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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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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6


“왜 신청이 안 된다는 거죠?”

라이언은 제게 다시 되돌아온 종잇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불과 5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의아한 얼굴의 그를 보며 주변을 살피던 담당자는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더니 그에게 손을 까딱였다. 라이언은 허리를 숙였다. 담당자가 속삭였다. “이건 잭맨이잖아요.”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일그러뜨렸고 담당자는 눈을 뒤집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신청서를 제출할 수 없어요.”

“왜죠?”

“정말 죄송하지만, 이렇게 서명하신다면,” 담당자의 손가락이 그가 제출한 종잇장 위 서명란을 가리켰다. “제 대답은 똑같을 수밖에 없어요. 미스터 잭맨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이어 그는 무슨 퀴즈쇼에 힌트라도 주듯 윙크하며 덧붙였다. “학교 규칙을 확인해 보세요.” 허. 라이언은 남자가 똑바로 짚었던 이름을 허무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결국, 휴 잭맨이기 때문에, 그가 남성이면서 또 오메가이기 때문에, 간단한 종이 한 장으로 해결될 일이 이렇게나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게 그렇게나 문제란 말인가?

형질에 의한 계급사회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이런 식으로 겪게 되니 상당히 불쾌하게 느껴졌다. 알파와 베타, 오메가로 나누어진 세계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것은 단연 알파였지만 다수를 이루는 것은 베타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락된 모든 것들에서 점차 차등적으로 차별되는 건 오메가였고 그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은 남성 오메가들의 차지였다.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것들을 감사히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

“그럼 제 이름으로 신청하죠.”

담당자는 그런 술수는 제게 통하지 않는다는 듯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학교 관계자만이 신청 가능합니다, 선생님. 학생 또는 교직원이어야 된다는 뜻이죠.”

젠장할.

“물론 이것도 내부 공지사항에 안내되어 있는 내용이랍니다.”

라이언은 갑자기 휴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저히 그런 웃음을 달고 살 수 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모욕과 불쾌한 시선들, 또 그와 같은 사람들을 짓밟으려는 비틀린 욕망들에 당당히 맞서 걷고 있었다. 휴의 비밀은 도대체 뭘까? 어쨌든 이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걸 깨달은 라이언은 종이를 들고 일어섰다. 그의 주먹 안으로 종잇장이 틀어진 마음처럼 구겨졌고 그것은 곧 문 앞의 쓰레기통으로 처박혔다.





 
7


그날 저녁, 라이언은 저녁 식사 자리에 오랜만에 엉덩이를 붙였다. “라이언.” 그의 아버지가 흘끗 그를 보며 인사했고 그는 얌전히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저녁 상은 늘 그렇듯이 레이나가 도움을 주었다. 오전에 먹다 남은 독일식 빵과 잼이 식탁 가운데에서 뒤쪽에 자리했고 라이언은 레이나가 가져다 둔 것이 분명한 닭 요리를 중앙에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제가 허둥지둥 만들어낸 샐러드까지. 레이나는 그들의 맞은편 빨간 지붕 밑에 사는 이웃으로 남성 둘만 남은 삭막한 공간에 가끔씩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는 사람이었다. 그는 제가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는 한참 지났다고 여겼지만 사실 집안에는 그런 손길이 요구될 때가 있었기에 감사히 여겼다.

그렇지만 레이나는 그들의 하녀나 어머니 또는 부인의 역할을 자처하며 나서진 않았다. 라이언은 그녀가 보이지 않는 선을 지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닭 요리는 푹 익은 감자와 브로콜리, 당근이 절여진 소스가 일품이었다. “음,” 라이언은 괜스레 감탄하는 척하며 식사를 즐겼다. “이거 정말 죽이는데요.” 아버지가 동의하듯 눈썹을 들썩이며 칼질을 계속했다. 한동안 대화는 오가지 않았고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음식을 씹는 소리, 그리고 숨소리만이 들렸다.

식사를 다 마친 후 접시들을 식기세척기에 넣은 라이언은 그의 아버지가 매일 밤 한 잔씩 즐길 것임이 분명한 와인을 찾았다. 그는 오늘 급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위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라이언은 부엌 등을 켜고 식탁 바로 옆에 자리한 조명 스위치를 올렸다. 은은한 주홍색 빛이 상석에 앉은 그의 아버지의 왼쪽 뺨을 물들였다. 그는 와인 잔 두 개를 내려놓으며 아버지의 왼편에 앉았다.

“할 얘기가 있구나, 그렇지?”

눈치 빠른 노인네. 라이언은 수긍하듯 각각의 잔에 적당한 양의 와인을 따랐다. 윌리엄이 말해보라는 듯 금세 한 모금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라이언은 제 몫의 와인 잔을 제 앞에 끌어당기며 잠시간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짙은 빨강의 물결이 그가 손짓하는 대로 찰랑이며 흔들리고 있었다. 라이언이 말했다. “오늘 낮에 잠깐 학교를 둘러봤는데요, 나쁘지 않던데요.” 아버지는 픽 웃음 지으며 다시 잔을 들었다. 그는 에둘러 말하는 데엔 여전히 재능이 없었다. 결국 라이언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 연구실에 잠깐 들렸는데, 아버지 학생 중에 휴라고…”

“잭맨 말이냐?”

“오, 바로 아시네.”

“당연하지. 아끼는 제자거든.”

흐음. 라이언은 이렇게 쉽게 인정하는 아버지의 말투가 묘하게 느껴졌다. 혹시 이거 가면을 벗기기 전에 다른 걸 벗기는 거 아니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떠올랐지만, (아버지가 설마!) 그는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상념을 떨치고는 다시 물었다.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얘기하시다니, 정말 열심히 하는 학생인가 보네요. (그런데 그가 왜 이제서야 공부를 시작했는지 그게 좀 궁금하긴 하지만, 어, 네, 쓸데없는 소리는 안 할게요.) 아무튼 과제물을 제출하겠다고 찾아왔을 때 제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얼결에 받은 부탁이 있어서…”

윌리엄은 예상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화 서비스 말이지?”

“네, 맞아요.”

“그건 내가 해결하마.”

묻지도 않고? 그의 얼굴에 또다시 의아함이 담기자 아버지는 이미 비워낸 잔을 가리켰다. “한 잔 더. 그리고 신청서는 계속해서 내가 제출했으니까, 그건 내가 하겠다는 얘기야. 더는 묻지 마라.” 라이언은 깜짝 놀라며 두 손을 들었다. “알겠어요. 제가 뭘 어쨌다고.” 그는 결백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잔을 채우는 그의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던 윌리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난 네가 그런 얼굴을 할 때를 잘 안다, 라이언.”

“제가 무슨 얼굴을 했다고 그러세요?”

“그 표정 말이야. 누군가의 비밀을 캐내고 싶다는 그 장난스러운 표정.”

“이런. 앞마당에 좌판이라도 까세요, 아빠.”

“어쨌든, 아들아. 내가 널 다시 학교로 불러들인 건 네가 뭐라도 했으면 싶어서야.” 또 시작되었군. 라이언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레퍼토리라는 듯 미소만 지었다. “가을학기 동안만이라도 정말, 진지하게 네가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구나.” 라이언은 이 대화를 가장 빠르게 끝내기 위해선 오로지 착한 아이처럼 굴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네, 알겠어요.” 귀에 딱지 앉겠어요, 아빠. 하지만 윌리엄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불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라이언, 난 경고했다.”

“뭘요?”

“휴 마이클.”

갑자기 그 이름이 튀어나오자 라이언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휴가 왜요.”

“괜한 장난질이라면 그 애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뜻이야.”

오, 이런. 이거 정말 돗자리라도 깔아야겠는걸. 새로운 먹잇감을 찾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조금, 아주 조금 다른 경우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그의 집요함을 걱정하고 있었다. 거짓과 진실, 사람의 양면성에 희한하리만치 집착하는 성정은 오랜 시간 어른으로 살아온 이의 눈을 피하기엔 아직 어린아이의 투정과도 비슷했던 것이다. 라이언은 어깨를 으쓱이며 “괴롭히려는 건 아니에요.” 라고 말했고 그의 아버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저 궁금할 뿐이죠.”





 
8


가을이 다가오는 만큼 해는 짧아졌고 공기가 서늘해졌다. 며칠 전보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코끝과 뺨을 스쳐 지났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걸으며 라이언은 점점이 불을 밝힌 공간들을 훑어보았다. 진한 밤이 내려앉으니 각각의 불빛들이 더욱 따스하게 보였다. 문득 그는 올해의 봄과 여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했던 말에 제가 그다지 반박하고 싶지 않았던 건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조금 춥네. 라이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얇은 긴팔 차림이었는데, 손끝이 시린 감각에 두 손을 마주 비비다 결국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렇게 무턱대고 외로움이 찾아드는 밤이면 그는 그의 손을 덥혀줄, 혹은 온기를 나누어줄 누군가가 절실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잠깐의 만남으로 위로받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는 이제는 정말, 진짜를 원했다. 아마 그래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라이언은 주머니 속 손을 꼼지락거리다 무언가 생각난 듯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걸음까지 멈춘 뒤 머뭇거리며 입술을 씹기를 몇 번. 곧이어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글자를 만들어 냈고 화면으로 떠오른 말풍선과 작은 ‘전송 완료’ 문자를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다음은? 그리고 그다음은?

그는 이상하리만치 설레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9


“밤이 이제 꽤 춥네요, 지금 뭐 해요?”  21:40

“오, 이런. 이거 너무 전 남자친구 말투였나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오늘 오후에 요청한 거 잘 처리했다고 전해주고 싶어서요. 네, 맞아요. 당신이 청부한 타깃 제거 건 말이에요.”  21:47

“설마. 기억하죠? 당신의 비밀 친구, 제이드 패트릭이요.”  21:50

“저기요? 여보세요? 분명 누군가 이 메시지를 읽은 게 확실한데 아직까지 답이 없네요. 이제 제법 멍청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21:54

“정말 제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면, 흠, 글쎄. 휴, 저예요. 라이언이요. (좀 창피하네요)”  21:56

“계속해서 혼자 떠들고 있네요. 어쨌든 제가 아직 출근 전이란 걸 깜빡했지 뭐예요. 그래서 사실 첫 시도에 완벽히 성공해 내지는 못했어요. 네, 바로 그 종이 한 장을 제출하지 못해서요.”  21:57

“그래서 결국 저는 제 유일한 권력을 사용하기로 했죠.”  21:57

“아빠 찬스를 썼어요.”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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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라이언. 당신 정말 웃겨요.’  22:00

“드디어!”  22:00

“제가 허공에 대고 이야기한 건 아니란 걸 증명해 주셔서 감사해요.”  22:00

‘사실 제가 손이 그리 빠르지 못ㅅ해서요. 재미있네요.’  22:01

“제가요? 저는 그다지 재미있지 못한 사람인데요. 그렇게 얘기해 주니 고맙네요, 휴. 정말 고마워요.”  22:01

‘지금 장난하는 건가요? 의미를 잘ㄹㄹ 모르겠는데.’  22:02

“무슨 의미요? 아무 의미 없어요. (놀리는 거 맞아요)”  22:02

‘그럴 줄 알았어요. 그ㅡ런데 제 번호는 어떻게 알았나요?’  22:03

“저희 대단하신 아버지의 노트를 슬쩍했어요. 혹시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22:04

‘아니에요, 그런 뜻으로 물은 건 아니었어요. 그냥, 궁금해서요.’  22:04

‘(대왕웃음이모티콘)’  22:05

“맙소사. 당신, 뜬금없이 아주 크게 웃고 계시네요. 아무튼.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제가 당신 전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물론 그냥 순수한 물음이에요.”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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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2:10

“세상에! 휴. 저희 서로 알게 된 지 24시간도 안 된 거 알고 있죠? 이런 사진을 보낸 걸 알면 저희 아빠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22:11

‘정말로요??? 미스터 레이놀즈는ㄴ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22:12

“당신 정말 앙큼하군요.”  22:12

‘하하, 정말이지. 재미ㅣ있어요. 물론 딸기 케이크가 당신에게 그렇게ㅔ 야할 수 있다니 놀랍네요.’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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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고마워요, 휴. 덕분에 집에 오는 길 심심하지 않았네요.”  22:39

‘잘 들어갔나요? 밤이 춥다면서ㅓ요. 감기 조심해요, 라이언.’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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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묻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신청서도요.’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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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말씀을요. 잘 자요, 휴.”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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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요, 라이언.’  23:30





 
10


근 한 시간 반 동안의 대화는 라이언과 휴 사이에 뻗어진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라이언은 손가락을 놀리는 동안 마치 휴와 직접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건 그에게 있어 실로 오랜만에 주고받는 상대와의 진정한 상호작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라이언은 휴대폰 뒤에 숨어 있는 동안 상대가 거짓을 말하는지, 그를 꾀어낼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자세 또는 행동으로서 그를 시험하고 있는지 계산하거나 가늠해 보지 않아도 되었다. 실제로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는 상태에서의 대화는 무엇보다 피곤함을 덜어주었으므로. 반면 그런 상태이기만 해도 극도의 편안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는 제가 생각보다 많이 지쳐 있음을 깨달았다.

둘의 대화 속 숨겨진 이야기는 물론 존재하지만, 그건 짚고 넘어가야 할 만큼 중요하진 않다. 라이언은 굿나잇 인사를 마지막으로 한순간의 꿈같은 상태—하루가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일어난 이 모든 일에 대해—를 시간순으로, 또 순차적으로 되짚어보며 침대에 누웠다. 샤워를 마친 상태에서의 몸과 정신은 노곤노곤하게 풀어져 있었고 선선한 감각이 이불의 감촉으로도 느껴졌다. 그는 이 정도의 감각을 좋아했다. 아주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바로 그 정도의 애매한 온기.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게 다였다.

그는 눈을 감고 다시금 휴가 어떻게 웃음 지었는지 떠올렸고, 휴의 목소리는 과연 어떤 목소리일까—를, (음의 높낮이, 울림, 깊이, 말할 때면 목울대가 울렁이는 모양 등등) 감히 상상하며 잠에 빠졌다. ‘묻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휴는 이미 그가 노트를 보았다는 순간 그에 대해 제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예상은 맞아들었지만 어쩐 일인지 라이언은 그의 앞에서 당신이 ‘남자’이며 흔하지 않은 ‘오메가’인데다 종이 한 장이면 끝날 일들을 ‘절대 해내지 못할 위치’에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굳이 그가 다시 상기시키지 않아도 이미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휴의 다른 무엇, 그 외의 것들이 궁금했다. 진정한 휴 마이클 잭맨이, 알고 싶었다. 





 
11


다음날 오전, 라이언은 첫 출근 날인만큼 조금 이른 시간에 일터에 나갔다. 제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인수인계를 받고 커피 한 잔에 의지해 오전 시간을 보냈다. 그는 종종 책상 옆에 놓인 휴대폰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그러지 않은 척하며 열심히 일했다. 라이언의 자리는 영문학과 학장실 바로 옆에 놓인 작은 공간이었는데, 창문이 뻑뻑하다는 것만 빼면 꽤 괜찮은 곳이었다. 커피 머신이 그의 바로 옆 테이블에 놓여 있었고 책상은 그가 양 팔을 뻗어도 남을 만큼 널찍했다. 옆자리의 메이트인 시몬 베이커는 갈색 머리의 푸들 같은 생김새를 가진 남학생이었는데,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잠시 일하는 중이라고 했다.

점심 식사 시간은 한 시간이었지만 오전이 가장 바빴고 오후에는 언제 바빴냐는 듯 한가해졌다. 라이언은 생각보다 많은 학과 문의 전화, 학생들의 부모님들에게서 잘못 걸려온 전화를 돌리거나 서류 작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몬은 이미 세 번째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그는 이제 조금 지루해지기 시작했지만 점심시간에 빌려온 책—혹시나 해서 도서관을 찾았는데 책이 너무나 쉽게 눈에 띄어 놀랐다—을 들여다 보기로 했다.

“뭘 공부해요?” 시몬이 물었다.

라이언은 대답 대신 책의 겉표지를 들어 보였다. 시몬이 호오, 하며 감탄하는 소리를 내더니 곧 제 책상 앞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다시금 집중했다. 맨 앞장에 적힌 순서대로 알파벳을 탐독했고 이어 제 이름을 손으로 그려내기를 반복했다. 라이언은 몇 장을 넘겨 보았다. 바로 어제 처음 보았던 휴의 손짓들이 눈에 아른거렸고 그것 또한 누군가에겐 하나의 언어일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속으로 어떤 의무감이 치솟았다. 그를 더욱 알고 싶다면, 먼저 그의 언어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라이언은 의심하지 않았다. 보이는 대로 믿지 않기 위해 틈틈이 의심을 끼워 넣어 스스로에게 반박하던 일들이, 휴의 앞에서는 필요치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첫 출근은 어때요? 할 만한가요?’  15:30

라이언은 발신인이 떠오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시몽.” “네. 그리고 시몽이 아니라 시몬이요.” “이런, 시몬. 미안해요, 아무튼 다녀올게요, 시몬!” 그는 허둥대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무슨 첫 데이트에 나서는 소년처럼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자만심, 내가 당신을 위해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어떤 마음, 그런 것들이 한데 뒤섞여 그의 가슴을 부풀리고 있었다. 라이언은 때마침 제가 보낸 답장에 다시 떠오른 글자를 재빨리 눈으로 훑었다.

‘공원 벤치에 있어요. 다음 수업이 있어서.’  15:32





 
12


휴는 마치 본래 그곳이 제자리라는 듯 어제의 바로 그 벤치에 앉아 있었다. 라이언은 잠깐 동안 그가 앉은 모양새, 소파에 다리를 올리고 앉듯 긴 다리를 벤치 위로 쭉 뻗은 것을, 손잡이에 등을 기댄 채 편안한 오후 시간을 즐기는 것을 바라보았다. 하늘 위로 새가 날았다. 푸른 하늘 위 하얀 구름 조각들과 기분 좋게 느껴지는 바람에 머리칼처럼 흩날리는 초록의 나무들. 그 가운데에 있는 그는 옛 명화처럼 아름다웠다. 라이언은 아이처럼 들뜬 마음을 겨우 추스르며 천천히 걸었다.

좁혀지는 거리만큼 둘 사이의 벽은 점점 더 허물어지고 있었다. 적어도 라이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다가갔고 어제의 회색빛 카디건이 아닌 크림색 차이나 카라 셔츠 차림인 그의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 그림자에 그늘진 얼굴, 언뜻 의아함이 스친 표정, 갈색빛이 도는 눈이 그를 향하는 바로 그 순간. 라이언은 저절로 올라가기 시작한 입꼬리를 보며 미소 지었고 그를 위해 준비한 손짓을 깜짝 쇼라도 되는 듯이 반복해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제 이름은……’

첫 번째 그것을 보았을 때 휴는 꽤 놀란 표정이었지만 다음 순간 눈이 스르르 접히며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웃기 시작했다. 라이언은 그 웃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이어진 상황에 무척이나 당황하며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기쁘게 웃는 얼굴 뒤로 마치 누군가 마법이라도 부린 듯 휴의 목소리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라이언, 당신은 정말 재밌는 사람이에요.” 라이언은 갑자기 제가 엄청난 바보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세를 바로 한 휴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가 눈가를 재빨리 훔쳤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감동이네요.”

“어떻게…”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때 누군가 제 옆으로 다가왔다. 라이언이 고개를 돌리자 어제 휴와 열심히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 분명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가 물었다. (당연하게도 손짓으로!) 휴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덮고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을 들었다. “미안해요, 다음 수업이 있어서.” 해명하라는 듯 라이언이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지만 휴가 웃는 것이 기분 나쁘진 않았다. 솔직히 말해 라이언은 광대가 된 듯한 상황에 기분이 나빠야 하는지, 휴가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오히려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랐다.

무엇보다 그는 제가 이토록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조금 창피하기까지 했다. 무조건적으로 보이는 대로 믿었다는 것이, 그의 단면을 보고 그를 판단했다는 것이.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휴가 몸을 일으키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이어진, 그 한마디.

“만나서 반가웠어요. 라이언 로드니 레이놀‘지’.”

“오, 이런.”

이 와중에 또 틀렸군. 라이언이 피식 웃음 짓자 휴가 아까의 남자와 뒤를 돌았다. 그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는데, 그런 그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휴가 슬쩍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허공에 무언가를 두드리는 손짓. 하하. 라이언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속았다는 느낌이, 전혀 싫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봐요, 놀지.’  1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