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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3 01:41
 

"내가 원할 때, 이곳에서 다리를 벌리는 것. 그게 부인의 역할이오."







9.

절일이 다가올수록 분주함이 더해졌다. 최고의 연회가 되어야만 할 것이라는 황제의 명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대륙 각지에서 황후께 바치는 선물이 황성의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황실의 무희들은 발이, 악사들은 손이 부르터라, 이미 져버린 연꽃을 구하기 위해 따뜻한 남부까지 먼 길을 떠나는 것정도는 예삿일이 되어버렸다.

그 분주함 속에서 제이크는 어떤지 혼자 외딴 섬에 뚝 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잔흔이 남았다가 흩어지기를 수 번, 서고의 가장 고층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던 제이크는 저 멀리 보이는 황태자를 발견했다. 첫날밤을 제하고, 브래들리는 제이크에게 손도 대질 않았다. 불행일까, 다행일까.

제이크는 그가 제 이름을 부를 때면 그에게서 잊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다가도, 그날처럼 제게 다리를 벌리라 명할까봐 불안에 떨었다. 무엇이 황태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인지 그 근원을 알 수 없으니, 노력을 할래야 노력을 할수도 없었다. 그저 쥐죽은 듯이 숨만 쉬는 것이 어린 태자비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글자가 도저히 눈에 차지 않아 처소로 돌아온 제이크는 무심코 양경을 들여다 보았다. 처음 황궁에 들어올 때보다 야윈 얼굴, 핏기가 가신 입술이 눈에 띈다. 퍽 안쓰러운 몰골에 서랍을 뒤져 연지를 꺼내려던 손길이 멈칫한다. 황궁 밖에 있을 때에는 이런 것따위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러나, 이제와서 그런 것들은 중요치 않다는 것 또한 제이크는 잘 알고 있다. 황궁 밖의 것들은 전부 다 두고온 것이 아니었던가.

소지로 연지를 찍어 바르며 미련을 털어내려 애썼다. 두고 온 것들은 잊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치는 것은 오직 그 마음 뿐일 테니.








10.

그럼에도 다행히 이날의 기분은 좋았다. 황궁에 들어온지 한 달, 제이크는 오랜만에 뵙는 세러신 내외에 달려가 안기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보는 눈이 많았다. 철없는 태자비라는 칭호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옆으로 미뤄두고 싶었다.


"그간 평온하셨습니까, 마마."
"...아버님."


그러나 심장은 저 아래로 추락하고, 제게 머리를 조아리는 아버지를 보며 새삼스레 실감한다. 이제 자신은 제이크 세러신이기 이전에, 이 나라의 황태자비라는 사실을. 이제는 제 부모조차 저를 편히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시리고도 서글펐다.


"...저야 늘 무탈하지요."


그런데도 웃는다. 애써, 미소를 짓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는 눈이 많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이 어미가 마마를 그리 보내고 마음이 편칠 않아서......."


맞잡아 오는 손은 아직은 따스해서, 마음 같아서는 어리광을 피우고 싶지만 제이크는 어른스레 굴며 그녀를 품에 안고는 속삭인다.


"저는 괜찮습니다."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으면서도.

황실의 예법은 어렵고, 사람은 무섭고, 행동은 서툴러서, 모든 것이 여즉 낯설고 집에 돌아가고 싶으면서도.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이 이제는 한낱 꿈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11.

제국에서 제일가는 상단이 준비한 수레는 고작 하나뿐이면서도 그 누가 준비한 선물보다 값졌으며,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황궁에 아무도 없었다. 황후는 만연한 웃음을 감출 기색도 없이 이야기의 운을 띄웠고, 이 기회에 통행증의 기간을 늘려보려는 상단주는 그녀의 비위를 맞추며 혀를 굴려댔다. 그와 함께 인사만 올리고 물러간 장자 내외는 저희와 면을 트려는 이들을 이리저리 피해다니기를 몇 번, 그러던 중 톰은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제이...!"


미소를 띄우며 그를 부르려던 입술이 다물리고, 톰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궁마마."


멍하니 허공을 배회하다 돌아오는 시선. 놀란듯 눈을 깜빡거리다가 곧 환해지는 표정에 톰도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형! ...루디 공도 함께 오셨군요."
"이렇게 특별한 자리에 초대까지 해주셨는데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이번에는 수도에 얼마나 머물 생각이야?"
"그리 오래는 머물지 못할 성 싶습니다. 상단의 일이 바빠서요."
"그래? 아쉽다, 다음번에는 어디로 가는데?"
"글쎄요. 통행증이 어찌 나올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남쪽으로 가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러자 제이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돌아온다. 형까지 이러기야? 서러운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제는 익숙하게 삼켜내며 미소를 대신 띄우고.


"...그래요. ......좋은 자리니 즐기다 가세요."


비록 저는 황태자 전하의 눈밖에 난 것으로도 모자라 황후마마의 마음에도 들지 못하여 내명부의 일을 돕지도 못하였지만.


"오랜만에 뵙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그 설움을 털어놓으면 이제 그것은 곧 황실에 대한 반역이 될 터이니.


"...마마, 혹... 별일은 없으시지요?"


아차하며 어린 동생의 변해버린 분위기를 눈치챈 톰이 제이크를 부르지만, 제이크는 고개를 내젓기만 할 뿐이었다. 혀를 잘못 놀리고 귀를 잘못 기울였다간 목이 날아가는 게 황실의 법도이니, 어찌 제이크가 감히 속내를 내보일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없습니다. 염려 마세요."


제이크는 그저 한 발 뒤로 물러선 다음, 톰이 저를 붙잡기 전에 발걸음을 옮겨버린다. 신이 나서 말을 걸어오던 동생이 불현듯 차분히 말을 높이던 순간 톰은 제이크의 외로움을 눈치챘지만, 그가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알버트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기만 하였다.


"...토미, 괜찮을 거예요."
"......."
"제이... 아니, 마마는 강하신 분이잖아요."


알버트가 조심스레 톰의 어깨를 감싸며 속삭이고, 톰의 걱정스러운 눈빛은 여전히 제이크의 뒤를 쫓지만, 제이크는 여전히 이 드넓은 황궁에 저 혼자만이 남겨진 듯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태자비는 그렇게 가족을 떠나 제 부군에게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음을 눈치챈다. 처음 보는, 그리움이 담기고도 애틋한 눈빛. 시간이 멈춘 듯 깊이 닿는 시선. 제이크는 무심코 고개를 돌리고, 저를 쳐다보는 톰과 눈이 마주친다.

황태자가 단 하나의 초상을 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는 소문은, 참이었구나.
형이었구나.


제이크는 심장이 깨어지는 것을 느낀다. 서늘한 가을 바람이 볼을 스치우고, 시끌벅적한 소리가 귓가에 울리지만 어떤 것도 그 마음에 닿지는 못하여, 태자비는 감히 울음을 터트리지도,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기지도 못한채로.


"마마, 황후마마께서 부르십니다."


어린 나인이 저를 부를 때까지 한참을 못박혀 서 있었다.








12.

북부의 가을은 수도보다 몇 배로 춥고도 시렵다. 살을 베는 듯한 칼바람이 불어오고, 베인 살에 내려 앉는 눈송이는 피가 끓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니, 이곳을 지옥이라 칭해도 이상할 것은 없겠구나. 그는 시체 더미를 베고 누워 감상에 젖는다. 따뜻한 수도가 그립다. 그립고, 또 그립고.


"정말 가야만 하는 거야?"


그보다 더 따뜻했던 아이의 손길은, 그립다는 말로도 다하지 못할 정도로 간절한데.

감았던 눈을 뜨면 그리운 모든 것은 흩어지고 흐린 하늘만이 가득 들어찬다. 가늘어졌던 숨이 다시 거칠어지며, 이곳에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치밀어 오른다. 너를 두고, 어찌 내가.


며칠 새 심해진 폭풍을 뚫고, 한 사내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전 부대가 전멸한 줄로만 알았던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한 남자. 그가 건네는 이야기. 그것은 훗날 벌어질 전투에서 제국이 승전고를 울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노라니.








13.

그는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는다. 흐릿한 시야가 뚜렷해지고, 사지가 삐걱이긴 하나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그의 손길은 가슴께로 향한다. 한손에 잡히는 천뭉치, 그 부드러운 촉감에 안도한 남자는 다시금 뒤로 넘어가 눈을 감는다.


"...보고 싶다."


제이크. 나의 아이야.

울먹이던 목소리가 이토록 생생한데 그 얼굴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으니, 남자는 그리움을 삼키며 눈물을 참는다. 잘 지내고 있으련지, 서책을 읽는 것을 게을리 하고 있지는 않은지, 홀로 꿩 사냥을 하겠다 나서서 또 넘어지는 것은 아닌지, 그럼, 내가 없는데, 누가 그 아이를 업어주나. 누가 그 아이의 투정을 받아주고, 누가 그 아이의 설움을 달래주지.


반드시 돌아오겠다 맹세하였건만 죽음의 문턱을 밟을 때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것만 같아서.


"네게 어울리는 사내가 되어 돌아올게."


아이를 홀로 남겨두고 온 것이 못내 사무치는 후회가 되었다.








14.

흥겨운 가락이 황궁에 울려퍼지고, 아름다운 무희들이 마치 나비처럼 몸을 놀리니, 그 옆에 술까지 겻들여지면 어떻게 즐겁지 아니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황태자는 제 곁에 앉은 태자비의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종일관 미소를 띄우며 말이라도 걸면 차분히 대답을 해오면서도 그 앞에 차려진 음식들은 손도 대질 않고 그대로니, 브래들리는 그게 또 신경이 쓰였다. 이토록 좋은 날인데 어찌 그대만 좋지 못한 것이오.


"안색이 좋지 못하오, 부인."
"...송구하옵니다."


황궁에 들어온 이후 처음 맞는 행사라 긴장하여 그러는지 염려가 되어 걱정의 말을 던져도 돌아오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뿐이라서 속을 답답하게 만든다. 그대는 내게 할 말이 그것밖에 없는지.


"의원을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소."
"아닙니다, 전하. 괜찮습니다."


연지가 지워진 입술은 파리한데, 무엇이 괜찮다는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어서. 브래들리는 손을 뻗어 제이크의 손을 낚아챘다. 그러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살결이 느껴졌다.


"비궁, 이 곡이 끝나면 나와 함께 일어납시다."
"아니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좋은 날인데 어찌 제가 자리를 먼저 비울 수 있겠습니까."


태자비의 미련한 아집은 결국 황태자의 노기를 불러 일으키니.


"왜, 이번에는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주저앉고 싶어서요?"
"...전하, 그것이 아니라-."
"그대가 이 자리에서 쓰러지면 그것만큼 이 즐거운 연회를 망치는 일이 또 있겠습니까."
"......."
"진정 황후마마의 연회를 망가트리고 싶어서 그러시오?"
"...송구합니다."


잘해보려고 했던 건데. 황후마마께 조금이라도 예쁨 받고 싶어서 그랬던 것인데.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어서, 제이크는 여린 볼살을 깨물며 아픔을 삼켜낸다. 비릿한 맛이 느껴져도 그것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보다 더할까.








15.

부름에 달려온 의원이 태자비의 맥을 짚고, 가슴에 쌓인 것이 많아 그런 것이오니 닷새간 탕약을 드셔야 할 것이라 이르고 물러갔다. 단 둘만 남은 태자비의 처소에는 적막이 감돌고, 침상에 누운 제이크는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숙인 채 브래들리의 눈치만을 살폈다.

그대는, 내 부인이 된 것이 그렇게 속이 상합니까. 속이 상해 탕약을 달여 먹어야 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싫은 것이오?

던져보아야 아니라는 대답만이 돌아올 게 뻔해서 입을 다문 브래들리는 조심스럽게 제이크의 젖은 머리칼에 손을 뻗는다. 첫날밤 이후로 얼굴을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라, 그와 닮은 듯 다른 얼굴이 이제서야 제대로 눈에 담겼다.

그가 아니라는 실망감과 되돌릴 수 없다는 절망감에 억지로 아이를 취한 주제에, 태자가 된 노릇으로 그런 짓을 저지른 자기 혐오가 밀려와 일부러 피해 다녔었다. 말간 얼굴을 보면 그가 생각나고, 동시에 그날 밤이 떠올라서. 황제께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갈 때도 부러 시선을 피하고 담소를 피했는데.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혹, 그날 많이 아팠소?

그래서 나를 미워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말을 해야지, 왜 이리 미련하게 혼자 끙끙 앓고 있었는지.


"아닙니다, 전하. 소첩은 정말 괜찮-."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언제까지 그 말만 반복할 거요!"


브래들리는 또다시 울화가 치민다. 괜찮지 않은 게 뻔히 보이는데, 그 말을 반복하는 것 말고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 태자비가 미련하기 짝이 없어서.


"그대의 눈에는 내가 바보로 보이나 봅니다. 내 부인이 아픈 것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 말은 그게 아니오라-."
"듣기 싫소."


멀리서는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송구합니다, 전하."
"...그대는 내게 할 말이 송구하다, 아니면 괜찮다, 이것밖에 없나보오."
"......."
"...푹 쉬세요."


결국 브래들리는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서늘한 바람이 말라가는 낙엽에 부서지는 소리가 스치운다.

발이 묶인 듯 한참을 그 앞을 떠나지 못하던 브래들리는, 아픈 사람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게 끝끝내 마음에 걸려 걸음을 돌렸다.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울음 소리만 아니었더라면, 그 문을 열고 들어가 내 말이 심했소, 하고 사과를 건넸을 텐데. 뭐가 그리 서러운지 흐느끼는 그 모습이 꼭 봐서는 안 될 것을 훔쳐본 기분이 들게 만들어서. 시원하게 울지도 못해 입을 틀어막고 몸을 웅크려 우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16.

불빛이 꺼진 늦은 밤, 제이크는 살며시 몸을 일으켜 처소를 빠져나왔다. 달빛을 따라 걸어 도착한 곳은 황궁 한 켠에 마련된 옛 국궁장으로, 새 것이 지어진 이후로는 발길이 끊겨 낡아가는 중이었다. 본래는 브래들리에게 허락을 구하고 올 작정이었는데, 도저히 날이 밝을 때까지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아 몰래 걸음을 한 것이었다.

조심스레 활을 움켜준 제이크는 시위를 당기고, 화살이 그 손을 떠나가 과녁 정중앙에 꽂힌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 시원히 허공을 가르는 화살이 마치 제 가슴을 막고 있던 돌덩이를 쪼개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달빛에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빛이 돌면 시위를 당기기를 수어번, 중앙에 꽂힌 화살이 늘어가던 어느 즈음에 다급한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 야심한 시각에 이곳에서 대체 무엇을 하십니까."


브래들리는 신하들을 국궁장 밖으로 물린 채 저 혼자만 걸어 들어와 제이크에게 묻는다.


"아픈 것은, 꾀를 부린 것이었소?"
"......."


얼어붙은 제이크는 입만 벙긋거릴 뿐, 감히 변명할 생각도 하질 못하고 고개를 숙인채 활을 놓지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잘게 떨리는 그 몸이 브래들리에게는 퍽 안쓰러워 보였다. 이렇게 쉽게 겁 먹으면서, 밤산책을 나설 생각은 어떻게 한 것인지.


"...앞은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리 시위를 당겨대니 손끝이 상한 것 아니오."


브래들리는 조심스레 제이크의 손을 잡아 올리며 중얼거렸다. 불호령이 떨어질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걱정어린 투에 제이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파드득 숙였다.


"손은... 활이 아니라 자수 때문에 다친 것이옵니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주제에 해야 할 말은 꼭 해야 하는 것인지. 브래들리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자수는 하지 마시오."
"......."
"...실력이 좋습니다. 나와 견주어도 되겠소."


시선을 과녁으로 옮긴 브래들리는 태자비의 활솜씨에 진심으로 경탄하며 말을 이었다.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형님께 배웠습니다."


브래들리는 제이크의 손에서 활을 빼앗아 쥐었다.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고, 시위가 팽팽히 당겨진 다음, 숨을 참은 순간 활이 정적을 가르고 날아간다.

달빛을 받고 선 브래들리의 도포자락이 휘날리지만, 제이크는 그에게서 이곳에 없는 사람을 본다. 제게 활을 가르쳐준 사람.


"어때, 내 실력도 좀 봐줄만 하오?"


그러나 그는 이 자리에 없다. 앞으로도 계속 없을 테고.


"...소첩이 어찌 감히 전하의 활솜씨에 말을 얹겠습니까."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이 다시 달을 가리고,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래도 이 야심한 시각에, 비궁 혼자 나오는 것은 위험합니다."
"......."
"내 그대를 만나러 왔다가 어찌나 놀란줄 아시오?"


그 말에 제이크는 고개를 슬며시 들어 브래들리를 바라보았지만 어두워진 하늘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전하께서 소첩은 왜......."


끝맺지 못한 질문. 그러나 제이크는 곧 스스로 의문을 해결했다. "내가 원할 때, 이곳에서 다리를 벌리는 것. 그게 부인의 역할이오." 그 말이 여즉 심장에 박혀 빠지지 않고 있었으니,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내가 내 부인을 만나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달을 가렸던 구름이 지나가고, 빛이 브래들리 위로 쏟아진다. 미소가 걸린 표정. 제이크는 이제 이것이 제 것이 아님을 안다.


"...낮에는 내가 말이 심했소. 비궁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내 속이 답답해서 그랬던 거요."
"......."
"손끝도 보시오. 다쳤으면 약을 발라야지. 왜 자꾸 곪게 내버려 두는 것입니까. 속도, 손끝도."


톰을 향한 마음. 저를 선택한 이유. 그가 야심한 밤, 저를 찾은 까닭.

톰이 아니었더라면, 시작되지 않았을 이야기.

제가 그와 닮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들. 허락되지 않았을 시선. 떨어지지 않았을 애정.


"...네, 돌아가면 약부터 바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찌 제이크가 감히 브래들리에게 반기를 들 수 있을까. 그는 장차 황제가 될 황태자고, 저는 그에게 선택된 운이 좋은 태자비에 불과한 것을.












루스터행맨 루행

"그대가 웃는 것이 중요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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