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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1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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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리처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흠 하나 잡히지 않도록 정성들여 치밀하게 작성한 자신의 서류에 왕립 재판소의 인장이 찍히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한시라도 빨리 에드워드를 끄집어내려고 혈안이 된 듯 다른 안건에는 별 문제가 없이 넘어가버린건 예상을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쉽게 넘어갈 줄은 몰랐기 때문에 맥이 풀려서 저절로 어깨가 축 쳐졌다.


"괜찮습니까?"


"난 괜찮지만 괜찮지 않아. 마라톤으로 따지면 이제 시작점인걸. 되려 쉽게 끝나서 맥이 빠졌어."


"네, 어떤 의미에서는 저 녀석이 방어막을 쳐준 셈이죠."


"네드에게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사는건지 모르겠어."


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조사관들에게 둘러 싸인 에드워드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리처드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건 빚이 아닙니다. 다만 사랑의 결실이고 또 다른 사랑일 뿐이죠. 당신은 저 녀석이 베풀어주는 뜨거운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으니 부담 갖지 마시고 실컷 받으시면 됩니다."


"그래놓고 질투하려고?"


"제 질투보다 며느리놈의 질투가 더 강해서 문제의 소지는 없을거라고 판단합니다만."


"그건 그래."


소주 마스터라도 되는 듯한 가이의 강렼 소주질을 곁에서 보아왔던 리처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재판정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냉정한 시선을 에드워드에게 주고 있는 필립을 발견하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막 도착했다고 들었고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서 재판정에서 가까운 위치의 저택을 비싼 값을 주고 구입했다고 들었는데 리처드가 알기로도 그 저택은 대단히 비싸서 어지간한 재력으로는 엄두도 못낼 정도였다.
기세 싸움에서 지지 않겠다는건가? 리처드의 시선을 느낀 듯 필립은 에드워드에게서 시선을 떼고 리와 리처드를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가문의 이름을 짊어진데다가 현재로서는 공인된 아미티지 후작이자 영주인지라 리처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리는 그런 행동이 영 못마땅한 듯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리가 보기에 필립은 지금 리처드가 아니라 아미티지의 반지에 시선을 두고 있었고, 전쟁 후반에 무리한 수를 써서라도 반지를 노렸던 것을 생각하니 리는 설마 필립이 에드워드의 문제와 저 반지를 바꾸려는 의도가 있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리 자신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긴 해도 정식 아미티지 후작으로서 인정받는 상징이라고 하니까 눈에 불을 켜고 노릴 법도 했고-


"아미티지의 반지와 에드워드를 바꾸자고 하면 어쩔까 싶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


한 시간 정도 주어진 휴식 시간에 휴게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쉬던 리처드의 말에 리는 쳐죽이고 싶은 공작이 필립과 저쪽에서 담소를 나누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리처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재판 전에 그런 딜이 들어왔다면 에드워드의 고소건을 취하하거나 무마하는 쪽으로 일이 진행되었겠지만 이미 재판이 시작된 지금에서는 기껏해야 에드워드가 받을 형벌을 대신하기 위한 금 1000파운드를 지불해주는 것 뿐이었기 때문에 이리보나 저리보나 필립의 관용과 여유를 보여줄 뿐이었다.
리 자신은 그런 상황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에드워드가 돈 때문에 벌을 받게 된다면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내심 속으로 적잖은 갈등도 겪었었다.
만약 필립이나 공작이 벌금을 대신 내준다고 한다면 과연 거절할 수 있을까?
그런데 리처드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았다.


"자비로우신 리처드 크리스핀 아미티지 후작님께서는 어떤 결심을 하셨습니까?"


"사실 이 반지 따위가 뭐가 중요하겠어? 하지만 결국 반지는 넘길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어. 이건 단순히 비싸고 희귀한 반지가 아니라 당신과 내 의지야. 그리고 네드의 의지도 우리와 같겠지. 이건 내가 아미티지의 이름을 가진 자이자 선조들의 의지를 이어받은 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만약 그 반지를 넘길 생각이셨다면 전 당신의 손가락을 부러뜨려서라도 빼내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으니까요."


"못된 알파네, 나를 아프게 할 생각이었던거야?"


살짝 눈을 흘기면서 부루퉁해진 표정이 꽤나 귀여워보인 리는 볼을 살짝 꼬집어주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시종이 가져다 준 잔을 받아서 자신이 한 모금 마신 뒤에야 리처드에게 건네주었다.


"저는 나쁜 알파 맞습니다. 영주님을 유혹한 것부터가 나쁜 행동이니까 말입니다."


리와 리처드가 나름대로의 알콩달콩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존 포터는 무서워서 당장 쓰러져서 기절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보기만 해도 후덜덜한 조사관들의 질문 공세에 자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의 말을 앵무새 훈련하듯 수도 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겨우 12살 소년이 토씨 하나 안 빼먹고 에드워드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의심의 소지가 되었던 듯 조사관들은 말을 바꾸어가며 거짓을 캐려고 노력했지만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존 포터는 진짜 외워버린 그 당시의 대화를 계속 일관되게 내어 놓을 뿐이었다.
조금 떨어져서 그 광경을 보던 조지는 존 포터의 기억력에 감탄을 하면서 저들이 겁 많은 소년이라는 사실을 이용해서 혹시라도 위협을 가하는 일이 없도록 감시를 하고 있었다.


사실 존 포터의 기억력에 가장 감탄을 하는건 에드워드였다.
소심하지만 꼼꼼한 성격인건 잘 알고 있었고 심부름도 정확하게 잘 해내는것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전쟁 도중 있었던 다른 일들까지도 토시 하나 안 빼먹고 기억하는건 신기하기만 했다.
조사관들이 조사를 마치고 곁을 떠나자 현기증이 돌아서 쓰러질 지경이 된 존 포터는 조지의 격려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게다가 여기서 쓰러지면 괜시리 에드워드에게 불이익이 갈 수도 있으니 꾹 참아야만 했다.


"너 진짜 기억력이 대단한데? 어때? 수도에 남아서 나한테 일을 배우지 않을래?"


"네? 하지만 저는 신분도 천한 꼬마일 뿐인데요?"


"사무를 보는 일에는 그런건 상관없어. 수도나 자유무역항 같은 곳에서 정당한 직업을 얻게 되면 자유시민 증서를 얻을 수 있어. 그러면 네가 살던 지역의 영주가 너에게 명령을 할 권한이 없이 넌 자유롭게 직업을 얻고 원하는 지역에서 살 수 있게 되는거야. 결혼을 하기 위해서 영주의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지. 어때?"


필립 체제 하에서 농노 생활을 경험했던 존 포터에게는 놀라운 제안이긴 했지만 잠시 고민에 빠지던 이 어린 소년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는 있었다.


"전 북쪽 출신이긴 하지만... 후작님께서 승리하시면 지금까지처럼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잖아요? 후작님은 너그러우신 분이시니까요. 그러면 저도 고향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야죠. 그리고 저는 같은 마을의 저처럼 평범한 여자와 결혼을 할텐데 후작님께서 그걸 반대하실 분도 아니실테고요."


그야 그렇지만... 조지는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에드워드의 일생 소원인 애를 다섯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과 맞먹는 소박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듣자 왠지 모르게 최대한 빨리 기사단의 행정직을 집어치우고 고향인 남쪽 영지로 돌아가서 느긋하고 평화롭게 살아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긴 릴리를 생각하면 다 집어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평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나을테지만-


"다 끝난거야?"


조지는 저쪽에서 따로 조사를 받던 에드워드가 다가와 말을 건네자 존 포터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뭐라도 먹여서 기운을 차리게 한 후에 오후에 시작될 치열한 재판 일정을 견디게 항 생각이었다.
왕실 기사단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마틴이 직접 재판에 참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신당부를 하기를 리처드는 먹을게 떨어지면 안되니까 필히 맛있는걸 먹여주라고 했기 때문에 리처드와 리도 함께 데려가서 점심이라도 먹여야했다.
오늘 재판이라 근처 식당에 자리가 있겠나 싶었지만 그래도 마틴이 이모저모로 신경을 써주는 것이 고마운 리처드는 에드워드의 손에 이끌려 재판소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힉-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소리를 지를 뻔 한 것은 리처드 뿐만이 아니었는데 소심한데다가 사람들에게 주목당하면 더 움츠러드는 존 포터는 무섭기 짝이 없는 단장님이신 리의 뒤로 냉큼 몸을 숨기기까지 할 정도였다.


"에드워드, 힘드셨죠!? 이거 드세요!"


"이것도 좀 드세요! 우리집에서 직접 만든 햄입니다!"


"거기 좀 비켜요! 염소 젖으로 만든 치즈도 드려야 한단 말이야!"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흰 빵을 받아든 것부터 시작해서 치즈와 햄과 절인 야채 등을 잔뜩 받아든 조지는 점심 식사를 하러 갈 필요가 없겠구나 싶어서 한숨이 푹 나왔다.
재판소 밖에서 대기하던 하인에게 점심은 이래되었으니 예정된대로 저녁 만찬만 하면 된다고 소식을 전달하게 시킨 조지는 에드워드를 둘러싼 인파를 뚫고 나타난 노인이 에드워드의 양 손을 꽉 잡는 광경에 역시 에드워드는 인기도 많다고 생각을 하며 리의 뒤에 숨어서 은둔해 있던 존 포터에게 바구니 하나를 넘겨주었다.


"어? 어르신은 그 때 그... 손녀따님은 괜찮으신가요?"


"괜찮다마다요! 그 때는 정말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기사님."


리와 리처드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다가 저 노인이 바로 손녀딸을 납치 당했다가 에드워드에 의해 구출되었던 그 사건의 당사자임을 깨달았다.
연신 고개를 굽신거리며 감사의 인사를 하던 노인에게 쩔쩔매며 마주 답례를 하던 에드워드는 노인의 뒤를 따라온 덩치 큰 중년의 남자가 내민 가죽으로 단단하게 만든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 때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이건 이미 잃어버렸을테니 저희에게는 있으나마나 한 겁니다. 그러니 부담갖지 마시고 받아주십시오."


이거 먹을거 맞나? 햄인가? 햄치고도 무거운데?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에드워드는 가방을 살짝 열어보고는 화들짝 놀라 그걸 도로 노인의 아들로 보이는 덩치 큰 중년의 남자에게 도로 내밀었다.


"감사하지만 이건 받을 수 없어요. 적은 돈도 아니고..."


"그건 정당하게 장사를 해서 모은 겁니다. 이게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으니 걱정마시고 받아주십시오. 다섯 번째의 아미티지 후작님의 편에 서 계시니 기사님께는 적이 많아서 이 재판이 유리하게 흘러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적은 도움이나마 되길 바랍니다."


리는 어안이 벙벙해진 에드워드가 들고 있는 가죽 가방 안을 슬쩍 들여다보고 그게 금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놀라서 노인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아는 얼굴이 아닌 것을 보아 대형 상단을 이끄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대충 어림 잡아도 금 100파운드가 좀 못될 것 같은 금액을 선뜻 내어 놓는 것은 좀 놀라웠다.


"실례지만 어르신께서 단독으로 내어놓으실만한 금액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리와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던 듯 리처드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며 꺼낸 말에 노인은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섯 번째의 아미티지 후작님. 기억 못하시는게 당연하시겠습니다만 저는 후작님께서 어리셨던 시절 종종 들르시던 무기상의 주인입니다. 소소한 가게라 큰 돈은 벌 수 없어서 이 돈의 일부는 수도의 무기상 길드원들의 도움을 받아 모은 것입니다. 에드워드 페이스 경을 돕고 싶다고 하니 다들 기꺼이 모아주더군요."


진은 가이의 출산을 돕고 아이들을 돌보느라 재판소로 가지 못했지만 배달꾼으로 가장하고 있는 암살부대원에게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점심이 지나고 오후의 중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펴질 때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된 진통 때문에 고생을 하는 가이를 위해 산파를 불러온 진에게 전해진 재판소에서의 소식은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고 밖에 표현할 다른 말이 없었다.


"...듣고 있어요."


좀 잦아든 진통 덕택에 진의 말을 들을 여유가 생긴 가이는 산파의 조언과 애를 둘 낳아본 경험대로 숨을 깊게 몰아쉬며 진이 전해준 재판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진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을 듣느라 산통에 신경이 덜 쓰이는건 어떤 의미에서는 고마운 일이긴 했다.
게다가 에드워드 존똑인 윗이 옆에 꼭 붙어서 엄마 아프지 말라고 손을 꼭 붙잡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봐주고 있으니 흐뭇하기 짝이 없었다.
하필 재판날이 출산일이라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꼬맹이 댕댕이 녀석이 옆에 없어서 아쉬웠지만 존똑 아들네미가 엄마 걱정을 하면서 붙어 있어주니 아쉬움도 푹 사그러드는 기분이었다.


"일이 잘 풀려서 벌금형으로 마무리 되었대. 저쪽에서 트집을 워낙 심하게 잡아서 반역으로 몰렸으면 벌금형조차 불가능 했을텐데 포터군의 증언 덕분에 벌금형으로 마무리 될 수는 있었나봐."


"그거 다행이네요... 휴우...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예요? 역시 벌금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다시금 시작되려는 진통조차도 잊어버릴 정도로 기가 막힌 이야기에 가이는 넋을 잃어버렸고, 더운 물을 가지고 들어오던 나이 지긋한 산파조차도 진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느라 윗의 옆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는 존을 데리고 나가라는 말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리에게서 사정 이야기를 전해들은 암살부대원이 진에게 전해준 재판소에서의 사건은 이랬다.


일반적인 4인 가족이라면 일주일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식품을 공급받은 에드워드에게 무기상 길드의 중역을 담당하고 있기도 한 노인이 길드원들을 설득해서 금 100파운드를 모아가지고 왔다는 소문이 재판소 앞에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 퍼지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일부가 갑자기 썰물 빠지듯 뿔뿔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식당까지 갈 수도 없는데다가 갓 구워낸 맛있는 빵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리처드의 주도하에 조지를 포함한 다섯 명은 휴게실로 들어가서 산더미 같이 쌓인 식량을 축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생겨난 금 100파운드에 당황한 에드워드는 이걸 어쩌느냐고 말을 꺼냈지만 리와 리처드는 아주 단호하게 네게 준거니까 너를 위해서 써야한다고 부드러운 치즈를 바른 빵과 함께 단호박을 먹여주었다.
금 100파운드는 상당히 많은 금액인지라 리는 존 포터의 증언으로 인해서 자칫 벌금으로도 해결이 안될 수 있었던 판결이 한결 완화되어 벌금형에 처해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진 것에 안도를 하며 나머지 금액을 뽑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귀족들조차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중립 세력인 상인 길드 쪽에 접근을 해 볼 생각을 못했는데 가만히 보니 이건 접근을 할 가치가 있어보였다.


벌금을 납부하는 기간은 한 달 이내로 제한하고 있으니 그 사이에 어떻게든 길을 뚫어서... 리처드가 수염에 붙은 빵조각을 털어주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골몰해 있던 리는 재판소 앞에 대기를 하고 있는 암살부대원을 만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서서 재판소 바깥으로 나왔다.
십여분 정도 시간이 있으니 그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고 지금 펜리 상단에 머물고 나름대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는 피터가 상인 쪽을 더 잘 알고 있으니 그에 대한 소식만 전달해 달라고 할 참이었다.
하지만 리를 기다리는 것은 질린 표정으로 턱이 빠져라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암살부대원의 어이없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뭐라고 한 마디 해 줄 작정이던 리는 재판소 앞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우르르 달려와 외쳐대는 목소리에 암살부대원과 똑같이 넋이 빠져버렸다.


"페이스 경! 이건 저희 길드에서 모아온겁니다! 수도의 양조업 길드입니다!"


"이것도 받아주십시오! 저희는 식품업인지라 액수는 적지만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처음 떠들어대는 몇 소리는 들을 수 있었지만 자신의 완력으로도 감당이 안될 정도의 돈더미를 안겨주는 바람에 리는 넋을 놓아버린 채 순식간에 자신의 앞에 쌓여가는 지원금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혼자서는 들고 갈 수도 없는 돈더미가 쌓여버린 터라 재판소의 회계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들을 동원해서 계수한 금액의 총액은 무려 금 2000파운드가 훌쩍 넘어버렸다.
보통 수준의 평범한 농경지를 다스리는 귀족이 벌금 1000파운드를 내기 위해서는 일년 내내 끙끙대며 빚을 써야 하는 판국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 액수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모였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빚까지 내서 돈을 제공한 길드도 있었고, 길드 뿐 아니라 중립을 지키던 수도의 상단과 집단이 아닌 개인 자격의 중산층들까지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수도에 거주하는 자유 시민들에게서 순식간에 높은 수익을 얻을 방법이 있는 대영주나 되어야 어렵잖게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이 나왔다는건 반대파의 귀족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위협적인 일이었다.


"...그래서요? 그 새끼들이 에드워드를 더 물고 뜯으려고 노력했을텐데?"


점차 간격이 짧아지는 진통조차도 잊어버리고 진이 전해준 이야기를 듣느라 정신이 없던 가이가 질문을 하자 진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전해들은 이야기를 계속 꺼내놓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에드워드를 벌금으로 몰아세워서 리처드의 전쟁 자금을 동결시키려던 전략은 완전 꽝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래서 오후 재판은 더욱 치열해져 버렸고, 존 포터가 아미티지 영지의 농노 출신 미성년자라는 것을 꼬투리 잡아서 증언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재판을 위한 심문은 고문까지도 허용되는 터라 소심하고 겁이 많아보이는 존 포터를 공격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어린 소년에게 고문까지 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의견과 더불어 리처드가 다섯 번째의 아미티지 영주이자 후작 작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이 불쌍한 소년은 겨우 심문을 받을 위기를 넘길 수는 있었다.
게다가 고문을 포함한 심문을 행해야 한다는 말에 에드워드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살벌해진데다가 방청석에서 어린 소년에게 고문을 하다니! 야유가 쏟아지는 판국이라 그 발언을 꺼낸 조사관은 쭈그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존 포터의 기억력이 사실인가 아닌가는 중요한 문제인지라 재판관으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오전의 재판에서 있었던 내용의 일부를 재판석의 서기가 기록한 기록에 대조해서 과연 이 소년의 기억력이 주장대로인지를 살피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재판에 사용하는 말이 아직 어린 소년이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어려운 내용이 많았기에 불리한 조건이긴 했지만 진짜로 존 포터는 재판관이 했던 발언을 고스란히 반복해서 내어놓았다.
중간에 조금 망설이다가 옆에 앉아있던 담당 변호사에게 뭔가를 소근거려서 의심을 사긴 했지만 변호사는 소년의 질문이 재판관이 했던 말의 뜻을 몰라서 그걸 물어보려는 것이라는 대답을 내어 놓아서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어내지는 못해서 의심을 샀지만 재판관은 왜 그 때처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지 못하느냐는 질문에 이 순진한 소년이 내어놓은 대답에 그냥 입을 다문 채 1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 때는 에드워드가 뭐라고 하는지 너무 궁금해서 집중해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는 저 같은 소년들에게는 영웅이니까요. 저어... 죄송합니다만 오전에 에드워드가 전쟁에 대해 증언했던 말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는데요..."


한마디로 광빠 인증한 셈이 되었지만 에드워드가 그 또래 소년들에게 인기 짱인건 기정 사실이었고 어직 어린 소년이 재판 도중 오고가는 어려운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도 당연한 터라 그 정도의 편차는 결국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저 망할 아들놈은 왜 주워와도 범상찮은 놈을 주워왔느냐며 리는 혀를 찼지만 어쨌든 존 포터의 증언력은 증명이 된 셈이었고, 그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 불쌍한 소년은 한동안 어딜 가든 에드워드를 위기 상황에서 두 번이나 구해준 영웅 대접을 받아서 대단히 괴로워해야만 했다.


"포터군의 기억력이 대단하긴 하죠. 농노로 썩지 않은건 천운인 것 같아요. ...그래서요?"


그렇게 되자 리는 엄청 고소해서 뒤집어지게 웃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현 상황은 반대파들에게는 엄청 애매해진 상황이었다.
오전 중에 있었던 청문회의 내용- 에드워드를 제외한 다른 부분을 가지고 항소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항소를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왕립 법원에서 내려진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를 하면 결국 왕국을 다스리는 왕의 결정에 맡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항소를 하면 분명 왕은 에드워드의 건에 대해서도 다시 판결을 내리겠다고 할게 분명했다.
존 포터의 증언에 힘입어 리처드의 주장대로 에드워드가 기스본 영지의 광산에 대한 왕가의 소유권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광산이 왕가에 속했다고 말을 했기 때문에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왕은 왕실에 속한 수입원의 실질적 소유권자이기 때문에 왕이 무죄라고 판결을 해버리면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제일 큰 문제는 왕국의 대표적인 양대 에드워드 광빠가 왕과 조지라는 점이었기 때문에 항소를 안하느니만 못하게 될 지경이라 그냥 벌금으로 끝나는게 차라리 나았다.


"내 동생이지만 그 정도로 인기기 있을 줄이야. 순식간에 벌금의 두 배나 되는 돈이 모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이제 본격적으로 짧아지는 진통 때문에 죽을 지경이어야 옳았겠지만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넋놓고 듣느라 아픔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던 가이는 일단 안심을 하자 급작스럽게 밀려오는 진통에 끙끙대기 시작했다.
가이와 마찬가지로 넋을 놓고 이야기를 듣느라 애가 나오는 상황은 신경도 쓰지 못한 산파가 뒤늦게 허둥지둥 다 식어버린 물을 다시 떠오는 광경을 바라보며 화로에 장작을 두어 개 더 집어넣은 진은 가이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어, 가이. 어쩐지 그 녀석이 이번에 애 낳는 일을 쉽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사실 에드워드는 가이가 당연히 가졌어야 했었을 광산의 소유권을 왕가로 넘겨야만 했던 상황에 대해서 대단히 불만족스럽게 생각했었다.
행정이나 회계업에 상당한 재능을 보이는 가이는 분명히 자신의 영지에 있는 광산을 소유해도 충분히 잘 해나갈 것 같았는데 리처드와 마찬가지로 오메가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찾지 못하는건 진짜 불만이었다.
그래도 에드워드가 이제는 광산의 소유권에 대해 별 불만을 표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왕위에 오르도록 해준 공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적도 많고 모든 기반이 약한 왕에게 있어서 기스본 가문의 금광이 안겨준 힘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왕과 벤자민은 친구니까.


판결을 기다리며 휘하의 기사들을 닥달하던 마틴이 무사히 끝난 재판 결과에 대해 들으며 대단히 인자해져서 되려 기사들을 두렵게 만들고 있을 무렵 진이 전달해 준 재판 소식에 의해 그 어떤 진통제보다도 탁월한 효과를 보고 있는 가이는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꼬맹이에 대한 강렼 소주질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진으로부터 전해진 재판 이후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 마지막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었다.


"내가 전해 들은 것 중에서 제일 기가 막힌 내용이 바로 이거야."


재판소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에드워드는 자칫하면 깔려 죽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우르르 모여든 군중들에게 갇혀버린 신세가 되어버렸다.
양 손을 얼굴에 댄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리처드 때문에 리가 등을 떠밀어 먼저 나가보라고 하는 터라 일단 먼저 나온 에드워드는 빽빽하게 몰려든 군중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몰려들기 시작하자 진심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고 저도 모르게 보는 입장에서는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가벼운 몸놀림으로 재판소 앞에 위풍당당하게 세워진 왕국의 법률을 정비한 두 번째의 왕을 조각해 놓은 조각상의 받침대 위로 냉큼 올라갔다.
조각상도 대단히 컸지만 받침대만 해도 높이가 2m는 족히 되는 터라 보통 사람은 폴짝 뛰어도 손이 닿기 어려운 받침대의 위로 순식간에 올라가서 쭈그리를 하고 있는 에드워드의 행동은 되려 군중들을 더욱 흥분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자신의 행동 때문에 함성 소리가 더 커진건 1도 생각을 못하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어떻게 하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에드워드는 한참동안 시끄럽던 주변이 서서히 조용해지면서 수도 상인 조합의 길드장이 우렁찬 목소리로 하는 말에 조금 더 쭈그리가 되어버렸다.


"에드워드 페이스 경, 무사히 재판을 마치신 것을 축하합니다! 한 말씀 해주시죠!"


말실수 한 것 때문에 대박 걱정을 끼친 내가 뭔 말을 하겠어...
리처드를 방불케하는 길드장의 우렁한 목소리에 더 쭈그리가 되어서 기대감에 가득 찬 군중들의 눈치를 살살 보던 에드워드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길드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기... 뭐라고 말을 하면 되는데요?"


"우리는 모두 에드워드 페이스 경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다음번 신년 무투회에서도 멋지게 활약해주시면 충분한 보답이 되니 출전을 해서 멋진 결과를 내주시겠다고 역속해주시면 됩니다."


겨우 그런 정도로 보답이 되려나? 잠깐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에드워드는 금새 자신만의 결론을 내리고 쭈그리를 하고 있던 자세를 펴고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재판소의 입구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레슬리 백작과 삼촌인 루퍼트, 그리고 그들의 뒤에 서서 재판소 안쪽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리에게 시선을 둔 에드워드는 방금 자신이 내린 결론을 실행해도 좋다는 결단을 내렸다.


"십 년. 내년의 무투회를 포함해서 앞으로 십 년간 우승을 놓치지 않을겁니다. 상금이 금 100파운드라고 하던데 그것으로 오늘 진 빚을 갚을 생각입니다."


대-애↗박!


그 광경을 직접 구경하다가 그렇게 중얼거린 암살부대원과 똑같이 말을 했던 진이 수도 전체를 완전히 들썩거리게 만든 에드워드의 대박 발언을 듣던 가이는 정신이 순삭될 것 같던 출산의 고통마저 잠시 잊어버린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철없는 댕댕이 자식! 그건 또 무슨 자신감이야!? 아니, 우승 따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 쇠막대 따위는 비교도 안되는 꼬추만큼이나 존내 강한 내 알파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상금을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이 대책없는 자식은 분명히 상금으로 파티를 열거야! 소도 잡고 돼지도 잡고 양과 염소도 잡고 닭도 잡겠지!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써버릴거라고! 생긴건 하는 짓만큼이나 대박인데다가 워낙 인기가 쩌니까 하는 수 없기도 하지만 유일한 단점인 경제적인 무개념은 고질병이니까 분명히 그럴거라고! 하지만 난 자비로우니까 그것도 이해할 수 있어! 문제는 그러다가 술을 잔뜩 마실거고 취해버리게 되면 존내 못생긴 것들이 찝쩍거릴게 분명하다는 사실이야! 내 꼬맹이는 나 외의 다른 것들에게는 눈길조차 안돌릴테지만 그래도 취해버리면 또 모를 일이잖아!? 안돼애- 꼬맹이가 나를 두고 바람을 피우다니! 난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도대체 뭘 걱정하는건지 모를 정도로 핏대를 세워가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댄 가이가 화를 내다가 아이를 낳은 것과, 방문이 벌컥 열리며 여기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온 것이 분명해보이는 에드워드가 가이 오빠! 라고 외친건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잠시 밖으로 내보낸 윗과 존이 아빠다 아빠! 에드워드를 따라 들어오자 산파는 익숙하게 탯줄을 자르고 마무리를 하다가 기겁을 하면서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약한 가이 오빠 부둥부둥 힘들었쪄? 나 없어서 속상했지? 다음번에는 내가 애 낳는게 낫겠어~ 먼지투성이 소맷자락으로 가이의 땀을 닦아주려고 들던 에드워드는 이 대책없는 댕댕이 녀석을 보다 못한 진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하고 윗과 존을 양 옆구리에 하나씩 낀 채 쫓겨나야만 했다.


"...네드."


"응? 응? 나 불렀어?"


가이 오빠가 나를 불러줬어! 힘들텐데도! 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이야!


딱 그렇게 얼굴에 대놓고 써 놓은 에드워드가 냉큼 방문을 닫고 기대감에 가득 찬 시선을 보내자 가이는 힘없이 웃어주었다.


"꼬맹아, 다른건 다 용납해도 바람 피우는건 절대 용납 못해. 알지? 오빠 성질 더러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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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먹은 이후에 가이는 자신의 일생에 대해서 딱 두 가지는 남부럽지 않게 열심히 해냈다고 자부함.
하나는 애 낳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렼!소주


실제로 에드워드는 십 년간 우승을 놓친 적이 없었고, 나중에는 서쪽 분쟁 자역의 수비 및 자라나는 새싹들을 위해서 위해서 더 이상 무투회에 참여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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