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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5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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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나더 이나더 삼나더 사나더 오나더 육나더





 
41


‘안녕, 라이언. 제일 먼저 또다시 당신에게 사과해야 해서, 정말 미안해요.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지만 진심으로 당신을 괴롭게 하려고, 혹은 당신의 마음을 우습게 여겨서 장난삼아 당신을 속이려 한 건 아니라는 걸 알아줘요. 일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냐고 묻는다면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고 할게요. 전혀 몰랐다면 그건 거짓말이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당신에게 최대한 스스로를 숨기려 했어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제가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최대한 감춰두는 게, 나를 지키는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긴 거예요. 당신을 만나고 나서부터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자꾸만 나를 다 내보여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어떤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저는 보기보다 단순하거든요) 당신은, 내가 뭘 원하든 ‘그래요? 그게 뭐 어때서요?’ 라던가 ‘오, 정말요? 그럼 좋죠.’ 라면서 그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아주 당연한 말을 한다는 듯이 받아줄 것 같았거든요.’

‘처음에는 제 모든 걸 (속내까지는 아니더라도) 알면서도, 여전히 친구로 남아준 당신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당신이 핑계랍시고 제게 연락을 해왔을 때, 함께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기뻤고… 조금 부끄럽지만 새로운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일도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었어서, 저도 모르게 들떠있던 것도 같아요. 저는 당신이 곧, 그러니까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 흥미가 생겨도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멀어지는 것처럼, 당신이 가진 저를 향한 관심이 금세 사그라들 거라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저는 특이 케이스니까요. 사람들은 보통 다른 게 있으면 특별해 보인다고 착각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것과 사실은 함께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는 현실을… 네, 이 또한 부끄럽지만 저는 여태껏 그건 진짜가 아니라고 믿으려 노력했어요. 그런데, 맞아요. 사람들은 곧 다들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또는 오히려 저를 경멸하고 상처 주기 위해서 지금까지 참아왔다는 것처럼… 그렇게 떠나갔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제게 말을 걸어올 때면 제가 그동안 겪었던 모든 일들이 마치 없었던 일들처럼 느껴졌어요. 좋지 않았던 때가 불쑥불쑥 생각나는 때도 있었지만, 당신을 만나면 항상 잊어버렸죠.’

‘그래서… 그날 그 파티에서 당신과 만나게 되었을 때, 무척이나 놀랐어요. 제 그런 모습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마치 나를, 전혀 문제가 없는 완벽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음이 분명했으니까요. 가능하면 숨기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약혼자가 있다고 하면, 당신이 더이상 저를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뭐든 숨기려 할수록 모든 게 드러났을 때 더더욱 크게 다가오죠. 라이언, 또 다른 좋지 않은 하루가 될 뻔했던 그날, 구해줘서 고마웠어요. 미안해요, 감사 인사가 너무 늦었지만… 진심이니 제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제서야 이렇게 솔직히 말하게 되어서, 또 미안해요. 저는 지금 제 전부를 이야기하고 싶으니 이 이야기는 빠질 수 없겠죠. 당신과의 키스는 지금까지 제가 겪었던 것들과 너무나 달랐고, 또 너무 좋아서…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들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요. 당신이 정말, 진심인 것 같았거든요. 약혼자도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준 다는 건 옳지 않은 일임이 분명한데도, 그날 밤 그 일을 제가 하고 있었던 거예요. 한순간 스스로가 볼품없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신의 마음을 제가 장난으로 취급했다는 오해를 살까 봐 두려웠고, 당신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롭게 느껴졌어요.’

‘당신에게 다가가려면 솔직해져야 했지만, 그러려면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죠. 흔들리지 않으려면 당신을 포기해야 했어요. 그래야 그대로 숨어서, 안전하게 나를 감추고는, 평범하지는 않아도 괜찮은 척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당신은 생각보다 끈질겼어요. 마치 너무나도 나를 원한다는 눈빛을 쏘고,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고… 그렇지만 몇 번의 고비를 넘기자 당신이 나를 포기한 듯 보였어요. 당신은 저를 찾아오지도, 연락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제가 그랬던 것처럼 제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듯 나타나지도 않았으니까요.’

‘라이언, 당신은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막상 원하던 것이 이루어졌는데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실망감이 다가왔고 이상하게도 무척이나 슬펐으니까요. 마음속의 또 다른 제가 속삭였어요. “이대로 도망칠 거야?” 하지만 떠오른 그 물음은 곧 “일이 잘못된다면, 감당할 수 있겠어?” 라는 질문으로 바뀌곤 했죠. 며칠을 밤새도록 고민했고, 용기가 자라나길 기다렸어요. 사실은,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거든요……’

‘당신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정말이지 나로서는 처음 겪는 감정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설명을 잘 못하겠지만, 그래도 당신을 이토록 보고 싶어 했다는 게, 또 당신과 닿고 싶고, 안기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게 제게는 너무 이상한 일이었거든요. 그게 싫었다는 말이 아니에요. 뭐랄까… 그냥, 너무 좋은 느낌만 가득했어요. 미안해요. 당신에 대해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어서. 그래서 저는, 언젠가는 끝이 좋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스스로를 속이고 당신도 속였던 거예요. 단지 당신과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후에 당신이 느끼게 될 죄책감은 생각도 하지 못한 거죠.’

‘제리 일은 신경 쓰지 말아요. 그건 제 일이니까요. 당신을 배웅할 때까지만 해도, 물론 제 욕심이었지만, 그저 당신 곁에서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숨어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부탁하면 당신은… 당신은 기꺼이 나를 받아들였을 테니까요. 그런데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우쳐주겠다는 것처럼 전화가 걸려왔어요. 언젠가 당신에게 이야기한 적 있는 누나요. 네, 레이철은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는데, 마침, 부모님의 연락을 받고 제게 전화를 걸었던 거예요. 파혼 기사가 났고, 그래서 저는 예전처럼 숨어야만 했으니까요. 저는 여기 더 있고 싶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당신을……’



글자가 번져 잘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장이 다가오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라이언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가장 최근의 시점을 적어둔 종잇장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어느새 그의 눈 끝으로 또다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슬프게 울었던 적이 있던가. 그는 눈물방울 그대로 젖은 종이 위를 엄지로 문지르며, 울퉁불퉁하게 솟은 글자를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하지만 레이철이 되물었어요.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감당할 수 있겠어?’ 라고. (종이 위의 선명한 눈물 자국) 오, 라이언. 미안해요. 그건 제 머릿속을 항상 채우고 있던 질문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그걸 모른 척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지만 당신은, 당신은 아니에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말들, 모두 다 믿어요. 그렇지만 현실은 달라요.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 당신을 손가락질할 거고 저는 당신이 그런 식으로 취급당하길 원치 않아요.’

‘거기다 만일 정말, 정말 모든 게 싫어지기 시작해서 당신이… 당신이 저를 떠나게 된다면, 아마 저는 완전히 무너질 거예요. 더이상 살아갈 수 없을 만큼이요. 그래서 떠나기로 결정했고, 당신에게 미안하지만 마음을 굳혔어요. 네, 맞아요. 이렇게 저는 또다시 당신에게서 도망치는 거예요. 하지만 이번엔 오지 말아요, 라이언. 당신은 좋은 사람이고, 그렇기에 더욱더 당신에게 걸맞은 사람을 만나야 해요.’

‘당신은 친절한 사람이에요, 라이언. 마지막을 이렇게 끝내야 해서, 정말 미안해요. 당신과 함께한 시간들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거예요. 고마웠어요. 사랑해요.’





 
42


파혼 기사 이후로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과 같았다. 라이언은 호되게 다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휴 마이클 잭맨’ 혹은 ‘그 남자 오메가’의 이야기를 흘려들었고 매 순간 진실을 되잡고 싶다는 충동적인 마음을 가다듬으며 참아야 했다. 물론 참지 못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떠나버린 휴는 어디로 숨었는지 알 수 없었을뿐더러, 그의 집을 찾은 그를 당황스러워하면서도 결코 믿지 않는 가족들은 휴의 행방을 실수로라도 발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몇 번씩이나 문전 박대 당한 라이언은 매일 밤 여전히 그 앞에 서서 시간을 보냈다.

“레이철, 레이철을 만나게 해주세요.”

길어지는 헤어짐에 오늘은 만취한 그가 휴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굳게 닫힌 철문에 매달리듯 기대선 채 그는 소리쳤다. “부탁이에요, 제발!” 제발, 저를 휴에게 가게 해주세요. 그의 누나라는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었다. 라이언은 이미 두 달째 이런 식으로 밤을 보냈지만 그의 부모님은 마치 이것이 한낱 어린애의 치기 어린 사랑놀음이라는 것처럼, 결국에는 그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처럼 무시하고 무시했다. 한참을 그렇게 무너져 앉은 채 울고 있던 라이언은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문득 그 자신이, 휴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때 어떤 소리가 들렸다. 그건 욕지기가 섞인 조용한 중얼거림이었는데, 라이언은 소리를 듣기 위해 숨까지 멈춘 채 침을 삼키며 재빨리 눈가를 닦아냈다.

“젠장할, 내 손자 녀석이 네까짓 것들의 놀음 거리라도 되는 줄 아느냐?”

기괴한 쇳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문이 살짝 열렸다. “휴?” “이 미친 것! 이 늙은이의 단잠을 매일 밤 이렇게 방해하는 건 어느 나라 예절이야!” 그는 어느새 제 앞에 놓인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휴의 오뚝한 콧날과 미소 지을 때면 패이던 잔주름을 쏙 빼닮은 얼굴이었는데, 그는 그것이 휴의 것이 아닌 그녀로부터 휴에게 전해진 것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라이언은 주저앉은 몸을 어정쩡하게 일으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미처,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노인이 소리쳤다. “생각하지 못하긴 개뿔!”) 저, 그런데, 잭맨 부부께서는 자리를 비우셨나요?”

“내 알 바냐. 이봐, 미셸. 나를 좀 더 앞으로 밀어줘.” 그녀는 무릎에 두꺼운 담요를 두른 잠옷 차림이었고, 그녀의 뒤에 선 미셸이 힘을 줘 앞으로 밀자 휠체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라이언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허리를 바짝 세웠다. 그녀가 말했다. “자. 이제 이렇게 줬으니까, 더이상 밤마다 찾아오지 말거라.”

“이게,” 라이언은 제게 건네진 작은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레이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 이건 곧…

“망할 제리 같은 놈들을 한 번은 엿 먹여야 되지 않겠어?” 노인이 씩 웃으며 말했고 라이언은 힘 빠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휴를, 휴를 데려올게요. 약속하겠습니다.”

“오냐. 하지만 네가 진정으로 임하지 않는다면 죽어서라도 쫓아갈 게다.”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에요. 휴를 사랑합니다. 후회하지 않아요.” 그때 그것이 마치 그녀가 원했던 대답이라는 듯 그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알지, 암. 할미가 손자 마음도 모를까.”

그녀가 말했다. “내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그러니 얼굴이라도 실컷 보게 그만 돌아오라고 해.” 그까짓 눈총쯤은 이 할미가 다 맞아주겠다고. 그는 어느새 눈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눈가를 닦아내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휠체어는 나타났을 때처럼 조용히 뒤로 물러났고 라이언은 그녀가 팔랑이는 손짓으로 인사하는 것과 느리게 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빠짐없이 바라보았다. 휴는 이처럼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라이언은 새삼, 그가 하고 있는 이 사랑이라는 것이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도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랑받아 마땅할 사람을, 더이상 외로이 홀로 남겨둘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미셸이 다가와 제 앞에서 문을 닫는 것을 빤히 지켜보았다. 명함을 쥔 손에 단단히 힘을 주며, 제게 쥐여진 간절한 희망을 곱씹어 보았다. 조금이라도 작은 희망이 있다면, 사람은 그것을 보고 달려들기도 하지. 그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도, 혹은 어떤 성공을 거머쥐게 할지도 모른 채. 하지만 미래는 본래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라이언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버지.” 그가 말했다. “허락받았어요. 이제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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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은 보기와 다르게 원칙주의적인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휴를 끌어들일 유일한 방법을 들먹였을 때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는 안 돼. 안 된다, 라이언.” 그는 비틀어진 세상을 이용해 먹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듯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이 정도는 하실 수 있잖아요. 왜 자꾸 안 된다고만 하시는데요?” 라이언이 소리쳤지만, 바로 그 순간 그는 이 행동 또한 너무나도 다 자라지 못한 어른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침착할 수 없었다. 휴가 사라진지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는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못된 속삭임들과 거짓된 이야기들, 또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더러운 알파들에게 일일이 화를 내며 쏘아붙이는 일들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이 방법밖에 없어요.” 라이언이 말했다. “아시잖아요. 모든 걸 바로잡을 수는 없어도 적어도 휴를 안전하게 할 수는 있어요.”

라이언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한 그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조금 우울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였고, 둘의 앞으로 어느 날의 저녁처럼 와인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윌리엄은 벌써 세 잔을 비웠고 그는 그의 옆에서 기다렸다. 윌리엄은 그보다 더 산 세월만큼 그들이 삶이라고 부르는 이 세상 속에서의 규칙, 규율, 권력 등과 같은 것들 위에 그들이 자리해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라이언은 그것을 이용하고 싶었다. 이미 제게 쥐어진 권력이라면, 힘이라면, 이제껏 사용해 마지않았고 욕심내지도 않았지만 휴를 위해서라면 그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알파 가문의 ‘혼인 계약서’는 가문의 대표자가 작성해야 했고 그것은 곧 윌리엄의 허락과 동시에 그의 마음에 내켜야 하는 거래여야 했다. 라이언이 말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라이언,” 윌리엄이 조용히 재떨이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니?”

그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제가 장난하는 걸로 보이세요?”

“그게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담배 끝으로 불을 얹었고 잠시 후 깊이 빨아들였다. 윌리엄은 턱을 수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휴를 안전하게 할 수 있지만 결국엔 우성 알파의 권력을 이용해 슬픔에 잠긴 오메가를 제멋대로 이용해 먹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이런. 라이언은 창피하게도 그제야 깨달았다. 혼인 계약서를 들이밀며 휴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를 돌아오게 만들 심산이었지만 그것은 결국 휴를 향한 또 다른 폭력일 뿐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라이언은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심이 끼어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휴는 여전히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사랑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왜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을까?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하나같이 부정적인 울림들에 그는 눈을 감았다. 곧이어 최악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가 억지로 숨고 싶은 휴를 세상에 도로 끄집어냈을 때, 그들을 향해 날카롭게 솟은 비난의 화살이 오로지 휴의 차지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한 일방적인 혼인 제안은 휴와 그들 가족 모두를 무시하는 것과 같았고 그들을 사회에서 짓밟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라이언은 눈을 감은 채 다시금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좀 진정한 것 같구나.”

“… 네.”

“그러니, 라이언.”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담배 끝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피우지 않고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윌리엄이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조건을 걸겠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갈색 눈을 마주 보았다. 그건 언젠가 진정한 사랑을 마주했던 눈이었고, 라이언은 그의 아버지가 결코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윌리엄은 이미 가슴 깊이 그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라이언,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혼인 계약서는 일방적으로 작성되어선 안 된다. 적어도 레이놀즈 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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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계산이 조금 틀어진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그는 결국 두 달 동안 대문 앞으로 출석 도장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잭맨 부부의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른 수확은 있지 않았는가. 라이언은 휴를 ‘손자’라고 칭했던 노인이 건네준 명함을 확인하고는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목표는 같았으나 그 속에 아주 작은 꾀를 부린 것이다. 라이언은 노인이 건네준 것이 레이철의 명함, 그 작은 종이 쪼가리임에도 그의 아버지에게 거짓을 보고했다. 하지만 곧 거짓은 아닐 것이었다. 그는 지금 그녀의 아파트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이언은 세 번 노크했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갑작스레 바짝 긴장되기 시작하자 그는 입이 말라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걸쇠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그는 그녀를 마주했다. “라이언?” “레이철.” 그들은 어색하게 눈인사를 나눴지만 생각보다 상대에 대해 알고 있었던 터라 상상 속 인물에 이미지를 더한 느낌일 뿐,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들어와요.”

훈기가 도는 아파트 안은 무척이나 깔끔했다. 톤 다운된 옅은 아이보리색 벽들과 부엌과 거실 바닥을 뒤덮은 회색 카펫은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레이철이 그를 식탁으로 안내했고 그는 그녀가 빼어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차를 끓였다. 잠시 동안 둘 사이로는 침묵만이 흘렀다. 라이언은 식탁 위로 기대며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식탁과 맞닿아 있는 선반 끝으로 작은 액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 중 단연 그의 시선을 끈 건, 활짝 웃고 있는 어린 휴의 사진이었다. 나의, 휴. 그는 손을 뻗어 액자를 집어 들었다. 그날 그 순간의 갇혀 있는 휴는 무척이나 어린 얼굴이었고 행복해 보였으며 앞으로의 미래 따위는 알 필요 없다는 듯 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는 갑작스레 엄습하기 시작하는 어떤 마음, 혹은 감정에 잠시간 눈을 감았다. 그를 보지 못한지 벌써 두 달하고도 일주일지 지나고 있었다.

“열여섯 살 때예요. 여름휴가에 갔을 때였죠.” 그의 앞으로 잔을 내려놓으며 레이철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배경은 바다였다. 라이언은 휴가 물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곧바로 의아함이 들었다. 휴는, 물을 끔찍이 싫어하는데. 그러자 씁쓸한 미소를 지은 레이철이 사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사건이 있기 전이에요. 아직 휴가 발현하기도 전의 일이었죠.” 라이언은 다시금 사진 속 휴를 바라보았고 그때의 휴가 어떤 아이였을지를 상상했다. 하지만 그 시절의 휴를, 나는 절대 알 수 없겠지. 라이언은 액자를 그들 사이에 세워두고는 레이철을 바라보았다. 지금 보니 그녀는 휴와 굉장히 닮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굳게 마음 먹었던 것처럼 입을 열었다.

“휴와, 혼인할 생각입니다.”

레이철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따뜻한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말없이 그 속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뒤 그녀가 말했다. “휴가 당신 이야기를 할 때면, 굉장히, 뭐랄까… 행복해 보였어요. 언젠가 한 번은 제발 그 사람 이야기를 안 하면 안 되겠냐고 소리친 적도 있을 정도로, 정말, 틈만 나면 당신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오, 이 정도인 건 몰랐다고요? 당신은 모르겠죠. 그 애가 얼마나 신나했는지. 어쨌든 그건 생각보다 놀라운 일이었어요. 휴는… 아시다시피 많은 일을 겪었거든요. 다행히 워낙 밝은 성정을 가지고 있어서 겉으로는 다른 그런 사람들과 달리 느껴지지만요.”

라이언은 잠자코 듣고 있었고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도 몰라요. ‘넌 도대체 뭘 가지고 있길래 그렇게 당당해?’ 아니면, ‘네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뭐지?’ 하는 그런 것들이요. 사람들은 흔히 본인이 잘 알지 못하는 것들에 궁금함을 느끼듯이 대부분 처음 휴를 만나면 휴에 대해 궁금해했어요. 이미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얼마 못 가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갔죠. 결국 조금 오래도록 그를 보고 싶어 하거나 여전히 궁금증이 남는 사람들만이 곁에 남았어요. 제리도 그랬죠. (천하의 쓸모없는 놈!) 휴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했어요. 난 아직도 그 얼굴을 잊지 못해요. 이번에는 진짜,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행복하게 웃던 얼굴을…”

“잠시만요,” 라이언은 듣던 중 걸리는 말에 검지를 들며 끼어들었다. “이번에는, 이라고요? 그럼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그에 레이철은 금세 분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씹다 말했다. “이번이 세 번째에요, 라이언. 휴는 세 번을 이렇게 배신 당해야 했어요.”

맙소사. 라이언은 다시금 들끓기 시작한 속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제일 중요한 것은 휴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제리에 대해서는 뒤로 밀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대로는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깊은 곳에서부터 인간의 마음이라고 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도저히 막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레이철.” 그를 바라보는 두 개의 녹색 눈동자와 눈을 맞춘 그는 제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진지하게 속삭였다. “전부, 말해줘요.” 휴에 대해서 전부 이야기해 주세요.