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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01:48

"내가 원할 때, 이곳에서 다리를 벌리는 것. 그게 부인의 역할이오."
"내가 내 부인을 만나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그대가 웃는 것이 중요했지."
"전하의 씨를 받겠다 말하고 있사옵니다."
"그래, 내가 그대의 서방이오."
"...황후를 끌어내라."
"네가 울면 내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55.

가끔은 당신이 밉다가도, 그립다가도, 원망스럽다가도, 보고 싶다가도.

그리하여 당신은 만족하는지, 나를 놓아버린 그 손에 새로 쥔 그것들이 당신을 만족시켜 주는지.

그렇다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서럽다가도.


드높은 담벼락을 올려다보는 제이크의 뺨에 눈물이 뚝 흘러내렸다. 황궁에는 봄이 찾아왔는데, 그에게도 분명 봄이 온 것만 같은데, 어찌하여 저는 아직도 겨울에 갇혀 있는 것인지. 손을 뻗어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 해도 마치 모래처럼 빠져나갈 뿐이었다. 단 꿈은 새벽녘의 하늘처럼, 안개 낀 숲처럼, 비가 오는 바다처럼, 그렇게 아스라히 멀어져 흩어졌다. 오래 전의 기억처럼.

제이크는 다시 손을 뻗었다. 손끝에는 따듯한 바람과 부드러운 꽃잎이 스치웠다. 어쩌면 그도, 처음부터 이 손을 붙든 것이 아니라 그저 스쳐지나가던 바람이었을 뿐일까.


"뭐 어때요. 지아비가 제 부인을 안겠다는데."



그렇다면 차라리 찬 바람이었으면 좋았을 걸. 외롭게 움츠렀던 몸을 따뜻히 감싸안던 바람이라.


"날이 풀리면 함께 꽃놀이를 갑시다."


떠나지 않고 오래도록 멤돌 것처럼 굴던 바람이라.

그저 스쳐가는 바람인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을 내어주었고, 그 마음은 바람을 타고 떠나갔으니, 공허만이 남아 그것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품었다고 표현해도 되는 것이라면.








56.

어둠이 황궁을 덮쳐온 깊은 밤, 브래들리는 작은 호롱불에만 의존하여 서찰을 써내렸다. 그게 벌써 몇 달, 수십 통이었으나 브래들리는 돌아오지 않는 답서에도 원망 한 번 않았다. 화가 많이 났나보다. 그 순한 아이가 이토록 답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잘못하였다는 것이겠지. 그저 그렇게 여겼다.


'그곳은 볕이 잘 들지않아 여즉 추위에 떠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구나. 그래도 마당의 복사나무는 이맘때 즈음 꽃을 피우니 분명 예쁠 테지. 너를 닮았을 것이고.'


잠깐 자세를 바꾼 브래들리는 붓에 다시 먹을 적시고는 이어 적었다.


'꽃놀이를 가자던 약속은 반은 지키고 반은 지키지 못할 것 같다. 내 사흘 후 해시(21~23시)에 그대를 보러 갈 테니 지아비가 아무리 미워도 소박을 놓지는 말거라. 밤이 깊어도 보름달이 뜨는 날이니 꽃은 잘 보일 거다.'


추운 날, 제 품에 안겨 꽃을 좋아한다고 말하던 그 목소리가 선했다.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서찰을 마저 쓴 브래들리는 붓을 내려놓고 눈을 감은 채 제이크의 얼굴을 그렸다. 말갛게 웃던 얼굴, 붉어진 콧망울과는 어울리지 않게 다부지게 다물었던 입술, 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당당히 활을 쏘던 모습. 그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매일매일을 되새겼으니까.

냉궁에 함께 보낸 아이는 믿을 수 있는 나인이니 부탁할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하라고 처음 보낸 서찰에 일러두었으니, 어쩌면 남몰래 활을 구해다가 냉궁의 뒷마당에서 활을 쏘고 있을지도 몰랐다. 특히나 속이 답답할 때면 활을 들던 황후였으니. 그리하여 브래들리는 그 다음에 보낸 서찰에는 황궁에는 숨은 눈과 귀가 많으니 활을 쏘는 것은 술시(19~21시) 이후로 하는 게 좋겠다고 덧붙이기도 하였다.

물론 돌아오는 답서는 없었지만, 그래도 브래들리는 제이크가 분명 밤마다 활을 잡았으리라고 생각했다. 과녁 대신 제 서찰을 쓰는 것은 아닐지 분에 넘치는 걱정도 하였으나, 그렇게라도 제이크가 제 서찰을 한 번 더 들여다 본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앗다.


"들어오거라."


황제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자,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그의 심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히 전달하거라."
"네, 페하."


그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추기 직전, 브래들리가 헛기침을 하며 그를 잡았다.


"...혹, 폐비가 답서를 쓰고 싶다고 하면 반드시 받아오거라."
"네, 폐하."
"전할 물건이 있다고 하면 곧바로 이리 달려오고."
"알겠사옵니다, 폐하."
"...잠깐 이리와 서찰을 꺼내보거라."


여러번 당부하던 브래들리는 결국 성에 차지 못했는지 반듯하게 접었던 서찰을 다시 펴고는 내려놓았던 붓을 들었다.


'보고 싶소 부인. 그대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대가 많이 그리워.'


조금 전보다는 휘날린 필체가 서찰에 자리를 잡고, 먹이 마르자, 브래들리는 서찰을 다시 접어 심복에게 건넸다.


"폐비가 서찰을 읽는 것은 분명하겠지."
"네, 폐하께서 명을 내리신대로 제 앞에서 펼쳐보시게 하였으니 분명합니다."
"...그래, 이만 기보거라."


제이크가 간절했다. 상상 말고, 손 끝에 닿는 현실의 제이크가.

브래들리는 밀려드는 피로에 엄지로 눈가를 짓누르다가 작게 웃었다. 사흘 뒤면 드디어 제이크를 만나러 갈 수 있다. 당당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 아이는 분명 울겠지. 화를 낼 것이고. 아니, 그 아이라면 차마 화를 내지도 못하고 원망의 눈초리로만 바라볼 수도.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현실일 테니. 눈물을 닦아주고 떨리는 몸을 품에 안아 달래야지. 떨림이 잦아든 후에 제이크가 허락한다면 젖은 입술에 입을 맞춘 다음, 오랜만에 손을 맞잡고 마루에 앉아 꽃을 볼 것이다. 상상했던 꽃놀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그 아이가 곁에 있다면 분명히 평생 기억에 남을 꽃놀이가 되리라.

그 상상만으로도 브래들리는 제 가슴 깊숙한 곳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57.

황제의 서찰을 가슴팍에 품은 심복이 그림자를 가로지르며 당도한 곳은, 냉궁이 아닌 태후전이었다.


"황제께서는 뭐라고 하셨는가?"
"폐비께서 답서를 쓰시거나 물건을 건넨다면 반드시 받아오라고 하셨사옵니다."
"또?"
"폐비께서 서찰을 읽는 게 분명하냐고 제게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태후의 눈썹이 들썩였다.


"그래서. 무어라 답했느냐."
"제 눈으로 읽는 것을 확인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 그것 말고는?"
"그게 전부이옵니다."


태후는 황제의 심복이 건네는 서찰을 받아들며 미소를 지었다.

감히 그 자리에 앉기에 그대는 아직 순진합니다, 아드님.


"앞으로도 황제께서 폐비에게 서찰을 쓰면 무조건 내게 가져오거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마."
"그래. 물러가보거라."


미리 준비해둔 은화가 든 주머니를 던져준 폐비는 브래들리가 제이크에게 보내는 연서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화롯불에 던져넣었다. 불꽃이 타닥이는 소리를 내며 서찰을 집어삼켰고, 그렇게 불쏘시개가 된 브래들리의 마음은 재가 되어 타들어갔다. 태후는 불꽃이 서찰을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꼴을 빤히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겨 마당을 떠나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번 황후 간택전에서는 쓸만한 아이를 잘 골라야 할 텐데.








58.

오랜만에 어떤 꿈도 꾸지 않아서일까. 제이크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을 떴다. 이제는 늦잠을 잔다고 하여 혼을 낼 어른도 없지만, 황급히 몸을 벌떡 일으켜 앉은 제이크는 밀려드는 어제의 기억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꿈 같았던 하루. 행여나 그것이 진짜 제 환상일까, 제이크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이부자리를 더듬으며 비니가 제게 돌려주었던 부적을 찾았다.

어젯밤 손에 쥐고 잠들었던 부적은 배게 밑에 얌전히 놓여있었고, 제이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는다. 비니가 돌아왔다. 그것은 제이크의 바람도, 환상도, 꿈도 아닌, 현실이었다. 그 사실이 미치도록 벅차서, 제이크는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비니가 돌려준 부적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렸다.








59.

이상하게, 지난 겨울의 기억은 따뜻한 것 뿐이었다. 봄은 이토록 시린데.








60.

오래 전 어느 겨울날.

계단을 내려가던 제이크가 발을 헛딛어 주저앉자, 그 아래에서 제이크를 기다리고 있던 비니는.


"...뭐하는 거야, 형?"


그 옆에 자리를 깔고 누워버렸다.


"또 부끄럽다고 얼굴을 안 보여줄 것 같으니, 내 그보다 더 부끄러운 행동을 하면 네 수치가 덜하지 않을까 하여."


팔자 좋게 팔을 괴고 누운 비니가 한쪽 눈꺼풀을 들어올리면,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는 제이크가 담겼다.


"됐으니까 일어나. 부끄러워."
"그래. 그럼 되었다."


흙바닥에 드러누운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툭툭 털고 일어난 비니는 제이크를 향해 씩 웃어보였다.

그 장난기 가득한 표정은 결국 제이크를 웃게 했었고,








61.

그리고 그보다는 한참 뒤의, 호수의 물이 얼어붙었던 어느 날.

새가 날아가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제이크가 얼어붙는 눈길에 미끄러지자, 브래들리는 화들짝 놀라서는 귀한 몸을 굽혀 앉아 제이크를 들여다 보았다. 꽤 큰 소리가 났으니 많이 아플 텐데. 그것보다는 부끄러움이 큰 것인지,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서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이 퍽 안쓰러워 보였다.


"어디 다치진 않았소?"
"괜찮습니다, 전하."
"...부인의 손은 괜찮지 아니한 것 같은데."


바닥을 짚느라 찢어진 손바닥을 보고 혀를 찬 브래들리의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체통을 지켜야 할 태자비가 되어-."
"그만하세요, 비궁."
"......."
"내가 속이 상하는 것은 그대가 다쳤기 때문입니다. 내 부인이 아파서."


여전히 제이크의 손목을 붙든 브래들리는 조심히 상처가 나지 않은 제이크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었다.


"갑시다. 내 손수 약을 발라주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소."


그 다정한 속삭임은, 제이크를 설레게 했었다.








62.

제이크는 마루에 앉아 비니를 기다리다가, 문득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주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허공을 빤히 바라보던 제이크는 문득 자신이 무엇을, 누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잊어버렸다. 그리운 환청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이다.

오랜 기다림. 그것은 제이크에게 영원히 새겨진 것처럼 남았다. 그리하여 제이크는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 기다림이 끝나면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지. 그것을 어떤 까닭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반가웠던 재회 이후, 혼란이 찾아들었다. 비니가 돌아왔다고 한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는 이미 그와 마음을 나누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는데. 아니, 여기까지 와서 그에게 나누어줄 마음이 남아있기는 한가? 제이크는 자조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껍데기. 제이크는 그것이 폐비가 된 제 꼴을 일컫기에 딱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황제에게 매달리지도, 비니에게 돌아가지도 못하는 몸이 되었는데.

심장이 저렸다. 사무치게 외로웠다. 길을 잃었다. 불빛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 버려진 기분. 어디로 나아가야 좋을지, 얼마나 오래 나아가야 외딴 섬에라도 닿을 수 있을지. 어떤 것도 알지 못한 채로. 차라리 이대로 잠겨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허무가 밀려와 제이크를 집어삼켰다.


"형."

"서방님."


제이크는 소리를 내어 그들을 불렀다. 갈라진 목소리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닿지 않는 부름이었다.








62.

해가 지고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냉궁의 문이 열리고, 꾸벅꾸벅 졸던 제이크의 고개가 번쩍 들린다.


"오래 기다렸어?"


졸린 눈을 깜빡이는 제이크에게 다가간 비니가 속삭여 묻자, 하루 온종일 그만 기다리며 보냈던 제이크는 고개를 젓는다. 으응- 하며 삐죽이는 입술은 꼭 예전과도 같았다.


"잠투정은 여전하네."


비니는 장난스레 제이크의 밝은 머리칼을 흐트리며 웃었다. 익숙한 웃음 소리가 안정을 가져다 주어, 제이크는 푸스스 웃으며 비니의 손바닥에 제 머리를 부비며 미소를 짓는다.


길을 잃은 아이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그저 당장 눈앞의 빛줄기만 보고 따라가는 것이다.








63.

전장의 이야기. 비니는 그것을 이야기하길 꺼려했으나, 제이크가 고집을 부렸다. 형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야겠다며 한 발짝을 물러나지 않는 통에 비니는 결국 두 손, 두 발을 들고야 말았다. 언제나 그랬다. 비니는 제이크를 이기는 법을 몰랐다. 사실은 그때도. 제이크가 가지 말라고 했더라면 비니는 기꺼이 제이크의 곁이 아닌 뒤에 머무는 한이 있더라도 떠나지 않았을 텐데. 그가 왜 떠나려고 했는지 몰랐던 제이크는 그를 붙잡지도 못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추위였지."
"......."
"손발이 썩어들어가는 것을 여럿 보았거든."


비니는 무심코 제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북방의 오한이 여즉 손끝에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허나, 이제는 괜찮다. 폐하께서 내게 상을 내려주신다고 하였거든."
"......."
"내일 알현 할 때 황궁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실 수 있냐고 청할 거야. 그럼 이렇게 널 보러 오는 것도 수월하겠지."


비니는 그렇게 말하며 제이크의 손을 맞잡았지만, 제이크는 얼음물을 뒤집어 쓰기라도 한 것처럼 굳어버렸다. 꽃이 내리고 달이 밝은 환상에서, 어둡고 추운 냉궁으로 돌아온 것이다.

폐하께서 내게-

황제께서 비니와 제 사이를 알게 된다면.

제게 마음을 거두었다고 한들, 황후였던 이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눈 감아줄 리가 없다. 저는 물론이고 비니도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 되겠지.

제이크는 어둠을 밝히던 불빛이 꺼져버리는 것만 같은 기분에 잠겼다. 다시 혼자가 되고, 길을 잃고, 걸음을 멈춰선다.


"...제이크?"


대답 없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제이크를 두고, 비니가 안색을 살피려 몸을 기울였다.








64.

멀리서 보면, 그러니까, 대문 틈으로 그 모습을 보면.

그것이 꼭 입을 맞추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브래들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약간 시점이 헷갈릴 것 같아서 쓰는 tmi...

55~57 의 시점은 비니가 제이크를 찾아가기 전임. 그래서 전편에서 비니가 다시 온다는 내일이랑 브래들리가 서찰에 쓴 사흘 뒤가 같은 날이 된 거..!


루스터행맨 루행크오 비니행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