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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7 07:23

bgsd



훈련 받는 기간은 계속 좌충우돌이었다. 노부는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읽어내야 하는 운동을 오랜 세월 해 왔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시작해서 부상으로 강제 은퇴하기 전까지 상대의 몸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고 대응방법을 계산해야 하는 운동을 오래해 왔으니 잘해 낼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상대의 몸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는 것과 상대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상대방의 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고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자연스럽게 읽어내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노부는 마치다에게 배운 대로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상대를 은밀히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종종 상대방이 '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하며 의심스럽게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는데도 조직에서는 노부와 마치다에게 첫 임무를 내렸다. 

조직에서는 사이비종교의 교주 신원을 넘길 수 있는 사람만 찾아내서 조직에 넘겨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라 위험하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으니 훈련 삼아 하라고 했다. 다소 위험한 사상을 갖고 있지만 교의 저변을 넓히려 하기보다 국가의 중요정보를 취급하는 정재계 인물들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이미 넘어간 이들이 몇 명 있는 것 같으니까 확인된 용의자 몇 명에게 접근해서 교주에 대한 정보를 진짜로 알고 있는 사람을 알아내라는 것이었다. 누가 정보를 알고 있는지만 확인하면 뒤의 일은 조직에서 알아서 할 테니 정보를 알고 있는 놈만 넘기라나. 

조직에서는 종교에 대해서 별다른 정보도 알고 있지 않고 교주가 누군지도 모르는 배교자를 하나 확보하기는 했다. 평범하게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한 것뿐이라고 했던 이 배교자가 내보인 경전은 상당히 조악한 수준이었는데 여러 종교에서 베껴온 듯한 문장들 범벅이거나 헛소리를 현란한 문장으로 나열해 놨을 뿐이었다. 정재계의 높은 인물들이 깊이 빠져 들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조악했다.

이따위 헛소리에 넘어간 사람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는데 진짜 경전은 일정 등급 이상의 교인만 볼 수 있는 건가.... 그럼 이 교인은 눈가리기용인가... 교주는 뭐하는 자지... 

노부가 그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뺨에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각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노부의 오른쪽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마치다가 노부의 뺨을 오른손으로 콕콕 찌르고 있었다. 

"자기야, 내가 옆에 있는데 무슨 딴생각을 하는 거야? 나 화내야 될 때야?"

마치다가 그렇게 삐진 애인처럼 화를 내면서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게 허리를 쿡 찔러서 그제야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파티장 앞에 도착했는지 입구에 선 자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노부가 품에서 초대장을 꺼내서 건네주자 깔끔한 복장의 여자는 초대장의 이름을 확인하고 다시 돌려주었다.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마치다가 여자에게 상큼하게 윙크를 하는 걸 보고 흠칫하며 마치다를 바라보자 마치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자기도 내가 옆에 있는데도 딴생각했잖아. 나도 맘대로 할 거야. 흥."

노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마치다의 어깨를 끌어안자 마치다는 여전히 뾰로퉁한 얼굴로 흥하고 고개를 돌렸다. 딱딱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문 앞의 안내인은 마치다가 계속 삐진 척하고 있고 노부가 쩔쩔매며 달래려는 걸 보더니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입구 안내인의 시선이 돌아간 걸 알아챈 노부가 마치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하자 마치다는 상큼하게 웃고 노부를 안으로 이끌었다.

또 실수했어... 

노부는 여전히 아리시마 코키라는 신분을 갖고 있고 지금 아리시카 코키는 뉴질랜드로 이민간 거부의 조카이자 유일한 상속자 신분으로 교묘하게 위장한 상태였다. 그 신분으로 정재계의 주요인사들이 참가하는 파티에 참가할 수 있었다. 패션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모 재벌가에서 창간했던 잡지가 있는데 오늘은 그 패션지의 창간 10주년 기념식의 애프터 파티가 있었다. 각계각층의 여러 사람들이 참가한 이 파티에서 마치다와 노부가 확인해야 할 인사들은 이 도시의 시장, 경찰국장, 이 잡지사의 모기업을 소유한 재벌가의 3남, 또 다른 잡지사의 에디터, 모 패션 브랜드의 CEO였다. 노부는 이들이 누구와 만나는지, 신분이 의심스러운 이와 접촉하지 않는지 꼼꼼히 관찰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들이 노부를 경계해서가 아니었다. 노부가 누군가를 주시하려고만 하면 옆에서 마치다가 계속 말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자기야, 이 와인 너무 맛있다. 마셔 봐."

노부는 지금이 업무 중이란 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파티에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시선을 끈다는 것 정도는 알았기 때문에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확실히 상큼하면서 달콤한 맛이 좋았다. 

"어때? 맛있지."
"네"
"엄청 비싼 건가? 우리 100일 기념일 때 이거 마실까?"
"... 알겠습시습... 알겠니시슷..."

계속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불안과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초조함과 긴장감 때문에 혀가 계속 꼬이자 마치다가 노부의 손을 감싸쥐며 생긋 웃더니 노부의 뺨에 살짝 입술을 붙였다.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이 촉 닿는 느낌에 흠칫 놀라자 마치다는 다시 싱긋 웃고 노부의 뺨에 입술을 촉 맞췄다. 노부가 뺨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마치다를 바라보자 마치다는 입술만 움직이며 소리없이 말했다. 

"괜찮아."

노부가 한숨을 삼키며 입술을 끌어올려 웃자, 마치다는 노부의 뺨을 살짝 쓰다듬어주고 와인병을 가리켰다. 노부는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 와인병을 내려다봤다. 에티켓에 적힌 이름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기억할 자신이 없어서 폰으로 에티켓을 찍었다. 그때 카메라 촬영음을 들었는지 근처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더니 다가왔다. 조금 전 노부가 빤히 바라보다가 마치다에게 제지당했던 이였다.

"와인이 마음에 드셨습니까?"
"좋네요. 곧 우리 100일인데 제가 이 와인이 마음에 든다고 하니까 우리 자기가 100일 기념 저녁식사 때 가지고 오겠다고 해서요. 안 그래도 되는데 참."

마치다가 자랑하듯 즐겁게 말하자 남자는 와인의 에티켓을 슬쩍 보고 노부와 그런 노부의 팔짱을 끼고 새침하게 웃고 있는 마치다의 옷차림을 한 번 빠르게 훑었다. 상대가 관찰당하는 줄 모르게 훑어봐야 한다고 하더니 남자는 마치다가 요구하는 수준과 노부의 현재 수준의 중간쯤 수준인지 관찰하는 건 눈치챘지만 긴가민가할 정도로 빠르게 시선을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 모두 명품 수트를 입고 있었다. 애초에 이 조직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수트를 입을 일조차 별로 없던 노부는 이름도 못 들어본 브랜드였는데 색감이나 핏, 재질은 정말로 좋았다. 마치다는 명품 중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도 있다고 했다. 정말로 비싼 브랜드들 중에 은근히 그런 경우가 있다던가. 남자는 그 옷을 알아본 모양인지 미소에 호의가 가득했다.

"상당히 값이 나가는 와인인데 이 정도 와인을 감당하지 못하실 정도는 아닌 것 같군요."

그러면서 남자는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만 말했지만 노부는 당연히 이 자가 눈군지 알고 있었다.재벌 순위 5위 안에 들어가는 그룹 오너가의 3남이고 마치다와 노부가 관찰해야 하는 타겟 중 하나였다. 노부는 그 남자의 이름을 듣고 악수를 하며 가명을 입에 올렸다. 

"아리시마 코키입니다."

가명이 아직 입에 익지 않아 낯선 이름이 혀 끝에서 덜컥거리는 기분이었지만 다행히 더듬지는 않았던 덕에 재벌가의 3남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예의바르게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곧이어 마치다도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마치다 케이타입니다. 반갑습니다."

계속 첩보원으로 일해야 하는 데다 한동안 마치다 밑에서 첩보활동에 대한 실전 체험이 끝나면 더 본격적인 첩보활동을 해야 하는 노부는 정교하게 꾸며진 가짜 신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노부 같은 첩보원들이 몇 명이나 스쳐지나가도 계속 그 자리에 똑같은 얼굴과 이름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마치다는 얼굴이 이미 알려져 있기 때문에 본명을 쓰고 있었다. 재벌가의 3남은 환하게 웃었다. 

"어쩐지 눈에 띄게 화려하고 아름다우시다 했더니 던전의 오너시군요."
"네, 방문해 주신 적이 있으신가요?"
"가 보고 싶었지만 주변에 회원이 없어서 아쉽게도 가 보지 못했습니다. 마치다 상의 소개로 어떻게 안 될까요?"

재벌가의 3남이 예의바르게 그러나 어딘가 비릿하고 느물느물하게 웃자 마치다는 남자가 놓아주려 하지 않는 손을 깔끔하게 빼 내면서 상큼하게 웃었다.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물론 이 남자를 클럽으로 끌어들일 계획이긴 했다. 정보를 얻어내야 하니까. 그러나 평판이 워낙 좋지 않은 인간이라 회원제로만 운영되는 클럽의 물을 흐릴 우려가 다분하기 때문에 회원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사전에 논의를 할 때 마치다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나 데려와야 하기는 해서 회원자격 심사를 위해서 선을 볼 겸 한 번 초대하기로 하기는 했는데 마치다는 애를 태울 셈인지 확답을 피했다. 

"던전 문턱이 높다더니 역시 쉽지 않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영광이죠. 잘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타겟을 몇 명 만나거나 스쳐갔지만 노부가 타겟들을 유심히 바라보려고 할 때마다 마치다가 와인이 맛있다든가 카르파초가 새콤하게 맛있다든가 마카롱이 정말 예쁘다든가 하는 핑계로 계속 말을 걸면서 시선을 돌리게 했기 때문에 아직 초보 첩보원인 노부는 거의 정보를 모으지 못했다. 그리고 파티가 끝난 후 노부와 같은 조직에 속한 요원이 모는 차를 타고 마치다가 이번 임무를 시작하며 조직에서 새로 얻어준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마치다는 내내 노부의 사랑스러운 애인 역할에 충실했다. 마치다는 노부의 어깨에 기대앉아서 노부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다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파티에 갈 때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그렇게 맛있고 예쁜 게 많은데 왜 사람들이 그 맛있는 음식들을 안 먹고 다 쓸데없는 수다만 떨까?"

애초에 먹을 게 목적이 아닌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노부는 마치다가 우아하고 세련된 메인디시들과 아기자기하고 귀엽던 핑거푸드들을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봤기 때문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케이터링 업체가 어딜까? 치즈케이크 너무 맛있었는데."

정말로 딱 한 입 크기의 작은 케이크긴 했지만 마치다가 그걸 5개나 먹는 걸 봤기 때문에 어느 케이터링 업체인지 알아봐야겠다고 마음 속 수첩에 꼼꼼하게 메모해 놨다. 치즈케이크 케이터링 업체, 라고. 그러는 동안에도 마치다는 계속 오늘 파티에서 나왔던 와인과 음식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차피 차 안에는 운전하는 이까지 셋뿐이고 운전하는 자도 조직의 요원인 걸 알면서도 마치다는 조금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리고 노부가 마치다를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마치다의 집 안까지 함께 들어갔을 때였다. 

"오늘 정보를 많이 모으지 못해서 큰일입니다..."

노부가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누가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관찰하려고 할 때마다 마치다가 계속 와인이나 장식, 인테리어, 음식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노부의 시선을 끌어서 누구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마치다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마치다는 어디까지나 조력자였고 노부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노부가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얻은 게 없다는 걱정 때문에 시무룩하게 말하자 집에 들어오면서 재킷부터 벗던 마치다는 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노부를 향해 돌아섰다. 노부가 헤매거나 불안해할 때 늘 그랬던 것처럼 노부를 바라보는 예쁜 눈동자에는 안쓰러움과 대견함이 묻어 있었다.

"자기야."

마치다는 노부에게 사뿐사뿐 다가와서 노부의 목에 팔을 감싸고 노부를 끌어안으며 눈을 맞춰왔다.

"내가 다 봤어."
"..."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면 의심을 사, 자기야."

그제야 왜 마치다가 노부가 누군가를 관찰하려 할 때마다 자꾸 말을 걸면서 방해했는지 알았다. 그래도 그동안 던전에서 상대의 경계를 사지 않고 정보를 수집하는 법을 몇 달이나 훈련했는데 긴장했기 때문인지 실수연발이었기에 마치다가 노부를 저지한 것이란 걸 이제야 확실히 깨달은 노부의 얼굴이 굳자 마치다는 한 손으로 노부의 뺨을 쓰다듬었다. 

"처음이니까 잘 안 되는 게 당연한 거야. 너무 우울해하지 마. 우리 합이 잘 맞으면 금방 적응할 거야."
"... 마치다 상은 처음부터 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마치다는 웃고 있었고 눈빛도 여전히 다정했다. 그러나. 

"과장님에게서 들었습니다."

그 순간 다정함이 감돌고 있던 마치다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5과의 과장은 마치다와의 연락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듣기로는 과장과 마치다의 인연이 꽤 길다고 하는데 그 이상의 이야기는 노부도 잘 알지 못했다. 과장이 젊은 시절에 어린 마치다를 구했다고는 얼핏 듣긴 했지만.

"지가 뭘 안다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네, 그 노친네는."

은인에 대해 하는 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싸늘한 태도와 경멸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눈동자에 노부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눈만 깜박거리고 있자, 마치다는 입꼬리만 끌어올리며 웃으며 다시 노부의 뺨을 토닥였다. 

"난 그때 잘하지 못하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과장이 마치다를 구했던 게 아닌가. 노부의 표정이 더 굳어 버리자 마치다는 피식 웃었다. 

"자기는 맨몸으로 혼자 버텨야 했던 나 같은 거랑 달라. 내가 잘 케어해 줄게. 자기는 날 열심히 이용해서 날 밟고 올라가야지."
"..."
"그러려고 니네가 날 쓰는 거잖아. 자기야."

마치다는 웃고 있지만

어쩌면... 

어쩌면 당신은 우리들을, 과장과 나 그리고 당신과 함께 실습을 했던 모든 선배 요원들을 전부 지독히 혐오하고 증오하고 있는 게 아닐까. 





놉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