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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0 02:05

"내가 원할 때, 이곳에서 다리를 벌리는 것. 그게 부인의 역할이오."
"내가 내 부인을 만나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그대가 웃는 것이 중요했지."
"전하의 씨를 받겠다 말하고 있사옵니다."
"그래, 내가 그대의 서방이오."
"...황후를 끌어내라."









46.

현실에서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는, 그를 그리워 하다 못해 환상을 보게 되기라도 한 것인지. 그렇다면 세상은 폐비에게 너무 가혹할지도 모른다.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의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평생을 그리워 해야 할 이를 잊지도 못하게 괴롭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제이크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크는 제가 미쳐버렸다고 하더라도 좋다고 생각한다. 미쳐서 떠나버린 그의 환상을 보는 것이라도, 그렇게라도 그를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돌아오겠다는 약속, 너무 늦게 지켜 송구합니다."


그러나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하고, 그가 목덜미에서 풀어낸 부적은 제가 그에게 직접 걸어준 것이니. 제이크는 점차 이것이 환영이 아닌 현실임을 깨닫는다.


"비니."


비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멍하니 서 있는 제이크의 손에 부적을 쥐어준다. 눈을 녹인 물에 몇 번이나 빨았지만 핏물이 가시지 않아 붉게 물들었고 여러번 터져서 다시 꿰맨 자국이 역력한 것. 그건 꼭 비니를 닮아 있었다. 몇 번이고 온 몸이 피로 물들고, 터졌던, 전장의 비니 파지엔자.

제이크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다. 매끈하던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하고, 생기가 가득했던 눈은 새까맣게 가라앉아 깊은 상실을 품고 있으니, 그간 비니가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감히 짐작할 수가 없어서.


"형."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비니, 그런 말 하지마."
"그간 평안하셨-"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멀어진 사람들.

제이크는 비니마저 그들처럼 놓아줄 수 없었다. 그만은 놓칠 수가 없었다. 다 잃어버려 손에 쥔 것이라고는 비니가 제게 선물해 주었던 그 노리개 뿐이던 제이크였기에.

비니에게서 돌려받은 부적을 말아쥔 주먹이 그의 어깨를 내려친다. 분명 힘껏 내리치는 게 분명한데, 왜 그다지 아프지 않은 건지. 떠나기 전에는 많이 매서웠던 주먹이 약해진 까닭은, 제가 고통에 무뎌져서인지, 제이크가 약해져서인지. 비니는 그저 묵묵히 제이크의 비난을 받아낼 뿐이었다.

점점 느려지고 힘이 빠지는 주먹. 마침내 제이크의 오랜 원망이 멎고, 비니는 조심스럽게 제이크를 제 품에 안는다. 감히, 황제의 사람을. 그러나, 황제가 놓아버린 사람을.


"울지마."


그럼에도 결코 제 것은 될 수 없는 사람을.


"울지마, 제이크."


몇 년만에 불리우는 이름이었다. 비궁이나 황후가 아닌, 제이크라는 이름. 아주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이자, 황궁에서는 외면해야만 했던 스스로였다. 그러나 지금 비니가 그 이름을 다시금 불러오고, 제이크는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는다.

똑바로 바라보는 그 눈에는 오직 제이크만이 담겨있고 다정한 목소리는 제이크만을 위한 것이다.


"네가 울면 내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제게 허락된 그 품에서 마침내 제이크는 울음을 토해낸다. 참아왔던 설움과 울분이 터져나온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시절. 볼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사람. 그렇기에 멀리 두고 왔던 그 사랑.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리웠고, 널 두고 떠난 걸 후회하지 않은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었어."


꿈만 같은 속삭임에 제이크는 조심스레 저를 끌어안은 비니의 품에 파고든다. 황제에게 버려진 폐비를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미 오랜 시간으로 배워버린 제이크이기에.


"기다렸어."


내뱉는 말에도 두려움이 없고 망설임이 없는 것이다.








47.

아버지에게서 비니의 소식을 들은 이후로, 가끔은 꿈을 꾸었다. 어떤 날에는 창에 찔리고, 어떤 날에는 칼에 베이고, 어떤 날에는 화살에 맞는 꿈. 제게 다정한 말을 속삭이던 그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쏟아지더니, 저를 끌어안던 팔은 저 멀리 날아가버리고, 그 사람이 산산조각나 부서져버리는 꿈.








48.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말. 그것은 비니 파지엔자의 진심이었다.

적군의 칼이 배를 가르고 들어왔을 때에도, 달뜬 열에 정신을 잃어갈 때에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강물에 빠져 허우적 댈 때에도, 비니는 늘 후회했다. 제이크를 두고 떠나온 것을. 제 소식을 들은 제이크가 얼마나 힘들어 할지 알았기에 아주 오랜 시간동안 후회에 잠겨 지냈다. 제이크를 두고 온 것을. 두고 떠나오며 모질지 못했던 것을. 감히 기다려 달라고 했던 것을.

세러신의 막내 음인이 태자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황후가 폐위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비니는 늘 후회했다. 제이크를 두고 떠나온 것을. 제가 지켜줄 수 없었기에 무력하게 떠나보내야 했고, 저를 떠났던 아이였기에 버려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래서, 항상 후회했다.








49.

"네가 가당키나 한 것 같으냐."
"......."
"네 양심에게 물어보거라. 비니, 네가 우리 제이크의 짝으로 어울리기나 하는지."


세러신 대감의 앞에 꿇어앉은 비니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옳았으니까. 그 옳은 말이, 비니를 전장으로 밀어넣었다.








50.

세러신 대감은 처음부터 제이크가 그와 어울리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으나, 제이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비니가 왜 저를 두고 전장으로 떠나야만 했는지도.

제가 없다면 제이크가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가족뿐이니. 제이크가 제 아버지를 미워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이크의 삶에서 무언가를 도려내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정말 가야만 하는 거야?"
"......네게 어울리는 사내가 되어 돌아올게."



울먹이던 제이크는 곧 비니에게 폭 안겨오고, 비니는 간질거리는 제이크의 밝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절대로 꺼낼 수 없는 말을 삼켰다. 도망가자.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리웠고, 널 두고 떠난 걸 후회하지 않은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었어."
"기다렸어."



그때 그 말을 꺼냈더라면, 감히 그랬더라면.

네가 겪어야 했을 아픔이 이것보다는 덜하였을까.








51.

전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딱 한 번, 비니에게 수도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다. 그러나 비니는 기꺼이 그 기회를 마다하였다.

세러신의 막내 음인이 태자비로 책봉되었다기에.

뒤늦게 돌아갈 곳도, 이유도, 없었으니까.








52.

브래들리는 일렬로 앉은 황후의 후보군들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내뱉었다. 하나같이 아리따운 여인들이, 그 눈에는 아리땁지 못한 야망을 품고 있으니, 멀리 보내버린 황후가 더욱 간절해질 뿐이었다.

울부짖던 제이크의 목소리가 여전히 선했다. 처음으로 제게 환히 웃어보이던 얼굴도 여전히. 무슨 연유인지 펑펑 울며 폐하께오서는 저를 버리시면 아니 된다고 안겨오던 모습도.

왜 그랬을까.

브래들리는 여태 가족을 떠나 황궁으로 오게 된 제이크가 제 가족에게서 버려졌다고 생각하여 그런줄로만 알았다. 세러신 대감이 제이크를 다녀간 뒤의 일이었기에 막연히 그의 모진 말에 상처받아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그게 신경쓰였다.


"신, 파지엔자,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리옵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브래들리를 다시금 현실로 끌어왔다. 차례로 인사를 올리던 장군들을 둘러보던 시선이 제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올린 파지엔자 장군에게서 멈춰섰다.


"그대가 그 유명한 파지엔자로군."


황궁에서 잊혀져가던 가문.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전장에서 떠오른 별.


"말씀이 과분하십니다, 폐하."


비니는 고개를 조아린 채 뜨거운 불덩이를 삼켜낸다.


"내 그대에게 상이라도 내리고 싶은데, 그대가 무엇을 원할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그 말씀만이라도 감읍하옵니다, 폐하."
"그러지 말고 하나 생각해두거라. 황명이네."
"...네, 폐하."


...만약 폐하께서 폐위시킨 그 아이를 제게 달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비니는 생각한다. 제게는 너무 어렵고 귀해서 입맞춤도 뺨에나 겨우 해보았던 그 아이의 모든 것을 누렸을 황제를 감히 투기하며. 그럼에도 그 아이를 무참히 버려버리고 새 황후를 들이려는 황제에게 감히 분노하며. 그런데도 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절망하며.


"내 그대가 마음에 드네."
"......."
"사내라면 모름지기 그정도의 야망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브래들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 야망이 무엇을 얻기 위했던 것인지도 모르고. 또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줄도 모르고. 저와 닮은 그 눈이, 왜 닮아있는지는 꿈에도 모른채.








53.

제이크가 태자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비니는 평생을 품고 살았던 열등과 절망이 제 뼈에 새겨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이크의 곁에 설 수 없을 것만 같던 이유 모를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저보다 훨씬 강한 사람. 이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강한 이가 제이크를 지켜줄 테니 그것만큼 다행인 일이 어디 있으랴.

비니는 그렇게 후회에 잠겨들면서도 안도했다.

제가 죽어도, 제이크는 울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54.

늘 마루에 앉아 기둥에 몸을 기대고 시간을 보냈던 제이크의 곁에는 이제 비니가 앉아있었다. 제이크는 비니의 단단한 어깨에 고개를 기댄채 벅찬 숨을 깊이 내쉬었다. 비니가 보이고, 들리고, 만져진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제이크가 살아갈 이유는.


"비니."
"응."
"비니."
"그래."
"비니- 파지엔자-."
"그래, 제이크."


제이크는 제 곁에서 온기를 나누어주는 이가 언제나 바라보던 허공 속의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숨이 턱하고 막혀오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다.


"...밤이 늦었다."
"......."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


싹이 움튼 가지에 달이 걸리고, 비니가 몸을 일으켜 섰다.


"...또 올 거지?"


놀란 제이크가 비니의 소매를 붙잡고 물으면.


"당연하지."


다정한 목소리가 대답해온다.


"다신 어디 안 갈 거지?"


불안에 떨리는 목소리가 비니를 옭아매니, 비니는 마치 그것이 제 목에 걸린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널 두고 어딜 가겠어."


비니는 제 소매를 붙든 제이크의 손을 감싸쥔다. 아직은 찬 밤공기에 싸늘해진 손을 제 열기로 데워도, 제이크는 여전히 울쌍이 된 얼굴로 비니를 올려다 볼 뿐이다. 언제나처럼 사랑스러운, 제이크.


"내가 언제 너와 한 약조를 어긴 적이 있느냐."


그 물음에 제이크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돌아오겠다는 약조도, 이렇게 지키지 않았느냐."
"...그렇지만...."
"내일, 오늘과 비슷한 시각에 만나러 올게."
"......."
"그러니 오늘은 이만 잠자리에 드는 게 좋겠다."


건조해진 입술이 제이크의 뺨을 눌렀다가 떨어졌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곧 반달을 그리며 휘어진다.


"내일도 기다릴게."


기다림에 익숙해진 제이크는 하고 싶은 무수히 많은 말들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제 곁에 있는 게 꼭 꿈만 같아서 이름만 부르다보니 훌쩍 밤이 깊어진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오늘 못다한 이야기는 내일 하면 되는 일이었다.

비니는 앞으로 절대 제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조하였으니.











루스터행맨 루행크오 비니행맨

 

적어도 브래들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