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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3 20:32
(1) (2) (3) (4) (5) (6) (8) (9) (10)
(11) (12) (13) (14) (15) (16)
금린대는 사시사철 갖가지 화초목이 번갈아가며 꽃을 피우지만 조그마한 비단화가 만개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 작고 반질반질한 꽃잎들이 바람과 함께 휘날리며 길이고 정원이고, 심지어 활짝 핀 금모란 위까지 비처럼 떨어졌다.
금릉이 방긋방긋 웃으며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제법 걸음을 걷게 되었지만 위만 쳐다보고 아장거리더니 이내 남희신의 손에 엎어지고 말았다.
웃으면서 다가온 강염리가 금릉을 받아 안았다. 앙증맞은 머리에 쓴 모자에는 나비 모양의 금붙이가 달려 있고 옷도 금빛 일색이지만 솜씨 있게 여러 색을 짜 넣어서 무척 귀여웠다.
잠시 후 남희신은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금광요와 함께 시내로 걸어내려갔다. 금릉에게 줄 장난감을 살 겸, 새로 생긴 찻집에 가 볼 예정이었다.
천천히 걷는 남희신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또 뭔가 신경쓰이는 일이 있으세요, 형님?”
“아... 아니다.”
남희신이 얼버무렸지만 사실은 신경쓰이는 일이 있었다.
청담회에 참가하기 위해 금린대로 오기 전, 남희신은 동생에게 위무선을 잘 단속하라고 단단히 일러 두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남망기에게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제는 이상한 실수도 하지 않고, 쳇바퀴처럼 일정한 일상으로 돌아왔기에 정신을 차렸다고 믿고 싶었지만, 말액을 빼앗기고도 가만 있던 일전의 모습을 보면 아직도 어딘가의 나사가 빠진 것 같다.
“회상이 귀띔해 줬는데 현재 난릉에서 제일 괜찮은 찻집이랍니다. 새로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나요.”
“청하 사람이 난릉의 찻집을 어찌 알고?”
“그러니 큰형님께서 노발대발이시지요.”
남희신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저기인가 봅니다.”
연초록빛 깃발이 걸린 찻집은 과연 새로 지어서 그런지 깨끗하고 산뜻해 보였다. 대문을 지키는 주인 외에도 시종들이 바삐 오가는 걸 보니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았다.
찻집 주인은 두 사람이 다가오자 반색을 하면서 맞이했다.
해와 달처럼 금색과 백색의 옷을 입은 두 사내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기품도 있어 아주 높은 가문의 귀공자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수선을 떨었다.
남희신이 막 주인을 따라 문턱을 넘으려는데 금광요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와 비슷한 때에 주인도 이상하다는 듯 돌아보면서 금광요의 얼굴을 살폈다.
슬쩍 보고 외면했던 주인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시 쳐다보았다.
“맹요...?”
아예 발걸음을 멈춰버린 채 찻집 주인을 바라보던 금광요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삽시간에 웃음기가 싹 가셨을 뿐 아니라 아주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아요?”
남희신이 기색을 살피며 어깨에 손을 올려도 금광요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점점 눈빛만 깊어지더니 새까만 눈동자가 더욱 짙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별안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 쪽에 촘촘히 얹어뒀던 단지들이 박살이 났다.
남희신이 놀라서 보니 금광요가 한생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고, 그의 허리로부터 창처럼 뻗어나간 검날이 단지를 박살내고 벽까지 구멍을 뚫어버렸다.
금단을 맺은 후 금광요는 한생을 더욱 길게 만들어 두었기에 끝까지 영류를 흘리면 사거리가 1장 가까이 되었다. 생긴 것은 단순한 연편같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덤빈 사람들은 혼쭐이 나곤 했다. 연편은 쥐고 휘두르는 모양새를 보면 공격이 어디로 향할지 어느 정도 예측 할 수 있지만 한생은 자세와 관계없이 아무 방향으로나 뻗쳐나갔기 때문에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남희신의 눈으로도 알기 힘든 부분이었지만, 이 때 금광요의 크게 뜨여진 눈이 바로 앞에 있는 남자에게 못이 박혀 있었다.
아찔한 순간에 삭월이 검집에서 튀어나가며 한생의 손잡이 근처를 때렸다.
땅 하고 쇠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번개처럼 공기중으로 뻗어 나가던 한생의 검날이 남자의 눈 앞에서 멈추었다.
남희신이 부지불식간에 내뻗은 힘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금광요는 손을 떨며 한생을 놓치고 말았다.
“히익!”
남자는 갑자기 코 앞에서 뾰족한 검 끝이 나타났다가 물러나자 뒤늦게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요, 너...”
금광요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는 마치 처음 대하는 것처럼 제 앞을 막아선 남희신을 바라보았다.
단지를 깨부수는 소리와 함께 소란하고 바쁘던 시장의 움직임이 일시에 멎었고 사람들의 눈이 이 쪽으로 쏠렸다.
대기를 꽉 채웠던 소음이 가시자 일순 귀가 멍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금광요가 주변을 둘러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삶에 찌든, 희노애락에 박한 얼굴들의 시선이 한 몸에 박히자 저도 모르게 터져버린 감정이 점점 풀려나며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약에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질을 치는 금광요가 너무 위험해 보여 손을 뻗으려던 남희신은 그가 양 입꼬리를 올리며 킥킥거리고 웃기 시작하자 굳어버렸다.
금광요가 고개를 젖히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더니 훌쩍 몸을 날려 근처 지붕 위로 날아올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남희신은 삭월을 손에 든 채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금방 금광요가 앙천대소하던 웃음소리가 잔향처럼 남아서 날카롭게 귀를 때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꿈에서 깨어난 듯 그가 돌아서자 구경꾼들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안 보는 척하며 흘끔흘끔 남희신의 동태를 살폈다.
남희신은 배상도 할 겸 주인에게 내막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멀리 달아난 후였다.
금광요는 남희신이 자신의 공격을 무력화시킨 순간 자신이 사람을 죽일 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후회하기는 커녕 자신을 쳐다보던 수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살기가 일었다.
그는 계속해서 내달려 시내를 완전히 벗어나 아무도 없는 들판에 이르러서야 발을 멈추었다.
옛날 어머니 맹시와 기루에 있을 때, 기둥서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면서 그녀를 괴롭히던 사내가 있었다. 좀 전의 찻집 주인이 바로 그 남자였다.
당시 금광요는 어렸던지라 남자가 어머니를 어떤 식으로 괴롭히는지 알지 못했다. 차차 장성하면서 그 남자가 얼마나 불쾌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지만, 그 때쯤 맹시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남자는 기루에서 여자들을 괴롭히며 난봉질이나 하던 인간이었기 때문에 지금쯤은 죽었거나 비루한 인생을 살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제법 번듯하게 차려 입고는 커다란 찻집을 운영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금 시커먼 분노가 솟구쳐, 되돌아가서 그 남자를 죽이고 잘게 찢어버려야만 성에 찰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쓰레기같은 남자를 보호하던 남희신의 얼굴이 겹치는 바람에 부들부들 떨다가 그만 땅바닥에 웅크렸다.
그 남자가 정말 죽도록 미웠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희신이 적시에 자신을 막아낸 것이 다행이라는 이성적인 생각도 들었다.
두 가지 생각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 남자를 죽이고 싶다.
다행히 남희신의 앞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 남자를 죽이고 싶다.
...
그 다음에는 10년이 넘도록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비참한 추억들이 걷잡을 수 없이 들이닥쳐서, 양 팔로 머리를 감싸안고 몸부림을 쳤다.
이마의 혈관이 터져 나올 것처럼 괴로워도 그 동안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하며 배인 습관 때문인지 눈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빨을 뿌득뿌득 갈며 분노, 괴로움, 그 다음에는 분노로 인한 공포심이 불거졌다.
금광요는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큰 분노를 담고 있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삶 전부가 가짜인 그에게는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성을 잃고.
가장 중요한 사람 앞에서 본색을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남희신...”
그는 크게 숨을 삼켰다.
남희신을 떠올리자, 이번에는 두려움이 불쑥 커져서 분노를 다 집어삼켜버렸다.
과거가 어찌됐든 현재가 어찌되어 있든, 지금 자신에게 남은 것은 남희신 단 한 사람 뿐이었다.
스스로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그토록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람과는 계속 사귀어 나갈 수 없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는 이미 자신의 본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마음을 닫아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금광요는 마지막으로 떠오른 이 생각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너무도 불안하고 두려워서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엉망이 된 상태로 그래도 될지 자신이 없었다.
더 이상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된다. 불안정한 상태로 그와 대면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어떻게든 분노를 가라앉혀야 했다.
남희신은 몇 시진 동안이나 주변을 헤매고 다녔다.
금광요의 행방이 걱정되는 것은 물론이고, 격앙된 그가 위험한 사고를 치는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다.
한참이 지나 해가 지기 시작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금린대로 돌아왔다. 금광요는 어디 갔냐고 묻는 강염리에게는 급하게 볼일이 생겼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희신은 계속해서 바깥 정원을 서성이며 금광요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실성한 듯 웃던 금광요의 얼굴은 남희신이 전혀 모르는 남자의 얼굴이었기에, 만약 그가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져서 다시 찾으러 나갈까 하다가, 그 사이 돌아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눌러 앉았다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한참 후 하인이 나와서 저녁상을 들여도 될까고 묻자 남희신은 너무 조바심이 나서 더이상 견디지 못했다.
저녁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을 밟으며 급히 걸어나가던 그는 동시에 서둘러 돌아오던 금광요와 맞닥뜨렸다.
짧은 시간 동안 염려하는 눈과 놀란 눈이 마주쳤다.
금광요가 곧장 남희신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형님.”
“아요...”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사람을 궂힐 뻔했으니 벌을 주십시오.”
남희신은 우선 그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그 다음에는 자연스레 내막이 궁금해졌다.
“사연도 모르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꾸짖겠느냐? 일어나거라.”
남희신이 금광요의 팔을 붙들어 일으키며 말했다.
금광요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남희신을 쳐다보고는 재빨리 눈을 깔았다. 그렇게 눈치를 살피는 모습은 여상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아요,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느냐?”
“형님께서 아실만한 인물은 아닙니다. 예전에 알던 사람으로 사사한 시비가 있었습니다. 험한... 세계에 있던 사람이라 저도 모르게... ...잘못했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되돌아오는 말이 없자 금광요는 다시 용기를 내어 쳐다보았다.
남희신은 금광요가 우려했던 것처럼 혐오스러워하거나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근심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이에 금광요는 완전히 마음이 놓였다. 최선을 다해 감정을 억누른 것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이었다.
남희신은 가슴이 베이는 것처럼 아프고 어깨에 힘이 빠졌다.
금광요의 얼굴은 다소 창백했으나 평소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남희신이 늘 사랑해 온 얌전한 의동생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지없이 사랑스러운 그 얼굴이, 마땅히 변해야 할 때 변하지 않으니 별안간 차갑고 멀게 느껴졌다.
사람을 죽이려고 했는데 아무 일도 아닐 리가 없다. 괜찮을 리가 없다.
그런데 금광요는 금가 사람들에게 욕을 보던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는, 그 얼굴을 자신에게 내밀고 서 있었다.
그가 그런 줄 짐작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아요. 넌 누구에게도 진심을 보이지 않는구나.”
남희신이 어두운 눈빛으로 말하는 소리를 듣고 금광요는 가슴이 철렁했다.
누구에게도, 라고 했으나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명백했다.
이 말에 금광요가 어떻게 반응하든, 남희신은 더 이상 확인해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니다. 마음 상한 건 너인데 내가 무슨 말을...”
남희신이 눈을 내리깐 채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서늘한 옷자락이 습한 바람처럼 금광요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11) (12) (13) (14) (15) (16)
금린대는 사시사철 갖가지 화초목이 번갈아가며 꽃을 피우지만 조그마한 비단화가 만개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 작고 반질반질한 꽃잎들이 바람과 함께 휘날리며 길이고 정원이고, 심지어 활짝 핀 금모란 위까지 비처럼 떨어졌다.
금릉이 방긋방긋 웃으며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제법 걸음을 걷게 되었지만 위만 쳐다보고 아장거리더니 이내 남희신의 손에 엎어지고 말았다.
웃으면서 다가온 강염리가 금릉을 받아 안았다. 앙증맞은 머리에 쓴 모자에는 나비 모양의 금붙이가 달려 있고 옷도 금빛 일색이지만 솜씨 있게 여러 색을 짜 넣어서 무척 귀여웠다.
잠시 후 남희신은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금광요와 함께 시내로 걸어내려갔다. 금릉에게 줄 장난감을 살 겸, 새로 생긴 찻집에 가 볼 예정이었다.
천천히 걷는 남희신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또 뭔가 신경쓰이는 일이 있으세요, 형님?”
“아... 아니다.”
남희신이 얼버무렸지만 사실은 신경쓰이는 일이 있었다.
청담회에 참가하기 위해 금린대로 오기 전, 남희신은 동생에게 위무선을 잘 단속하라고 단단히 일러 두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남망기에게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제는 이상한 실수도 하지 않고, 쳇바퀴처럼 일정한 일상으로 돌아왔기에 정신을 차렸다고 믿고 싶었지만, 말액을 빼앗기고도 가만 있던 일전의 모습을 보면 아직도 어딘가의 나사가 빠진 것 같다.
“회상이 귀띔해 줬는데 현재 난릉에서 제일 괜찮은 찻집이랍니다. 새로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나요.”
“청하 사람이 난릉의 찻집을 어찌 알고?”
“그러니 큰형님께서 노발대발이시지요.”
남희신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저기인가 봅니다.”
연초록빛 깃발이 걸린 찻집은 과연 새로 지어서 그런지 깨끗하고 산뜻해 보였다. 대문을 지키는 주인 외에도 시종들이 바삐 오가는 걸 보니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았다.
찻집 주인은 두 사람이 다가오자 반색을 하면서 맞이했다.
해와 달처럼 금색과 백색의 옷을 입은 두 사내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기품도 있어 아주 높은 가문의 귀공자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수선을 떨었다.
남희신이 막 주인을 따라 문턱을 넘으려는데 금광요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와 비슷한 때에 주인도 이상하다는 듯 돌아보면서 금광요의 얼굴을 살폈다.
슬쩍 보고 외면했던 주인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시 쳐다보았다.
“맹요...?”
아예 발걸음을 멈춰버린 채 찻집 주인을 바라보던 금광요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삽시간에 웃음기가 싹 가셨을 뿐 아니라 아주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아요?”
남희신이 기색을 살피며 어깨에 손을 올려도 금광요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점점 눈빛만 깊어지더니 새까만 눈동자가 더욱 짙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별안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 쪽에 촘촘히 얹어뒀던 단지들이 박살이 났다.
남희신이 놀라서 보니 금광요가 한생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고, 그의 허리로부터 창처럼 뻗어나간 검날이 단지를 박살내고 벽까지 구멍을 뚫어버렸다.
금단을 맺은 후 금광요는 한생을 더욱 길게 만들어 두었기에 끝까지 영류를 흘리면 사거리가 1장 가까이 되었다. 생긴 것은 단순한 연편같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덤빈 사람들은 혼쭐이 나곤 했다. 연편은 쥐고 휘두르는 모양새를 보면 공격이 어디로 향할지 어느 정도 예측 할 수 있지만 한생은 자세와 관계없이 아무 방향으로나 뻗쳐나갔기 때문에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남희신의 눈으로도 알기 힘든 부분이었지만, 이 때 금광요의 크게 뜨여진 눈이 바로 앞에 있는 남자에게 못이 박혀 있었다.
아찔한 순간에 삭월이 검집에서 튀어나가며 한생의 손잡이 근처를 때렸다.
땅 하고 쇠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번개처럼 공기중으로 뻗어 나가던 한생의 검날이 남자의 눈 앞에서 멈추었다.
남희신이 부지불식간에 내뻗은 힘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금광요는 손을 떨며 한생을 놓치고 말았다.
“히익!”
남자는 갑자기 코 앞에서 뾰족한 검 끝이 나타났다가 물러나자 뒤늦게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요, 너...”
금광요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는 마치 처음 대하는 것처럼 제 앞을 막아선 남희신을 바라보았다.
단지를 깨부수는 소리와 함께 소란하고 바쁘던 시장의 움직임이 일시에 멎었고 사람들의 눈이 이 쪽으로 쏠렸다.
대기를 꽉 채웠던 소음이 가시자 일순 귀가 멍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금광요가 주변을 둘러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삶에 찌든, 희노애락에 박한 얼굴들의 시선이 한 몸에 박히자 저도 모르게 터져버린 감정이 점점 풀려나며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약에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질을 치는 금광요가 너무 위험해 보여 손을 뻗으려던 남희신은 그가 양 입꼬리를 올리며 킥킥거리고 웃기 시작하자 굳어버렸다.
금광요가 고개를 젖히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더니 훌쩍 몸을 날려 근처 지붕 위로 날아올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남희신은 삭월을 손에 든 채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금방 금광요가 앙천대소하던 웃음소리가 잔향처럼 남아서 날카롭게 귀를 때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꿈에서 깨어난 듯 그가 돌아서자 구경꾼들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안 보는 척하며 흘끔흘끔 남희신의 동태를 살폈다.
남희신은 배상도 할 겸 주인에게 내막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멀리 달아난 후였다.
금광요는 남희신이 자신의 공격을 무력화시킨 순간 자신이 사람을 죽일 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후회하기는 커녕 자신을 쳐다보던 수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살기가 일었다.
그는 계속해서 내달려 시내를 완전히 벗어나 아무도 없는 들판에 이르러서야 발을 멈추었다.
옛날 어머니 맹시와 기루에 있을 때, 기둥서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면서 그녀를 괴롭히던 사내가 있었다. 좀 전의 찻집 주인이 바로 그 남자였다.
당시 금광요는 어렸던지라 남자가 어머니를 어떤 식으로 괴롭히는지 알지 못했다. 차차 장성하면서 그 남자가 얼마나 불쾌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지만, 그 때쯤 맹시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남자는 기루에서 여자들을 괴롭히며 난봉질이나 하던 인간이었기 때문에 지금쯤은 죽었거나 비루한 인생을 살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제법 번듯하게 차려 입고는 커다란 찻집을 운영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금 시커먼 분노가 솟구쳐, 되돌아가서 그 남자를 죽이고 잘게 찢어버려야만 성에 찰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쓰레기같은 남자를 보호하던 남희신의 얼굴이 겹치는 바람에 부들부들 떨다가 그만 땅바닥에 웅크렸다.
그 남자가 정말 죽도록 미웠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희신이 적시에 자신을 막아낸 것이 다행이라는 이성적인 생각도 들었다.
두 가지 생각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 남자를 죽이고 싶다.
다행히 남희신의 앞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 남자를 죽이고 싶다.
...
그 다음에는 10년이 넘도록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비참한 추억들이 걷잡을 수 없이 들이닥쳐서, 양 팔로 머리를 감싸안고 몸부림을 쳤다.
이마의 혈관이 터져 나올 것처럼 괴로워도 그 동안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하며 배인 습관 때문인지 눈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빨을 뿌득뿌득 갈며 분노, 괴로움, 그 다음에는 분노로 인한 공포심이 불거졌다.
금광요는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큰 분노를 담고 있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삶 전부가 가짜인 그에게는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성을 잃고.
가장 중요한 사람 앞에서 본색을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남희신...”
그는 크게 숨을 삼켰다.
남희신을 떠올리자, 이번에는 두려움이 불쑥 커져서 분노를 다 집어삼켜버렸다.
과거가 어찌됐든 현재가 어찌되어 있든, 지금 자신에게 남은 것은 남희신 단 한 사람 뿐이었다.
스스로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그토록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람과는 계속 사귀어 나갈 수 없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는 이미 자신의 본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마음을 닫아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금광요는 마지막으로 떠오른 이 생각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너무도 불안하고 두려워서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엉망이 된 상태로 그래도 될지 자신이 없었다.
더 이상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된다. 불안정한 상태로 그와 대면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어떻게든 분노를 가라앉혀야 했다.
남희신은 몇 시진 동안이나 주변을 헤매고 다녔다.
금광요의 행방이 걱정되는 것은 물론이고, 격앙된 그가 위험한 사고를 치는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다.
한참이 지나 해가 지기 시작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금린대로 돌아왔다. 금광요는 어디 갔냐고 묻는 강염리에게는 급하게 볼일이 생겼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희신은 계속해서 바깥 정원을 서성이며 금광요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실성한 듯 웃던 금광요의 얼굴은 남희신이 전혀 모르는 남자의 얼굴이었기에, 만약 그가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져서 다시 찾으러 나갈까 하다가, 그 사이 돌아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눌러 앉았다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한참 후 하인이 나와서 저녁상을 들여도 될까고 묻자 남희신은 너무 조바심이 나서 더이상 견디지 못했다.
저녁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을 밟으며 급히 걸어나가던 그는 동시에 서둘러 돌아오던 금광요와 맞닥뜨렸다.
짧은 시간 동안 염려하는 눈과 놀란 눈이 마주쳤다.
금광요가 곧장 남희신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형님.”
“아요...”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사람을 궂힐 뻔했으니 벌을 주십시오.”
남희신은 우선 그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그 다음에는 자연스레 내막이 궁금해졌다.
“사연도 모르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꾸짖겠느냐? 일어나거라.”
남희신이 금광요의 팔을 붙들어 일으키며 말했다.
금광요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남희신을 쳐다보고는 재빨리 눈을 깔았다. 그렇게 눈치를 살피는 모습은 여상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아요,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느냐?”
“형님께서 아실만한 인물은 아닙니다. 예전에 알던 사람으로 사사한 시비가 있었습니다. 험한... 세계에 있던 사람이라 저도 모르게... ...잘못했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되돌아오는 말이 없자 금광요는 다시 용기를 내어 쳐다보았다.
남희신은 금광요가 우려했던 것처럼 혐오스러워하거나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근심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이에 금광요는 완전히 마음이 놓였다. 최선을 다해 감정을 억누른 것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이었다.
남희신은 가슴이 베이는 것처럼 아프고 어깨에 힘이 빠졌다.
금광요의 얼굴은 다소 창백했으나 평소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남희신이 늘 사랑해 온 얌전한 의동생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지없이 사랑스러운 그 얼굴이, 마땅히 변해야 할 때 변하지 않으니 별안간 차갑고 멀게 느껴졌다.
사람을 죽이려고 했는데 아무 일도 아닐 리가 없다. 괜찮을 리가 없다.
그런데 금광요는 금가 사람들에게 욕을 보던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는, 그 얼굴을 자신에게 내밀고 서 있었다.
그가 그런 줄 짐작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아요. 넌 누구에게도 진심을 보이지 않는구나.”
남희신이 어두운 눈빛으로 말하는 소리를 듣고 금광요는 가슴이 철렁했다.
누구에게도, 라고 했으나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명백했다.
이 말에 금광요가 어떻게 반응하든, 남희신은 더 이상 확인해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니다. 마음 상한 건 너인데 내가 무슨 말을...”
남희신이 눈을 내리깐 채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서늘한 옷자락이 습한 바람처럼 금광요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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