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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다 상."
"응."
노부는 다시 한 번 부러진 나뭇가지들을 던져 개들을 교란시킨 뒤 계속 달려가며 말을 이었다.
"통신 잡히면 바로 부장한테 전화해요. 어차피 제가 마지막으로 부장에게 보고한 뒤로는 계속 갈림길 없이 외길이었으니까 제 핸드폰 마지막 위치 파악해서 거기서부터 쭉 길 따라 오면 된다고요."
"네가 해."
"마치다 상."
"네가 전화하고 네가 지원 요청하라고."
하나라도 살아야 했다. 그리고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 빌어먹을 이 조직에 20년이나 이용당했던 마치다가 살아야지.
"다육이들은 열흘에 한 번 정도만 물을 주면 돼요. 가끔 잎을 만져봐서 말랑해졌거나 잎에 주름이 생기면 주시고요. 지금 자리가 햇볕이 잘 드는 곳이니까 가끔 창문 열어서 바람 좀 쐬 주시고요."
"네가 해. 난 다 죽일 거야. 난 한 번도 뭘 키워본 적이 없어서 죽일 거야. 그러니까 네가 해. 네가 키워. 난 못해."
마치다는 불안해진 듯 말이 빨라지고 말이 많아졌지만 놈들이 정말 이제 지척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방금 총탄 한 발이 노부의 다리를 스칠 뻔했다. 휴대폰엔 여전히 통화권 이탈이 떠 있었다. 젠장. 노부는 아래쪽 도로와 이어지는 언덕 가장자리까지 뛰어가서 빠르게 경사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무뿌리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지면 위쪽에서 마치다의 발 밑을 쳐서 마치다를 쓰러뜨렸다. 물론 마치다의 상체를 끌어안듯 잡고 있어서 마치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일은 없었다.
"노부! 뭐하는 거야!"
난 마치다 상과 같이 무사히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러나 노부는 그 말을 삼키고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마치다를 붙잡아앉히고 억지로 웃었다.
"통신방해를 할 수 있는 범위가 그렇게 넓을 리가 없어요. 조금만 뛰어가면 통신 연결되는 곳이 나올 거예요. 바로 부장님한테 연락해서 지원 요청해요. 최대한 멀리 도망가요 아니면 안전한 곳에 숨어서 기다려요."
"노부!"
노부는 마치다의 비명같은 외침을 들으면서 마치다의 등을 세게 밀었다.
"나 무사히 버티고 있을 테니까 구하러 와 달라고 해요. 알았죠?"
강제로 떠밀린 마치다가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가는 걸 보면서 노부는 아까 건물 안에서 범인 놈들에게서 훔쳐서 허리에 꽂아뒀던 칼과 파이프를 뽑았다. 그리고 마치다를 따라 언덕을 내려가려고 하는 놈의 얼굴에 커다란 돌을 주워 던졌다. 놈의 얼굴에서 피가 튀면서 끔찍한 비명도 함께 튀었다. 노부의 조직에서는 노부를 포함한 요원들이 임무 중 순직하거나 잡혀서 신변을 되찾을 수 없게 되면 노부 등 요원들과의 관계를 부인할 거라고 했다. 저놈이 죽으면 나도 감옥행인가.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한 놈도 마치다를 쫓아가게 둘 수 없었다.
정말 무사히 버틸 수 있을까?
글쎄...
< 3년 전 >
과장이 노부에게 건네준 명함에는 dungeon이라는 상호와 주소, 유선전화번호 그리고 마치다 케이타라는 이름만 적혀 있었다.
"그쪽이 경험자니까 돌발상황 같은 건 그쪽이 잘 대처할 거야. 어차피 이 일은 얼굴 알려지면 못하니까 몇 년만 하면 돼."
그렇게 해서 찾아온 던전은 노부는 살면서 한 번도 발을 들여보지 않았던 화려한 클럽이었다. 노부는 외양부터가 지나치게 화려하고 낯선 그 클럽에 위축됐지만 담담하게 입구로 향했다. 문을 지키고 서 있던 경비 같은 자는 노부의 옷차림을 보고 손을 들어 출입을 막으려 했지만 노부가 지갑에 넣어두었던 명함을 꺼내서 보여주자 무전기에 대고 '사장님 손님'이라고 말하며 들여보냈다. 안으로 들어가자 무전을 받았는지 기다리고 있던 서버가 다가와서 노부를 2층 발코니석으로 안내했다. 홀이 내려다보이는 자리는 3면이 꽉 막혀 있었고 앞쪽도 유리로 완전히 막혀 있어서 방음이 좋은지 홀의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는 꽤 편안하고 푹신한 의자였는데 등도 못 기대고 뻣뻣하게 굳어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서늘하면서도 어딘가 위태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위스키병과 예쁜 잔 두 개가 놓인 쟁반을 가지고 들어왔다.
노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쟁반을 받아주자 남자는 싱긋 웃고 노부의 옆자리에 앉더니 노부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팔을 감으며 안겨들었다.
"자기,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어? 잘 찾아왔어?"
노부가 쟁반에서 술병과 술잔을 내려놓다가 놀라서 멈칫했는데도 남자는 개의치 않고 웃으며 노부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자기는 몇 살이야?"
"... 27살입니다."
"와우, 이제 나보다 어린 사람이 오는구나. 지금까진 늘 연상이었는데 나도 이제 나이 들었나?"
노부가 이 남자에 대해서 들은 건 과장이 데리고 있는 정보원이니 정보를 캐 내는 실전 훈련을 이 사람과 한동안 함께하면서 남자에게 실전에 대해 많이 배우라는 것뿐이었다. 노부가 속한 조직은 태생부터 소규모 비공식 조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공식비밀기관이 된 지금도 조직의 규모가 작았다. 그래도 대부분은 검경에서 특채로 들어오기 때문에 기본적인 훈련이 갖춰져 있지만 운동선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기본 베이스가 별로 없는 노부의 교육을 전담해 줄 팀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 과장이 오랜기관 과장의 정보원으로 비밀 작전을 여러 번 도왔던 이에게 노부의 훈련을 맡긴 것이었다. 물론 그동안 연인 행세를 할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다짜고짜 자기라니. 노부가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서 묵묵히 술만 따라주고 있자 잠시 후 예쁘장한 얼굴의 남자들이 치즈와 햄 플레이트, 과일 그리고 얼음 버킷을 들고 들어왔다. 노부의 옆에 있던 남자는 직원이 들어오자 노부의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핀잔을 줬다.
"자기 옷 좀 사야겠다. 내가 예쁘게 하고 오라고 했는데 이렇게 딱딱한 옷 입고 오면 어떡해."
"... 아..."
장소가 클럽이니 옷을 맞춰입고 가라는 말은 들었지만 한 번도 클럽에 발걸음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냥 맨날 입는 옷 - 출근용 수트 - 를 입고 왔더니 확실히 혼자 붕 뜨는 것 같긴 했다. 역시 잘못이었나.
"이런 옷밖에 없어서... 새로 마련하겠습니다."
"옷 볼 줄은 알고?"
"..."
"같이 가서 옷 골라주면 나도 뭐 하나 사 줘? 손수건이라도?"
"뭐든 사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자기. 자기밖에 없네."
그렇게 한참을 남자에게 휘둘리던 노부가 남자가 명함 상의 마치다 케이타가 맞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던 건 1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마치다는 노부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로 애교가 넘쳤고 계속 노부에게 가벼운 스킨십을 하며 노부를 뻣뻣하게 굳게 만들었다. 매우 자주. 아니, 사실 두 사람 옆에 누군가가 있기만 하면 노부를 가만히 두질 않았다. 그러나 주변에 누군가, 그러니까 직원이나 복도에서 마주치는 손님, 아니면 옷을 사러 간 가게의 직원이나 손님 등이 있을 때는 정말로 노부의 사랑스러운 애인인 것처럼 애교가 넘쳤지만 주변에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살짝 냉정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자기야, 자기야 그러면서 노부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건 여전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스킨십을 해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것도 여전하긴 했지만. 미묘하게. 뭐랄까. 주변에 사람들이 있을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다는 느낌이었다면, 주변에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자기야~하며 눈웃음을 칠 때는 길들이기랄까.말 그대로의 길들이기였다. 노부가 '사랑스러운 연인 역할'의 마치다에게 익숙해지게 하기 위한.
노부는 처음엔 마치다가 소유한 클럽인 던전에서 훈련을 했다. 처음 노부를 안내했던 발코니석에서 마치다가 아래쪽의 손님을 한 명 찍어준 다음 그 사람의 옷차림과 표정, 움직임을 분석하는 훈련을 시켰다. 사람을 보고 외양과 손짓, 몸짓, 표정 등을 기반으로 기초적인 분석을 하는 데 익숙해진 다음에는 노부를 데리고 클럽의 홀로 내려가서 가볍게 춤을 추거나 바에서 술을 마시거나 홀 옆의 테이블에서 술을 마실 때 가끔 다른 사람과 짧게 대화를 하거나 인사를 하게 했다.
마치다는 노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마치다가 알고 있는 노부의 이름을 댔다.
"아리시마 코키예요. 우리 자기. 내 거니까 눈독 들이지 말고."
마치다는 노부를 데리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동안 상대를 관찰하고 정보를 캐 내는 훈련을 시켰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실수가 잦았으나 마치다는 채근하거나 독촉하지 않고 끈기있게 노부를 이끌었다. 노부는 마치다가 '자기야'하며 눈웃음을 치고 팔짱을 끼고 노부의 손을 주무르거나 만지작거리는 일에는 쉽게 익숙해지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동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부가 실수를 해서 침울해 있거나 좌절해 있을 때 무심한 척 굳은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실수에 긴장해서 차갑게 굳은 손에 따뜻한 찻잔이나 향이 근사한 위스키잔을 들려줄 때는 마음이 점차 흔들렸다. 자기는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사람의 눈을 하고 있는 주제에, 툭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를 풍겨대고 있는 주제에 노부가 위축되거나 좌절할 때는 '괜찮아, 내가 있잖아'하고 무심하게 말하곤 했다. 그 말을 할 때의 마치다도 여전히 외롭고 위태로운 분위기를 잔뜩 풍겨대고 있는데도 그런데도 마치다가 그렇게 말해줄 때마다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때부터 뭔가 잘못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마치다의 다정한 위로나 담담한 격려에 숨을 쉬기가 쉬워지고 뻣뻣하던 뒷목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끼는 일이 많아질수록 마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스킨십을 하고 웃어줄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는 일도 많아졌으니까. 평소엔 머쓱하고 당황스럽기만 했던 마치다의 스킨십과 눈웃음에 가슴이 출렁이는 일이 많아졌다는 걸 노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자기야"
그렇게 말하며 눈웃음을 지을 땐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연인 같은 마치다는 노부의 교육을 돕기 시작하면서 조직에서 마치다에게 얻어준 맨션에 데려다줄 때 집에 들어가 주변에 아무도 없게 되면 표정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둘만 있을 때도 마치다는 여전히 노부를 '자기야'라고 불렀지만 마치다를 둘러싼 공기가 달라진 게 느껴졌다.
"자기야, 차 한잔 마시고 갈래?"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달콤했고 내어준 찻잔은 늘 따뜻했지만 웃고 있는데도 눈빛이 무미건조했다.
그날도 노부가 마치다의 교육을 따라가지 못해서 하루종일 우당탕탕했던 날이었다. 마치다는 잔뜩 지치고 의기소침해진 노부를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시켜줬었다. 똑같이 이 도시에서 평생을 살아왔는데도 마치다는 노부보다 아는 곳이 훨씬 많아서 밤의 강바람이 시원하고 풍경이 예쁜 곳도 많이 알고 있어서 마치다가 드라이브를 시켜주면 항상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날도 그렇게 마음이 가벼워지고 상쾌해지는 드라이브를 하고 나서 노부의 차를 세워둔 클럽의 주차장까지 다시 데려다줬을 때였다. 하루 종일 풀이 죽은 노부를 다정하게 달래줬던 마치다는 노부를 주차장에 내려주고 잘 돌아가라는 작별인사를 한 직후 미련없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종일 노부를 달래준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던 것처럼 미련도 없이 빠르게 멀어지는 작은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마치다의 얼굴은 밀랍을 씌운 것처럼 건조하고 무표정했다.
여전히 시원한 강바람과 마치다에게서 흘러나오던 달콤한 향수의 향기에 잔뜩 들떠 있던 노부는 그 순간 마음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노부는 학창시절 내내 운동만 했기 때문에 어설픈 풋사랑 한번 안 해 봐서 나이차가 많이 나는 어린 동생이 첫사랑에 가슴앓이하며 잉잉 울 때도 귀엽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왜 동생이 저를 놀리는 노부를 그렇게 원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입술 한 번 맞대보지 않았으면서 뭐가 그리 가슴이 아플까 했는데. 마치다는 여전히 노부에게 다정하고 상냥했는데도 마음을 내주지는 않는다는 이유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진짜 연인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마치다는 하루 종일 노부에게 다정했고 의기소침해진 노부를 달래주기 위해 피곤했던 하루의 끝인데도 드라이브까지 해 줬는데도, 주차장까지 데려다주고 갔는데도, 잘 들어가라는 인사까지 남겨주고 떠났는데도 그냥 서운하고 서글퍼졌다. 그리고 노부를 던전으로 보내던 날 과장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애가 너무 예쁘게 컸어.'
'네?'
'마음 주지 마.'
'...'
'그 앤 너한테 마음 안 줄 거야. 그 앤 그런 애가 아니야. 그러니까 일이나 하고 와. 네 선배들처럼 헛물켜지 말고.'
그때는 노부가 아무리 아직 수습도 떼지 못한 초보요원이라고 해도 그렇지 얼마나 무시하길래 그런 말을 하나 했는데.
마음을 주는 그런 애가 아닌 사람에게 이쪽은 마음을 이미 줘 버렸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놉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