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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8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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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이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노부의 목적은 오로지 놈들이 마치다를 쫓아가지 못하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노부는 목적을 달성했다. 아무도 마치다를 쫓아가지 못하도록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안에서 뺏어온 칼을 휘둘렀다. 결국 모두의 발을 묶을 수 있었다. 그러다 결국 노부의 종아리에 총탄이 스쳐가고 노부가 놈들의 쇠파이프 세례를 받으며 쓰러졌을 때 이미 마치다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다가 잘 도망갔으면 됐다. 

건물로 다시 돌아온 후 노부는 건물의 지하로 끌려갔다. 지하실로 통하는 문을 연 순간 피비린내가 진하게 풍겨왔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울음소리와 욕설들도 귀가 따갑도록 울리고 있었다. 하도 많이 맞아서 눈을 뜨기도 힘들었지만 피냄새가 역하게 풍겨오는 곳이 위생도 전혀 갖춰지지 않은 수술실이란 것도 확인했다. 어차피 이식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다 뜯어낼 테니 강제로 장기나 각막 같은 걸 빼앗길 사람을 위한 위생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저렇게 비위생적인 공간에서 뜯어낸 장기를 이식받을 이들은 무사할지 의문이긴 했지만. 

노부는 바로 장기를 뜯기지 않을까 했지만 마치다와 노부가 난장을 부려서 몇 명이나 부상을 당한 데다가 보스가 쓰러져 있는 상황이라서인지 놈들은 바로 불법수술에 들어갈 여유가 없는 듯했다. 쓰러진 보스와 보스를 따라 클럽 던전에 왔던 눈매가 더러운 남자 대신 마찬가지로 살벌한 분위기를 풀풀 풍겨대는 놈이 지하감옥에 갇혀 있는 노부를 찾아와 묶여 있는 노부를 폭행하긴 했었다. 

"우리가 궁금한 건 고작 경호원 따위가 아니야."
"..."
"너는 전혀 궁금하지 않단 말이야. 하지만 궁금한 게 없지는 않지."
"..."
"마치다 케이타. 그 자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그놈이 속한 조직이 어딘지, 7년 전 승냥이의 조직을 친 게 어디인지, 말이야. 솔직히 너도 알고 있잖아 그놈이 평범한 클럽 사장이 아니라는 건 너도 당연히 알 거 아냐."
"왜? 이직 생각 있어?"
"뭐?"

노부는 팍 일그러지는 놈의 얼굴을 보면서 아주 새침하게 말했다. 

"마치다 사장님의 경호원이 업계 최고 연봉을 받는다는 말을 들었나 본데, 거긴 내 자리야. 넘보지 마."

마치다에게 접근하지 말란 말은 진담이었는데 놈은 노부가 엉뚱한 말로 화재를 돌리려 한다고만 생각했는지 바로 배를 후려쳤다.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놈들은 노부의 장기를 알뜰히 뜯어내려는 듯 쫓아올 때도 큰 부상을 입히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몇 대 패는 선에서 그쳤다. 조직이 발칵 뒤집힌 상황이라 고문 같은 걸 할 여유도 없는 것 같았고. 놈은 마치다 케이타의 진짜 신분이 뭔지, 어느 조직에 속해 있는지, 조직원이 아니라면 어느 조직과 협력하고 있는지 물었지만 대답해 줄 리가. 놈들이 지금 노부를 죽이거나 목숨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고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에 더더욱 노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몇십 분 정도 폭행이 이어지다가 마치다에게 울대뼈를 얻어맞고 기절한 보스가 아직 깨어나지 않아 어수선한 범죄자들이 우왕좌왕하며 돌아다니자 결국 2인자나 3인자 정도로 보이는 그놈도 노부를 감옥의 빈 감방에 던져두고 나가 버렸다. 목숨이 위협받진 않았지만 많이 얻어맞긴 했기 때문에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노부는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 재킷 안주머니를 더듬었다. 

원래라면 잡자마자 몸수색부터 했겠지만 놈들도 지금 정신을 잃은 놈이 한둘이 아닌데다 마치다가 무사히 도망쳤기 때문에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 뜨기 위해 바쁠 테니 몸수색을 할 틈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노부는 안주머니에 넣어뒀던 반지케이스를 꺼냈다. 마치다에게 다육이 화분들을 선물한 다음에 충동적으로 산 반지였다. 마치다는 노부가 창가에 조르륵 놓아둔 다육이들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노짱을 끌어안고 소파에 앉으며 웃었다. 

"네 덕분에 집이 사람 사는 집처럼 돼 간다. 인형도 늘어나고 화분도 생기고."

그 말을 듣자 노부가 완전히 복귀하고 나서도 또 던전에 와도 되고 연락해도 된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노부짱과 노부유키짱들이 생겼고, 다육이들이 생겼지만 노부가 마치다와 함께 매일을 보낼 수 없게 되면 다시 이 집은 사람 사는 집처럼 느껴지지 않게 될까. 아니, 솔직히 마치다만 걱정되는 건 아니었다. 노부 자신도 걱정이 됐다. 이 사람과 자연스럽게 멀어지면서  그저 그냥 한때 스쳐 지나갔던 인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워낙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성격이라 평생 부모님과 튼튼이, 유도만 생각하고 살았었는데 이제 이 사람이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노부의 마음 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돼 버려서. 

그래서 충동적으로 반지를 샀다. 충동적이라고 해도 바로 악세사리 가게에 처들어간 건 아니고. 그날 밤에 집에 돌아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으로 반지 브랜드의 홈페이지를 보고 있었더니 노부의 방에 놀러온 튼튼이가 보고 자기가 더 기뻐하면서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졸랐다. 그리고 튼튼이는 실제로 노부가 반지를 살 때 매장까지 따라와서 어떤 반지가 예뻐 보인다는 둥 역시 프로포즈 링은 다이아몬드여야 한다는 둥, 예산은 얼마로 잡고 있냐는 둥 별별 참견을 다했다. 자긴 짝사랑만 했을 뿐 아직 연애도 못해봤으면서 아는 척하는 게 웃기기도 했지만 귀엽기도 해서 튼튼이의 참견을 참고로 해서 반지를 골랐다. 그리고 그때 튼튼이가 이런 프로포즈링에는 이니셜 같은 건 새겨넣어야 한다고 해서 안쪽에 노부와 마치다의 이니셜까지 새겨넣었는데. 

그러지 말걸...

반지 같은 거 사지 말걸...

이니셜 같은 거 새기지 말걸...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인질들을 묵어서 차에 태워야 한다는 둥 검문에 걸릴 수 있으니 차라리 컨테이너 차를 꺼내오라는 둥 떠들어대는 걸 보니 살아 있는 인질은 모두 데려갈 셈인 듯했다. 당연했다. 마치다가 탈출했으니 곧 특수기동대가 올 거고 살아있는 인질을 두고 가면 그들의 범죄에 대한 확실한 증인들이 될 테니 죽이거나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놈들이 도망갈 때 노부를 데리고 간다면 모르겠지만 만약에 상황이 급해져서 죽이고 간다면... 

이 반지가 노부의 유품으로 가족이나 조직에 전해지게 할 수는 없었다. 튼튼이는 이 반지를 받을 사람이 마치다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고, 조직으로 유품이 전달된다고 해도 아마 부장도 눈치챌 테니... 

마치다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지만... 그래서 노부는 더더욱 마치다에게 자신의 마음을 밝히지 못했다. 만약에 노부가 잘못되면 남아 있는, 앞으로도 계속 긴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마치다는 받아주지 못한 사랑에 대한 죄책감과 미련을 갖고 살아야 할 테니까. 안 그래도 서럽고 힘든 시간을 오래 버텨와야 했던 마치다가 외로움과 미련에 갇혀서 살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반지 같은 건 역시 사지 말걸. 

노부는 반지를 사고 이니셜까지 새겨넣은 걸 후회하면서도 반지를 살 때의 설렘이 떠올라서 작게 웃었다. 웃자마자 찢어진 입술과 뺨이 아팠는데도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다를 생각하면 언제 어디서든 웃음이 났다. 마치다는 어젯밤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앨범을 샀다. 노부에게 먼저 씻게 해 줬기 때문에 노부가 먼저 씻고 나온 뒤 마치다가 씻으러 들어간 틈에 앨범을 꺼내보자 폰으로 찍었던 사진들은 언제 다 인쇄한 건지 노부와 테마파크에 가서 찍은 사진들과 페스티벌 기념으로 받은 포토카드를 붙여놓았다. 노부가 작은 다육이 화분들을 선물하기 전까지는 침대 위에 뒀던 작은 강아지 인형 하나 말고는 작은 액자 하나 놓지 않고 살아서 집이 삭막함 그 자체였던 사람인데. 앨범도 샤랄라한 핑크색의 반짝거리는 앨범을 골라 사서 사진 한장한장 깔끔하고 꼼꼼하게 잘 붙여놓았던 걸 떠올리니 저절로 웃음이 나는데. 입술 아픈 것 정도야 뭐. 

마치다는 18살이 됐을 때 클럽의 사장이 되었다고 했다. 과장이 서류를 조작해 주었다고. 정말 미친놈이지. 그때는 지금처럼 던전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연옥'이라는 이름의 클럽이었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스틱스강', 그 다음에는 '삼도천'이었다나. 하나같이 죽음이 연상되는 이름들 뿐이라 노부가 클럽 이름이 왜 다 그랬어요? 라고 물었더니 마치다는 어깨만 으쓱였다. 

놀이공원에 다녀와서 행복에 흠뻑 젖어 있는 마치다를 보며, 지금 클럽의 이름을 바꾸게 되면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들 대신 좀 더 상큼한 이름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다시 노부의 표정이 굳었다. 

노부가 드러내지 못한 연심과 미처 전하지 못한 프로포즈링을 품고 죽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사람은 또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허덕이면서 아케론이나 레테강 같은 이름의 클럽에 앉아 있게 될까. 아니... 모든 걸 놔 버리면 어떡하지... 그저 자의식 과잉이라면 좋겠지만 세상에서 태어나서 가장 행복하다고 웃던 얼굴이나 밤에 노부의 품에서 편안하게 잠들던 모습이나 바쁘게 일하고 노부를 교육시키고 날카로운 눈으로 타겟을 살펴보다가도 노부와 눈이 마주치면 풀어져서 웃던 얼굴이 떠올라서...

고단했던 인생 끝에 찾은 달콤함이었는데 이마저 없어진다면... 그 사람이 잘 살 수 있을까.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노부는 마음을 돌렸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노력은 해 봐야 했다. 노부가 없으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눈이 촉촉해져서 줬다 뺐는 게 제일 나쁜 거라고 앙칼지게 말하던 그 얼굴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던 서러움과 두려움도 다시 떠올라서 노부는 이를 악물었다. 기껏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됐는데 그 행복을 줬다 뺐을 순 없으니까. 

노부는 밖에서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는 놈 하나를 불렀다. 

"이봐."
"뭐야! 조용히 있어!"

정말 다들 정신이 없는지 놈은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줄 게  있어."
"더 맞기 싫으면 얌전히 있으라고!"

노부가 반지 케이스를 내밀자 그냥 지나가려던 놈이 다시 돌아왔다. 

"뭐야, 반지?"
"이거 가져."
"고작 반지 하나 받고 풀어주라고? 웃기지 마."

물론 풀어준다면 좋지만 풀어주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다. 이놈은 그저 아무런 결정권도 없는 말단 조직원일 뿐이니까 풀어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노부는 마치다에게 배워왔던 대로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빠르게 놈을 훑었다. 놈의 허리춤에 매달린 열쇠가 보였다. 노부가 이놈을 부른 건 그래서였다. 빠르게 스쳐가는 놈의 허리에 매달린 열쇠를 봤기 때문에. 놈이 반지에 혹한 동안 놈의 머리를 감옥 창살로 잡아당겨서 충격을 준 다음 놈이 쓰러지면 열쇠를... 노부는 진정하려고 노력하면서 다시 반지 케이스를 내밀었다. 

"어차피 난 여기서든 끌고 가서든 죽일 거 아냐. 그러니까 나한텐 필요없으니까 가져가라고."

놈팽이가 여전히 쳐다보고만 있어서 노부는 케이스를 열어줬다. 

"다이아몬드 반지야."

그제야 눈을 번들거리며 다가오는 놈에게 반지 케이스를 더 내밀어주려고 했을 때였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놈의 머리를 잡아채서 창살로 잡아당기려고 했을 때. 동료인 듯한 남자가 복도 끝에서 빠르게 다가왔다. 틀어진 계획에 당황한 노부가 반지 케이스를 다시 끌어당기려고 했을 때, 다가오던 남자는 반지에 정신이 팔린 놈의 뒷덜미를 향해 느닷없이 쇠파이프를 강하게 내리쳤다. 

"하나."

작은 속삭임은 놈이 완전히 의식을 잃고 쓰러진 다음에야 들려왔다.

노부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갑자기 나타나서 난데없이 동료를 후려갈겨서 기절시켜 버린 남자를 바라보자, 이 범죄조직의 다른 조무래기들처럼 검은 폴라티에 검은 진, 검은 복면을 착용한 남자는 기절해서 무너지는 남자를 일으켜서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뭐야! 왜 이래? 무슨 일이야?"

자기가 때려서 기절시켰으면서 놀란 척하고 있는 남자에게서, 이미 누군지 알겠는 그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자, 누군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치면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달려온 놈 둘이 쓰러진 동료를 붙잡고 노부를 확 노려보는 순간 동료 하나를 기절시키고 뻔뻔하게 다른 놈들까지 불러들인 남자가 들고 있던 쇠파이프로 새로 달려온 놈들의 머리까지 차례로 후려쳤다. 새로 온 놈 들 역시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지자 주변을 확인하며 주위에 다른 사람이 더 없는지 확인한 남자가 복면을 슥 내려서 얼굴을 드러낸 채로 노부를 바라봤다. 

"넌 왜 이딴 거한테 반지를 주고 있는 거야, 주려면 날 줘야지."

그리고 노부가 당황해서 아직도 엉거주춤하게 쥐고 있던 반지케이스를 다시 야무지게 닫아서 노부의 손에 꼭 쥐어주고 노부의 주먹까지 꼼꼼하게 오무려주었다. 

"... 마치다 상?"
"우리 같이 무사히 돌아가기로 했잖아, 구하러 왔어. 노부."





놉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