳이 없어요.”

“많이 와보신 것 같네요.”

“네, 그럼요. 여기 디저트가 정말 맛있거든요.”

나름대로의 맛집이라니. 휴에게는 그런 리스트가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제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가 뭐랄까, 굉장히… 굉장히. 단어를 생각하고 있던 와중 다가온 점원에게 휴가 메뉴판을 팔랑대며 주문하기 시작했다. 휴는 케이크 두 개와 차 tea의 이름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듣도 보지 못한 이름이라 라이언은 또다시 놀라워하며 물었다. “지금 저희가 뭘 마신다고요? 봄봄의 빨간 스웨터요?”

휴는 이제 코까지 찡긋이며 말했다. “아, 라이언. 당신 정말 웃겨요.”

둘은 잠깐 동안 이 희한한 찻집의 차 tea 이름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라이언은 앞으로 절대 ‘보보의 보라색 콧물’은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대화가 끊겼을 무렵 둘은 서로가 왜 이곳을 찾았는지 되뇌기 시작했고 각자가 맡아야 할 역할에 대해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휴는 그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웃고 있는 얼굴이었기에 라이언은 (솔직히 말해) 약간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이렇게 누군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모든 걸 알고 싶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드디어 이 침묵을 깰 메뉴들이 등장했다. 라이언이 중얼거렸다. “빨간 스웨터 등장이네요.”

라이언은 제 앞에 놓인 익숙한 딸기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흐음, 그때 그 친구군요.” 예의 다정한 얼굴로 그의 포크까지 알뜰히 챙긴 휴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맛봐달라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라이언은 포크를 눕혀 들곤 케이크의 뾰족한 끄트머리를 갈랐다. 이어 작은 조각을 입으로 넣는 그 순간. 제 표정을 단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따라붙는 눈동자에 그는 과하게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혀를 놀렸다. “와우, 음, 끝내주네요. 휴. 당신이 왜 그런 사진을 보냈는지 알겠어요.” “그렇죠?” 휴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운 듯 보였고 라이언은 그의 웃는 얼굴이 좋았다.

이어 고풍스럽게 세팅된 찻잔 안으로 봄봄인지 봉봉인지의 빨간 스웨터…가 가득 찼고 라이언은 붉고 투명한 것으로 따뜻하게 목을 축였다. 똑같이 잔을 들고 차의 맛을 보던 휴가 이제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듯 팔꿈치를 테이블에 기대며 몸을 기울였다. “목이, 조금 안 좋아요.” “아.” 라이언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냥 가끔 조금 심할 때가 있어요. 목소리가 안 나올 만큼.”

라이언은 진지한 자세로 들었다. “일부러 속이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물론, 당신을 놀리려던 것도 아니고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휴는 두서없이 시작한 말들을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그에게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말투는 무언가를 해명하는 것처럼 들렸으나 한편으로는 진실한 고백 같기도 했다. 당신을 처음 봤던 날은 목이 좋지 않아서 목소리가 조금, 뭐랄까 듣기 좋지 않았거든요. 그럴 때는 가끔 그렇게 숨기도 해요. 때로는 그 편이 더 편하기도 하고요. (웃음) 그래도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해명이 필요하다고 했죠? 사실 별 얘기 아니었는데, 당신이 너무 놀란 것 같아서 사과를 하고 싶었어요……

사과라니. 그건 당치도 않았다. 제가 장난삼아 추궁해댄 것이 그를 부담스럽게 했다니. 라이언은 다급하게 말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휴. 이건 그냥…” 그리고 바로 이어진 이 잠깐의 순간. 라이언은 제 앞에 있는 남자의 두 눈을 들여다보며 아주 잠깐 동안 망설였다. 은근하게 선을 지키며 행동하고 있는 둘 사이에서, 그는 제가 있는 그대로의 그 자신을 내보여도 되는지 고민했다. 이후에 또 속는 건 아닐까? 하지만 휴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를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라이언?”

입을 그대로 벌린 채 굳은 그를 보며 휴가 물었다. “괜찮아요?” 흔들리는 갈색빛, 혹은 짙은 초록빛 두 눈동자가 마치 그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라이언이 말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휴. 이건 그냥…”

휴는 계속해 보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고 그 얼굴을 빤히, 깊게 마주 보던 라이언이 손을 뻗었다. 휴의 턱 끝으로 살짝 번진 생크림을 엄지로 닦아내자 그 손길에 화들짝 놀란 휴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뒤로 몸을 물렸다. 쨍그랑! 포크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라이언은 그런 그의 모습을 모두 눈에 담았다. “이건 그냥, 작은 핑계일 뿐이에요.” 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왜냐고? 그야 당연히…

그가 말했다.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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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얼굴을 보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티가 날 정도로 허둥대진 않았지만 휴는 잠시간 말을 고르다 결국 말없이 제 손끝을 보았다. 라이언은 그저 미소 지었다. “부담 가지지 말아요, 휴.” 그는 아직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상대가 말할 때면 경청하면서도 곧게 뻗어오는 그의 시선, 휴의 두 눈을 믿고 싶었다. 이후 둘은 오가는 말없이 조용히 찻잔을 기울였다. 라이언의 빨간 스웨터가 사라지면 휴가 채웠고 반대의 경우에는 그가 손을 뻗어 휴의 잔을 채웠다. 부드럽게 입안을 감싸는 생크림과 새콤한 딸기는 맛이 좋았고—직원은 친절하게도 새 포크를 가져다주었다—이제서야 긴장하기 시작한 듯 보이는, 휴의 뻣뻣한 몸짓을 보는 것도 기분 좋았다.

접시와 찻잔이 모두 비워질 때 즈음, 라이언이 아직 남은 궁금증이 있다는 듯 팔짱을 끼곤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그럼 수화 신청서는 뭐예요? 사실 당신에게는 필요 없는 거 아닌가요?” 그러자 휴는 곧바로 아까의 그 ‘휴 잭맨’으로 돌아왔다. 부끄러워한 적 없다는 듯이. 아까의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아, 그건.” 휴가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은 뒤라 라이언은 그의 입술을 보며 기다렸다.

“제 친구, 그러니까 (사실 친구라기에는 제가 나이가 많지만) 벤자민이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요?”

“벤자민은, 그런 걸 내보이기 어려워할 때가 있어요.”

“……”

맙소사. 이 남자는 도대체 뭘까? 그러니까 지금, 제게는 해당사항도 없는 일을 벤자민을 위해 했다는 건가? 아무 욕심 없이, 오직 타인을 위해, 타인의 편안을 위해. 그런 일을,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게 분명한 일들을 굳이 해내고 싶어하는 건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 라이언은 휴를 경이롭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 눈을 깊게 감았다. 너무, 착해, 빠졌군. 그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곤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라이언?” 또다시 따라붙는 그 눈빛. 라이언은 제가 아무래도 정말 잘못 짚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는,

“휴, 당신, 혹시 날개 숨긴 거 없죠?”

이 남자는 망할 천사가 분명해!

“네?”

“천사냐고요. 뭐 하늘에서 소원 들어준대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

그에 휴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우스운 나머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라이언은 다시 그를 마주 보며 “당신은 정말 놀랍다” 며, 솔직히 “남을 그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줄 몰랐다” 고 말했고 휴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친구니까요.” 라이언은 절로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저도 당신의 친구가 되면 그런 호의를 받을 수 있나요?”

“오, 놀지.” 휴는 마지막으로 빨간 스웨터를 삼켜내곤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우리는 이미 친구이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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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가게 밖을 나선 뒤 아직 한적한 길을 걸었다. 라이언은 제가 그와 더 함께 있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휴를 몰아세우고 싶진 않았다. 그들은 도시의 사거리 앞에서 인사를 나눴다. “여기서 헤어져도 괜찮을까요?” 그는 정중하게 물었고 휴는 그의 친절에 미소로 답했다. “네, 혼자서도 괜찮아요.” 보통 저를 그렇게 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순간 라이언은 저도 모르게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보는 사람—이라는 건 아무래도 그를 오메가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네?”

“그런 자조적인 표현 말이에요. 당신과는 안 어울려서.”

“……”

이번에는 휴가 굳은 듯 멈춰 선 채 그를 바라보았다. 라이언은 제 말에 더 무게를 싣기 위해 눈썹을 들고 진지하게 끄덕여 보였다. 진심이라는 듯이. 휴는 입술을 다물곤 다시금 고개를 숙이더니 곧 웃어 보이며 말했다. “당신은 친절한 사람이에요, 라이언.”

“제가요?”

“네.”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데요.”

“그럼 그 말을 더 믿도록 해요.”

허. 그는 또다시 헛웃음이 터졌다. 라이언은 오늘 하루 동안 몸의 가장 안쪽에서 일어난 변화—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감각 또는 느낌—에 그의 ‘알 수 없는 상태’ 가 꽤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무슨 느낌일까? 어떤 얼굴로 그를 대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에 빠져 한눈을 판 사이, 휴가 눈을 맞춰오며 (세상에, 그는 저를 봐달라는 듯 정말로 눈을 맞추려 시도했다!) 말했다. “잘 가요, 라이언.”

그를 여전히 마주 보면서 천천히 뒷걸음으로 걷는 휴의 모습은, 마치 어떤 영화에서 감독이 주인공을 향해 시선을 떼지 않으려는 장면처럼 강하게 다가왔고 라이언은 또다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아마도 무척이나 멍청한 얼굴이었으리라. 뒤를 돌기 전, 마지막으로 끝끝내 시선을 맞추던 휴가 정말이지,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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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둘 사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조금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라이언은 지금과 같은 그의 마음이라는 것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제가 휴를 (약간이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정말로, 또 살짝 충동적으로 휴의 앞에서 휘둘리기도 했다. 교내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 같던 그들은 어느새 약속을 잡아 만나기 시작했고 그러지 않을 때에도 종종 휴의 벤치에서—라이언은 그 벤치를 그렇게 불렀다—만나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거나 햇볕을 받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이 모두에게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들의 우정이 약 한 달간 지속되고 있었을 때, 라이언은 생각보다 제가 이 문제를 너무 안일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출할 서류가 있어 잠시 밖을 나섰던 그가 되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그 벤치 앞을 지나길 고대하고 있었기에 그는 곧바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고, 라이언은 당연하게도 걸음을 옮겼다. 휴는 평소 즐겨 하던 것처럼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의 주변으로 지나가던 몇 사람이 멈춰 서더니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는 사이라고 하기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고 라이언은 그들이 하는 말들을, 또 그 앞의 남성 오메가를 희롱하며 부는 휘파람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휴! 여기 있었네요.”

“아, 라이언…”

그는 일부러 불쑥 끼어들며 휴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 미안하지만 친구들. 내가 이 분이랑 약속이 있어서.” 움찔거리며 몸을 뒤로 물린 이들은 그의 이름을 서로 속삭이더니 곧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웃기지도 않는 애송이들이었다. 라이언은 휴를 살폈다. “괜찮아요?” 잠시 동안 표정이 굳은 듯싶던 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갔다 와요?” “아, 잠깐 심부름 같은 거요.” “아.” 라이언은 시간을 확인하곤 살짝 떨어져 그의 옆에 앉았다. 

쑥덕거리는 소리들을 몰랐다고 하기에는 변명밖에 되지 않겠지. 라이언이 말을 고르는 사이 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미안해요.” 도대체 뭐가? 그가 고개를 돌려 휴를 바라보았다. 휴가 말했다. “그냥, 당신이 곤란해지는 건 싫어요. 정말이에요. 혹시 소문이라도 나면…”

“휴. 이런 건 아무 문제 없어요. 우린 친구잖아요, 그렇죠?”

“……”

“설마 겨우 이런 일 때문에 저를 내치려는 건 아니겠죠?”

의기소침해진 휴라니. 근 한 달간의 우정을 지속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휴는 진심으로 상대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처럼 진심으로 상처받았고, 그럴 때면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해진다는 사실이었다. 라이언은 지금이 바로 그런 때—아주 가끔 일어나는 자조적인 휴가 나타나는 때—라고 생각했고 그를 웃게 만들고 싶었다. “지금 저를 내치려는 건가요, 휴? 정말로요?” 애써 불쌍한 표정까지 지어 보이자 졌다는 듯 휴의 입꼬리 끝으로 스멀스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럴 리가요. 울지 마요, 라이언.”

어린애를 다루 듯 다정한 말투에 저절로 웃음이 걸렸다. 라이언은 햇볕을 받은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하는 말은 모두 믿을 수 있겠다는 다소 엉뚱하고 어리석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대로라면, 그는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휴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라이언.” 곧게 뻗은 시선이 마주 닿자마자, 라이언은 제가 이제 제법 진지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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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진지해졌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을 때, 마치 신이 당장 그 선택을 종용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일이 벌어졌다. 그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마주함과 동시에,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까지 알게 되었기에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라이언은 어떻게 보면 제가 또 한 번 휴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건 아주 작은 의심의 꼬투리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가슴속 깊이 묻어둘 수 있었다. 문제는 휴가 누군가의, 그러니까 한 알파의 약혼자였다는 사실이었다.

라이언은 우성 알파 가문에 걸맞게 때때로 중요한 인물들이 주최하는 파티에 초대되곤 했는데, 주최자들이 그를 초대하는 건 단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참석하지 않아도 될 뻔했으나 미스터 레이놀즈의 호통에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였다. 한 정치계 거물의 대저택에서 벌어진 파티는 돈바른 티가 빤히 보일 정도로 휘황찬란했고, 샴페인에 캐비아, 잘 다진 사슴고기로 만든 고급 요리 또한 눈에 띄었다. 라이언은 테라스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자리한 수영장을 지나쳐 우글우글 모여든 사람들을 비켜 걸으며 구석진 자리로 피신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는 그의 시선을 여느 때처럼 사로잡은 얼굴에 깜짝 놀라며 한걸음에 다가갔다.

“휴?”

정원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유리 테이블에 앉아 있던 휴는 그를 확인하자마자 반가워하는 것 같긴 했지만 애매한 표정이었다. 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라이언,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그야…” 초대를 받았으니까. 그렇지만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훅 다가온 검은 그림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라이언은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그를 향해 다짜고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미스터 레이놀즈!”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에게 그런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제리 윌슨이에요. 그냥 제리라고 불러주세요.” 라이언은 애써 웃으며 시선을 돌리려 했으나 그가 다 알고 있다는 듯 휴의 허리를 세게 끌어당겼다.

“제 약혼자하고 아는 사이이셨나요?”

“… 아, 친구입니다.”

휴는 조금 굳은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게, 뭐지? 라이언은 갑자기 닥친 상황에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우습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곤란한 듯 보이는 휴의 모습은, 지금껏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약혼자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휴.” 휴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눈을 돌렸다. 다음 순간 제리가 손에 힘을 주며 그를 희롱하듯 끌어안았고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휴는 라이언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피했다.

“이런, 친구 앞에선 많이 부끄러운가 봅니다.” 제리가 말했다. “파티 주최자의 아들이다 보니 인사드릴 얼굴들이 많네요. 미안합니다. 어쨌든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레이놀즈.”

라이언은 마침내 그의 손을 잡고 마주 흔들었다. “그럼요.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를 나눠보죠, 윌슨.”

그는 마지막으로 끈덕지게 휴에게 달라붙더니 귀 끝을 살짝 깨물었고 그가 떠난 후 남은 두 사람 사이로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제리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서, 휴는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라이언은 그에게 또다시 해명을 요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건 그때와는 다른 경우라고 여겼다. 장난으로라도, 그는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휴는 제가 그를 볼 때면 그랬던 것처럼 넋이 나간 듯 보였고 라이언은 그에게 잠깐의 시간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실 것 좀 가져올게요.”

휴는 번쩍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더니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은 곧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다시 비집고 걸으면서 밖에서 안으로 들어섰고 기다란 복도 쪽으로 몸을 틀었다. 다소 시끌벅적한 공간과 구분되는 곳을 걷던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골랐다. 아까의 그 장면이 누군가 끊기지 않는 비디오를 재생시킨 것처럼 계속해서 떠올랐고 자꾸만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거짓말, 또 속았어. 하지만 그는 그런 것보다 더, 스스로가 휴의 상태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졌다. 이제 속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휴의 떨리는 숨결이, 불안한 동공이 라이언을 우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긴 숨을 한번 내쉰 뒤 다시 발을 돌렸다. 라이언은 지나가던 웨이터의 은색 쟁반 위로 놓인 샴페인 두 잔을 들고 다시 밖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그가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다면, 이러한 파티에는 항상 중요한 자리라는 사실을 깜빡한 머저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라이언은 밖을 나서자마자 제 눈앞에 보인 상황에 눈을 크게 떴다. 알파임이 분명한 남성들이 휴를 수영장으로 몰아세우고 있던 것이다. 주변 모두가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었고 그건 무척이나 끔찍한 장면이었다.

“휴!”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휴의 얼굴이 그를 향한 그 순간. 그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의 손이 뻗어져 나왔다. 풍덩! 휴는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그대로 물속에 빠졌다. 라이언은 미친 것이 분명한 이들을 지나쳐 빠르게 뛰어들었다. “어머!” 그의 모습을 보고 소리친 어떤 여성의 목소리를 끝으로 그는 물에 잠기 듯 가라앉았다. 휴와의 우정에서 그가 알아낸 것이 있다면 휴는 단것을 좋아하고, 때때로 상처받기도 하며, 아버지가 메모해 놓은 것처럼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담담하게 잘 해낼 줄 아는 그가 단 하나,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물이었다.





 
18


“괜찮아요, 괜찮아요.”

아주 잠깐 허우적댄 것에 불과한데도 휴는 발작적으로 기침을 토해내며 그를 끌어안았다. 아이처럼 제게 달려드는 그의 몸을 받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지만 라이언은 애써 침착한 척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푹 젖은 그의 뺨으로 떨리는 더운 숨이 닿았다. “괜찮아요, 진정해요, 휴.” 휴는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후 관리자로 보이는 이들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고, 라이언은 조금씩 움직이면서도 휴를 놓지 않았다.

사위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파티는 중단되었고 아까의 그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먼저 건져 올려진 휴의 옆으로 다가가 커다란 수건으로 휴의 몸을 감쌌다. “괜찮아요, 휴?” 휴는 멍하니 제 젖은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가 말을 걸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라이언은 입술을 씹으며 주변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는 아직 멍한 정신의 휴를 일으키며 자리를 떴다. 그는 진정할 필요가 있었고 이런 곳에서 그런 게 가능할리는 없었다.

다행히 이 소동이 주최자에게도 전해졌는지 아까의 제리가 나타나 그들을 2층의 작은방으로 안내했다. “올라가서 잠깐 쉬시죠.” 제리는 휴의 꼴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는데 제가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내렸다. 라이언은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휴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단단하고 밝고 씩씩해 보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곳에는 그저…

“미안하지만, 됐습니다.” 라이언이 말했다. 그는 보란 듯이 휴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더이상 머물고 싶지 않네요. 오늘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예? 미스터 레이놀즈, 저기,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약혼자분은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 편이 오늘, 제 친구에게도 좋을 것 같네요. 또 파티의 주인공께서 자리를 비워서야 되겠습니까.” 그는 이것이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고 그들은 감히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제리는 분하다는 표정으로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휴를 노려보았으나 결국 옆으로 비켜섰다.

“그럼.”

라이언은 손에 힘을 주고 걸었다. 그들을 향해 몇십 개의 눈동자가 따라붙었으나 그는 아랑곳 않고 앞서 걸었다. 뒤쪽으로 조금 끌려오듯이 걷는 발소리가 들렸다. 라이언은 이로써 그가 휴의 다른 면을, 혼자일 휴에게 일어났을 일 모두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의 진실을 알고 싶었던 마음이 우습게도 진짜를 보게 되자 오히려 그를 괴롭게 했다.

그렇기에 라이언은 난생처음, 누군가의 숨겨진 비밀을 알아낸 제가, 평소처럼 자랑스럽지 않았다. 여태껏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스스로가 무척이나 혐오스러웠다.





 
19


라이언은 제 안에 꼭 들어맞는 손을 느끼며 걸었다. 막상 이런 식으로 그와 닿게 되니 지금껏 제가 휴와의 관계에서 원하던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조금 끌려오는 듯 걷던 발소리가 제 박자를 찾으며 걷기 시작하자 속도를 늦췄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 찾아든 밤이었고 쌀쌀히 불어드는 바람에 그는 몸이 떨렸다. 점점 온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잠깐 동안 제가 실수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갑자기 뒤쪽으로 끌리는 손에 의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휴?”

휴는 조용히 손을 빼고는 이제 됐다고 말했다. “지금은 너무 늦었어요. 집 앞까지 바래다 줄게요.” 라이언은 휴의 갈라지기 시작한 목소리를 들었다. “괜찮아요.” “아니요, 휴. 고집부리지 말아요.” 감기에 걸리면 어쩌지. 그는 뒤를 돌아 휴를 마주 본 상태에서 그의 어깨를 덮고 있던 수건을 가슴팍 앞으로 여며 잡았다. 휴는 그런 그를 꼼꼼히 지켜보면서도 말이 없었고 라이언은 휴의 손을 끌어다 다시 잡았다. 둘은 도시의 사거리를 지나, 휴의 집이 자리하고 있는 골목길 사이로 접어들었다. 몇 분 동안 오가는 대화 없이 걸었고 마침내 휴의 집 앞 대문에 다다랐을 때, 라이언은 손을 놓았다.

“… 미안해요.” 휴가 말했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요.”

약혼자 얘기였다. 라이언은 상관없다고 웃으며 그를 들여보내려 했지만 휴는 끝까지 다 뱉어야 한다는 것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거짓말하려던 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냥… 모르겠어요. 라이언, 당신과 있을 때면 너무 즐거웠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깜빡하고 잊을 때가 있는데, 저도 모르게 그게 좋았던 거 같아요. 다 잊을 수 있으니까요. 사실, 저는 그다지 재미없는 사람인데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그런 좋은 사람은 못되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휴는 헐떡이는 숨을 잠깐 고르더니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그런데 당신하고 있을 때면 제가 꼭, 정말, 좋은 사람이 된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게, 그게 너무…… 결국 말끝을 흐리기 시작한 휴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라이언은 충동적으로 그에게 한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그가 한마디라도 더 한다면, 더이상 멈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휴.” 휴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라이언은 가까워진 거리만큼 그의 코앞에 놓인 얼굴을 빈틈없이 훑어보았고, 다음 순간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뺨을 감싸 안았다. 촉촉이 젖은 눈동자, 흔들리는 목울대, 축 늘어진 눈썹, 그런 것들을 빠짐없이 눈에 담은 라이언이, 곧 참을 수 없다는 듯 달려들었다.

“눈 감아요.”





 
20


열린 입술 사이로 파고 들어간 라이언은 얌전히 그의 입술에 응하는 휴를 바짝 끌어안았다. 그는 아까의 제리의 손이 닿았던 허리를 잡아당겨 제 품에 가두면서도 한 손으로는 턱을 틀어쥔 채 깊숙이 키스했다. 휴는 떨리는 호흡을 어쩌지 못하면서도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첫 번째 입맞춤은 짧았다. 떨어진 입술 새로 가쁜 숨을 뱉어내면 서로의 입김이 서로에게 닿았다.

“난 약혼자가, 있어요.”

휴가 말했다. 이제 와서는 전혀 소용없는 말이었다. 라이언은 아직까지 젖은 옷을 입고 있는 둘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는 앞으로의 제 삶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또 다른 속도로 내달릴 것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제 더이상 누군가의 거짓이니 진실이니 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제가 믿을 수 있는 진실은, 이제부터 오로지 이 남자일 것이니.

라이언이 말했다. “나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