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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6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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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라이언은 레이철의 말을 모두 들었다. 물론 그는 그들이 견뎌야 했던 시간들에 대해 가슴속 깊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열성 알파 가문인 잭맨 가에서의 휴의 존재를 그들 모두가 별다를 바 없이—열성 알파인 레이철처럼—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가족들끼리의, 어떤 무리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 막연히 갖게 되는 결속력, 혹은 유대감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결함도 사랑할 수 있다는 듯 보였기에, 라이언은 휴의 단단함이 그런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는 저도 모르게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감사함이 넘쳐흘렀다. 그들 덕분에 휴의 성정이 그대로 지켜질 수 있었다 생각하니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이, 한 사람을 진실로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레이철은 제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리는 처음에는 진심이었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휴와 긴 시간을 두고 만나고 있었으니까요.” 라이언은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그의 이름은 가장 무너졌을 때의 휴의 얼굴을 상기시켰기에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그녀가 말했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휴는 조금은 안정되어 보였어요. 하지만 그때부터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을, 우리 모두 알지 못했죠. 약혼식은 하지도 않았어요. 알잖아요, 보통 사람들은 시끄럽게 떠벌리는 걸 좋아하지 않고 제리 또한 그랬으니까요. 제 생각에는, 제리가, 그 자신 스스로도 왜 휴에게 끌리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을 거라 생각해요. 그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언가였으니까요. 맞아요. 연민이죠. 제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진 듯했던 연민이 휴로 인해서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던 거죠. 그래서 그는 제 자신이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휴를 구원했다고 생각했어요. 우습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이런 일은 꽤 흔히 일어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라이언, 그렇기에 저는 당신도 처음에는 어떤 호기심 때문에 휴에게 매력을 느꼈을 거라 생각해요.”

“……”

맞는 말이었다. 그녀의 말은 그가 휴를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리게 했고, 그는 지금과 다르게 차갑게 식어있던 스스로를 생각했다. 그때 그 공원에서 벤자민과의 대화에 무척이나 집중하던 휴의 얼굴은, 한편으로는 그를 답답하고 짜증 나게 했고 한편으로는 그 얼굴을 계속 보고 싶다는 이상한 욕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라이언은 그때의 제가 어쩌면 첫눈에 제 사람을 알아보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곁에 없지 않은가.

생각에 깊이 잠긴 듯 보이는 그를 두고 레이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은 얼마 가지 않죠. 제리는 우성 알파 가문의 자제였지만 열성 알파였기에 스스로 가지고 있던 열등감이 상당했을 거예요. 그런데 약혼자 자리에 막상 ‘남자 오메가’인 얼토당토않는 휴를 앉혀 놓았으니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던 거죠. 그때부터 그는 변하기 시작했어요. 휴를 없는 사람인 듯 취급했고 가끔은 휴를 창피주기 위해 일부러 파티에 불러내곤 했어요. 물론 가족들은 분노했지만, 알잖아요. 우리는 바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저 옆에서, 그가 마지막까지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죠. 사람들의 시선을 왜 눈총이라 하는지, 당신은 알고 있나요? 그런 눈빛들, 마치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을 보는 듯한 눈들이 수십, 아니, 수백 개가 모이면 그건 무척이나 아프죠. 아팠을 거예요. 분명.”

둘은 잠깐 동안 말없이 차를 마셨다. 째깍째깍, 부엌 벽 한편에 걸려 있는 시계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던 라이언은 그를 바라보는 레이철의 시선에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오, 라이언.” 다음 순간 그녀는 울컥 치밀기 시작한 무엇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감았고 금세 젖어드는 양 뺨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 애가 당신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했을 때, 휴가 지금까지와는 정말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나는 또다시 그 애가 그렇게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요. (알아요, 이건 결국 제가 편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그래서 그렇게 말했는데…… 그날 울던 그 애의 울음소리가 아직까지도 문득 떠오를 때면 너무 괴로워요. 내가 휴의 마지막 희망을 빼앗은 것 같아서…”

레이철은 조용히 흐느끼며 말을 아꼈다. 라이언은 휴가 그들의 헤어짐을 무척이나 힘들어했다는 사실이, 아주 조금 마음에 들었지만 이런 마음도 죄스럽게 느껴졌다. 젠장! 그가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지금 그는 곁에 없지 않은가! 그는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 휘몰아치는 상념들을 떨쳐내며 목적을 분명히 했다.

“레이철, 끼어들어서 미안하지만 이제 더이상 지체할 수 없어요. 계약서는 작성될 거고, 저는 곧 잭맨 가에 정식으로 발을 들일 겁니다. 물론 계약서 지침대로 당신 가족들의 동의가 필요해요. 당연하게도 휴는 서명하지 않겠다고 할 거예요. 그는 제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걸 택했으니까요. 그러니, 무조건 가족들 모두의 동의가 필요해요. 제가 오늘 당신을 찾아온 건 바로 그 이유입니다.”

레이철이 얼굴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라이언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 위로 겹쳐 올렸고 주머니에서 그녀의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모든 걸 바로잡아야죠. 제리가 휴를 두고 먼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걸 증명할 사람이 있어요.” 그는 이미 손때가 타기 시작한 그녀의 명함 위를 톡톡 두드렸다. “바로 저예요.”

라이언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게다가 당신은 증거를 찾는 데에는 최적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이제부터 각자 할 일을 해 보죠.”





 
46


라이언은 시간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수첩을 펼쳐 보니 거의 도착한 듯했다. 그는 잠시간 멈춰 선 채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 같은 도로와 눈앞에 놓인 드넓은 정원을 바라보았다. 여름에 무성히 자라났던 풀들은 그의 종아리께에서 성장을 멈춘 듯 보였고 점점 떨어지는 기온에 그마저도 곧 바스러질 것처럼 스러진 것도 있었다. 그는 그 정원 뒤쪽에 자리한 낡은 집을 눈에 담았다. 바로 저곳에, 그가 있을 터였다. 사랑하는, 나의, 휴. 라이언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심장이 달음박질치기 시작한 것과, 이상하리만치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몸은 그를 배반하듯 곧 이어질 만남을 상상하며 멋대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한쪽으로 내어진 길을 걸었다. 자연 속에 외따로 떨어진 집은 마치 지금의 휴처럼 홀로 우뚝 서 있었는데, 지난 두 달 반 동안 그가 그렇게 혼자 시간을 보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누구보다 다른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저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며 구석에 처박히다니. 라이언은 휴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막무가내로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할 작정이었다. 휴를 둘러업어서라도 이곳을 떠나리라.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

그는 문 앞에서 조금 뜸을 들였다. 다시 그를 보게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준비하고 준비한다고 한들, 북받쳐오는 감정들은 정돈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라이언은 두 번 노크했다. 그는 이 행위가, 어느 때의 밤을 떠올리게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이번에는 제가 휴가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며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다. 당신은, 나를 보고 싶지 않아? 일순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마음의 크기를 재고 싶어 하는 어린애 같은 질투심과 애정을 갈구하고 싶은 욕구가 무턱대고 솟아올랐지만, 그는 참았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노크는 계속되었다. 라이언은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점점 다가오는, 멀어진 둘의 사이를 좁혀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휴.” 그 순간 그는 발자국 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예요.” 기다렸어요? 미안해요, 이제 와서.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휴, 그렇게 사라지면 못 찾을 줄 알았어요? 나를 사랑한다면서요. 왜 자꾸 나에게서 도망가요. 라이언은 입안에서 맴도는 모든 말들을 침과 함께 삼켜냈다.

“휴,” 제발, 나를 봐줘요. “문 좀 열어줘요. 할 얘기가 있어요.” 그는 가슴팍에 고이 접어 놓았던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슬며시 현관 밑으로 밀어 넣자, 곧이어 종이 끝으로 머뭇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바로 그 짧은 순간, 그는 무척이나 목마른 듯한 감각이 자신을 휩쓰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라이언은 또 한 번 참아냈다.

“계약서예요. 당신이 나와 함께 하기를 바라요. 그래서 왔어요. 저는 당신이… 제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건너편에선 아무 말도 없었다. 라이언은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지만 노력했다. 밀어붙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애가 타는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결국 발끝을 가까이 붙이며 문에 몸을 기댔다. “보고 싶었어요.” 몇 번씩이나 곱씹었던 말이 뱉어지자 그는 그동안의 시간이, 그의 홀로됨과 자신의 홀로됨이 몸서리치게 느껴지며 눈가가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왜 우리가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라이언이 말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날 밀어내지 말아요.” 이제 더이상 스스로를 상처 입히지 말아요. 그는 한동안 그곳이 제 자리인 것처럼 문에 어깨를 기대며 안쪽을 상상했다. 휴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그러나 그런 상상을 시작도 하기 전에 그의 마음을 잘라버리겠다는 듯 평소보다 낮은 휴의 목소리가 꽂혀들었다.

“가요.” 휴가 말했다. “라이언, 난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사랑이요? 아니요, 그런 건 이제 그만할래요.”

“휴,”

“싫어요! 싫다고요! 내 대답은 ‘아니요’에요. 저는 이미 제 마음을 당신에게 똑똑히 전했다고 생각해요. 나를 괴롭히지 말아요. 물론 사랑한다고 했던 말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더는 못하겠어요. 또다시 모든 게 반복되는걸, 이제 견딜 수 없어요. 끝은 정해져 있잖아요. 당신도 어떻게 될지 알고 있잖아요! 제발, 내게 선택을 강요하지 말아요. 라이언… 말했잖아요.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왔어요? 난, 나는, 나는 이제… 이제서야……”

끝이 흐려지기 시작한 목소리를 들으며 라이언이 냉정하게 중얼거렸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그는 휴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여전히 솔직하지 못해. 그런데 그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거지? 그러자 다음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분노가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그렇게 타인만을 중요시해요? 당신을 생각해. 당신이 좋을 대로 하란 말이야. 당신은 나를 사랑하잖아! 라이언은 마치 그의 눈앞에 휴가 서 있는 것처럼 소리치기 시작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휴! 당신이 이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속이 문드러지는 줄 알아요? 나를 사랑한다면서요! 그렇다면 이렇게 나에게 상처 주지 말아야지. 당신이 나를 위해 (그것도 이토록 멀리!) 도망쳤다는 사실을, 내가 조금이라도 기뻐할 줄 알았어요? 당신은, 그래, 당신은 이기적인 사람이야. 타인을 위한다면서 결국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히지만 그것 또한 다른 사람을 괴롭게 만든다는 것쯤은 이제 알 때도 됐잖아! 내가 지난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 거라 생각해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제 마음이 우스워요? 그래요?”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는 휴의 변명은 듣기 싫다는 듯이, 그리고 더이상 멈출 수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쏟아부었다. “맞아요. 저도 알고 있어요, 끝이 정해져 있다는걸. 그런데 그거 알아요, 휴? 왜 자꾸 우리의 끝이 헤어짐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나요? 내가 그렇게 부족한 사람인가요? 사랑한다고요! 그래서 함께해달라고 하잖아! 도대체 뭐가 그렇게 어려운데요? 지금 당신은, 나를 위한다면서 결국 나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지금 당신의 말에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알고 싶은지도 알 수 없지만. 라이언은 낮게 뇌까리듯 말했다. 잠시 동안 정적이 이어졌고 그는 제가 꽤 흥분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당신은 나를 위해 당신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거야. 라이언은 숨을 고르며 결국 다른 식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휴에게 다시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끝이 어떻게 이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휴를 제 맘대로 이끌고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니, 당신이 선택해야 해. 

“좋아요, 휴. 저는 이제 다시 돌아갈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겠죠. 내일이면 기사가 나갈 거고, 공식적으로 혼인 계약서는 잭맨 가에게 전달될 거예요. 물론 나는 당신 가족들을 설득해야 하겠죠. (당신이 절대 동의하지 않으면요) 이후에는 제가 어떤 취급을 받던 당신이 이곳에 머물기로 결정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살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당신의 선택이라면 존중할게요. 더이상 당신을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즉,”

그는 마지막을 정확히 발음하려 애썼다. “우리의 진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에요.” 그러니, 당신이 선택해야 해.





 
47


다음날, 기사는 예정대로 발행되었다. 라이언은 기존에 인터뷰한 내용을 빠짐없이 실어 달라고 부탁했고, 그들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실었다. 파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지역 내의 유명인들에게는 타격이 클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노렸다. 그들이 쉽게 입에 올리던 이름은, 이제 더이상 실수로라도 내뱉지 못할 것이다. 그는 신문을 본래 접혀있던 모양대로 접으면서 이른 아침 그와 함께 거실에 나와 있던 윌리엄에게 건넸다. “기사가 났어요.”

윌리엄은 소파 옆 탁자에 놓은 안경을 들고 기사를 확인했다. ‘라이언 로드니 레이놀즈, 잭맨 가에 비밀리에 청혼해’ 조금 우스운 헤드라인이었지만 의미는 전해졌을 것이었고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조용히 그의 앞으로 미리 작성해 두었던 계약서—두 장 중에 한 장—를 내밀었다. “결전의 날이구나.” 라이언은 그것이 그만의 응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네. 걱정 마세요. 잘하고 올게요.” 잘하고 말 것도 없었다. 잭맨 가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레이철과 약속을 했으니. 그 뒤가 문제였지만, 그는 그들에게 제가 어떤 취급을 받을지는 상관없었다.

“라이언,” 윌리엄이 말했다. “휴 마이클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작정이냐.”

그에 라이언은 여상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경우의 수는 제게 없어요, 아버지.”

그만큼 그는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잭맨 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사그라들었다. 실제로 그가 그들의 동의를 얻기도 전에, 기사가 나갔기 때문이었다. 레이철은 가족들을 최대한 설득해 보겠다고 전했으나 생각보다 잘 해결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는 그를 마중 나온 레이철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레이철은 안쪽으로 그를 안내하면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미안해요. 가족들은 동의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라이언은 어려움 없이 잭맨 가의 대문을 넘고 안채에 발을 들였지만, 거실 가운데에 모여 앉아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들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런. 그는 제 안의 어린아이가 겁을 먹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어. 그는 예의를 차리며 구겨진 정장 옷깃을 바르게 펴고 그들과 마주 앉았다.

“죄송합니다. 먼저 인사를 드리고 진행하는 것이 맞는 일이었어요. 제멋대로 이런 식으로 발을 들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라이언은 이어 말했다. “휴를 만나긴 했지만 아직 제대로 된 동의를 받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염치없지만, 가족분들의 동의가 필요해요. 저는 이 결혼을 진심으로 하고 싶습니다. 이 과정에서 절대 휴가 상처입지 않게 하겠습니다. 부탁드려요.”

그는 천천히 얼굴을 들고 그를 바라보는 여덟 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처음으로 뵙는 잭맨 부부는 둘 다 무표정했는데, 그가 어떤 말을 하든 믿지 않겠다는 듯 냉담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조금 낯이 익은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휠체어에 앉아 그날과 마찬가지로 무릎에 담요를 덮고 있던 그녀는 검지를 들고 두 어번 까딱였다. 그러자 저 멀리 떨어져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미셸이 다가와 그녀의 뒤에 섰다.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바퀴는 소리 없이 움직였고 잠시 후 그는 엇비슷한 눈높이로, 제 앞으로 바짝 다가온 노인의 두 눈을 마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두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건 마치 그의 속내를 다 캐내고 말겠다는 눈빛처럼 느껴졌기에, 그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라이언은 그녀를 끈기 있게 쳐다보며, 제 진심이 그녀에게도 가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입술 양옆으로 깊숙이 팬 주름은 왜인지 오늘따라 그녀를 더욱 심술궂은 노인으로 보이게 만들었고, 그는 아주 잠깐이지만 기가 죽었다. 잠시간 그런 상황이 대치되자 남은 사람들은 그저 그들을 바라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저…” 마침내 라이언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어떤 압박감에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가 무릎 위, 한 손으로 받치고 있던 잔을 들어 그에게 휘둘렀고, 그 내용물은 정확히 라이언의 얼굴을 향해 쏟아졌다.

“세상에!”

“어머니!”

소파에서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킨 잭맨 부부가 다급하게 달려와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라이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는 젖은 얼굴을 닦아 내렸다. 진한 커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축축이 젖은 셔츠와 얼룩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는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노인이 소리쳤다. “이 배은망덕한 것! 데려오라고 했더니 이딴 짓거리를 벌여?” 노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그를 향해 잔을 들어 보였고 무참히 쏘아붙였다. “너 같은 것들의 놀음 거리가 아니라고 했지 않냐! 지금 이게 몇 번째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어디서 우성 알파랍시고 못된 것만 배워와서는 사람을, 제가 좋다는 사람 하나를 제대로 데려오지도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시끄러! 이건 절대 동의할 수 없다. 내 손자가 하지 않겠다는데, 네가 무슨 수로 우리를 설득해!”

“잠시만요, 한번만 다시 생각해 주세요.” 라이언은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 돼요. “이렇게 끝낼 순 없습니다. 잠깐 제 말 좀…”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뺨을 얻어맞듯 내리쳐진 손에 깜짝 놀라며 몸을 물렸다. “할머니, 진정하세요!” 이제 레이철까지 나서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그렇지만 혼란스러운 와중 라이언은 그녀가 하는 말이 모두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에는 그도 똑같은 수순을 밟고 있다는 것을, 휴에게 다시금 선택을 강요했다는 것을, 상처받은 휴는 이제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스스로도 내심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순 차게 식은 커피의 찌든 향기가 솟구치면서, 라이언은 제가 굉장히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휴는 나타나지 않고 있잖아. 넌 왜 그리 자신만만해 했지? 네가 사랑을 하면 얼마나 해봤다고. 그러나 바로 그때, 초조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라이언은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 휴.”

상기된 두 뺨으로 그를 바라보는 휴가 있었다.





 
48


모두가 휴를 쳐다보았다. 휴는 이미 모든 상황을 짐작한 듯했지만 라이언의 셔츠가 갈색빛으로 물든 것을 발견하자마자 미간을 구겼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무척이나 조용하게 움직였는데, 그건 마치 아까의 바퀴와 같아서 라이언은 그게 휴의 형상을 한 다른 것이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노인이 물었다. “꼴이 그게 뭐냐. 춥지도 않든?”

그녀는 언제 노여워했냐는 듯 따뜻한 시선으로 휴를 바라보았고 휴는 잘게 턱을 끄덕였다. 라이언은 제 곁에 조심스레 앉는 휴를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휴의 목으로는 여느 때처럼 크림색 스카프가 둘러져 있었지만 그의 할머니가 물었던 것처럼, 그는 겉옷도 없이 얇은 셔츠 차림이었다. 잠시 동안 그들 모두와 하나하나 눈을 맞추던 휴는 그들의 시선이 제게 집중되자 조금 빠른 듯한 속도로 손짓을 만들어냈다.

“뭐라고?”

그의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허락할 수 없어. 이제 이 문제는 네가 하겠다고 해서 다 되는, 그런 게 아니야.”

하지만 휴는 이미 어쩔 수 없다는 듯 죄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휴의 손이 느리게 움직이며 젖은 그의 손등 위를 덮었다. 라이언은 한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듯한, 그의 안에서 또다시 무언가 굉장히 큰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순식간에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 온기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휴는 억지로 소리를 내려다 말고 그 대신 들어올 때부터 쥐고 있던 종잇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가 건넸던 계약서였고 라이언은 가족들이 모두 확인한 것처럼 그의 이름 옆으로, 휴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휴, 진심이냐?”

이 짓을 또 할 생각이야? 이번엔 그의 아버지가 물었고 휴는 재빨리 또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을 더욱 충격에 빠뜨린 건, 힘이 든 것이 분명한데도 똑똑히 뱉어낸 휴의 다음 말이었다. 그는 꼭 뱉어야 된다는 듯이, 아주 중요한 사실이라는 듯이 침을 여러 번 삼킨 뒤에야 말했다. 죄송해요, 어쩔 수 없어요.

라이언은 덜덜 떨리는 휴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 휴는 그의 손을 마치 삶의 마지막 기회라도 되는 것처럼 붙들고 있었고 라이언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휴가 말했다. “임신, 했어요.”

점차 경악으로 물들어가는 얼굴들 속에서, 라이언은 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알 수 있었다. 휴는 지금, 그를 위해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