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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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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공주의 말상대로 궁에 들락거리던 피터의 입장만을 따져본다면 급작스럽게 빨리 몰려온 한파로 인해 올해의 전쟁이 일찍 끝나버린 것은 대단히 고마워 할만한 일이었다.
지난 두어달 간 수도에 머물면서 암살 시도를 당했던 횟수가 무려 30여회나 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예전만 못하다는 한탄을 하면서 얼른 단장놈이 수도로 와주길 바라는 피터가 조금도 긴장을 풀 사이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바로미터였다.
아직 사정을 모르는 벤자민의 반대로 인해 에리카 공주의 소원대로 벤자민의 생부를 빼내지는 못하고 계속 궁 안의 깊은 감옥에 가둬두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살려둘 수 있다는 것은 이익이었기 때문에 에리카 공주도 일단 거기까지만은 양보를 해야 했다.
다만 공작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도록 감시만 해주는 것에 신경을 쓸 뿐.


물론 전쟁이 일찍 끝난 것은 리의 입장에서는 전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공성전이 계속되면서 성 안의 식량을 말려버린 효과가 슬슬 나타난다고 보여져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는데!
밤새도록 내린 눈에 의해 막사가 무너져버린 어느 아침에 무너진 막사 안에서 끙끙대며 기어나오더니 이를 득득 갈면서 웕웕!!!! 괴성을 지르고 하늘을 향해 구성진 욕설과 함께 삿대질을 했을 정도로 한 달씩이나 빠르게 찾아온 한파와 엄청나게 내리기 시작한 눈이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완전히 얼어붙은 하천을 건너서 퇴각을 하면서 리처드는 예상보다도 빠르게 전쟁이 끝나고 성 안의 주민들이 굶어죽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 대단히 반가워했지만 차마 흉폭해진 리가 화를 낼까봐 그런 표현을 겉으로 꺼내놓지는 못했다.
'리처드의 기준'에서의 겉으로만.


"너무 대놓고 안심했다는 표정을 짓지 마십쇼. 저는 진짜로 화가 난 상태니까."


"아... 아냐! 내가 왜!?"


"뭐, 이해는 합니다. 당신은 저처럼 냉혈한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당신이 제자리를 되찾았을 때 다스릴 주민들이 다 죽어있다면 그것도 문제니 이 정도로 양보할 수는 있습니다."


늘 수직으로 쭉 서 있는 이마의 주름이며 굵은 눈썹이 당장이라도 튀어오를 듯 꿈틀거리는데다가 입이 댓발은 튀어나와서 전혀 이해를 하는게 아닌 것 같은 표정이지만 어쨌든 리처드는 말만이라도 자신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주는 것이 고마워서 짐을 싸고 있던 리의 눈투성이 수염 사이에 파묻힌 수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춰주었다.


"고마워, 리."


그나마 입이 댓발은 튀어나와서 제대로 입을 찾아 키스를 해줄 수 있었던 리처드는 무너진 막사 구석에서 중요한 서류가 담긴 상자를 꺼내며 그제서야 살짝 누그러진 표정을 짓는 리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어머님!"


아직 키가 작아서 허벅지까지 파묻혀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산 속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진 터라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헤치고 다가온 소린은 자신을 꼭 안아주는 리처드를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한껏 끌어안았다.


"그래, 갈 준비가 다 된거니? 숲의 원 주인들께 인사를 드려야겠구나. 리, 잠시 와주겠어?"


뭘 나까지... 말은 그렇게 투덜대며 하면서도 중요한 우방인 숲의 원 주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리는 리처드의 품을 파고 든 소린을 냅다 안아들어 목마를 태운 뒤 리처드와 함께 성큼성큼 헌터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겨우내 페이스 용병단과 함께 왕으로부터 거주 허가를 정식으로 받은 사흘 거리의 지역으로 함께 가서 용병단을 관리해주기로 약속한 올드보이들은 한 때는 적이었지만 지금은 더없이 친한 친구가 되어버린 숲의 노인들과 작별 인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이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일이 없는지라 겨우내 서로 잘 지내다가 봄에 다시 꼭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있었다.


"후작님, 아무래도 소린은 데려가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리처드가 오는 것을 보고 급히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우려를 표한 질리언의 말에 리처드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어린아이치고 너무 많이 먹어서 폐가 되겠군."


포인트가 그게 아닙니다만! 질리언은 그렇게 부르짖고 싶었지만 차마 리처드의 앞에서 대놓고 그렇게 말을 해서 눈새부리 삐약삐약을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연합군들의 사이에서 전쟁 기간 동안 기사단의 수장인 월터의 살이 쭉 빠진 이유가 리처드의 곁에서 말도 안되는 새부리 삐약삐약을 경험해서라는 소문이 쫙 퍼져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뻥이 아니라 레알 팩트라는게 함정.
질리언은 리처드에게서 시선을 돌려 리를 바라보았고, 그 시선의 의미를 알기 싫어도 알아챌 수 밖에 없는 리는 수염에 묻은 눈을 툭툭 털며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분명히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왜 내가 저 사냥꾼 양반의 말을 해석해줘야 하냐고, 이 할머니야!
하지만 이건 역시나 내가 리처드의 옆에 꼭 붙어있어야 한다는 증거! 그러므로 리처드는 내 운명의 오메가- 간단하게 결론을 내린 리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리처드에게 질리언의 말을 해석해주었다.


"이 사냥꾼 양반은 소린의 안전을 염려하는겁니다. 애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습니까?"


앞의 말은 분명 맞는데 뒤의 발언은... 좀... 페이스 경, 양심은 있으신겁니까?


딱 그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질리언의 시선을 먹금해버린 리는 아주 단호하게 질리언의 우려를 접어버렸다.


"사냥꾼 양반, 우리는 당신들을 믿고 있네. 그리고 저 기사들은 더 이상 자네들이 왕국의 적대 세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번 전쟁을 통해서 인정했을걸세.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자네들은 이 동맹 중에서 가장 필립과 가까이에 위치해 있고 그들에게 위협을 받고 있지. 실제로 자네들은 부족의 생존이 위협을 받게 된다면 소린을 내놓아서라도 자신들을 구해야만 하네. 난 그게 옳다고 생각해. 나 역시 그럴테니까. 하지만 저 순진하기 짝이 없는 후작 각하께서는 자네들이 배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기꺼이 소린이 자네들과 함께 있고 싶다고 한 요청을 들어준거야. 이해하나? 다시 말하자면..."


"미안하지만 페이스 경, 다 들리는데 꼭 비밀 이야기처럼 말씀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리고 난 그다지 순진하지 않습니다만."


듣다가 어처구니가 없어진 리처드의 말에 리는 흘끔 리처드를 바라보다가 손을 번쩍 쳐들었다.


"이봐, 월터 경. 여기 좀 와보라고!"


응? 월터? 월터는 아까 기사들을 이끌고 먼저 퇴각했는데? 영지 밖까지의 주변 상황을 둘러보고 용병단의 민간인들이 무사히 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겠다고 했는데?
의아한 심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뒤를 돌아본 리처드는 황량한 눈밭의 풍경만 눈 앞에 보이자 당장 리를 독기 품은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리가 거봐요, 순진하지?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한 말이 없어져서 새부리만 삐죽 내밀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이건 순진한게 아니라 멍청한거야. 여하튼 나는 소린의 안전에 대해서라면 염려하지 않네, 질리언. 자네들이 겨우내 부락에 머물테니 제아무리 필립이래도 겨울에는 손을 쓸 수가 없겠지. 적어도 이 숲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라면 겨울에는 들어가지 않는게 상책이라는 사실을 잘 알테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족장께서 소린을 잡으러 온 침입자를 그냥 둘 것 같지 않아서 더 염려가 안되는군."


연합군 공식 껌딱지인 소린이 지금도 스란두일의 옆에 꼭 붙어서 1+1이 뭔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는 광경에 시선을 주던 셋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이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기사들 중에는 이 혼약이 자신들을 이용하려는 술수가 아닐까 의심하는 축들도 있었지만 그런 그들도 소린이 스란두일을 졸졸 따라다니며 껌딱지 1+1을 계속 보여주는 것에 결국 의심을 접었었다.
게다가 기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에드워드가 그에 대해 계속 의심을 품는 기사들에게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1+1을 가리키며 저거 봐요, 죠아 듀금!이라고 써있잖아? 라고 하는 말에는 더 이상 반박을 못했었다.
소린을 이 곳에 남겨두는 이유 중 하나는 지금까지도 이 위태로워보이는 연합군에 들어오지 못하고 간만 보는 왕국 내의 여러 세력들에게 이번의 전쟁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 결속이 단단해졌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했다.
기사들이 가졌던 의구심처럼 북쪽 숲의 원 주인들은 왕국인이 아니라 최근까지만 해도 적대관계였으니까.


게다가 리와 리처드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소린이 북쪽 숲의 원 주인인 이민족들이 살고 있는 숲의 부락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밝힐 예정이었는데 그 이유는 필립이 영지 바깥의 무력 항쟁을 비밀리에라도 하지 못하도록 수를 쓰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필립이 부락을 침입해서 그들을 학살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위법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먼저 영지 내부로 침입했고, 그들은 20여년 전에 전쟁을 했던 적대관계이니 영지의 안보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에 소린을 침입 방지용 안전장치로 삼으려는 계산도 들어있었다.
아직 어린 소린에게는 가혹한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막상 소린은 전쟁이 마무리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모에게 달려와 부락에 머물고 싶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눈빛으로 애원을 했기 때문에... 냉정하게 따지면 정략에 의한 희생물이 된 셈인 소린은 조아조아너무조아!인 결과가 되어서 서로 다행이기도 했다.


"여기서 작별을 해야겠군. 겨우내 무사히 지내길 바라네."


껌딱지인 소린에게 이끌려 인사를 하러 온 스란두일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시 한 번 소린을 꼭 끌어안은 리처드는 축복의 말을 건네주며 곁에 둔 시간보다 떨어뜨린 시간이 더 길어지기 시작한 소린을 한 차례 돌아보다가 겨우 마음을 다그쳐 그 자리를 떠났다.


"에드워드는?"


"아침에 먼저 부락에 올라갔습니다. 주변을 살펴주고 난 후에 본대와 합류해서 뒷마무리를 하고 수도로 올겁니다."


"어쩐지 나 때문에 자식들에게 엄청난 짐을 지우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


리처드가 말에 올라타는 것을 돕던 리는 주변을 슬쩍 돌아보고 리처드의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 양반이! 당장 새부리 삐약삐약을 하려던 리처드는 엄청나게 진지해진 리의 표정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쳐다만 봤다.


"뭐야? 난 지금 진지하다고, 이 할머니야. 너무 멋져서 반했다는 표정 짓지 말라고."


"내... 내가 언제!?"


하지만 진짜 그랬뜸- 리처드는 이내 아닌 척 모르는 척 망토의 후드를 푹 눌러쓰고 부농부농해진 얼굴과 귀끝을 감추려고 했지만 감춰져야 말이지.


"소린은 저 부족과 족장놈을 좋아하니 짐을 진 것도 아니야. 게다가 네드 그 자식은 이쪽 방면으로 타고난 놈이라 다른 삶을 산다는건 상상도 안가. 본인도 그렇게 말을 하니까 더 할 말이 없지. 그러니 리처드, 절대로 당신 탓이라고 생각하지마. 냉정하게 따지면 이 전쟁을 시작한건 나니까 내 탓을 해. 차라리 내 탓을 하고 나를 원망하는 편이 나아. 난 당신이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게 가장 괴로우니까."


"아냐, 내 탓이야."


단호하게 말을 하며 말에 올라탄 리처드를 향해 조금 더 엄한 표정을 지은 리는 잔뜩 토라진 듯 보이던 리처드가 이내 도도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며 꺼낸 말에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무 매력적이라 당신이 나한테 반해서 이 사단이 난거니까 내 탓이지."


"전쟁 내내 못생기고 늙은 할머니를 입에 달고 살더니 어쩐 일로 그런 말씀을?"


"뭐 별거 아냐. 당신이 수도에서는 수염도 좀 깎고 멀쩡하게 돌아다닐텐데 그러면 사람들이 나더러 저런 잘생긴 젊은 알파를 어떻게 유혹했냐고 물어볼 것 같아서 나름 마음을 정돈시키려고 생각해보니까 그 답이 제일 나을 것 같아. 아, 물론 난 못생기고 늙은 할머니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수도에서 벌어질 말싸움에서까지 그렇게 말을 할 필요는 없잖아? ...음... 아무래도 레슬리에게 말싸움을 멋지게 하는 방법을 배워야겠어."


"허- 그런 쪽이라면 여우새끼 며느리놈한테 배우는게 나을 것 같은데? 그 자식은 진짜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믿고 살잖아. ...망할놈, 감히 나의 리처드를 젖혀놓고..."


"가이 기스본이야 진짜 예쁘니까 그렇게 생각할만하지만 난 역시-"


냉큼 리처드의 망토를 잡아당겨서 수염투성이 얼굴을 들이대고 길고 짙은 키스를 시작한 리를 바라보던 용병단은 이제 너무나도 일상적인 광경인지라 눈살을 찌푸릴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그나마 그 광경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애니였고, 주변에서 한숨소리가 터져나오는 광경에 자신도 한숨을 내쉰 애니는 수레의 뒷자리에 올라탄 채 소리를 질러 둘의 애정행각을 멈추도록 해주었다.


"페이스 경,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하지 않나요?"


리처드도 좋다고 응했는데 왜 나만! 리처드도 좋아라 혀를 이케이케 해줬다고!


하지만 그 말을 했다가는 리처드에게 등짝스매싱 스무대는 예약각인데다가 지금도 졸여놓은 산딸기잼 같이 뻘개진 얼굴을 한 리처드가 대박 삐져서 한 달간 접근금지 명령을 내릴 것이 무서워진 리는 지금까지처럼 자신만 나쁜 놈이 되면 된다는 가치관념하에 자랑스럽게 자신의 말테 올라탔다.
그래봤자 페이스 용병단의 범위 내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리 혼자 리처드를 핡핡거리며 따라다니는게 아니라 리처드도 내 알파 최고 미남! 핡핡... 얼빠질을 한다는걸 다 아는 터라 리의 저 생각은 틀린 셈이었다.


"뭔가 서운한 기분이 드는군요. 집사님은 그렇지 않으십니까?"


거주지역을 관리하던 관리자 한 사람의 말에 애니는 뒤를 돌아보며 멀어져가는 아미티지 성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살아 생전에 다시 저 성을 보게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다시 볼 수 있었고, 내년에도 또 볼 것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우습기도 하네요. 물론 겨울을 무사히 보낸다면 말이지만요."


"하긴, 저희와는 느끼는 바가 다르시겠죠. 그래도 저희는 집사님께서 동행해주신다니 너무나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단장님이 부재중이시니 좀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요. 단장님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아주 꼼꼼하게 이 쪽의 사정을 살펴주셨거든요. 사정 모르는 사람들이야 제멋대로 단장님에 대해서 평가하곤 하지만 충분한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저만큼 사려깊은 사람도 드뭅니다."


"저런, 페이스 경께서는 당신들을 이용하기 위해 데리고 있는거라고 대놓고 말씀하시던데요?"


"물론 저희 앞에서도 그렇게 말을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는 좋게 말을 하다가 뒤에서는 제거할 계획을 짜던 주인을 모셔본 입장에서는 차라리 대놓고 말을 하니 더 안심할 수 있죠. 게다가 후작님께서 절대 반대해주실테니 더 안심이고 말입니다. 가만 보니 후작님께 맞으면 단장님은 진짜로 아파하시더라고요. 어지간한 상처에는 꿈쩍도 안하는 양반인데."


그 광경을 눈 앞에서 수도 없이 보았던 애니는 소리를 내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이 생긴 리처드와 잘 어울리는 냉혹한 아미티지 성의 前집사에 대해 알려진 이미지와 다르게 애니는 잘 웃고 말도 잘 하는 편이라 이제는 거주지역의 사람들은 애니에 대해 거부감을 갖거나 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생각보다 상대하기 어렵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상대하기는 좀 어려운 단장을 말 한 마디로 쭈구리 시키는 광경은 제법 재미있어서 가끔은 애니가 사소한 일에 고집을 부리는 일이 생기면 다들 슬그머니 애니의 편을 들곤 했다.
키도 작달만한 나이든 여자에게 잔소리를 들으면서 말빨로도 이기지도 못하는 광경이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고, 어쩐지 리가 애니를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서이기도 했다.
리처드는 대놓고 애니를 자신의 누나라고 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처형뻘 되는 분이니까 단장이 못이기는게 맞는거잖아?ㅋ


"네, 페이스 경은 아주 믿을만한 사람이죠. 누가 뭐래도 저는 그 사실을 인정해요."


한 때는 리처드를 망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원망도 많이 했었고, 리처드가 부탁한 사랑의 결실이라고 생각해서 소중하게 애정을 담아 키우긴 했어도 사실은 가끔 리처드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도 힘이 들 때는 눈 앞에서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작은 아이가 미워질 때도 있었다.
리처드를 망쳐버린 미운 알파 용병을 꼭 닮은 아이니까.
하지만 영주님이 거주하시는 성에서 처음 어린 리처드를 만났던 그 날처럼 아무런 의심도 없이 달려와 품에 안기곤 하는 작은 아이의 온기를 느낄 때면 애니는 곧장 그 미움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었다.
이 아이는 겉모습만 그 용병을 닮았을 뿐 다른 것은 전부 리처드를 닮은 것이고, 그 미운 용병을 닮은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는데-


"휴우... 눈치 없는 것과 쉽게 좌절하는건 어쩜 그렇게 크리스핀을 꼭 닮았을까... 그러고보니 상상력이 풍부한 것도 크리스핀을 닮았네. 기왕이면 성격도 리를 닮을 것이지."


리처드가 들었다면 당장 울망해져서 내가 뭘- 내가 뭐얼- 옹알거리며 삐약삐약을 시전할테지만 다행히 리처드는 올드보이들이 올라탄 수레 옆에 나란히 말을 달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하는건 닮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애니는 문득 낯가림 때문에 종종 복통까지 경험하곤 했던 리처드와 낯가림이 대놓고 심한 리를 떠올리며 도대체 에드워드의 낯가림이라고는 1도 없는 깨발랄 댕댕이 성격은 어디서 튀어나온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성격이야 꼭 부모를 따라가는 법은 아니지만 둘 사이에서 나올 수 없는 성격의 조합이 신기하긴 했다.


그리고 리처드와 리를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다들 신기하게 생각하는 미친 친화력의 주인공인 에드워드는 새벽부터 부락으로 향하는 루트를 꼼꼼하게 살피고 주변을 살핀 후에야 부락에 도착한 동생과 부족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그래도 걱정을 했던 것과는 다르게 필립이 숲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라 숲에 두엇 감지되던 헌터들을 잡아서 족쳐볼까도 싶었지만 질리언이 이끄는 헌터 무리가 겨우내 부락에 머물 것이라는 말을 기억하고는 그만뒀다.
그들의 실력을 잘 알기도 했지만 이 숲에 사는 것도 아닌 자신이 지나치게 나서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만약 먹을게 떨어지면 꼭 연락하고. 알았지?"


딴건 걱정이 1도 안되는데 먹을게 떨어지는 상황이 가장 걱정되었던 에드워드는 소린을 꼭 끌어안고 쭈압쭈압 뽀뽀도 해주고 토닥여주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가능하면 함께 수도로 가서 편안하게 겨울을 보내게 하고 그 동안 신경써주지 못했던 미안함은 죄다 사라지도록 잘 해주고 싶었지만 소린 자신이 원하기도 하고 리의 언질에 의하면 소린이 이 곳에 머물고 있는 편이 부족의 안전을 위해서도 나았으니까 아쉽지만 하는 수 없었다.


"형수님과 모두에게도 안부를 전해주세요. 윗과 놀아주기로 약속했는데 못해서 미안하다고도 전해주시고요. 전쟁이 끝나면 조카들과 많이 놀아줄게요."


윗은 어려서 기억도 못할텐데- 에드워드는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대답 대신 소린의 발갛게 달아오른 볼에 살짝 키스만 해주었다.


"지금은 존 포터가 함께 있으니까 너 대신 많이 놀아주고 있을거야. 그러니 걱정말고 건강하기만 해."


감기도 안걸리는 건강 체질이긴 하지만- 그 말도 차마 하지 못한 에드워드는 어린 동생을 꼭 안아주고 이내 번뜩이는 시선을 스란두일에게 꽂았다.


"다시 말하겠는데 내 동생을 굶긴다거나 구박한다거나 혹은..."


"얼른 꺼지기나 해. 더 지체하면 눈이 쌓여서 못 내려간다."


역시나 고운 말은 1도 쓰지 않은 스란두일의 핀잔에 울망한 표정으로 소린을 다시 한 번 꼭 끌어안은 에드워드는 여름 내 정이 든 부락의 노인들과 헌터들과 봄에 찾아와 친해졌던 사람들과 도리 형제들과 마지막으로 에스텔을 으스러져라 꼭 끌어안고 작별 인사를 건넨 뒤에야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산을 내려갈 수 있었다.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보다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서 데굴데굴 구른건 굴욕이었지만 굴러서 내려가는게 더 빠르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계속 굴러갔으니 굴욕이랄 것도 없었다.


"참 신기한 녀석이야.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저 친구가 후작님의 뒤를 이어서 영주가 되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질리언의 말에 스란두일은 대답 대신 저 멀리 데굴데굴 굴러서 씡나게 산을 내려가고 있는 에드워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믿지 않고 날이 설대로 서 있던 자신조차도 에드워드의 댕댕이같은 모습에 무장 해제 당했었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친근감을 갖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더구나 자신과는 검을 맞댔었는데도 자고 일어나자마자 댕댕거리며 친근하게 다가오는건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할 지경이었다.
저런 성격이라면 부족과의 관계도 좋게 만들 수 있을테고, 그 누구보다도 사랑받는 영주가 된다는 것은 확실할테지만-


"글쎄요, 저 녀석이 그런 짐을 짊어진다면 주변은 편해질지 몰라도 본인은 아주 힘들게 될 것 같아서 저는 반대하고 싶습니다."


질리언은 놀란 표정으로 스란두일을 응시했다.
막 성인이 되었던 이 젊은 족장은 늘 다수가 편해지는 것을 강조했었고, 그렇기에 본인은 악명 높은 암살자로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그 길을 거리낌없이 걸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아주 놀랄만한 발언이었다.


"저 친구를 진심으로 아끼는군."


질리언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에드워드의 흔적을 바라보던 스란두일은 북쪽 숲의 가을 하늘만큼이나 푸르고 서늘한 눈으로 질리언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제게는 첫번째 친구입니다. 저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요."


질리언은 그 말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스란두일은 늘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했었고, 그러면 자네는 우리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말에 친구 따위는 사치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말을 접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놀랄만한 변화였다.
그러고보니 자유무역항에서 옛 아미티지 후작과 원활하게 협정을 맺었던 이후로부터 자신과 헌터들에게도 벽을 덜 세우기 시작했었는데 그 때는 그런 변화가 조금은 낙관적이 된 부족의 형편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 그러니까 작년에 부락에 찾아왔을 때 스란두일이 소린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이 냉혹하기만 하던 젊은 족장이 너그러워진 것이 이 작은 꼬마에게 마음을 위로받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녀석의 변화는 소린 때문만이 아니었던거로군. 하긴, 이 자존심 강한 녀석이 거리낌없이 칭찬을 할 정도라면 뻔한거였나.


어쩐지 자신이 눈치도 없는 바보가 된 기분이 든 질리언은 허공에 하얀 입김을 뿌리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여러모로 아미티지 후작의 가족들에게 빚을 진 기분이군. 옥수수를 포함해서 말이야."


전쟁 종료 직전 수확했던 옥수수의 상당부분을 저놈의 눈 때문에 쓸모가 없게 되었다며 부락에 잔뜩 줘버린 덕분에 그 동안 미비했던 겨울나기 준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게 되어버렸고, 용병단 뿐 아니라 기사들까지 옥수수를 나르는 일을 도와준 것은 대단히 큰 수확이었다.
그만큼 헌터들이 동맹들에게 신뢰를 얻었다는 뜻이니까.


"이제 눈이 잦아들면 사냥 준비도 해야하고... 그래도 올 겨울은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훈훈하게 보내겠군. 도리도 겨우내 훈련을 더 시켜야겠어. 본인의 각오도 단단히 되어있으니 말이야."


질리언이 어깨를 툭툭 쳐주고 부락으로 몸을 돌리자 스란두일은 조금씩 내리는 눈에 에드워드가 데굴데굴 굴렀던 자국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천천히 몸을 돌렸다.
멀거니 서 있던 스란두일이 걱정되었던지 소린이 살그머니 다가오자 눈이 하얗게 쌓인 탓에 유독 까맣게 보이는 머리카락을 살살 털어준 그는 소린을 데리고 부락으로 향하다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완전히 흔적이 사라진 비탈의 모습에 어쩐지 느끼지도 못하던 추위가 뼛속을 후비는 기분이 든 스란두일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떨치려고 소린을 안아들어 그 온기를 느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언젠가 꼭 네게 진 빚을 갚아주고 싶다."


너는 늘 주변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지만 그 때문에 너 자신은 힘들어질테니까.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에 네가 힘에 부쳐 쓰러지는 일이 생기게 된다면, 혹은 너를 추앙하는 많은 이들이 너를 더 이상 추앙하지 않고 도리어 손가락질을 하게 되는 때가 오게 된다면, 혹은 그게 아니라도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걱정거리가 생기게 된다면- 에드워드.
그 때 내가 너를 도울 수 있게 된다면 너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주길 바란다.
지금 네가 나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서 나를 끝까지 믿어주고 다른 이들에게 나를 변호해주고 있듯이 나 역시 너를 믿고 도와줄테니까.

2016.11.29 20:4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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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천년만년 써주세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6340]
2016.12.02 00:0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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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ㅠㅠ 정말 고머워요!!!!
[Code: cc66]
2016.12.02 00:0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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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센세 글 감사히 잘보고 있어요!! 글 볼때마다 행복합니다 ㅠㅠ
[Code: cc66]
2016.12.04 03:0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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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센세..내가 어쩌다 센세 글을 접하게 됐는지..인생의 몇안되는 행운이라 생각해요
[Code: 1d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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