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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5 00:11
일나더 이나더 삼나더 사나더
27
둘은 주말의 마지막을 함께 보냈다. 라이언이 요구하지 않아도 밤은 늦었기에 휴는 떠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이 험한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었다. (물론 정말로 동의하는 건 아니었지만) 라이언은 아직 불편한 차림새인 그에게 제 옷들 중 제일 큰 것을 권했고 제 회색 스웨트 셔츠를 입은 휴의 모습은, 묘하면서도 그에게 또 다른 목표를 제시했다. 같은 집에서 함께 먹고 자고 옷을 나누어 입으며 살아가는 것. 그런 삶을 휴와 계속해서 이어가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친구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숨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선을 지킬 생각이었다. 라이언은 휴가 진실하다고 믿었다. 상대에게 끌리는 것이 확실한 상태에서, 이도 저도 아닌 마음으로 또 그 무엇도 결정지을 수 없는 마음으로 다가가고자 노력한다는 건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쁘다기보다, 선택할 수 없는 상태를 알면서도 솔직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처받을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가 진실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자 라이언은 지금까지 제가 원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을 하라고 했던 어머니의 말이, 그제야 와닿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구나. 라이언은 그가 원한 것이 다름 아닌 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것이었음을 깨달았고, 그렇기에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그는 부엌에서 다시 물을 끓이기 시작한 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그의 모습 그대로를 내보이며 전부를 바치는 것. 그는 그런 마음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언이 휴의 등 뒤로 다가가 그를 당겨안았다. 조금 놀란 휴는 그를 보며 손가락으로 주전자를 가리켰지만 품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사랑은 모두 다른 모양이라고들 하지.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주는 것이었다. 그의 사랑을 받는 이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오르게 하는 것이었다.
휴가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올렸다. 엄지로 느리게 쓰다듬는 그 손길에서, 라이언은 아주 조금, 그와 같은 마음일지도 모를 작은 사랑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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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은 본래 짧게 느껴지는 것인 만큼, 시간은 더욱 쏜살같이 지나갔고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이미 휴는 없었다. 라이언은 괜스레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휴가 이곳에서 저와 함께였다는 건 침대 끄트머리에 가지런히 개켜진 옷가지가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혼자 일어나게 하다니. 가기 전에 깨워줄 수도 있지 않았나 싶은 마음에 그는 아이처럼 투정 부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방을 나서자 은은하게 남은 고소한 냄새에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귀엽다니까. 분명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휴는 그를 위해 따뜻한 아침을 만들어 둔 것이다. 라이언은 그를 위해 누군가가 요리를 했다는 사실이, 또 그것이 휴라는 현실이 무척이나 기쁘게 느껴졌다. 휴가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기분 좋았다. 라이언은 부엌 옆에 작게 자리한 식탁으로 다가갔다. 접시 위에 뒤집힌 채 겹쳐 놓인 둥그런 그릇을 밀어내니, 평소 좋아한다던 프렌치토스트가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수첩에서 뜯어낸 것이 분명한 메모.
‘먹을 것!’
하하. 그는 아이를 챙기듯이 구는 휴가 밉지 않았다. 윗부분이 갈퀴처럼 찢어진 종이를 들고 라이언은 냉장고 앞에 섰다. 언젠가 선물 받은 여러 나라 수도 모양의 자석들 중 하나를 집어 그것을 제 눈높이에 맞춰 붙이며, 어제 받아낸 종이들을 훑어보았다.
‘저는 단지 당신이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와 ‘미안해요. 제 욕심일지도 몰라요. 그래도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의 사이로 ‘같이 있고 싶어요.’ 가 붙어 있었고, 이제 그 옆으로 ‘먹을 것!’이 자리 잡았다. 한참 동안 멍하니 그 앞에 서 있던 그는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며 식탁에 앉았다.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은 이 토스트를 말끔히 해치우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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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꽤 지루한 것이지만 누군가를 만나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지를 상상하며 고대하는 것은 질리지 않는 법이다. 라이언은 시몬이 그를 보며 눈을 흘길 정도로 즐겁게 일했다. 커피를 엎질러도 짜증 부리지 않았고 오전에 마구잡이로 걸려오는 전화에도 화내지 않았다. 그리고 시몬이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라고 물었을 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모든 게 잘 됐다.” 고 말했다. 사실은 그다지 잘 된 것이 아닌데도. 라이언은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했다. 해가 지고 있었고 휴는 도서관에 머물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는 그날 밤 이후 학생일 때에도 찾지 않았던 곳에 자주 발을 들이며 팔자에도 없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휴는 취미가 독서인 만큼 많은 책들을 읽고, 또 알고 있었고 그는 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즐기고 싶었다. 건물 밖을 나선 라이언의 발이 가볍게 언덕을 올랐다. 푸르렀던 나무들의 끄트머리가 조금씩 노랗게 물들고 있었고, 그와 만난지 벌써 두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언덕을 다 오를 즈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듬성듬성 불빛이 피어났다. 그는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스카프를 생각하다가 휴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낮은 저음에 가끔씩 톡톡 튀는 억양, 쑥스럽거나 조금 토라질 때면 말끝을 흐리는 소리 같은 것들을.
그러다 문득 떠오른 숫자에 라이언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런! 그는 걸음까지 멈췄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휴와 가까워졌다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사이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주는 다름 아닌 휴의 생일이 끼어있는 주였고, 그는 갑자기 급해지기 시작한 마음에 종종거리며 속도를 높였다. 생일인 만큼, 특별한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그는 휴가 환하게, 또 행복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제일 큰 열람실 안으로 들어서자 어느새 컴컴하게 물든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휴가 보였다. 라이언은 슬며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책을 보던 휴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용하게 움직였고 그는 마침내 저를 알아챌 때의 휴의 얼굴을, 그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뜨겁게 닿는 시선에 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미소. 라이언은 만족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의 옆에 놓인 수첩을 집어 들었다. 익숙하게 스프링 사이의 펜을 뽑아 새 페이지를 찾고는 휴가 그랬던 것처럼 재빨리 써갈긴 뒤 그에게 내밀었다.
‘이번 주에 생일이잖아요. 가고 싶은 곳이나 갖고 싶은 게 있나요? 있다면 얘기해 줘요. 그리고 당신만 괜찮다면 조용한 곳에서 저녁 식사라도 같이 하고 싶은데.’
하지만 곧바로 조금 애매하게 변하는 표정에 라이언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답장이 넘어왔다. ‘미안해요. 그날은 선약이 있어요.’ 하! 제가 잊고 있던 사이 누군가 선수를 친 것이다! 그가 물었다. ‘무슨 약속이요?’ 아, 휴는 아직 본가에 살고 있으니 어쩌면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이 우스울 만큼 다시 넘어온 종잇장에 적힌 이름은… 라이언은 이를 갈았다. ‘제리가 지난번 일을 사과하고 싶다고 해서… 그날은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요.’ 허공에 그를 비웃는 듯한 얼굴이 저절로 그려졌다. 그러니까 지금, 그 귀한 생일날을 제리 윌슨이랑 보낸다고? 정말 그 제리처럼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때 단단한 손이 수첩 위를 덮어왔다. 그를 쳐다보자 휴가 미안한 얼굴로—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미안함일까, 아니면 결국에는 이럴 수밖에 없을 거란 현실에 대한 미안함일까?—손짓을 만들었다. ‘미안해요.’ 라이언은 더이상 사과받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그가 아주 작게 말했다. “어쩔 수 없죠.” 잠시 동안 시무룩해진 라이언은 괜스레 수첩 끄트머리를 돌돌 말며 생각에 잠겼다. 약혼자가 있는 상대라는 건 알고 있었으면서도 뒤로 밀려나는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그날이 아니어도 앞으로를 생각한다면 시간은 많았다.
‘그럼 그 전날은 괜찮아요? 그때 얘기했던 좋아하는 영화 있잖아요, 그거 같이 보는 게 어떨까 하는데. 물론, 당신이 제게 쓸 시간이 있다면요. 이를테면 우리끼리 전야제를 하는 거죠. 휴 마이클 잭맨의 생일 전야제. 어때요?’
그의 한쪽으로 쏠린 글자를 내려다보던 휴가 잠시 뒤 그가 좋아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좋아요.” 휴는 비밀 이야기라도 건네는 것처럼 그를 향해 허리를 푹 숙이며 속삭였다. “좋아요, 라이언.” 라이언은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제 앞에서 편안히 활짝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불쑥불쑥 그런 욕구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는 휴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도, 제 사랑을 받아달라고 매달리고 싶지도 않았다. 라이언은 마주 웃는 대신, 아까부터 톡톡 부딪히던 발을 끌어당겼다. 그는 제 다리에 얽힌 기다란 다리 사이사이를 더 깊게 파고들며 옷가지 너머의 체온을 간접적으로 느끼는 것에 만족했다. 정말로, 이 정도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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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휴 마이클 잭맨의 생일 전야제 당일, 라이언은 갓 튀겨낸 팝콘과 와인을 준비하고 영화 시간 내내 둘을 덥혀줄 부드러운 담요도 장만했지만 그런 것들을 신경 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상당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휴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휴가 도착하기 약 한 시간 전부터 부산스럽게 허둥대던 라이언은 마침내 울린 초인종 소리에 오븐에 갇힌 닭을 내팽개치며 달려나갔다. 거의 매일 같이 보는 얼굴이었지만 둘은 때때로 몰래 이루어지는 이와 같은 비밀스러운 만남이 그들을 더욱 뜨겁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라이언은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자연스레 옆으로 비켜섰다. 휴는 꽃다발을 들고 있었고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둘은 곧 현관에서 마주 보게 되었다. “웬 꽃?” “음, 이번이 정식적인 방문이니까…” 말끝을 흐린 그의 입술에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이어진 아주 짧은 정적. 눈이 마주쳤고 라이언은 숨을 죽였다. 다음 순간 휴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혹은 이미 그럴 작정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제게 부딪혀오는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라이언은 이 순간이, 어느 날의 밤을 상기시킨다고 생각했고 그랬기에 이번에는 무게를 실으며 다가오는 몸을 맞춰 끌어안았다.
입술 사이로 깊이 있게 혀가 오가는 와중 그의 날개뼈가 벽에 닿았다. 꽃다발은 또 다른 밤의 수건처럼 바닥에 널브러지고 흐트러졌다. “휴, 꽃이…” 그는 아깝다는 듯 겨우 입술을 떼며 손을 뻗었지만 저지당했다. 가쁜 호흡을 고르며 휴가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정말?” 이런. 라이언은 냉큼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그의 향기가 뼛속까지 파고들며 끊임없는 갈증을 일으켰다. 다시 맞대오는 입술에 라이언은 입을 크게 벌려 받아들였다. 둘은 모든 것을 잊은 채 순간순간에 집착하며 키스했지만, 그는 선을 넘지 않았다. 휴가 죄책감을 가질만한 일은 벌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은 차갑게 식은 저녁을 나눠 먹었지만 상대의 진심을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럴 만큼 기쁘게 시간을 보냈다. 둘은 작은 식탁에서 마주 보며 발을 얽었고 나란히 앉은 소파에서는 팝콘을 나눠 먹으며 웃음 지었다. 행복했다. 라이언은 매 순간 심장이 세차게 뛰면서도 편안할 수 있다는 어떤 감각과, 일생 동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감정을 느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영화 속 남자가 빗속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라이언은 휴를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것을 바라볼 때의 휴의 눈은 굉장히 아름다운 빛을 띄었다. 그 순간 그는 드디어 제가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상대가 휴라는 사실이 감격스럽게 느껴졌고 갑작스럽게 이리도 감상적이 되었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렇지만.
다시금 둘의 시선이 마주 닿았다. 휴의 옆얼굴로 영화의 장면 장면들이 스쳐지났다. 그는 휴의 손을 잡았고, “휴,” 마주 잡아오는 온기를 느끼며 나지막이 말했다. “생일 축하해요.” 당신이 좋아요. 당신을 좋아해요.
휴는 아주 행복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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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미있게 놀지 말아요.” 18:30
질투 나니까. 그는 제리 윌슨이라는 남자가 조금 더 못난 사람이기를 바랐다. 그랬다면 휴가 지금과 같이 옅은 죄책감을 가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니, 알 수 없었다. 그는 휴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휴의 약혼자라는 사람은 ‘사과’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는 휴가 제리를 배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그런 위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도 무딘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좋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제리가 진정으로 사과한다면 봐주도록 할게요.” 18:30
‘하하. 고마워요, 라이언.’ 18:31
“연극 시간이 몇 시라고 했죠?” 18:31
‘7시요. 그런데 그건 왜ㅐ요?’ 18:31
“나 참. 제가 쫓아갈까 봐요? 걱정 마요. 오늘은 착하게 집을 지킬 예정이니까. 그냥, 날이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었나 해서요. 이미 밖이죠?” 18:32
‘네. 늦는 게 싫어서요. 조금 쌀쌀하지만 괜찮아요. 고마워요.’ 18:33
제법 차가워진 공기에 라이언은 재킷을 여미며 걸었다. 휴의 스카프가 풀린지 얼마 되지 않아 온도는 급격히 낮아지기 시작했고 그는 점점 자주 불편을 호소하는 휴가 걱정되었다. 그가 수화를 알아듣고 익숙해지는 만큼 휴의 목 상태는 좋아지다 나빠지기를 반복했는데, 그건 그를 가끔씩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때때로 그 크림색 스카프와 함께일 때의 휴가 어딘가 더욱 예민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늘은 휴의 생일이었고, 사과를 한다며 그를 불러낸 그의 약혼자가 그를 상처 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렇기에 길의 모퉁이를 돌자마자 항상 지나치는 레스토랑에서 그 얼굴을 발견했을 때, 라이언은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6시 38분. 연극 시간에 맞춰 가는 것이라면 아직 괜찮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본 것은 다른 누군가와 함께 마주 보며 웃고 있는 제리였다. 다른 누군가. 라이언은 그대로 굳은 채 창가에 앉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리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파티에 가는 듯 갖춰 입은 차림새였고 제리 또한 그랬다. 물론 친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괜한 생각이라고 치부할 틈도 주지 않은 제리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키스했다는 것이다.
“젠장…”
그럼 휴는. 휴는, 지금. 지금. 휴는. 이미 밖을 나선 휴가 멍하니 홀로 서서 기다리고 있을 모습이 상상되자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흥분을 감출 수 없었지만 제가 지금 본 것이 실제 일어난 일인지, 그렇다면 이것이 진실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휴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는 멋대로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제리가 몸을 일으켰다. 휴에게 가는 걸까? 아니, 그는 몸을 돌려 화장실로 사라졌다. 라이언은 제리가 자리를 뜨자마자 홀로 남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며 시간을 때우는 듯 보이는 그녀에게, 그는 물어야만 했다.
라이언은 가게에 들어섰다.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무척이나 듣기 싫었다. 그는 목적이 분명했으므로 성큼성큼 거리를 좁혔고 다짜고짜 그녀에게 물었다. “방금 그 남자와 무슨 사이죠?” “깜짝이야!” 상대의 몸이 움찔 튀어 올랐지만 라이언은 아랑곳 않고 그녀를 추궁했다. “제리 윌슨이랑 어떤 사이냐고요!” 커다란 그의 목청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 그에게 꽂혀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했고 이어 들려온 대답에 하얗게 질리며 입술을 물었다.
그녀가 혼비백산하며 외쳤다. “연인이에요!”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고요! 개자식. 그는 곧바로 다시 밖을 나섰다. 하지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럼, 지금까지의 휴는 도대체 뭘 지킨 거지? 저런 놈을 위해 마음을 쓰는 휴, 그런 휴의 마음을 비웃는 제리, 그럼에도 쉽게 사람을 놓지 못하는 휴… 라이언은 혼란스러웠다. 이 사실을, 휴는 알고 있을까?
그때였다. 아직 모퉁이에서 벽을 짚고 있던 그의 뒤로 바로 아까의 커플이 밖으로 나와 길가에 서 있던 차에 탔다. 라이언은 뒤를 돌아 모두 지켜보았고, 갑자기 모든 것이 뚜렷하게 느껴지자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탁자 위에 놓인 티켓이 떠올랐던 것이다. 제리는, 그녀와 함께 약속 장소에 나갈 생각이었다. 그에게 또다시 창피를 주고 무참히 상처 입히기 위해서. 그에게 휴의 존재는 그저 잠시 동안의 유흥거리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짓밟기 위해서. 그것도 그가 다른 날보다 더 행복해야 할 단 하루, 바로 오늘.
라이언은 거친 숨을 급하게 몰아쉬면서 뛰기 시작했다. 그가 휴에게 가닿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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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속도에 비례해서 바람이 거세게 그의 뺨을 할퀴며 지나갔다. 라이언은 재킷을 펄럭이며 빠르게 달렸지만 차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어느새 사거리로 접어든 그는 휴에게까지 가는 길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하지만 제리는 그보다 먼저 휴를 만날 것이고 그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받는 얼굴을 견뎌야만 할 것이다. 라이언은 도시의 한가운데에 길게 솟아있는 건물 위로, 대문짝만하게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6시 50분. 그는 뛰면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신호음이 몇 번 반복되다가 곧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하는, 나의, 휴.
“휴,” 그는 헐떡이는 숨을 좀처럼 감추지 못한 채 쥐어짜듯 말했다. “거기서 나와요.”
“라이언? 괜찮아요? 혹시 운동 중이에요?”
“아니요! 아니요, 휴!” 라이언은 절규하듯 소리쳤다. “제발, 거기서 나와요. 부탁이에요.” 제발, 제발요. 저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제발 저를 믿어줘요. “아, 알았어요. 진정해요, 라이언. 괜찮아요? 네, 알겠어요. 지금 나갈게요.” 그는 조금만 빠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 발, 바로 그 차이로 휴를 채간다면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늦고 말았음을 휴가 눈앞에 나타나자마자 알 수 있었다. 휴가 건물 밖으로 나온 바로 그 순간, 그를 향해 뛰고 있는 라이언과 눈이 마주쳤고 의아함이 스친 얼굴은 곧바로 그 앞을 가로막은 두 인영에 천천히 굳어졌다. 라이언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휴…”
제리가 휴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흘끗 뒤를 돌아보며 그를 보았다. 라이언은 벌겋게 달아오른 낯으로, 또 분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고 제리는 기쁘다는 듯 웃었다. 휴는 그때 그 파티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좋지 않은 상태였다. 휴대폰을 쥔 손이 맥없이 바닥을 향했고 그의 고개 또한 발끝을 향했다. 마치 이미 상처받을 준비가 됐다는 것처럼. 라이언은 입술을 씹었다.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지만 버텨야 했다. 제리는 그녀를 휴에게 소개하는 것처럼 둘을 번갈아가며 손짓하더니 휴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때처럼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휴는 입술을 물었다.
“휴,”
이리 와요. 그렇게 말하려 했는데. 제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듯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더니 바닥에 집어던졌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더러운 걸레 같으니라고. 어느새 좁혀진 거리에 라이언은 그가 하는 말을 모두 들었다. 휴는 바닥에 던져진 것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라이언은 그것이, 흩뿌려진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것들이, 그들의 사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그는 휴의 앞으로 다가가 서며 그들과 휴를 갈라 놓았다. 라이언은 호흡을 골랐다. 뭐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지금 그는 한 알파의 약혼자를 꾀어낸 파렴치한 또다른 알파일 뿐이었다. 제리는 드디어 그날의 복수를 했다는 눈빛으로 턱을 까딱이더니 그녀와 함께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제가 벌인 일의 대가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무언가에 난도질당한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휴,” 그는 멍하니 바닥을 향해 있는 시선을 돌리기 위해 그의 팔을 잡았다. “가요.” 나랑 가요. 그는 무력하게 끌려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허망함과 공허함은 다른 것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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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추웠다. 몸도 마음도. 라이언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휴의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그의 꼴이 말이 아니었고 제 집으로 이끌기에는 맞지 않는 상황인 것 같았다. 그렇게 망설이며 앞으로만 걷고 있던 그때, 잡힌 손이 당겨지더니 휴가 그를 돌려세웠다. “미안해요, 저기…” 저기, 그러니까, 라이언. 있잖아요…… 답지 않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작게 사그라들었다. 그건 무언갈 말해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듯한 느낌이었기에, 라이언은 그런 그의 모습을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휴,”
“놀지. 음, 저기 지금은, 저…”
“……”
“혼자, 혼자…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아니, 혼자, 있고 싶어요. 마침내 더듬거리며 문장을 완성한 휴가 그와 눈을 맞췄다. 떨리는 눈동자는 진실인 척하고 있지만 진짜가 아니었다. 거짓말. 당신은 거짓말을 할 줄 몰라. 라이언은 가슴께가 활활 타는 듯한 기이한 감각을 느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절망했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휴,” 그는 뭐라 말하려 입술을 뗐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휴는 이런 시간을 혼자, 또 얼마나 자주 겪어야 했을까? 마주한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앞에서 미소를 잃지 않으려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끔찍하게 여겨졌다. 그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있는 그대로의 휴.
“휴,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라이언은 알게 모르게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던 행동을 후회했다. 휴는 그에게 진심이었던 만큼, 제리와 같은 사람에게도 진심이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할 줄 아는 사람. 남을 미워하느니 차라리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히는 사람. 그는 이토록 깊은 애정을 느껴본 적 없었고 어머니가 그를 사랑했던 것처럼, 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사랑했던 것처럼,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잊지 못한 채 여전히 괴로워하는 것처럼 휴를 사랑하고 있다고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다.
라이언은 휴를 품에 안았다. 조금씩 떨기 시작한 몸을 가득히, 꽉 끌어안으며 손바닥으로 천천히 그의 등을 쓸었다. “괜찮아요, 휴.” 일순 가슴팍에 손이 닿았으나 휴는 곧 힘을 빼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한 휴를 감싸 안으며, 그는 이제 다시는 제가 예전과 같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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