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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9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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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벗을 수 있겠어? 옷 좀 벗어 봐. 노부."
"네?"
지금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는데 갑자기 옷을 벗으란 요구에 당황한 노부가 마치다를 바라보자 마치다는 피식 웃더니 쓰러진 세 놈 중 한 놈의 허리춤에서 열쇠를 풀어서 노부가 갇혀 있던 감옥의 문을 소리없이 빠르게 열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세 놈을 안으로 끌어다 놓더니 노부의 얼굴을 꼼꼽히 살폈다. 노부의 터진 입술과 찢어진 뺨 같은 곳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던 마치다는 미간을 팍 좁히더니 이를 악물었다.
"많이도 때렸네, 태워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누가 때렸어? 얼굴 제대로 봤어?"
"네. 보긴 봤는데."
"오늘 이놈들 잡혀가면 너 때린 놈들 폭행 죄까지 꼭 넣어. 꼭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해. 알았지?"
"...네."
정작 자기를 희롱하고 조롱했던 그 사이비종교 망나니 재벌 3남은 형량거래를 해서 풀려나게 됐다고 해도 시큰둥했고, 쇠파이프를 휘둘러서 자기 팔뼈에 금이 가게 한 놈의 처벌에도 딱히 관심이 없었으면서. 노부의 입술이 터지고 뺨이 찢어진 걸 너무 속상해하는 마치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찡해졌다. 언제 또 놈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인 만큼 마치다는 빠르고 꼼꼼하게 노부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또 이를 으득 갈고 노부의 셔츠 단추를 빠르게 풀기 시작했다.
"마치다 상?"
"일단 저놈이랑 옷을 바꿔입고 이쪽 구석에 던져놓자. 다른 두 놈은 뭐 구석에 숨겨놓고 뭘로 덮으면 되겠지."
"...네? 네."
마치다는 노부가 셔츠를 벗은 뒤 드러난 상체 곳곳에 멍이 들어 있는 걸 보고 또 화를 냈고 바지를 벗기다가 종아리에 총알이 스친 상처 때문에 피가 난 걸 보고는 또 욕을 했다.
"이 찢어죽일 쓰레기 새끼들! 진짜 가만히 안 둬! 꼭 고발해! 절대로 빠져나가게 하면 안 돼. 절대로!"
마치다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조심스럽게 노부의 옷을 벗기고는 쓰러진 놈들 중 노부와 체구가 비교적 비슷한 놈의 옷을 거칠게 벗겨냈다. 놈의 옷을 속옷 한 장만 남기고 홀랑 벗겨낸 마치다는 옷을 거칠게 털고 노부의 옷을 놈에게 아무렇게나 입혀놓더니 양 손과 양 발을 꽁꽁 묶어놓은 다음 구석에 던져 놨다. 머리를 흐트려놓고 고개를 푹 숙이게 해서 얼굴이 잘 안 보이게 한 다음에 일어서려던 마치다는 놈에게 입혀놓았던 노부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서 노부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건 챙겨야지."
"마치다 상, 사실 이 반지..."
"여기서 나가면 얘기해 줘."
말투가 무심하게 들려서 살짝 시무룩해졌던 노부는 마치다의 귀가 또 새빨갛게 불타오르고 있는 걸 보고 이를 악물었다. 이를 악물지 않으면 이 긴박한 상황에 눈치없이 입술이 벌어져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정말 눈치없이. 노부가 반지 케이스를 손수건에 넣고 팔목에 손수건을 꽉 묶어놓는 동안 마치다는 놈의 옷을 노부에게 입히려다 멈칫했다.
"잠깐 있어 봐."
감방을 나간 마치다는 잠시 후에 붕대와 소독약을 하나 가지고 돌아왔다.
"그래도 수술실이라고 이것저것 구색은 갖췄는데 다른 약들은 성분을 믿을 수가 없어서 안 가지고 왔어. 일단 이건 기본적인 소독약이니까 소독만 하고 붕대 감은 다음에 옷 입자. 붕대는 비닐도 안 뜯은 거니까 괜찮을 거야."
마치다가 총탄이 스친 노부의 다리에 소독약을 조심스럽게 붓고 새 붕대를 뜯어서 감겨주는 동안 노부는 범인 놈 중 하나의 셔츠를 입고 복면을 썼다가 일단 목까지 끌어내렸다. 노부의 다리에 붕대를 꼼꼼히 감고 반창고로 야무지게 붕대를 고정하고 있는 마치다의 눈꼬리 쪽에 살짝 맺힌 눈물을 본 건 그때였다. 노부는 마치다가 건네주는 범인 놈의 바지를 입은 후, 붕대가 들어 있던 비닐 봉지와 소독약 약통을 모아서 구석에 버리는 마치다를 끌어안았다.
"두 번이나 나 치료하게 해서 미안해요."
"... 알긴 알아?"
"다시는 마치다 상이 날 치료하는 일이 없게 할게요. 약속해요."
마치다는 아무 말 없이 노부를 살짝 노려보면서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노부가 그 새끼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감아주자 마치다가 엄지를 내밀어서 노부의 엄지손가락에 엄지를 꾹 찍었다. 야무지게 도장까지 찍는 게 너무 귀여운 와중에도 노부의 피를 보고 놀랐는지 아직도 새파란 얼굴이 너무 걱정됐지만 여유롭게 달래줄 시간도 없어서 노부는 마치다를 한 번 꽉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춰준 다음 복면을 끌어올려썼다. 마치다도 복면을 다시 끌어올려 쓰고 아직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두 놈 중 한 놈은 감방 구석에 던져놓고 대충 감방 안에 있던 천이나 박스 같은 걸로 덮어놓은 다음 다른 한 놈의 복면과 상의를 벗기고 팔을 등 뒤로 돌려 묶었다.
"이놈은 어떻게 하죠?"
"우리가 이놈을 차로 옮기는 것처럼 끌고 나가자. 우리도 나가야 돼. 나가서 차에 손 좀 대 놓자."
노부는 고개를 끄덕이고 놈을 함께 끌어올리면서 작게 물었다.
"부장한테 연락했어요?"
"어. 통화 가능 지역 표시되는 거 보고 바로 연락했는데 안 그래도 대기하고 있었다고 바로 출발한다고 했어. 7년 전에 없앤 조직과 연관된 놈이었고, 지금 여기에 아직 살아 있는 피해자들이 많은 것 같다고 하니까 바로 출발시킨대. 곧 도착할 거리던데 내가 여기까지 뛰어오는 동안 안 오다니, 바로 출발한 거 맞나 몰라. 그래도 곧 오긴 오겠지. 혹시 모르니까 인질들을 빼돌릴 수 없게 차량들에 손 좀 써놓자. 들어오면서 보니까 밖에 차 잔뜩 대 놨더라."
두 사람이 감옥 밖으로 나갔어도 둘 다 복면을 쓰고 있었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서류나 장비들을 챙기는 놈들이 많았기 때문에 상의가 벗겨진 채 팔이 묶인 남자를 질질 끌고 가는 두 사람을 보고도 붙잡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뒤쪽에 컨테이너 차량이 있으니 인질을 거기로 옮겨놓으라고 지시하는 놈은 있었지만. 노부와 마치다는 놈을 끌고 나가서 컨테이너에 던져놨다. 다행히 아직 인질들을 옮기는 작업은 시작하지 않았는지 컨테이너는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마치다는 신기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망 좀 봐 줘."
"네."
뭘 할 건지 보고 있자, 마치다는 문이 열리는 모든 차량의 운전석에 들어가서 퓨즈박스를 열더니 전선들을 끊고 임시로 연결할 수도 없도록 아예 일정 길이 이상을 잘라내 버렸다. 노부도 운전을 하는 만큼 퓨즈박스의 위치나 배선도 정도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 열어볼 생각은 해 보지 않았던 터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건 영화에서만 봤는데요."
"나중에 내 잡기 다 보여줄게. 지금은 망 좀 잘 봐 줘."
그러면서 노부의 뺨에 입술을 콕 찍어서 잠깐 집중력이 흐트러졌지만 노부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망을 봤다. 더 열리는 차가 없을 때는 문을 열지 못한 차량들의 타이어를 몰래몰래 터뜨리고 다녔다. 그리고는 혼자 돌아다니는 놈들이 있으면 때려서 쓰러뜨린 다음 묶어서 빈 창고에서 던져놨다. 그러다 마치다한테 맞아 기절해 있던 보스가 깨어난 건지 보스를 따라다니던 그놈이 깨어난 건지 아니면 노부가 탈출했다는 게 탄로난 건지 안쪽에서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리고 쇠파이프와 칼로 무장한 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노부와 마치다는 얼른 창고 뒤쪽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도망칠 때처럼 개를 풀까 봐 차량이 있는 곳에서부터 곳곳에 휘발유도 뿌려서 냄새를 마구 퍼뜨려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온갖 무기를 든 놈들이 근처까지 수색해 왔을 때.
노부가 반사적으로 마치다를 꽉 끌어안아서 품에 꽁꽁 숨겼을 때였다.
시끄러운 헬기 로터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건물 앞 상공에 나타난 헬기들에서 줄이 촤르륵 내려오고 인신매매범 놈들이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총을 맨 특수기동대 대원들이 줄을 타고 빠르게 내려왔다. 사태가 진압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18년간이나 얽매여 있던 마치다의 해방은 헬기 뒤로 떠오르는 새로운 태양과 함께 찾아왔다.
노부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총탄은 정말로 스친 정도였기 때문에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살점이 약간 패인 터라 몇 바늘 꿰매고 항생제와 파상풍 주사를 맞았다. 국소마취를 해서 정작 노부는 바늘이 드나드는 감각만 희미하게 느껴졌으나 꿰매는 동안 노부의 손을 잡아주고 있던 마치다의 얼굴이 새파래서 노부는 꿰매는 내내 마치다의 손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그리고 함께 마치다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마치다는 노부를 한참 끌어안고 있더니 마음이 좀 안정됐는지 고개를 들었다.
"옷 벗어, 노부."
오늘만 벌써 두 번째 듣는데, 두 번 들어도 여전히 당황스러운 그 말에 노부가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 마치다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작게 웃었다.
"씻어야지. 내가 씻는 거 도와줄게."
꿰맨 상처 때문에 며칠간 목욕이나 샤워는 금지라고 듣기는 했다. 그래도 싸우고 도망치고 맞느라 워낙 굴렀기 때문에 몸을 닦고 싶기는 했지만 손을 다친 건 아니니까 노부가 알아서 닦을 수 있는데도 마치다는 기어이 씻겨 주겠다고 나섰다. 마치다가 다쳤을 때 그랬던 것처럼 노부가 먼저 욕실에 들어가서 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감고 있자, 뒤따라 들어온 마치다가 욕실 의자에 노부를 앉혀놓고 집에 오는 길에 들른 무지개 정형외과에서 급하게 몇 개 얻어온 다리용 깁스커버를 노부의 다리에 끼워주었다. 마치다가 노부의 몸에 꼼꼼하게 비누칠을 해 주고 닦아주는 동안 허리에 수건만 감은 채로 마치다의 손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민망해서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불타올랐다. 멍이 든 노부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닦아주는 데 열중하고 있던 마치다는 빨개진 노부의 얼굴을 봤는지 작게 웃었다.
"내가 다쳤을 때 네가 내 몸 닦아주는 동안 너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 어떤 기분인데요?"
"확!"
"...?"
"잡아먹고 싶은 기분."
"..."
"그런데 또 막 간질간질한 기분."
노부의 얼굴이 더 빨개지자 마치다가 또 웃었다.
"넌 아니었어?"
"..."
"에이, 나만 그렇구나."
노부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삐죽삐죽거리고 있는 마치다를 끌어안으며 한창 삐죽거리는 중인 귀여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욕실에 가득 고여 있는 따듯한 수증기 덕분인지 마치다의 입술은 정말 따뜻하고 촉촉했으며 부드러웠다. 그 따뜻한 입술과 조그맣고 단단한 치아, 말캉하고 부드러운 혀가 노부의 혀에 닿고 노부의 입술에 닿았다. 튼튼이가 언젠가 책에서 읽었다며 첫키스를 할 때는 귀에서 종소리가 들린대! 라고 재잘거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생애 첫키스였는데도 귓가에서 종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그저 노부와 노부 품 속의 마치다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두 사람 주위의 모든 세상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 이 세상에 단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벅찬 기분. 그 다정하고 뜨거운 키스의 끝에, 여전히 노부의 입술에 닿아 있던 마치다의 입술 사이로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나아, 노부."
정말 빨리 나아야겠다.
놉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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