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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3 01:13
일나더 이나더 삼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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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이 젖은 옷깃이 불편해질 만큼, 라이언은 휴에게 키스했다. 두 번째 입맞춤은 입을 크게 벌리며 제 혀를 마중 나온 휴가 그의 목 뒤로 팔을 감아올리자 더욱 불이 붙었다. 라이언은 거친 호흡을 삼키며 순간순간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듯 그에게 달려들었고 휴는 받아들였다. 그건 마치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여도 허락하겠다는 것으로 느껴졌기에, 라이언은 부드럽게 그를 끌어안은 손을 미끄러뜨렸다. 손가락 마디마디의 감각이 살아 움직이며 휴의 드러난 몸선을 따라 훑었다. 목이 말랐다. 잠시 떨어진 사이 휴의 뜨끈한 숨이 턱에 닿았고 라이언은 어느새 묵직하게 축적된 열기에 저절로 목이 탔다. 그리고 바로 그 향.
처음 연구실 앞에서 휴를 마중했을 때 언뜻 스쳤던 향이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꽃향기일까 싶던 것은 눈을 감고 그의 어깨에 코를 박자 조금 더 짙어지며 그의 뱃속을 긁어내렸다. 저도 모르게 그르렁거리며 숨을 내쉰 라이언이 휴를 벽으로 가두 듯 밀며 몸을 붙였다. 목 안에 뾰족하고 뜨거운 쇳덩이가 걸린 것처럼 갈증이 일어 그는 향기의 근원을 찾았다. 젖은 셔츠를 홱 들춰내며 코를 박고 숨을 쉬길 몇 번, 그는 몽롱한 정신에 결국 입을 벌려 목덜미를 물었다. “아!” 그 순간 순식간에 눈이 뜨였다. 라이언은 제 어깨를 붙들고 있는 두 손이 이미 저를 밀어내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런. 라이언은 당황하며 몸을 물렸다.
“……”
휴는 물기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둘 사이로 불규칙적인 숨소리가 섞였다. 눈앞에 놓인 휴의 모습은 매력적이었지만, 조금, 엉망이었다. 언제 틀어잡았는지 흐트러진 젖은 머리칼은 이리저리 뻗쳐 있었고 강하게 쥐어잡은 셔츠 깃에 목 언저리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휴,” 라이언은 제가 아까의 제리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이건…” 알파가 오메가의 향에 취해 의사도 묻지 않고 제 맘대로 마킹까지 했다. 한순간이었지만 그는 제 손안에 그를 쥐어잡고 싶다는, 무참히 정복하고 싶다는 그런 욕망에 취했던 것이다. 그것도 약혼자가 있는 사람에게! 하지만, 하지만. 휴도 허락한 게 아닌가?
라이언이 머뭇거리는 사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몰라도 휴가 말했다. “미안해요.” 그는 한 손으로 터진 셔츠 깃을 여며 잡고는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내렸다. “이러면 안 돼요. 안 되는 거였어요. 미안해요, 라이언.” 휴는 마지막으로 떨리는 숨을 내쉬며 미소 지었다. “고마웠어요.” 잠깐, 잠깐만! “휴!” 그의 말투는 마치 마지막 인사라도 하는 것 같아서, 라이언은 문을 열던 휴의 팔을 잡았다.
라이언이 말했다. “잠깐만요, 제가 실수했어요. 미안해요.”
“아니요.”
틀어잡힌 팔을 빼내려 비트는 몸짓이란. 그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휴를 잡아당겼다. “기다려요. 뭐가 잘못됐다는 건데요?” 라이언은 곧바로 이렇게 물었던 걸 후회했다. 이 상황에 그를 추궁하는 듯한 말투는 정말이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못된 알파가 추행당한 오메가에게 화내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너도 좋았잖아! 나한테 키스했잖아! 라이언은 입술을 물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어리숙한 제 자신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제 자신이 너무나도 싫어졌다.
휴는 표정을 무너뜨리며 계속해서 고개를 젓더니 제가 힘이 빠진 틈을 타 빠져나갔다.
“미안해요.”
쿵, 문이 닫혔다. 라이언은 제 앞에서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갑작스레 제 안의 무언가가 무참히 짓밟힌 느낌이 들었다. 라이언은 꿈이라도 꾼 것처럼 허망하게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어느새 바닥에 떨어진 채 둘에게 처참히 밟힌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열정적인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 걸리적거리던, 바로 그것. 한동안 더럽혀진 수건을 가만히 보던 그는 그게 꼭 제 마음처럼 느껴져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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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이틀간 휴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아니, 받았지만 철저히 무시했다고나 할까. 라이언은 제 문자에도, 전화에도 반응 하나 없는 휴를 생각하면서도 그의 행동에서 명백한 거절 의사를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무얼 고백한 적도 없었으나 그 시작조차 막아보겠다는 어떤 결의가 느껴졌다. 라이언은 지금 와서 모든 게 엇나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한 달 동안 함께 웃고 떠들었던 시간이 그의 삶에서 아주 잠깐의 일탈이었던 것처럼 잊혀가고 있었고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심적으로 고달파질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그를 외롭게 했다. 하지만 전과 같이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날 모른 척할 셈이에요?” 15:39
그는 이미 휴의 행동반경 또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벌써부터 그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틀 내내, 또 오늘도 한참 동안 그러고 있는 그를 지켜보던 시몬은 안 됐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레이, 당신도 차일 때가 있어요?” 라이언은 고개만 돌려 억지웃음을 지었다. “연락을 아예 안 받네요.” 힘없이 중얼댄 소리에 시몬이 발을 구르며—의자가 도로록, 소리를 내며 딸려들었다—다가와 그의 곁으로 몸을 숙였다. “라이언, 이럴 때는 말이죠.”
라이언은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당신보다 나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봤을 땐… 변화가 필요해 보여요.”
그는 호기심이 피어오른 얼굴로 시몬을 쳐다보았다. “어떤 변화요?”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던 상대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쏟는 것도 좋지만—” 시몬은 턱을 치켜들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반대로 행동하는 방법도 꽤 효과가 있는 법이죠.”
“그게 무슨 말이죠?”
“설마! 정말 모르겠나요?”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예전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르게 바꿔야 한다는 거죠.” 시몬은 제 책상에 놓인 머그컵을 들고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밀당이요, 라이언! 지금까지 당기기만 했으니까 이번엔 밀어보라는 거죠. 단,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절대, 절대, 절대 흔들리지 않는 거예요. 보고 싶다고 매달려도 안 되고 지금처럼 스토커같이 구는 건 그만둬야 해요. 마치 ‘당신이 없어 죽을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뭐, 좀 괜찮네요.’ 하는 식으로요.”
흐음. 라이언이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자 시몬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곤 제자리로 돌아가며 말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람 마음이 그게 쉽나요. 하지만 라이언, 한 번 시도는 해봐요. 연락이 없다면 나쁠 것 없잖아요?” 하루 이틀 정도만 한 번 참아봐요.
라이언은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런 식으로 행동을 바꾸는 것이 과연 올바른 방법일까에 대해 고심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음으로 이어질 상황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이제 너무나 조용한 휴대폰을 멍하니 응시했다. 5분. 10분. 15분.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렀고 손으로 몇 번씩이나 건드려도 새로운 것이 없었다. 시몬의 방법이 정말 먹힐까? 휴와 그의 관계는 연인도 썸도 아닌, 말로 표현하기도 애매한 형국이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멈추고 싶지 않잖아. 마음속 목소리가 그를 향해 말했다. 뭐라도 해봐야지. 결국 짧게 후, 숨을 뱉은 그가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처럼 시몬을 향해 몸을 돌렸다. “좋아요, 시몬.”
“네?”
“한 번 해볼게요.”
“호오. 좋네요, 라이언. 행운을 빌게요.”
그는 윙크까지 해 보인 뒤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고 그건 꽤 슬픈 일이었지만 조금은 참아보기로 했다. 기다림은 언제나 지루하지만 휴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라이언은 흔들리는 마음을 스스로 타이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아보고, 좋지 않으면 휴를 찾아가는 거야. 빌어서라도 친구가 되어야지. 그러니까, 이건. 그가 되뇌었다. 이건 어찌 보면 나름대로의 인내심 테스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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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마음먹은 것이 무색하게도, 그가 직접 참아낸 시간은 하루하고도 반나절밖에 되지 않았다. 파티가 있었던 주말이 지나고 평일은 계속되었기에 그는 어딘가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휴가 몹시도 그리웠고 결국 시몬에게 다짐한지 채 이틀이 되지 않아 산책을 핑계 삼아 사무실을 나섰다. 오늘은 영문학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라이언은 익숙하게 건물을 찾아 들어가 한창 수업이 진행되고 있을 강의실을 살폈다. 무턱대고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도 그곳은 앞문에 세로로 길게 난 유리창이 있었다. 그는 강의실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비스듬히 선 채 꼼꼼히 안을 살펴보았다.
저기 있다. 휴는 예상했던 것처럼 앞쪽에 앉아 있었다. 멀리 떨어진 만큼 그의 표정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감격스러웠다. 그때 맨 앞 열에 앉아 있던 학생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학생이 제 시선을 따라 뒤쪽을 확인하더니 아주 고맙게도 휴에게 손짓해 보였다. 다음 순간, 뭐라 입도 뻥끗하기 전에 눈이 마주쳤다. 라이언은 말없이 시선을 맞추며 자리를 지켰다. 휴는 모든 동작을 멈춘 채 그를 바라보았지만 웃지 않았다. 한낮이었고 그의 발끝까지 비쳐 들어온 햇볕이 오후의 느린 시간을 더욱 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둘은 잠시 동안 둘만 아는 어떤 세계, 또 각자의 상념들 속으로 빠져들었지만 그건 서로에게 가닿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서로를 깊이, 또 오래도록 바라보던 두 사람 중 먼저 시선을 돌린 건 휴였다. 라이언은 침을 삼켰다. 그의 옆얼굴이라도 끝까지 훔쳐보겠다는 심산이었지만 가만히 서 있는 그를 다른 학생들이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했기에 발을 돌려야만 했다. 끝으로 아쉬운 한숨을 삼키며 휴를 담아낸 그는 읽을 수 없는 표정 속에서도 전해지는 의미를 모른 척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눈길을 받지 못하는 것이, 이토록 가슴 아플 수 있는 걸까? 라이언은 다른 의미로 또다시 알 수 없어진 기분에 침울해졌고 그건 알게 모르게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이지 평생토록 알 수 없을지도 몰랐다. “사랑을 하렴, 라이언. 사랑을 해.”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랑을 하고 싶었던 그의 앞에 사랑하고 싶은 상대가 나타났지만 사랑할 수 없는 상태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이언은 알 수 없었고 그것이 이토록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걸,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그건 그가 사랑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알아내지 못한 것처럼, 평생토록 혼자일 거라고, 누구를 만나도 결국 알아내지 못할 거라고, 넌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도 실패할 거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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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그는 휴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 때문이기도 했는데, 하늘이 도우셨는지—아니면 쫄딱 젖은 채 밤길을 걸었던 날의 뒤늦은 후유증, 또는 상사병이었는지—몰라도 그가 그날 밤부터 심하게 앓아누웠기 때문이었다. 라이언은 열이 높게 오른 탓에 학교에 나갈 수 없었다. 겨우 시몬에게 연락을 넣은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윌리엄과 통화를 해야 했고 그 후에는 갑작스럽게 치킨 수프를 포함해 다른 음식들을 싸 들고 찾아든 레이나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조용히 해라, 라이언.”
라이언은 얌전히 침대에 누운 채 그의 체온을 재는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몇 도예요?” “이제야 좀 내렸네.” 그러자 레이나는 그녀의 임무는 거기서 끝이라는 듯 온도계를 협탁 위에 내팽개치며 일어섰다. “지금 가시게요?”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내가 너처럼 한가한 줄 아니.” 참. 매정도 하셔라. 그는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퍽, 들어온 손바닥에 다시 냅다 누웠다. “배웅은 필요 없다. 정신 차리면 아버지한테 연락이라도 해, 응? 걱정 많이 하신다.”
“알았어요.”
그의 대답을 끝으로 그녀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떠났다. 곧바로 찾아든 적막감에 라이언은 편안해지려 노력하며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휴와 이야기를 나눈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단 일주일 사이에 그들은 이렇게 멀어진 것이다. 거절의 거절을 거듭하는 상대에게 어떻게 하면 부담을 주지 않고 다가갈 수 있을까? 라이언은 눈을 감은 채 이미 몇 번씩이나 그려본 얼굴을 다시금 떠올렸다. 보고 싶었다. 그의 맑은 두 눈동자가, 선한 얼굴이, 부끄러울 때면 붉어지는 귀 끝이, 뜨겁게 입 맞췄던 부드러운 입술이… 무엇보다 그리운 건 진심으로 웃던 그 미소였다.
기억은 때때로 그를 너무나 외롭게 만들었다. 라이언은 한숨 같은 숨을 내뱉으며 아직 남은 몸살 기운에 몸을 사렸다. 오랫동안 누워 있으려니 좀이 쑤셨지만 무언가를 하기에는 아직 너무 피곤했기에 그는 모로 누우며 다시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굉장히 작지만 문에 부딪히는 어떤 소리가 들렸다. 라이언은 어두워진 바깥에, 혹은 어느새 강해진 바람 소리에 무언가가 흔들리는 소리라 착각했다. 다시 기운을 빼며 돌아누우려는데, 또다시 그 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방문을 나섰다.
노크 소리는 연속해서 두 번 이어졌고 제가 반응하지 않자 뜸을 들이며 계속되었다. 라이언은 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문을 두드리는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무엇보다 그를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런 단순한 호기심,이었을 뿐인데. 아, 레이나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이렇게 늦은 밤에……
그는 문을 열었다. “레이나?”
그러나 열린 문 앞에는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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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의 휴처럼 라이언은 멈칫 멈춰 선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제 눈앞에 있는 게 믿기지도 않았다. 그런 둘 사이에서의 정적을 깬 건 휴였는데, 그는 조금 긴장한 듯 보였지만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맞추곤 눈짓으로 물었다. 라이언은 그가 크림색 스카프를 목에 두른 것을 쳐다보았고 서늘한 밤공기가 뺨에 닿자마자, 그를 안으로 들였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고요한 초대라니.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 제멋대로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맨발에 닿은 현관의 타일 바닥이 차가워 안쪽으로 발을 들인 그가 막 휴를 돌아보며 손짓하려는 순간이었다.
“……!”
휴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그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라이언은 혼란스러운 와중 저도 모르게 고개를 틀었고 덕분에 몇 분 전까지 그리워하던 입술이 그의 볼에 부딪혔다. 지금, 이게, 뭐지? 그는 가까이에 닿는 더운 숨을 느낄 수 있었고 어느 틈에 붙잡힌 허리에 당혹스러웠다. 휴가 내게 키스하려고 해! 휴의 두 번째 시도 또한 그의 손에 의해 틀어막혔다. 그런데 왜? 라이언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현관의 불이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미친 듯이 깜빡였지만 잠깐의 빛만으로 그의 표정을, 또 생각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다.
“휴! 그만해요!”
그가 소리쳤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자마자 흠칫 멈춰 선 휴가 처음에는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더니, 곧 사색이 되었다. “휴?” 경악과 당황스러움, 수치스러움으로 순차적으로 물들던 얼굴이 왜인지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휴, 휴. 기다려요. 잠깐!” 라이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는 밖을 나설 것처럼 비틀거리며 걸음을 디뎠다. 이렇게 보내면 안 돼. 하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그는 강하게 몰려오는 두통과 피로감에 벽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뒤통수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고 뜨거운 열기가 갑작스럽게 치솟았다.
라이언은 기어서라도 그를 붙잡겠다는 심보로 겨우 눈을 떠 앞을 바라보았다. 다시 시선을 들자 아직 떠나지 않은 휴가 어느새 제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휴는 손짓을 만들어 보였지만 라이언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힘없이 축축 처지는 발을 어쩌지 못해 벽을 따라 스르르 미끄러져내렸다. 휴의 손이 그의 팔을 잡았고 라이언은 놓칠 수 없다는 듯 그의 손을 겹쳐 잡았다. 다급한 숨소리, 답답하다는 듯 벌어졌다 다물리는 입술. 그런 것들을 홀린 듯 눈에 담으며 그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가지 마요.
“가지 마요, 휴.” 라이언이 중얼거렸다. “제발, 부탁이에요. 가지 마요.”
곁에 있어줘요. 나랑 같이 있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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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작은 거실로 자리를 옮겨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라이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있었고 휴는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차를 끓여야 했다. 몸이 따라 주지 않아 괴로웠지만 왜인지 그의 앞에서 더 아프고 싶다는, 그래서 그 또한 괴로워했으면 좋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린애 같은 심보였다. 라이언은 머그컵 두 개를 들고 조심히 제 옆에 앉는 휴를 쳐다보았다. 아직까지도 이 공간에 그와 함께 있다는 게 맞지 않는 퍼즐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 텐데. 라이언이 말을 고르는 사이 휴가 그때의 수첩을 꺼내 펼쳤고, 이어 글자를 만들었다. ‘아파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파요. 당신 때문에. 뒷말은 삼켰다. 펜 끝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 지켜보고 있으려니 답답했지만 작은 수첩을 손바닥 위에 두고 눈을 깜박이는 휴를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대화는 꽤 긴 텀을 두고 이어졌다. 라이언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기다렸고 둘러대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마침내 물을 수 있었다.
“제게 키스하려 했죠.”
휴는 그의 두 눈을 바라보다 내리깔았다. 기다려도 대답, 혹은 답변이랄 것이 오지 않았다. “왜요?” 라이언이 물었다. “여태 날 무시했잖아요. 알면서 모르는 척했잖아요. 도망갔잖아요.” 피했잖아요. 상처줬잖아요. 휴는 제가 하는 말에도 가만히 앞을 보고 앉아 있었다. 또다시 정적이 흘렀고 라이언은 이번엔 지지 않겠다는 듯 소파에 기대 팔짱을 꼈다. 잠시 뒤 휴가 꼼지락대며 글을 쓰기 시작했고 조금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했을 때, 그에게 수첩을 건넸다.
‘미안해요. 그날은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어요. 당신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게 너무 창피했고, 나도 모르게 위로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변함없어요. 그래서… (라이언의 한숨) 그때 일을 사과하고 싶었어요. 물론 그 일이 끔찍하다거나 싫었던 건 아니에요. 그냥,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제 모습이 제가 아닌 것 같아서… 이상해요. 모르겠어요, 무서워요. 저는 약혼자가 있어요. 당신에게 사람 대 사람으로서 끌리지 않는다고 하진 않을게요. 하지만 저는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이건 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잖아요.” 라이언이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좋아요, 받아들일 수 없으면 그만할게요.”
이럴 바에 다 관둬버리겠다는 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휴가 다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제발,’ 입이 뻥긋거렸다. ‘제발요, 라이언.’ 쌕쌕거리는 숨소리뿐이었지만 그는 제게 전달되는 간절함을 느꼈다. 그의 손을 쥐고 잘게 저어지는 고개에서, 라이언은 문득 어떤 기대감이 들었고 자연스레 다시 앉았다. 휴가 침을 삼키자 그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라이언은 그가 하는 양을 모두 지켜보면서, 까맣게 물들어가는 수첩을 바라보았다. 수첩은 어느새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미스터 레이놀즈를 괴롭게 했어요. 사과할게요. 당신이 며칠간 아팠던 건 몰랐어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것도 실례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저는 단지……’ 라이언은 이 대목에서 잠시 숨을 참고 두 손을 맞잡은 채 고요히 앉아 있는 휴를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휴는 조금 놀란 듯한 눈동자로, 아니, 마치 어른에게 야단맞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는 게 맞아요?” 흔들리는 눈동자가 옅은 전등 빛에 물들며 희한하게 빛났다. 라이언은 제가 쥐고 있는 수첩의 내용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은 다음 소파에 내려놓았다.
“내가 보고 싶었어요?”
“……”
“대답 대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잖아요.”
라이언은 갑자기 제가 뭐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해진 기분이 들었다. 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라고 내놓은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는 직접 듣고 싶었고 확인받고 싶었다. 라이언은 몸을 비스듬히 틀은 채 휴를 보았다. “휴.” 휴는 여전히 초조해하면서도 그의 옆에 있었다. “내가 보고 싶었어요?” 끄덕끄덕 “참지 못할 만큼?” 끄덕끄덕 “내가 좋아서 피했어요?” … 끄덕끄덕 “나와 계속해서 만나고 싶어요?” …… 끄덕끄덕
“제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면서요.”
부러 무심한 듯 뱉자 휴가 잽싸게 수첩을 집어 들며 뭐라 써갈겼다. ‘친구로 남을 수도 없을까요? 가능한 건 뭐든 할게요.’ 오, 이런. 이 남자는 도대체 어쩌려고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라이언은 욕심을 부렸다. 휴가 우정을 핑계로 그를 어디까지 봐줄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럼 키스해 줘요.” 그는 손을 뻗어 휴의 손을 겹쳐 잡았고 그 손으로 제 뺨을 감싸 안았다. 손바닥으로 뺨을 쓸어내리고 그 가운데에 입을 맞췄다. 당신은 내게 어디까지 허락할 수 있지? 어느 순간 가까워진 얼굴에 그가 휴의 귓가에 속삭였다. 키스해 봐요, 나한테.
하지만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휴가 아까부터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라이언은 그의 속삭임이 떨어지자마자 제 목을 휘어잡는 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적극적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대온 입술은 미숙한 소년이 첫 키스를 하듯 짧게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라이언은 웃음이 터졌다. 이런 키스도 너무나 휴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휴는 잠시 멈추며 고개를 돌리더니, 곧이어 그를 무척이나 세게 끌어안았다. 그건 어쩐지 오래도록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던 것처럼 마음을 울린 행동이었기에 그는 조용히 그를 마주 안았다.
안정감. 편안함. 이렇게 닿아만 있어도 행복하고 충만할 수 있다니. 라이언은 기이한 해방감을 느끼며 휴의 귓가와 뺨 사이에 짧게 입술을 붙였다 뗐다. 그때 갈라진 목소리로 휴가 말했다. “키스하는 친구가… 또 있어요?” 라이언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그럼?”
“당신밖에요.”
맞닿은 가슴 사이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고, 라이언은 제가 몰래 세운 벽이 이미 허물어지다 못해 새로운 안전지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오로지 좋은 것들만 가득할 것이다. 행복만 있을 것이고, 그동안 받지 못했던 관심, 사랑, 보살핌, 연민 등 모든 것을 쏟아부어 넣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생각했다. 이 모든 걸 당신을 위해 쓸게. 그러니, “휴.”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날 이용해.
라이언이 말했다. “수화를 가르쳐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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