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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8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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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한 풀 꺾이기 시작하면 전 지역이 수확을 대비하여 분주해진다.
이 때가 되면 민가에 가깝게 서식하는 요괴들이 날뛰는 빈도도 높아지므로 수선인들 역시 한가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연화오에서도 민간에서 피습을 당했다는 요청이 끊이지 않아서 수많은 수사들이 바쁘게 들락거리는 중이었다.
“종주, 이번에는 와렴호 인근에서...”
부사는 급하게 들어오면서 서찰을 바치다가 말끝을 흐렸다.
무슨 날인지, 오늘만도 벌써 세 번째의 사냥 요청을 받은 강징이 미간을 찌푸렸다.
부사는 얼른 머리를 굴려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파견된 수사들을 떠올렸다.
“지금쯤 능산으로 나갔던 자들이 일을 다 보았을 겁니다. 전서조를 보낼까요?”
“아니. 내버려둬라.”
잠시 기다리고 섰어도 별다른 지시가 없으므로 부사는 그것이 종주 본인이 가겠다는 뜻임을 알았다.
“그럼 누구를 데리고 가시겠습니까?”
강징은 공손하게 물어보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고작 요괴 몇 마리를 때려잡는데 데리고 가긴 뭘 데려가?... 하고 매번 눈총을 주어도 고지식한 성격의 부사는 고집스레 예의를 다했다.
바로 그 때 예기치 않은 목소리가 끼어들자, 깜짝 놀란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제가 함께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강징은 너무 놀라는 바람에 당황한 티를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남희신은 단신으로 태연자약하게 서 있었다.
아무리 고소 남씨의 수장이라지만, 공식적으로 만날 약속도 없는데 그대로 들여보내다니. 단 한 번을 일없이 찾아왔던 것뿐인데 아랫놈들은 그와 자신의 사이에 새로운 친분이라도 생긴 줄 아는 모양이었다.
부사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흘끔거렸다.
그러나 남희신은 양편의 따가운 시선도 모르는 척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를 고수했으므로, 부사는 무언가 자연스러워할만한 이유가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강징의 눈치가 험악하긴 하지만, 그야 금옥처럼 아끼는 조카를 대할 때에도 그리하는 사람이니 오히려 부사의 눈에는 스스럼없는 태도로 비쳤다.
강징은 붉어지다 못해 창백해진 이상한 낯빛을 하고선 곧 뭐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하지만 부사가 나가지 않고 있으니 말을 함부로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이도 저도 못한 강징이 말없이 집무실을 나가버리자 당연하다는 듯 남희신이 뒤를 따랐다. 이윽고 부사까지 줄줄이 따라와서 강징은 그대로 대문 앞까지 걸어나와 남희신과 나란히 선 채로 수하들의 전송을 받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압력에 등을 떠밀리듯 어검을 하여 날아오른 다음에야 바싹 붙어 따라오는 남희신에게 호통을 칠 수 있게 되었으나, 이제 와서 뭐라 해봤자 더 어색해지기나 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몇 번 그에게 대들어 보았지만 맘대로 됐던 적은 없고, 역으로 뜯기기만 했을 뿐이다.
모두가 바쁜 계절인데 이 사람은 일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일도 팽개치고 나를 곯리러 오는 건지. 강징은 생각하는 걸 피하려고 했던 그의 속내를 떠올리며 마음이 불편했다.
와렴호는 엄청난 크기의 연화호에 비견될 정도로 거대한 호수로 운몽성에서는 한참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오후에 출발하여 그 곳에 도착하자 이미 저녁이 되었으므로 강징은 떨떠름한 기분을 안고 투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희신이 또 장난을 걸지 않을까 싶어 긴장했지만, 그는 마주앉아 저녁을 먹는 동안에는 점잖게 굴었으며 청담회에서나 떠올릴 법한 밋밋한 화제만 끌어왔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죄다 가식이라는 걸 아는 강징은 오히려 짓궂게 삶길 때보다 더 불편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느긋하게 밖을 보며 차를 마시는 남희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강징은 얼른 해시가 되지 않으려나 하고 좀이 쑤셨다.
너구리처럼, 이제는 통하지도 않을 품위 있는 태도를 연기하는 그와 마주앉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산란해졌다.
속이나 태도야 어떻든 간에 외양은 변함이 없으므로 처음 반했을 때와 똑같은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불만도 불안도 짓눌러버릴 정도로 진한 감정이 새어나오는 걸 막기 어려웠다.
크게 열린 창문 너머로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바깥 공기를 통해 부산스러운 시장의 소리와 구수한 냄새가 전해져왔다.
무척 세속적인 공기 속에서도 남희신은 마치 청량한 대죽 숲의 내음이라도 맡는 것처럼 고상한 얼굴로 미소짓고 있었다.
순간 강징은 그의 겉모습에 홀려, 뻔뻔하게 흔들어대던 모습도 다 잊고 처음 반했을 때의 두근거림이 솟았다.
그야말로 강도질처럼 빼앗아갔던 나의 은령은 어디다 보관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혹시... 지금 바로 이 순간 저 몸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그렇게 생각하니 억누르려 해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아무리 궁금해도 절대 그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다.
그 작은 은방울은 정말로 귀중한 물건이었다.
강징이 금단을 맺었을 때, 운몽 강씨의 주인된 표식으로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말과 함께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니 어찌보면 삼독보다도 귀했다.
어리석은 생각이란 걸 알지만, 남희신이 그토록 귀한 자신의 보물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마치 정표처럼 느껴져서 달라고 하지 못한 것이다.
어쩐지 그는 갈수록 저만 보면 태도가 돌변하며 심술궂은 장난을 치느라 여념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나 거침없이 저질러버리는 그가 강징의 속을 알면 기어코 비틀고 놀리려고 들 것이 뻔하니.
그에게 은령에 대한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편히 쉬십시오.”
강징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어찌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던지, 어느새 그와 함께 위층에 올라 방 앞에 선 것도 몰랐다.
강징은 아직도 표정 관리를 못하고 이상야릇하게 굳어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기별도 없이 남의 선부에 불쑥 쳐들어 왔던 것만 빼면, 오늘 그의 태도는 한 치도 예의를 벗어나지 않았다.
예의바를 뿐 아니라 밤인사를 하는 그의 얼굴은 무척 상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택무군다운 모습, 아니면 속에 숨기고 있는 발칙한 다른 일면, 이 두 가지밖에 생각치 못하고 그 사이에서 휘둘리는 강징은 드러내놓고 듬뿍 내보이는 특별한 감정을 털끝만큼도 알아채지 못했다.
“편히... 쉬십시오. 택무군.”
강징은 간신히 대답하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남희신은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강징은 남희신의 마음을 까맣게 몰라 보았으나, 남희신의 눈에는 덫에 걸린 쥐처럼 옴쭉달싹 못한채 버둥거리는 강징의 수줍은 마음이 선연히 보였다.
어찌나 귀여운지, 혹여 긴장을 늦추었다간 부글거리는 감정이 그의 머리 위로 터져버릴 것 같아 농담도 한 마디 꺼내지 못했다.
“잘 자요... 만음.”
듣지도 못할테지만 남희신은 가만히 속삭였다.
이상하게도 차분하며 따뜻한 기분이 들었고, 벽 한 장 너머에 있을 강징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다음 날 강징은 또다시 남희신과 마주앉아 어색한 아침을 먹은 다음 거리로 나섰다.
강징에게 요괴를 보았다고 신고한 가문은 호수에 인접한 물시장통에 있었다.
요괴를 목격했다는 그 집 하인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강징은 표정이 좋지 못했다.
빈틈없이 몸에 꼭 맞는 자색 비단 장포를 휘감고 검을 든 남자가 뾰족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리자 하인은 움찔하고 초조하게 입술을 빨았다.
“똑바로 본 것이 확실한가?”
강징이 의심스럽다는 듯 다그치자 하인은 더욱 움츠러들었고, 집주인이 나서서 그를 감쌌다.
“아루는 정직한 아이라 거짓을 고하지 않습니다, 삼독성수.”
“......”
그래도 강징은 믿지 않는 듯 몹시 눈총을 주었고 수괴를 본 곳으로 안내하라고 명했다.
그 동안 남희신은 한 켠에 비켜 서서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는 무척 부드럽고 기품 있는 태도를 고수했다.
하인은 나룻배에 남희신과 강징을 태우고 호수를 가로질러 갔다. 호수가 매우 컸기 때문에 한참 동안 배를 저어야 했다. 그 동안 강징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고 남희신도 말이 없었다. 강징은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정직하다는 저 하인을 다시 몰아세우게 될 것 같아서 입을 열지 않았다.
안그래도 하인은 반대편 기슭이 가까워질수록 안절부절 못했다.
“저어기, 저 기슭에서 나타났습니다요.”
하인은 배를 완전히 뭍에 대지 않은 채 멈추더니 손가락질을 했다.
그래도 강징은 가타부타 따지지 않았다.
“그럼, 돌아가거라.”
그는 짤막하게 말한 뒤 바로 뱃전을 차고 올라 돌투성이 땅으로 내려갔다. 연이어 남희신마저 그를 따라 날아올라 뭍에 오르자, 하인은 배를 돌려 가벼워진 만큼 빨라진 속도로 멀어져갔다.
남희신은 강징과 단둘이 남게 되자마자 씨익 웃었다. 허를 찔린 강징은 찔끔하며 떨떠름하게 눈을 피했다.
이제까지 얌전했던 건 단지 사람들의 눈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건지. 남희신은 갑자기 적극적이고 시원스럽게 변한 걸음으로 물가를 걸어갔다.
이윽고 두 사람은 얕은 흙에 패인 발자국을 발견했다.
발자국은 넓적하고도 깊었는데 털 달린 짐승의 것도 아니고, 사람의 것도 아니었다.
하인이 설명했던 묘사도 그랬지만, 강징은 그렇게 생긴 수괴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발자국이 오래 되진 않았군요.”
“네...”
발자국을 바라보며, 거기에다 본인이 아는 괴들의 모양을 이리저리 맞춰보는 강징에게 남희신이 말했다.
“발자국이 저쪽으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유심히 보니, 새하얀 빛이라서 한 겹으로 보였던 절벽이 사실은 두 겹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가에 절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만이 있었다.
주머니처럼 쑥 들어간 공간은 좁았고, 주변을 둘러싼 절벽이 안으로 들어갈수록 머리 위를 가려서 어둑하게 그늘이 졌다.
안쪽 끝에는 작은 굴이 하나 있었다. 강징이 조심하며 안에다 발화부를 던져 넣었지만 굴 속은 조용했다.
잠시 후 강징과 남희신은 물가 어귀에서 흩어진 짐승의 뼈다귀를 찾았다. 살점과 내장이 붙은 부위도 있어 파리가 왱왱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강징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행히 이 중에 사람은 없는 것 같군요.”
남희신은 불결함과 악취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로 잔재들을 살폈다.
“이 곳에 어인형 요괴가 출몰했던 적이 있습니까?”
“...꽤 오래전에요.”
강징이 탐탁치 않은 듯 대꾸했다.
아니, 수괴일 리가 없다. 수괴라면 굳이 뭍으로 나와 털 붙은 짐승을 먹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발자국은 분명히 물에서부터 나온 것이었다.
“쉿.”
갑자기 남희신이 낮게 경고하자, 강징은 대번에 기민해지며 물 쪽을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잔잔한 물결 뿐이었지만 남희신이 얼른 강징의 팔을 잡고 당겼다.
더 이상은 말이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소리를 내지 않고 신속하게 지면을 차고 날아가 한구석의 무성한 덤불 뒤로 몸을 숨겼다.
가만히 숨을 죽이며, 강징은 남희신의 청각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렇게 숨고도 꽤나 시간이 흘러간 후에야 요괴가 나타났다.
강징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미끈미끈하게 물이 흘러내리는 피부, 끝이 갈퀴처럼 된 발끝은 분명 수괴의 것이었다.
하지만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지면을 기어가던 그것이 땅을 딛고 일어서자, 성인 남성의 두 배는 될법한 그늘이 땅에 드리워지며 모래가 흩날렸다.
서 있는 그것은 이제 하인이 묘사했던 모습과 꼭 같았다.
어마어마하게 큰 키, 사람과 같은 외양, 그리고 먹이를 찢어발긴 빽빽하고 들쭉날쭉한 이빨들.
요괴는 털투성이의 커다란 귀를 쫑긋거리며 주변을 탐색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이내 더러운 뼈, 고깃덩이가 흩어진 곳으로 가서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강징은 더욱 눈을 가늘게 하며 요괴를 자세히 보려고 했다. 하지만 유심히 보지 않아도 터무니없이 컸고, 얼토당토 않은 외모가 또렷이 드러나 보였다.
수괴는 저렇게 크고 건장하지 않다. 물 밖에서 저렇게 편안하게 머무를 수도 없었다.
그 때, 강징의 마음속 의문을 듣기라도 한 듯 남희신이 중얼거렸다.
“목수괴가 변성한 무상괴로군요.”
강징은 그와 꼭 붙어 있다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던 터라 어색함을 꾹꾹 누르며 반문했다.
“그게 뭡니까? 변성이라니요?”
“특정 환경에 완전히 복속되었던 귀괴가 모종의 이유로 다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탈바꿈한 것입니다.”
강징은 조금 전에 하인을 바라보던 것과 꼭 같은 눈으로 남희신을 쳐다보았다.
“그런 얘긴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만?”
“아직 실 사례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소 남씨 내에서도 연구중입니다.”
“......”
강징은 입을 다물었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그는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남희신의 지식에 감탄하는 한편으로는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지식의 총본산이라는 고소 남씨답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같은 입장인데도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신이 바보같아서 자존심 상했다.
공동으로 요마귀괴를 퇴치하는 선문가 입장에서 그런 정보는 함께 나눠야 할 게 아니냐고 열등감은 곧장 불만으로 바뀌었다. 다른 가문 사람이었다면 바로 따지고 들었겠지만, 상대가 남희신이라 말도 못하고 입술만 비틀었다.
그런 기색을 몰라 본 남희신이 계속해서 말했다.
“이 요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조심하는게 좋겠습니다. 체액이나...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체부위에 유의하십시오.”
“......”
“잡아다 연구를 했으면 좋겠는데...”
남희신도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요괴에 홀렸는지 눈을 떼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그는 강징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입을 꾹 다물고 내처 앞만 보며 불쾌한 기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얼굴이 마치 억지로 잔소리를 듣고 있는 아이의 것 같았다. 남희신은 몰래 웃음을 참느라 턱에 힘을 주었다.
잡괴가 아무리 커 보았자, 독수리처럼 날쌔며 바위도 베어버릴 수 있는 금단과 명검을 지닌 수사들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거두절미하고 뛰쳐나간 강징을 본 요괴가 위협적으로 포효했지만 강징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덤불 뒤에서 나온 남희신이 팔짱을 끼고 수수방관하는 것을 확인한 강징은 마음 놓고 검을 뽑았다. 얼마나 괴상하건 얼마나 크고 강하건, 운몽의 요괴는 운몽 사람이 처리해야 하는 법이다.
못 들은체 하긴 했지만, 남희신이 한 말을 완전히 흘려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거리를 두고 우선 자전부터 휘둘렀다. 길게 날아간 보랏빛 채찍에 얻어맞은 수괴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상한 액체를 토하거나 별다르게 변화하지는 않았다.
강징과 똑같이 그것을 확인한 남희신은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관찰했다.
요괴는 대부분 물 속에서 살지만 뭍짐승도 사냥하는 것 같다. 어쩌면 저 조그만 굴 속에서 잠을 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이제 처음으로 목격되었다면 이 곳에 오래도록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등등, 그는 고소 남씨의 학자다운 가설에 골몰했다.
문득 머리 위로 부슬부슬한 비 같은 것이 떨어져내리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삼독에 베인 수괴가 고통을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고 쿵쿵거리자 그 여파인 듯 절벽에서 돌가루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남희신이 벽을 쓸어보니 바삭거리는 석회 가루가 묻어났다. 무척 메마르고 잔구멍투성이의 석질이었다. 남희신은 고개를 들어 재빠르게 사방을 훑어보았다. 마른 덩굴이 엉성하게 붙은 연안 절벽에서는 바람만 불어도 가루 같은 것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문득 남희신의 의식 속에, 쿵쾅거리며 날뛰는 요괴와 갈수록 비처럼 떨어지는 돌가루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일어났다.
“강종주!”
남희신이 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마침 요괴의 한 팔을 베어버리며 끔찍해진 비명에 덮여버렸다.
남희신이 다시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기 전에 강징이 갑자기 삼독을 회수해버렸다. 그리고는 맨손을 휘둘러 장풍을 날렸다.
요괴가 날뛸 때마다 머리 위를 덮은 천장이 얇고 조악하다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순간 남희신의 머릿속에 지금의 직선적인 강징의 공격이 초래할 결과가 번개처럼 환하게 드러나 보였다.
“안됩니다, 강종주! 잠시만...”
그러나 강징은 이미 팔을 휘두르고 있었고, 전투에 집중한 건지 못 들은 체하는 건지, 이 편은 보지도 않았다.
자색 소맷자락을 휘감은 손바닥이 폭풍과 같은 힘을 쏟아내었다. 맥없이 날아간 요수의 덩치가 하필 한줄기 가느다란 기둥처럼 버티고 있던 석주를 박살내고 절벽에 처박혔다.
남희신은 강징이 요괴를 때리는 바로 그 순간에 바람처럼 튀어나갔다. 수사의 본능적인 반격까지 예상한 그는 강징의 옆구리를 타고넘듯이 뒤로 돌아가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고, 튕기듯이 돌아와 굴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르르쿵쾅, 천지가 무너지는 굉음이 울려퍼졌다. 남희신은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굴 속을 데굴데굴 굴러 최대한 입구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일시에 굴 바깥이 무너져내리며 안으로 들이친 흙먼지가 공기를 꽉 메웠다.
일대의 소란은 마치 천둥 번개처럼 강하고도 지극히 짧게 지나가버렸다.
귀가 아프도록 터지는 소음 끝에 소름끼치도록 잠잠해진 어둠과 적막이 이어졌다.
남희신은 온 전신으로 강징을 감싼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널부러진 두 사람의 몸 위로 작은 돌조각과 흙먼지가 두텁게 씌워져 있었다.
“나... 남종주.”
강징은 소리도 흙폭풍도 다 가라앉아버리자 조그맣게 중얼거리다가 입안으로 들이치는 먼지에 콜록거렸다.
그가 미적미적 밀어내려 했지만 남희신은 무시하고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왜 검으로 베지 않고 그토록 무지막지하게 때려버린 겁니까?”
“당신이, 생포하고 싶다면서요...!”
버둥거릴수록 남희신이 더 조아대니, 숨이 막힌 강징이 간신히 내뱉았다.
갑자기 가슴이 시원해지며 낮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강징은 제가 무슨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열적은 느낌이 들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일어나 앉은 채 제각각 말이 없어졌다.
강징은 조금만 움직여도 풀썩거리는 모래먼지를 느끼며 자꾸만 그와 엮이는 상황을 생각했다. 그리곤 금방 안겼던 그의 팔힘과 옷에서 풍기던 내음으로 소란스러워진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다.
한편 남희신은 한쪽 다리를 괴고 앉은 채 부스럭거리는 강징의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쯤 되면 따지거나, 아니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강종주는 지독하게 말이 없구나, 하고.
둘은 한참 동안 상대방에 대한 생각만 하다가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남희신이 탁, 하고 명화부를 밝히자 벌써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 시렸다.
쏟아져내린 돌무더기는 굴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고 있었다.
그와 반대되는 안쪽을 살펴보니 시커멓게 입을 벌린 어둠이 얼마만큼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몇 발짝 들어가 보니 계속해서 이어졌다.
길은 점점 아래쪽으로 경사가 지는 것이 별로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너진 돌을 치우는 것은 시간과 힘이 여간 많이 들 것이 아니라 일단 차선책으로 두고 길을 가 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한 명씩 통과해야 할 정도로 작았던 굴은 갈수록 더 좁아졌다.
굴 속은 그야말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숫제 귀가 멀어버린 게 아닐까 싶은 느낌이었다. 마치 정신이 짓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강징은 남희신이 뭐라도 말을 해 주길 바랬지만, 제 쪽에서 먼저 말을 걸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처 앞만 보고 말없이 이동하는 남희신이 혹시 화가 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까지 따라온 거야 남희신이 멋대로 한 짓이지만, 이런 재난까지야 예상하진 않았을 테니까 기분이 좋진 않을 터다. 게다가 지금의 남희신은 나쁜 기분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강징은 일신에 닥친 위험보다는 화가 났는지도 모르는 그와 묶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난관을 타개하길 빌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게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양갈래길이 나왔다.
남희신은 거침없이 오른쪽 길을 택하여 나아갔다. 하지만 얼마 안가 막다른 곳이 나왔다.
돌아나와 이번에는 왼쪽 길로 향하자, 다시 오랫동안 외길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통로가 좁아졌다. 점점 허리를 숙이고 걸어가던 두 사람은 급기야 웅크리고 전진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강징은 저는 둘째치고, 그 고상한 택무군이 땅굴 속을 기어가는 꼴만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이상은 안 되겠다, 되돌아가서 몇 날이 걸리든 돌을 치우는 수밖에 없겠다고 다급한 마음을 먹는데 돌연 앞서 가던 남희신의 몸이 아래로 쑥 빠지듯 사라졌다.
강징은 얼결에 손을 내미는 남희신의 부축을 받고 구멍같은 굴을 빠져나오며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넓은 공간으로 나오자 멍한 느낌이었다.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에 더불어 물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커다란 석회 동굴이었다.
높다란 천장에서는 수천개의 초가 거꾸로 흘러내린 것 같은 종유석이 그득했고, 아래에는 뾰족뾰족한 석순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저 아래에는 고요하게 멈추어서 차가워보이는 물이 고여 있었다. 발화부에 반사된 물빛이 희끄무레한 돌들 사이에서 이상할 정도로 새파랗고 맑아 보였다.
마치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처럼 아름다워보이는 석호를 보고, 또 수면 밖으로 밀려나와 흩어진 낙엽을 본 강징은 한숨이 나왔다.
어째 옛날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곧장 강징이 겉옷을 벗고 야명주를 꺼내어 입에 물자 남희신은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처음 위험이 닥쳤을 때부터, 전쟁을 겪은 적 있는 두 사람은 말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움직이던 습관대로 행동했다. 그래서 남희신은 굳이 알만한 이야기를 묻지 않았고 조심하라는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이지도 않았다.
강징은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뛰어들었다. 과연 바깥날씨와 무관하게 차가운 물이 전신을 감싸며 뼈가 시린 냉기가 들었다가, 차츰 무감각해져갔다.
강징은 수온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왔고, 다시 충분한 산소를 머금은 다음 잠수해 들어갔다.
능숙하게 수영을 하는 강징이 고개를 돌리는대로 강한 빛을 흩뿌리는 구슬이 사방을 비추었다. 강징은 뻥 뚫린 물 속 건너편을 향해 이동하며 서두르지 않고 적당한 힘으로 헤엄을 쳤다.
물속 길은 오히려 밖에서 지나온 길보다 시원하게 뚫려 있었고 생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숨을 참고 나아가자 마침내 흔한 물고기 한 떼와 이끼 같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점차 빛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길은 오히려 어수선해져서 강징은 두어번 길을 잘못 들었다. 물에 익숙한 그는 그럴수록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미세한 물흐름을 탐색하여 활로를 찾았다.
갑자기 터져나오는 듯한 빛무리를 발견하자 힘껏 헤엄을 쳐 가서 마침내 물 밖으로 솟구쳐 나왔다.
하늘을 보고 수면에 드러누워 둥둥 뜬 채로 강징은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바깥은 예의 새하얀 바위 지형으로 반쯤 둘러싸인 못이었다. 멀찍이 보이는 물가도 새하얀 모래도 덮여 마치 작은 바닷가처럼 보였다.
강징은 충분히 쉰 다음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호흡에 여유가 있었다.
돌아가서 남희신에게 길이 있다고 알린 강징은 그에게서 장포를 받아 젖은 몸에 걸쳤다.
문득 강징이 미심쩍게 물었다.
“남종주, 헤엄은 치실 수 있습니까?”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물 속에서 걸으라 하면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신도 할 줄 모르는게 있군요?”
강징이 저도 모르게 불쑥 내뱉자 남희신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갑시다!”
강징은 괜시리 의기양양해졌던 속을 들킨 기분에 얼굴이 붉어져, 벌떡 일어나며 서둘렀다.
그는 단단하게 허리띠를 여민 다음 남희신이 잡도록 했다. 내단에도 충분히 힘을 모은 다음 출발했지만 조금 있으려니 생각보다 이르게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어려서부터 물에 익숙한 자신이 이 정도라면 남희신은 얼마나 잘 버틸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강징은 노련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헤메었어도 단순한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길을 잘못 들었다 되돌아나온 강징은 벽을 잡고 떠다 미는 손이 떨렸다. 한 번 더 혼자 나가서 길을 익힌 다음에 그를 데려올 걸. 그렇게 후회해도 이미 되돌아가기엔 늦었다.
처음에는 허리를 붙잡은 손이 추진력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아마 남희신이 발장구로 밀어주고 있었음이리라. 그런데 점점 속도가 줄어드는 것 같더니 급기야는 뒤로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징에게는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가 손을 놓치지 않는 것만을 다행으로 여기고 필사적으로 헤엄을 쳐 나갔다.
마침내 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강징은 물을 한 번 들이켰다. 차가운 물로 사레가 들리자 눈알이 쪼개지는 듯하며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물 밖으로 솟구쳐 나오자마자 남희신의 몸을 끌어올려 토악질을 해대면서도 사력을 다해 물가로 끌어 갔다.
기를 쓰며 남희신을 모래밭 위로 옮겨놓은 강징은 어쩔 줄을 몰랐다.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진 남희신의 얼굴은 창백했고 꽉 다문 입술로는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아찔한 순간, 강징은 숨을 불어넣어서 구명해야 된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잊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요하게 눈을 닫고 시체처럼 누운 남희신의 모습 자체가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갈수록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아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도무지 머리도 돌지 않고 마음조차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가만 있는 남희신의 낯빛이 점점 파래지는 것을 보고 파득 정신을 차리고는, 와락 달려들었다.
조금 전까지 얼음처럼 굳어 있었던 것과는 대비적으로, 이번에는 불같은 기세로 남희신의 입술을 벌리고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을 꾹꾹 누르며 몇 번 크게 숨을 불어넣다가, 그래도 반응이 없자 미칠 듯하여 곁에 서기조차 어려웠던 거리감조차 잊고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는 힘껏 입술을 부딪혔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뒷목이 강하게 당겨지는 것이 느껴지자 마치 텅 빈 물가에 혼자 남은 듯한 막막함에 비참해지던 강징은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반사적으로 밀쳐버리고 보니 바로 코 앞에서 험악하게 날이 선 남희신의 눈동자가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오래 망설이십니까? 정말로 죽는 줄 알았잖습니까.”
강징은 기가 막히다기보다는 충격을 받아서 말을 하지 못했다.
“다... 당시... 당신이란 사람은...!!!”
간신히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며 속은 것을 깨달았지만 남희신은 그가 옳게 항의할 틈도 주지 않고 확 잡아당겼다.
다시금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이번에는 스스럼없이 벌려지며 비벼대는 감촉이 느껴졌고, 살아있는 깊은 숨결이 타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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